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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자본주의적일까?

훗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가 되는 로널드 코스가 1930년 LSE의 한 수업에 들어왔고, 그 수업에서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그것이 자유시장 경쟁을 옹호하는 논리를 처음으로 배우게 된다. 그 과목의 교수였던 아널드 플랜트는 모든 종류의 경제계획에 반대했으며 시장의 가격 결정 시스템이야말로 최적의 조정 매커니즘이라고 이해했다. 코스는 아주 먼 훗날 그 당시 자신이 ‘사회주의자’였음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공감과 플랜트 교수의 접근법을 어떻게 화해시켰는지 궁금할 것이다. 짧게 대답하자면, 나는 그 둘을 화해시킬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미국에서 연구로 1년을 보내는 동안 기업 자체가 “작은 계획사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교수들이 가르친 대로 정말 가격만 있으면 경쟁적 시장경제가 기능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비시장적인 권위적 위계조직인 기업들이 존재하는 것인가?[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조하나 보크만 지음, 홍기빈 옮김, 글항아리, 2015년, p71]

기업에 근무하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담당하는 기업이야말로 가장 비자본주의적인 조직인데, 왜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 이단아를 용인하는 것일까? 기업은 항상 계획 경제적 사고를 한다. 일정한 기간 동안의 생산 및 소비 목표를 미리 계획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슬로건을 만들어 조직원에게 주지시킨다. 기업 조직원 간의 시장적 경쟁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제한적이다. 특히 자본가는 궁극적으로 시장에서의 경쟁을 싫어하고 독점을 원한다. 자본가는 자본주의자가 아닌 셈이다.

이처럼 기업은 시장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였다기보다는 합목적적으로 발생하여 사회의 수요에 부합하여 집단적으로 기능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최초의 기업은 왕의 허가 하에 혹은 왕가가 직접 운영하는 유사국영기업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자본주의 제조업이 대공장의 형태를 띠면서 보다 유사군사조직을 방불케 하는 위계적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칼 맑스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군사적인 위계조직이 강고한 노동자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고 실제로 노동조합 또한 위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Detalle de Lenin.jpg
Detalle de Lenin” by JaontiverosOwn work. Licensed under GFDL via Wikimedia Commons.

어쩌면 블라디미르 레닌은 그러한 자본주의 기업의 성격을 이미 간파하고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상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단계는 자본주의가 더욱 강고하게 된 것이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여 시장 자체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는 상황이 최고조에 달한 단계랄 수 있다. 혁명가가 할 일은 가장 비자본주의적이 된 이 단계에서 사적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에서 자본가의 자본(equity)은 전체 자산(asset)에서 극히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공상적인 시나리오라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러한 일이 현실이 될 뻔 한 적도 있다. 바로 금융위기 때의 금융회사 자본투입이 그 사례다. 당시에는 망한 메릴린치뿐만 아니라 골드만삭스나 RBS등 어느 기업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위계적 기업의 거대한 성이 와르르 무너질 상황이었다. 혁명가는 다만 그 성에 주춧돌만 갈아 끼우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혁명가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보통주를 인수하는 대신 우선주를 인수하여 자신의 의사결정권을 스스로 제한하거나 수동적 관리인 역할을 택했다.

그렇게 혁명은 유보되었다.

알베르토 코르다

알베르토 코르다(Alberto Korda). 작가 자신의 명성보다 더 유명한, 예술작품 중에 가장 빈번히 복제된 이미지의 창작자이다. 그가 찍은 쿠바의 영웅 체게바라(Che Guevara) 사진 한 장이 이탈리아 출판업자의 손에 건네지면서, 그 이미지는 수많은 변주곡으로 복제되었고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급기야 상업적으로도 변용되어 왔기에, 쿠바 혁명에 대한 그 어떠한 서술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Foto original del Guerrillero Heroico de Alberto Korda

얼터너티브락 밴드 Radiohead는 그들의 대표곡 Creep이 너무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자신들의 음악적 의도가 곡해되었기에 그 곡을 싫어했다는 미확인 에피소드가 있지만, 적어도 코르다는 체게바라의 사진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뭐 어쨌든 그로 인해 전 세계, 특히 유럽 권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얻었고, 이를 통해 다른 작품들도 소개할 수 있었으니 일종의 세상을 향한 깔때기의 역할은 충분히 한 셈일 테니 말이다.(그리고 역시 그 덕에 한국에서도 작품전이 열렸고…)

