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ngelove

요새 딱딱한 글이 많이 올라와서 지루하실 텐데 단편소설 하나 올립니다. 몇 년 전 끼적거린 것 재탕입니다. 다소 표현이 폭력적이니 주의하시길.

덕수

[야 니차례다.]

길만이 소리쳤다. 우동국물을 마시고 있던 덕수는 소매로 입을 훔치고는 큐대를 잡았다.

[아 씨팔 은철이 이자식은 왜 안와?]

오늘따라 연속으로 식스볼에서 돈을 잃고 있는
성재가 먹다만 짜장면 그릇을 들며 애꿎은 길재에게 화풀이를 했다. 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중하게 스트로크를 했다. 검은 공을 먼저 맞은 흰 공이 파란 공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노란 공에 맞았다.

[오케바리]

[3점 남았는데 났어?]

덕수는
신이 나서 주먹을 불끈쥐고는 화투패를 뒤집었다. 삼광이었다.

[자 5천원씩]

점수계산을 하던 길재와 짜장면을 우물거리고 있던 성재는 분한 표정으로 흐뭇해하고 있는 덕수를 바라보았다. 그때 가죽점퍼 차림의 은철이가 당구장문을 열고 들어섰다.

[야 눌러 고만 치자. 너 왜 이제 오는거야 이 씨팔놈아.]

10만원돈을 잃은 성재가 은철이를 보자마자 성을 버럭 냈다.

[안녕하세요. 아까 삐삐받고 바로 오는 거예요 형.]

[빠져가지고 말야. 형님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고 말이야.]

[야야 됐어. 그만 하고 빨리 나가자. 벌써 4시다.]

덕수는 목장갑을 벗으며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던 성재를 달랬다. 덕수는 이 패거리에서 일종의 분쟁조정역이다. 분출할 길 없는 분노를 배설하듯이 아무데나 뱉어내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그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넷은 요구르트로 입가심을 하며 당구장을 나와 으스한 새벽거리로 나섰다. 세상은 아직 고요했고 가끔씩 차들만 거리를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 넷은 당구장 앞에 주차시켜 놓은 쏘나타3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걸터앉은 은철이가 물었다.

[오늘은 어느 쪽으로 갈까요?]

[오늘은 강남역쪽이 어떨까?]

길만이가 불쑥 나섰다.

[그래. 강남역으로 가다가 남부순환로로 빠지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덕수가 응수하자 은철이는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패거리의 이름은 깡다구파였다. 이들이 의기투합한건 석달전쯤이다. 중학교 이후로 소년원을 밥먹듯이 드나들던 성재가 97년 10월경 우연히 만난 고향친구 덕수를 만나 의기투합하였고 감방친구 길만이와 후배 은철이를 끌어들여 깡다구파를 결성한 것이다.

깡다구파는 세상의 모든 악의 일소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오렌지족을 중심으로 노상강도짓을 하고 있었다. 타겟으로 걸린 차를 추월하고 급정거하여 접촉사고를 일으킨후 운전자를 납치하여 돈을 갈취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수법이다. 구리의 후미진 창고에 마련해놓은 그들의 아지트에 끌고가 두명을 생매장해버린 일도 있다. 결손가정이나 생활능력없이 폭행만을 일삼던 부모밑에서 자란 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세상에 대한 증오밖에 없었다.

덕수가 켜놓은 카오디오에서는 낭랑한 여성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엽서를 보낸다는 여고생의 사연을 소개하고는 신청곡인 Mother of mine이 흘러나왔다.

[미친년 새벽부터 생일타령이야.]

담배를 물던 성재가 뇌까렸다. 덕수는 친구라지만 어떨때는 그런 성재가 섬뜩했다. 생매장을 하자는 것도 성재의 고집때문이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두 남녀의 나신위로 거침없이 삽질을 하던 성재의 야수같은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세상을 살아야 하나하고 덕수는 자문했다. 눈을 감은채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듯한 인생이다.

덕수는 이들과 달리 전과도 없고 깡다구파 결성전에는 공장에도 다닐만큼 나름대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성재를 만나던 석달전은 애인이었던 미경이를 어느 오렌지족에게 뺐기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요새는 밤마다 피묻은 자신의 손을 씼는 꿈을 꾸고 있다.

남부순환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거리는 매우 한적했다.

[야 뒤에 외제차 하나 온다. 운전하는 새끼밖에 없는 것 같은데 저 새끼로 하자.]

