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기업경영

홍석천 씨의 선의는 어떻게 악의로 둔갑하는가?

방송활동을 하면서도 수완 좋게 여러 접객업소를 운영 중이던 홍석천 씨가 최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근황을 밝혔다. 수완 좋은 그 역시 높은 임대료와 상승하는 최저임금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로 운영 중이던 가게 두 곳을 닫는다는 소식이다. 인터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현재 문제는 기존의 높은 임대료라는 한계상황에서 가게를 운영하다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그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가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임대료와 임금 이 둘은 자영업자의 목을 죄고 있는 가장 큰 두가지 변수임은 틀림없다.

홍석천은 “일부 건물주는 이미 임대료의 과도한 폭등에 대한 우려를 잘 알고 있고 이제 현실화해야한다는 데 다행히 동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저임금제의 인상 역시 너무 가파른 게 현실이지만 결국 장사를 잘해야만 해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홍석천은 수제맥주의 본산지였던 경리단길의 특색을 살려 특정 요일에 차 없는 거리, 수제맥주의 축제, 원주민이었던 아티스트의 전시공간 확보 등도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홍석천 “저도 가게 문닫아..사람 모이게 임대료 내려야 상권 살아요”(인터뷰)]

홍 씨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을 “장사를 잘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원칙적인 해법을 통해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보기에 그간 경리단길은 – 또는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많은 상업지역 – 상업지역으로 인기를 얻은 후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올리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였고, 그 와중에 최저임금이 올라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된 상황이다. 그래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사람들이 경리단길을 찾았던 그 매력을 제시해주는 것이 현 위기의 타개책이라 보는 것이고 나도 그의 그런 아이디어에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홍 씨의 소식을 전한 일부 “언론” 들의 보도행태가 논란이다. 홍 씨가 직접 페이스북에 언급한 중앙일보는 홍 씨의 이데일리 인터뷰를 전하는 기사 타이틀에 마치 자사 기자가 직접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따옴표를 따서 홍석천 “이태원 가게 2곳 문 닫아 … 최저임금 여파”라고 적어놓았다.1 홍 씨는 페이스북 글에서 “욕은 제가 대신 먹겠습니다만 그래도 전화한통이라도 하시고 기사내시면 좋았을텐데”라며 아쉬움을 표했는데 이는 기본도 안 된 “기레기”들을 향한 쌍욕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동아 역시 임대료 언급은 쏙 뺀 채 최저임금만 걸고넘어진 악랄한 기사 타이틀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특히 동아의 타이틀은 한발 더 나아가 ‘연매출 70억’ 홍석천 레스토랑 中 두 곳 폐업…“최저임금 인상 감당 못 해” 이라고 써서, 홍 씨처럼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는 자영업자도 버티지 못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타이틀로 보도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같은 매체에서 다시 홍석천 씨의 중앙에 대한 항의 소식까지 전하며 홍 씨를 소재로 조회수 장난질을 두 번 우려먹었다는 사실이다. 정말 웬만한 뻔뻔함으로는 할 수 없는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최저임금을 올린 이후 대다수 언론의 최저임금에 대한 맹공은 융단폭격에 가깝다. 상업중심지가 텅 비는 것도 최저임금 탓이요,2 청년들이 취직이 안 되는 것도 최저임금 탓이요, 며느리가 집을 나간 것도 최저임금 탓이다. 이러한 꾸준한 마타도어는 실제로 여론을 움직이기도 한다. 갤럽이 최근에 조사한 최저임금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는 최저임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높다. 그 직접적 수혜자라 할 청년층의 예비노동자군에서조차 최저임금 상승에 대한 기대보다는 우려가 높고,3 이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는 그런 점에서 자기충족적 예언에 가깝다.

보수 “언론”이 노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을, 나아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보다는 현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폐기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이 정책이 폐기돼야 진정으로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의 여부는 별개로 하고 현 정부의 경제 축을 이루고 있는 그 정책의 폐기가 궁극적으로 “진보”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고 그들이 꿈꾸던 우익국가로의 회귀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월급이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조선일보 기자는 왜 자기들 월급은 올려달라고 난리법석을 피우겠는가?4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한 독립형 일자리 경제

확실히 오늘날의 새로운 기술들은 노동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언제나 그러했었고, 사람들은 특정 경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교체될 것이다. 하지만 기술 혁신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동안, 특히 오늘날의 독립형 일자리 경제(gig economy)는 그것이 어떻게 고용인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경제적 불안정을 증가시키고 있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노동자의 공포감은 실재(實在)하는데, 이것이 노동운동이 이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이유다. 오늘날 기후변화 혼란의 상황에서 쓰이고 있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의 개념을 기술 관련 분열에 확장하는 것이 자동화로 인해 소외되는 사람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는 가치 있는 혁신이 될 것이다.[Rewriting the Future of Work]

우리나라에서도 카카오 카풀 서비스 개시를 계기로 날이 갈수록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분야가 바로 이 ‘독립형 일자리 경제’ 분야다. 그간의 택시 서비스에 불만이 많았던 상당수 소비자들은 택시 노동자의 편이 아닌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에도 한 노동자가 분신(焚身) 시도로 운명을 달리하셨지만, 여론은 그다지 동정심을 보이지도 않고 그저 무관심할 뿐이다.1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워낙 기술 혁신에 빨리 적응하는 편인 한국의 소비자들은 천편일률적이고 불친절한 것으로 낙인찍힌 택시 서비스에 거는 기대가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이고 불친절한 그 택시 서비스가 아직도 우리 대중교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많은 노동자가 그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불친절한 “개저씨”일 확률이 높은 택시 기사라 할지라도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 기술 혁신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 당위에 있어서만큼은, 소비자인 우리도 동의해줘야 한다. 다만 그것이 러다이트(Luddite)적 해결책이 아닌 바로 인용문에서 언급하는 “정의로운 전환”의 방식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업계와 정계에서 합의되어야 할 대전제이기도 하다.

