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Town

눈을 떴다. 흘낏 블라인드 너머 창밖을 바라본다. 늘 그렇듯이 하늘은 옅은 잿빛이다. 습관적으로 침대 맡에 놓여 있는 박하담배를 꺼내 문다. Salem. 누운 채로 가만히 허공에 연기를 날려 보낸다. 시계 초침소리가 들린다. 째깍 째깍 째깍 다시 담배를 한껏 깊이 들이마셨다. 몸속을 온통 담배연기로 채워 버리겠다는 듯이…. 훅 뿜어내는 순간 의식하지 못했던 소리가 다시 귓속을 이명(耳鳴)시킨다. 째깍 째깍 째깍….

여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 뇌 아래쪽에 침전되어 있던 기억의 찌꺼기가 또다시 흔들려 뇌 속을 부유하기 때문이다.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담배를 두 개비나 피운 끝에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예상했던 바대로 또다시 상처투성이의 기억이 불현듯 뇌 속을 직립보행 한다.

여자는 애써 빨라지는 심장박동수를 진정시키며 외투를 걸쳐 입었다. 때는 이른 여름이라 할 수 있는 6월 말이었지만 여자는 여전히 심한 한기를 느꼈다. 임신중절후 산후조리가 부실한 탓에 냉증(冷症)에 걸렸다는 것이 의사의 진단이었다. 여자는 내켜하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섰다. 목구멍에 먹을 것은 처넣어야겠기에….

여자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건물 일층에 위치한 스낵바에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입속에 구겨 넣었다. 맞은 편 식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카페오레를 마시며 조간지의 정치면을 읽고 있었다. 창밖에는 누추한 옷차림의 홈리스(homeless)가 멀거니 서서 안쪽을 바라보다 멍청한 걸음걸이로 저만큼 가버렸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가로수 잎이 여기저기로 흩날리고 있었다. 비라도 올 기세였다.

여자가 스낵바를 나서자 은색 비행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얕은 하늘을 날아갔다. 남쪽으로 3km 내려가면 화이트타운(whitetown)공항이 있다. 항상 잿빛 날씨인 이곳에 화이트타운이라는 명칭이 붙다니 도대체 모순이다.

여자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우울한 – 냉랭한 습기를 머금은 – 바람을 맞았다. 식사를 하고 있는 사이 온도가 많이 떨어져 여자는 더욱 한기를 느꼈다. 스낵바에서 사온 비스킷을 한 조각 꺼내 입에 물었다. 여자는 문득 언젠가 비스킷을 입에 물어 자신의 입으로 옮겨 넣던 남자의 입을 떠올렸다. 바로 눈앞에 보이던 남자의 미소속의 주름진 눈가가 떠올랐다.

옥상 난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고소공포증이었다. 언젠가 남자는 그런 그녀를 억지로 떠밀어 번지점프를 시킨 적이 있다. 사랑의 확인이라면서 둘이 같이 뛰어내리자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 때 허리를 삐끗하여 일주일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주일동안 지속된 공포감은 별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고요와 적막 속에서 평화를 느끼고 있다. 이제야말로 중력에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은 상상이 들었다. 옥상은 칠층 높이로 제법 높이가 있었다. 비스킷의 마지막 찌꺼기가 식도로 넘어간 순간 그녀는 앞으로 힘없이 쓰려졌다. 마치 침대로 쓰러지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여자가 눈을 떴을 때 억울해 보이는 눈썹을 가진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떼려 했지만 갑자기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신음을 낼 뿐이었다. ‘억지로 말하지 마요’라고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복장이나 벽의 색깔로 보아 병원이겠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이 곳은 병원 이예요’라고 남자가 그녀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자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한 채 아래로 수직 하강하였으나 몸이 닿은 곳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대신 한 건물에 사는 한 퇴역군인의 밴(van) 지붕이었다. 후에 노인은 시(市)를 상대로 그의 애마(愛馬)를 잃은 것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지만 법원판결에 의해 기각되었다.

남자 – 인턴 내지 레지던트로 추정되는 – 는 며칠 동안 틈나는 대로 그녀에게 와서 편의를 봐주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늑골이 두대 부러졌다는 것과 전치 2개월의 진단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일주일째 되던 날 남자는 그녀에게 자살동기가 – 그녀의 행동을 자살시도였다고 인정한다면 –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비스킷 때문에 무게중심을 잃었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그날 오후 학교선배인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여자에 대해 상의했다. ‘무언가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은 듯 한데요. 상담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남자가 운을 뗏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에게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만큼 한가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후배의 부탁을 일축해버리려는 하려는 찰나 최근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치료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뇌작용의 바이너리(binary)化.

‘부상이 어느 정도 치유되면 이쪽으로 한번 데려와 봐.’