연신 뒤를 돌아다보던 길만이 제법 속도를 내고 달려오는 은색 아우디를 보고 소리쳤다.

[오케이. 저 새끼를 요절내자. 자 벨트들 매시고.]

대장격인 성재가 동의했다. 은철이는 지시에 따라 백미러를 바로 보다가 뒷차의 속도를 가늠하다가 브레이크를 급히 밟았다. 뒷차는 당황한듯 허둥대다가 심한 마찰음을 내며 멈춰섰다. 부딪히지는 않았다. 뒷차 운전자는 다쳤는지 아니면 경황이 없는건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야 빨리 내려.]

셋은 서둘러 스패너를 뒷춤에 넣고 차에서 내려 아우디쪽으로 다가갔다. 그때서야 뒷차 운전자가 차에서 내렸다. 무스탕점퍼에 블랙진차림의 20대 청년이었다. 깔끔한 인상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보였다.

[아니 차를 그렇게 급정거하시면 어떻게 해요?]

상황파악을 못한 청년이 따지듯이 물었다. 성재와 덕수는 그에게 다가섰고 길만은 ‘어디 기스난데는 없는가’하면서 범퍼쪽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내차 내가 세우는데 불만있어?]

성재가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아니… 왜 언제봤다고 반말이세요… 이런 대로에서 그렇게 급정거를 하시면… 윽]

무심한듯 둘을 바라보고 있던 덕수가 다짜고짜 스패너로 청년의 뒷통수를 갈겼다. 그 청년에게서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야.. 빨리 뒷트렁크 열고 이 새끼 실어.]

어느새 운전석에 가있는 덕수가 뒷트렁크를 열고 성재와 길만이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청년을 뒷트렁크쪽으로 데려갔다.

[아저씨… 아저씨… 살려주세요… 예? 살려주세요…]

사태를 파악했는지 청년이 애걸했다.

[안돼. 넌 오늘 흙맛보는 날이야.]

성재가 잔인한 웃음을 띄며 청년에게 속삭였다. 그리고는 반항하는 청년을 완력으로 트렁크에 밀어넣고는 트렁크를 잠궈버렸다.

[덕수가 운전하고 길만이랑 같이 타고… 아지트로 곧장 와 알았지?]

곧있을 매장의식에 흥분했는지 눈이 붉게 충혈된 성재가 누구에겐지도 모를 명령을 내리고 급히 앞차로 달려갔다. 차를 출발시켰다. 덕수는 차를 몰아가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깊은 심호흡으로 달랬다. 언제나처럼 두렵고 무서웠다. 바로 1분전까지는 생면부지이던 사람을 뒷트렁크에 싣고가면서 잠시후 또다시 손에 피를 묻힐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미경이만 다시 돌아온다면’

하고 덕수는 생각해보았다. 정말 미경이만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면 이런 생활 깨끗이 청산하고 시골고향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었다. 강원도 두메산골의 공허한 메아리가 지긋지긋해서 뛰쳐나온 고향집이지만 홀로 남아있을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아파올때도 있다.

[넌 친구일 뿐이야. 난 따로 사귀는 남자가 있어.]

같은 공장에 다니던 미경이는 바람이 불어 쌀쌀한 공장 뒷뜰에서 애정을 구걸하는 덕수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말했다. 1년간 공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덕수의 머리엔 맑게
웃던 미경의 미소와 함께 걸었던 용산공원이 스쳐지나갔다.

[그게 말이 돼? 너도 나 좋아하잖아. 이러지마 미경아.]

미경은 미경의 손을 잡으려는 덕수를 뿌리치고는

[오해하지마. 그리고 앞으로 귀찮게 하지마.]

미경은 그말을 남긴채 사무실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로부터 3일후 미경은 공장의 경리일도 그만두고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덕수는 미경을 찾아 공장도 때려치우고 사방팔방으로 헤매다니다 이내 지쳐 포기하고는 밤마다 술에 절어 살았다.

어슴프레 동이 틀 무렵 차는 국도에 접어들었고 시속 90km의 빠른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앞차는 이미 저만큼 앞으로 달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덕수는 아까 거리에서 본 청소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췌한 모습으로 거리를 청소하던 청소부의 모습에 아버지의 모습이 중첩되어왔다. ‘그래 미경이는 이제 잊고 시골로 내려가자’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너 우냐 지금?]