코르다의 전시장은 코엑스 전시장이다. 뭐 다른 전시장도 크게 유별난 상황은 아니긴 하지만, 나는 반(反)자본주의적인 작품들의 전시장소가 자본주의의 첨병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인 코엑스에서 열린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어쩌면 다시 체게바라 사진으로 돌아가서, 그 작품이 지닌 이념적 지향성이 지속적인 복제를 통해 – 특히 상업적 복제 – 많이 희석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시장은 전시공간의 협소함 때문에 1관과 2관으로 나뉘어져 있다. 특별히 감상의 맥을 끊는 것은 아니었다.(오히려 작품의 배치와 섹션별 공간 활용이 맥을 끊었다) 전시된 작품은 그가 스튜디오 코르다에서 찍은 광고사진들, 피델 카스트로, 체게바라, 기타 혁명영웅들을 찍은 사진들, 기타 쿠바 민중들을 찍은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양적으로는 일종의 비공인 관제 사진사였던 관계로 압도적으로 카스트로 사진이 많다.

하지만 카스트로에 대한 사진이 많은 것이 곧 그에 대한 우상화 내지는 편향된 시각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혁명>지의 고용사진사로 일한 혁명적 예술가를 자처한 이이기에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타의 사회주의 영웅의 사진과는 구별되는 시각이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이 바로 <군중에게 연설하는 카스트로>다.

이 작품은 혁명 영웅이자 지도자인 카스트로가 프레임에서 매우 희한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물론 그가 사진의 중앙에 있긴 하지만 황당하게도 연설을 듣는 이의 발아래 서있다. 자칫 불경한 사진으로도 읽힐 수 있는 이 도발적인 구도를 통해 코르다는 카스트로를 비롯한 혁명 영웅들이 인민들과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인민과 구분되어 있는 레닌의 연설 장면 이미지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주1)

이런 작품 이외에도 링컨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이랄지 군중 속에 파묻혀 있는 카스트로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진을 통한 개인의 우상화를 의식적으로 피하려 하였는지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자유로운 구도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적 중산층의 삶을 누렸던 코르다 개인의 리버럴한 성향이 일정 정도 작품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코르다는 광고사진 작업으로 사진사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또한 이전에는 회계를 배워 쿠바에 있는 포록터앤갬블이라는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기도 했다. 여자를 좋아하고 파티를 좋아하는 젊은 미남 코르다에게 인민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그리 와 닿지 않았다. 다만 어떤 이는 벤쯔를 몰고 다니며 호사를 누리는데 어떤 이는 아이를 데리고 구걸을 하러다니는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으로 인민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어느 농장에서의 광고사진 작업 중에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 코르다는 농장에서 한 소녀를 발견하였는데 그 아이는 작은 나무토막을 안고 있었다. 코르다는 그 나무토막이 어떤 용도인지 궁금했으나 놀란 아이는 도망가며 나무토막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야 울지마.” 그 나무토막은 소녀에게 인형이었던 것이다. 코르다는 이 상황에 큰 충격을 받는다.

해당 작품 La niña de la muñeca de palo, 1959 감상하기

그리고 쿠바혁명이 일어나자 그 혁명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고 자본주의의 분장사에서 사회주의의 선동가로 전향하게 된다. <혁명>지의 사진사로 활동하면서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 집권층의 일을 도맡아 하게 되고, 이 덕에 마침내 1960년 5월 5일 열린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한 프랑스 화물선으로 인한 사망자 추모식에서 전 세계에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게 된 체게바라의 사진을 찍게 된다.

전시회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전시회는 이러한 삶의 질곡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알찬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20분짜리 다큐멘터리도 상영되는데 그의 인터뷰가 담겨져 있어 작품의도와 그의 삶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문제는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전시의 흐름이 그의 사상의 변화에 맞게 배치되지 않았다는 – 예를 들면 카스트로 사진은 전시회 전반부, 광고사진은 후반부에 배치되는 등 – 점이다.

몇 년 전에 지적재산권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이래, 이번에 그의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사진예술 또한 작가의 삶, 그 작품을 창작할 당시의 환경, 작품의도를 알 때에 더욱 마음에 와 닿게 마련인데 이번 전시는 한국 땅에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중에서도 드문 경우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Karsh가 탐미적이라면 Korda는 유쾌하고 혁명적이다.

그의 작품들 감상하기

(주1) 물론 그의 다른 작품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이미지들은 기존의 지도자적 시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