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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먼에 빡돈 로버트 라이시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폴크루그먼이 어제 버니의 지지자들에게 변화는 “변화의 레토릭”이 아닌 “정치적 실리주의” – “절반의 애증이 무관심보다는 낫다는 것을 인정하는” -를 통해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그는 “수단과 목적에 대한 깊은 고심하는 것보다 (힐러리를 의미하는) 행복한 꿈을 (버니를 의미하는) 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썼다. 크루그먼은 뭘 모르는 것이다. 난 워싱턴 근처에서 내각 생활을 포함하여 거의 50년을 몸담거나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진정한 변화는 오로지 미국의 대중의 상당수가 변화하고, 조직화되고, 충전되고, 실현될 수 있도록 확정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Bernie’s Movement]

미국판 “비판적지지”론 논쟁이 가열되고 있는가보다. 크루그먼은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 만드는 방법’이라는 칼럼에서 그 첫 단계로 버니를 민주당 대선후보로 뽑으면 된다고 비아냥댔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런 크루그먼이 못마땅해서 “빵 한 덩어리를 꿈꿔야 반 덩어리라도 얻는 법”이라고 반박했다. 반박의 근거(?)로 크루그먼은 못해본 라이시의 관료 경험까지 거론하는 것을 보면 꽤나 빡이 돈 것 같다. 한편 당연히 버니를 찍을 것 같던 촘스키의 힐러리 지지설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암튼 그 동네의 진보진영도 이런저런 변수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다.

내 경우엔 국내정치에서는 사실 로버트 라이시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생각해보면 나의 정치적 혹은 경제적 입장은 내가 투표를 던졌던 정당이나 정치인보다 덜 급진적이었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런 정치세력이 유의미해져야 사회의 균형추가 어느 정도는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과거에 최악을 막기 위해 “상대적 진보”를 택한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상대적 진보성을 무기로 더 수구화하는 모습을 목격할 뿐이었다. 진보의 급진성이 두렵다면 한국을 비롯한 열강의 現정치를 보라. 그 면면이 이전에 보지 못하던 보수적인 급진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숫자의 착시현상

우리나라에서는 김혜수가 드라마에서 부르짖은 ‘엣지’라는 단어의 정체가 무엇이냐며 설왕설래한 바 있는데, 지금 외국의 경제학 관련 블로고스피어에서는 다른 ‘엣지’가 화제가 되고 있다. James Manzi라는 경제학자가 National Affaris란 보수우익 냄새 물씬 풍기는 제목의 사이트에 올린 ‘Keeping America’s Edge’가 바로 그 엣지다.

제목을 어설픈 실력으로 해석해보면 ‘미국의 경쟁력을 사수하자’쯤으로 읽힌다. 경쟁력은 바로 ‘자유시장 자본주의(free-market capitalism)’다. 필자는 미국의 경쟁력인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비되는 주체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로 상정하고 둘 간의 비교를 통해 전자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문제는 이 주장의 근거가 틀렸다는 것.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1980년부터 오늘 날까지, 미국의 전 세계 산출량의 지분은 일관되게 21%다. 반면 유럽의 지분은 1970년대 40% 약간 못 미치는 수치에서 오늘 날 25%까지 떨어지면서 지구적 경쟁에서 탈락할 지경에 있다. 혁신적인 자본주의 대신에 사회민주주의를 택했기 때문에 유럽은 (대부분) 중국, 인도, 그리고 나머지 개발도상국들에게 그들의 지분을 넘겨주고 있다.
From 1980 through today, America’s share of global output has been constant at about 21%. Europe’s share, meanwhile, has been collapsing in the face of global competition — going from a little less than 40% of global production in the 1970s to about 25% today. Opting for social democracy instead of innovative capitalism, Europe has ceded this share to China (predominantly), India, and the rest of the developing world.[원문보기]

이 서술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 문제다. 미국은 ‘혁신적이고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자본주의’를 채택하여 산출량이 끄떡없는데, 유럽은 사회민주주의로 경제를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글은 미국의 우익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The New Public의 Jonathan Chait이 이 글의 맹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Chait는 Manzi가 그의 글에서 서술한 유럽은 사회민주주의의 서유럽뿐만 아니라 동유럽,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으로 포괄하고 있고, GDP의 기준이 되는 1980년 이후 미국의 인구는 35% 상승한 반면 유럽과 러시아는 각각 7%, 0.7% 상승한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범위설정의 오류와 산출 원단위의 왜곡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Paul Krugman 역시 이 논쟁에 가세했는데,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만약 Manzi가 수행한바 유럽을 ‘광범위하게’ 적용한다 하더라도 실제 산출량은 40%에서 25%가 아닌 30%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결국 Manzi는 조사방법도 잘못 되었지만 그 숫자마저 잘못 산정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이 해프닝은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현대사회에서 ‘숫자의 마술’ 혹은 ‘숫자의 착시현상’이 주는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해프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숫자는 공평하고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당장 이 논쟁에서도 숫자는 가장 정치적인 도구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인운하 사업성 분석, 주식의 기술적 차트, 세종시의 발전상, 원자력발전소의 수주금액 및 향후 기대수익 등은 하나같이 뛰어난 학식을 갖춘 전문가들에 의해 산출되어 그 기대효과가 마치 눈앞에라도 있는 것처럼 제시된다. 하지만 오늘 날 이 엄밀한 계량주의적 의사결정에 대한 맹신은 벽에 부닥치고 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숫자는 ‘사람하기 나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 경제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숫자나 그래프만한 것이 없다. 애매하고 흐릿한 상황도 숫자를 제시하고 이를 그래프로 표현해지만 군말이 없어진다. 사실은 Manzi의 경우처럼 몇 개의 숫자를 오려붙이고 산식을 꼬면, 또는 추세선을 더 넓은 범위로 확대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수(數)는 결국 사람이 셈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