덕수를 힐끗 바라보던 길만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냐. 눈에 뭐가 들어가서…]

급한 김에 둘러대던 덕수의 오른쪽 옆구리가 갑자기 불에 데인듯 뜨끔해왔다. 반사적으로 핸들이 오른쪽으로 틀어졌고 전면에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백미러에 미경의 얼굴을 본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길만이 ‘어어’하는 사이 차는 가로수를 들이받았다. 덕수는 뒷통수에 뭔가 세게 부딛히는 걸 느끼고는 즉사했다. 길만은 앞유리를 깨고 튀어나가 가로수에 부딪히고는 즉사했다.

종호

가만히 눈을 뜨자 은은한 핑크빛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급히 시계를 보았다. 3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잠이 들었을까 하고 종호는 생각했다. 사실은 심약한 종호가 기절한 것이었다.
기절하기 전에 벌어진 상황이 찰나 종호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래 미경이를 내가 죽였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루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뒷통수에 피가 약간 흐른 미경이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것도, 눈덮힌 스키장도, 화려한 밤의 야경도 종호에게는 더이상 자기 것이 아니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한 여자때문에 자신의 남은 인생이 감방에서 썩게 되어버린 것이다.

목이 타들어갈듯이 말라와서 종호는 부엌으로 가 버본을 한잔 들이켰다. 그리곤 눈을 감고 ‘냉정해지자’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단독주택이라 미경이 온걸 본 사람은 없을것이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손쳐도 잡아떼면 된다. 헤어지자고 한뒤 본 적이 없다고 하면 된다. 다만 시체만 안들키면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벽시계의 째각거리는 소리가 끔찍한 현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종호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우면산에 가면 후미진 곳이 있을거야. 지금 빨리 해치우면 해결할 수 있을거야.’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무스탕점퍼를 걸쳐 입고는 급히 헛간에 가서 등산용 침낭과 삽을 가져왔다. 그리고는 미경의 시체를 침낭에 구겨넣었다. 종호는 천근같은 침낭을 마당에 내려놓고는 슬며시 대문을 열어보았다.

밖은 고요하고 가끔 개짖는 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었다. 트렁크를 열어 삽을 넣고는 집안으로 돌아와 침낭을 짊어지고는 차뒷좌석에 침낭을 구겨넣었다. 긴장감에 온통 땀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급히 차를 몰아 골목길을 나섰다. 손이 떨려 제대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다니’라는 자책감과 비현실적인 어젯밤의 상황이 마음에 와닿지 않아 꿈을 꾸는듯 했다.

남부순환로에 접어들면서 종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과실치사란게 될 수 있을거야. 아버지가 힘쓰면 집행유예쯤 될지 몰라.’ 거칠것 없이 생활해오던 종호에게 그나마 미경은 한줄기 신선함이었다. 여태 만나오던 여자들과 다른 순박함과 꾸밈없음에 한때 미경을 배우자감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경에게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밀려오는 두려움과 혐오때문에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갑자기 밀려드는 미경을 향한 애틋한 마음에 가슴이 아파왔다. ‘헤어지자고 말했을때 미경의 마음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앞차가 급정거를 했다. ‘아니 저게’하면서 급브레이크를 밟은 종호는 핸들에 머리를 부딛혔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어서 큰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두려움이 밀려왔다. ‘앞차 운전사가 내 뒷좌석을 본다면?’하는… 머뭇거리는 동안 앞차에서 세사람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종호는 밖으로 나갔다.

[아니 차를 그렇게 급정거하시면 어떻게 해요?]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와 냉정한 얼굴을 한 남자 둘이 종호에게 다가왔고 조그만 체구의 남자는 ‘어디 기스난데는 없는가?’하며 범퍼를 살피고 있었다. 험상궂은 남자가 대답했다.

[내차 내가 세우는데 불만있어?]

종호는 갑작스런 반말에 화가 치밀었다.

[아니… 왜 언제봤다고 반말이세요… 이런 대로에서 그렇게 급정거를 하시면… 윽]

냉정한 눈초리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 사나이가 갑자기 뭔가로 종호의 뒷통수를 갈겼다.

[야.. 빨리 뒷트렁크 열고 이 새끼 실어.]

[아저씨… 아저씨… 살려주세요… 예? 살려주세요…]

사태를 파악한 종호는 트렁크로 자신을 구겨넣으려는 사나이들에게 목숨을 애걸했다.

[안돼. 넌 오늘 흙맛보는 날이야.]

