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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패전론, 전후 일본의 핵심” 독후감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聡)의 전후의 기만적인 일본 정치 체제에 관한 비판적인 저서 “영속패전론, 전후 일본의 핵심(永續敗戰論 戰後日本の核心)”을 읽었다. 영속패전론이라는 낯선 용어는 얼핏 러시아의 혁명가였던 레온 트로츠키의 유명한 혁명이론인 “영구혁명론” 혹은 “연속혁명론”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혁명을 영구적으로 행하자는 것이라면 뭔가 직관적으로 이해되는데 패전을 영구적으로 반복하자는 것은(혹은 반복하게 된다는 것) 선뜻 이해되지 않는 표현이었다.

조악하게 요약하자면 그 용어는 전후 일본의 지배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패전’이라는 정치적 귀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p9) 체제라는 것이다. 이런 체제의 행태 중 한 예로 저자는 일본 정부가 8월 15일을 ‘종전 기념일’로 부른다는 사실(p52)을 들고 있다. 전쟁은 대일본제국의 패배로 끝났음에도 ‘패전(敗戰)’이 아닌 ‘종전(終戰)’이라고 부르는 기만이 전후 일본 체제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p52) 저자의 지적이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 패전을 부인하고 있다면 그 상대는 승전국 미국인가? 일본의 자칭 내셔널리스트들은 이런 일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p8). 그 대신 그들은 대미 관계로 좌절된 내셔널리즘의 스트레스를 아시아를 향해 분출한다(p9). 저자가 들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 중국, 러시아와 벌이고 있는 영토분쟁이다. 저자는 이 세 나라와 일본이 분쟁을 벌이고 있는 영토의 진정한 주인을 따지기보다는 영토분쟁 과정에서의 일본의 모순된 행태를 밝힘으로써 지배 체제의 기만성을 고발한다.

또한 저자는 북한 문제를 통해 일본이 어떻게 영속패전론, 즉 패전을 부인했는지를 분석한다. 어쩌면 일본이 미국의 의도와 상관없이 선도적으로 외교관계를 모색했던, 말하자면 일본이 전후 최초로 시도한 ‘자주 외교’였다(p122). 이에 북한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간 있었던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였는데 오히려 당시 고이즈미의 심복 아베 신조는 이를 반북(反北) 소재로 활용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납치 문제를 평화헌법 개정으로 연계시키는 ‘패전의 부인’ 완수(p126)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패전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 정치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어떠한가? 알다시피 미국의 진보적 세력은 일본의 뻔뻔함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미국은 현재의 동북아 정치 구도의 설계자다.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냉전의 최전선을 한국과 대만에 떠넘기고 얻은, 지정학적 여유에서 비롯한 허깨비다(p153). 따라서 저자는 미국이 일본의 친미 보수 세력의 반성하지 않은 모습에 분노를 느끼고 있으나, 그 저열한 세력이 제멋대로 자라게 놔둔 당사자가 바로 미국임을 지적하고 있다(p157).

최근 한국의 대통령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제3자 변제’ 방안을 변명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수십 차례 사과했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사과는 따지자면 겉마음, 즉 다테마에(建て前)다. 도쿄 한 복판에 A급 전범을 ‘호국의 영령’과 ‘신’으로 모시는 시설이 서 있고, 이곳의 참배가 정치 공약(p194)인 체제가 바로 그들의 속마음, 즉 혼네(本音)다. 일빠인 한국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이번 역시 지난번 “위안부 합의”처럼 미국의 동북아 패권구도 재편을 위해 급히 일을 추진하다 보니 아무 소리나 해보는 것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는 2013년에 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1쇄가 발간되었지만, 읽고 있자면 엊그제 읽은 한일 정상의 오므라이스 만찬 소식만큼이나 생동감이 있다. 그만큼 일본의 정치 체제의 혼네는 변함없이 굳건하고, 우리 정치권과 우익 세력의 이에 대한 대처도 변함없이 굴욕적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의 역자는 후기에서 저자의 ‘영속패전론’ 용어를 빌어와서 한국 현대사의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을 ‘영속식민지론’ (p212)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부가 요즘 하는 짓을 보니 더더욱 꽤 그럴싸한 표현이다.

냉전은 끝났지만 신냉전은 보다 다양한 전선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반(反)러시아 구도 강화, 중국의 대만 위협, 시진핑과 푸틴의 정상회담, 미국의 ‘칩4 동맹’ 추진, 북한의 핵도발 등 곳곳에서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다시 한번 한일 갈등을 임시로 봉합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나아가는 구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일본의 혼네로서의 자기성찰은 한동안 없을 듯하다. 이는 당연히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전체에 불행한 일이며 그 수혜자는 각국의 극소수 권력층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