여자가 그 뻔뻔한 정신과 의사를 처음 만난 건 그녀가 입원한지 한 달 열흘이 지난 후였다. 의사는 대뜸 ‘당신 같은 미인이 왜 자살을 하려 했지?’라는 그의 직업적 소양을 의심케 하는 질문을 했다. 그는 그녀와 약 30여 분간에 걸쳐 단문식 대화를 나누고는 여자를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결정해 버렸다.

치료는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동안 여자는 여섯 번의 약물투여와 세 번의 최면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그녀가 말한 뇌 속의 침전물이라는 단어에 특히 역점을 두어 침전물 제거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입원한지 한 달하고도 이십일이 지난 후 퇴원했다. 레지던트 – 억울한 눈썹을 가진 남자는 레지던트로 밝혀졌다 – 는 그녀에게 들꽃 한 다발을 퇴원선물로 안겨주었다. 그녀는 들꽃을 받아 들고 ‘꽃이로군요.’라고 짧게 말했다. 레지던트는 무표정한 그녀의 한마디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방안에 혼자서 멍하니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느끼던 망연한 상실감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다만 어두운건 날이 흐리기 때문이라는 적실한 진단만을 내렸다.

이튿날 잠에서 깨었을 때 여자는 이제 확실히 뇌 속의 침전물이 제거된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도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창밖을 바라보니 전날 내리던 비가 개고 하늘은 쾌청했다. 그녀는 ‘비가 온 다음날은 음이온이 발생한다. 음이온은 빗방울이 땅에 부딪히면서 발생하는데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상쾌하게….’라고 중얼거렸다.

대충 얼굴을 물기로 추슬러 잠기운을 떨어낸 후 여자는 피씨앞에 앉았다. 그동안 미루어 졌던 번역작업을 재개하기 위해서다. 출판사의 배려로 일거리를 잃지는 않았다. 그녀가 번역해야 하는 책은 J.D Salinger의 Franny and Zooey였다. 그녀는 책을 펴들고 읽어 나갔다.

10여분을 씨름한 끝에 그녀는 번역작업을 포기했다. 번역이 불가능했다. 단어가 전혀 맘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sympathetic, afraid, sorry 등 온갖 단어 자체가 지닌 느낌이 그녀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었다. 그 대신 sympathetic은 형용사와 명사가 있고 sympathetic ink, sympathetic nerve와 같은 관련단어가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 달 후 그녀는 세 들던 집을 나와야 했다. 일거리를 잃은 후 수입이 없어진 그녀는 좀 더 싼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그 집에서마저 나와야 했다. 예금 잔고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불행을 예정된 수순인양 무감동적인 얼굴로 받아 들였다. 그리곤 당연하다는 듯이 지하철 한구석을 차지하고는 홈리스의 집단에 편입하였다.

10월의 어느 오후 그녀는 유일한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밤색 외투를 걸친 채 언젠가 그녀가 머물렀던 건물의 일층에 위치해 있는 스낵바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았다. 안쪽에서 남자가 해물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입을 우물거리면서 밖을 바라보던 남자는 깜짝 놀라 여자를 바라보았다. 둘은 약 5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10초 후 스낵바의 문이 열리더니 남자가 뛰쳐나왔다. 남자는 여자에게로 곧장 뛰어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너.>

하고 남자가 말했다. 남자가 그녀의 오른팔을 낚아채는 바람에 여자는 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는 짧게 ‘오랜만이군요.’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왠지 묘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었다. 쥐색 슈트(suit)에 노란 타이 차림, 왼쪽 가슴이 불룩하다.

여자는 갑자기 그의 양복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사향고양이가 물고기를 잡을 때처럼 재빠른 동작이었다. 양복 바깥으로 나온 그녀의 손에는 리볼버가 쥐어져 있었다. 연속동작으로 방아쇠를 당기기까지는 찰나였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은 공포영화 한 한편을 감상하는 동안 지을 수 있는 모든 표정을 담고 있었다.

남자의 하얀 셔츠는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남자는 어이없게도 과일가게 문 앞에 진열된 오렌지 상자위로 넘어졌다. 오렌지가 여기저기 굴러 떨어졌다. 여자는 총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오렌지는 과일의 한 종류이며, 오렌지 쏘싸이어티(orange society)는 18세기 아일랜드 신교도가 결성한 비밀결사. 피? 피는 혈통, 열정, 범죄 등을 의미 또는 은유한다.’

8 thoughts on “White Town

  1. 쌀국수

    오…. 오래 못뵌 사이에 작가로 전업을???
    안녕하세요~ 쌀국수 복귀 신고합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ㅋㅋ
    선리플후 감상~ -_-

    Reply
    1. foog

      여기 올리는 다른 소설 거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예전에 끼적거렸던 것들입니다. 적당히 때를 봐가며 올려서 날로 먹는 글들이지요. ^^; 새로운 보금자리를 트신 것 축하드립니다.

      Reply
  2. 너바나나

    오오~ 오랜만에 white town – your woman을 듣구만요. 소설하고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고 좋구만요~
    블로그에게 음악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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