험상궂은 사나이가 잔인한 웃음을 띄며 종호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반항하는 종호를 완력으로 트렁크에 밀어넣고는 트렁크를 잠궈버렸다. 종호는 하룻밤 사이 벌어진 이 많은 일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실오라기 만큼도 없는 좁은 공간이 주는 폐쇄된 공포감은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종호의 몇분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종호는 비겁한 눈물을 흘리며 덜컹거리는 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끝도 모를 질주가 계속되던 어느 한순간 차가 무언가에 세게 부닺혔다. 종호의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트렁크 안쪽에 넣어 두었던 스키복 가방에 부딪혔다.

미경

희미하게 정신이 들어오는 것은 갑자기 뭔가에 쿵하고 부딪히고 난 후였다. 아직은 생과 사의 중간지점에 있는지 미경의 의식은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했다. 눈앞은 캄캄했다. 꿈인듯 생시인듯 간밤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벌써 10시야 이제 돌아가.]

[종호씨.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응?]

[자 이거나 받고 어서 돌아가줘. 이정도면 수술비하고 당분간 생활비는 충분할거야.]

5개월전 부드럽고 다사로운 미소를 짓던 종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정하던 밀어를 속삭이던 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호기롭게 갔던 호텔수영장에서 그녀에게 접근했던 종호의 모습, 백일선물이라며 금목걸이를 걸어주던 종호의 모습, 정사후 장난스럽게 알몸을 간지럽히던 종호의 모습은 그 순간 찾아볼 수 없었다. 투박하기만 하던 덕수와 달리 종호의 사려깊고 따스한 매너는(그렇게도 미경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날 미경은 코트안쪽에 칼을 집어넣고 종호가 홀로 살고있는 강남 단독주택가로 찾아갔었다. 종호를 해친다는 생각보다는 임신이라는 미경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일방적인 결별선언을 하고는 연락을 끊어버린 종호에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일뿐이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던 그날의 절망감은 임신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던 그날보다 더했다. 결혼하자는 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따뜻한 위로라도 해주리라 생각했다.

딱히 신분상승을 바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종호의 화려한 삶의 방식이 부러웠고 사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한켠에 두고 있던 덕수까지 포기한채 그에게 인생을 걸었던 것이다. 그래서 절망은 더했다. 미경은 고개를 떨구었고 유리탁자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정말 너 왜이래? 이렇게 추하게 굴래?]

세븐마일드 연기를 내뿜고 있던 종호는 성질을 벌컥 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미경은 그말에 울컥 화가 치밀어올라 벌떡 일어나 종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이 자식아 나 천하고 추한 년이다. 그런 나랑 잔 너는 뭐야?]

종호는 달려들며 머리채를 잡으려던 미경을 거칠게 밀어냈다. 미경은 일순간 허공에서 손을 젓더니 벽쪽으로 떨어져 머리를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점점 뚜렷해지는 기억이 미경의 가슴을 다시 아프게 했다. 정신을 차려 주위를 기울여 소리를 들어보니 차안인것 같았지만 온통 캄캄했고 몸은 침낭같은 것에 들어가 있는듯 했다. 눈앞에 조그만 빛이 새어들어오는 것이 보여 손을 억지로 움직여 집어넣어 보았다. 침낭의 윗부분이 덜 잠겨 새어들어오는 빛이었다. 일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종호가 날 죽일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종호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한때는 사랑을 속삭이던 자신을, 그것도 종호의 아기를 가진 자신을 죽이려 하다니….

가만히 지퍼를 내리니 손쉽게 열렸다. 차안에선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둘러보니 자신이 차 뒷좌석 아래쪽에 침낭에 쌓여 내팽겨져 있었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미숙은 치를 떨었다. ‘그래 이 자식을 죽이고 애도 지워버리자. 늦지 않았다면 덕수를 찾아가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코트 안쪽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조용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운전석에 앉은 종호의 옆구리가 어설피 눈에 들어왔다. 지퍼를 조용히 끝까지 내리고는 재빨리 일어나
뒷좌석에 앉으면서 종호의 허리를 겨냥해 칼을 휘둘렀다. 칼은 종호의 오른쪽 허리에 깊숙히 박혔다. 차가 갑자기 도로를 벗어나며 가로수를 들이받았고 미경의 몸이 앞으로 쏠려 종호의 뒷통수를 들이받았다. 미경은 죽어가며 자기가 찌른 사람이 왠지 종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 thoughts on “Strangelove

    1. foog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사실 여기 올리는 꽁트들은 다 소싯적에 끼적거리던 것들이고 요즘엔 쓰지 않고 있습니다. 뭐랄까 영감이 쏵 몰려와야 되는데 사는 게 팍팍해서 그런지 그런 영감이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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