2016년 UNIA — 스위스에서 가장 큰 건설노동 및 산업노동 관련 노동조합 — 은 보주(Vaud) 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혹독한 날씨일 경우 받을 수 있는 특별한 보장을 쟁취해냈다. 이제 겨울에 노동조합과 고용주 조합과 주정부 간의 협의 메커니즘을 통해 호우, 강설 또는 차가운 날씨일 경우 외부 건설 현장에서의 노동은 중단될 것이다.[A Just Transition Must Include Climate Change Adaptation]

아직 우리에게는 익숙한 개념이 아닌 “정의로운 전환”이 실제로 적용된 사례다. 우리나라도 갈수록 연교차가 벌어지고 있어서 올여름에도 폭염 경보가 발령된 날에는 서울시가 발주한 건설 현장의 실외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진보”적 시장의 일시적 조치에 의한 것이지 제도나 노사협상이나 제도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의 우리 노동운동 단체에서도 이러한 권리를 항구적으로 확보를 위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권리를 첫 인용문의 저자가 주장하듯 기술 혁신 분야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민주당이 추진하는 ‘완전월급제’도 하나의 대안이다. 한편으로 새로운 서비스 혁신을 도모하는 경제 분야에 안전한 노동이 제공될 기반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카풀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의 자격요건이 느슨한데, 별도의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일반 운전면허만 있으면 운전자로 일할 수 있다. 범죄 이력도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서비스 질 차이라 할 수 있다. 소비자와 노동자 모두에게 안전한 노동의 하부구조를 새로 짜서 플랫폼 기업에 강제하는 것은 정부의 고유한 권리이기도 하다.

블록체인이 자본주의 이상향을 실현해줄 것인가?

삼식부기 회계는 기업 지배 구조를 혁신하는 다양한 블록체인의 사례 가운데 첫 사례에 속한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기업들은 합법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주주운동가 로버트 몽크스 Robert Moks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는 CEO또는 이른바 제왕적 경영인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이익에 의해 돌아가는 과두체제와 같습니다.” 블록체인은 주주들에게 권력을 돌려준다. 자산에 대한 권리를 표창하는 ‘비트셰어’라는 토큰이 하나 또는 다수의 투표에 따라 생성될 수 있고, 각 투표는 기업의 특정한 의결 사항을 대변한다. [중략] 일단 투표가 이루어지면, 이사회 회의록과 의결 내역이 타임스탬프에 따라 불변 원장에 기록된다.[블록체인혁명, 돈 탭스콧/알렉스 탭스콧 지음, 박지훈 옮김, 을유문화사, 2017년, pp 153~154]

올해 비트코인 등 이른바 가상화폐 광풍이 불고 있다. 특히 전 세계 가상화폐 거래량의 상당부분이 한국 소재의 거래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하니 새삼 ‘한국인의 역동성은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비트코인이니 이더리움이니 하는 가상화폐 또는 스마트계약들이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에 기반을 두어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상식이 된 것 같다. 인용한 글이 담겨져 있는 블록체인혁명이라는 책은 바로 그 블록체인 기술로 우리가 미래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현황과 성찰을 담은 책이다.

인용문은 그중에서도 블록체인을 통해 기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로드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삼식부기는 우리가 복식부기라 부르는 재무제표가 두 가지 장부 기록이 있는 반면, 블록체인을 이용하여 “월드와이드 원장”에 제3의 장부기록을 추가하는 방식을 일컫는 용어다. 기업이 각종 활동을 벌일 때마다 이 거래를 기록하고 블록체인에 타임스탬프가 찍힌 영수증을 발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삼식부기가 일반화되면, 시장은 최신 재무보고서는 분기에 한 번씩 기다릴 필요 없이 필요할 때마다 버튼 한번으로 출력해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자본주의를 “분산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주식회사라는 도구가 발명된 이후 우리는 명목상으로는 이 도구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즉, 우리는 공인된 주식 거래시장의 설치, 주주자본주의 강화를 위한 입법 및 규제, 기업의 투명성을 위한 회계 및 공시 등 수많은 대안과 통제를 시도했다. 그럼에도 인용문에서의 어느 주주운동가가 말하듯 여전히 기업은 – 주식회사조차 – “제왕적 과두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는 많은 부분 고의 또는 제도적 결함으로 인한 기업의 불투명성 혹은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한 결과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건을 예로 들어보자. 이 두 회사가 삼식부기에 의해 재무제표가 업데이트되었다면 주주는 보다 투명하게 회사가치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그러하지 않았기에 주주는 회사가 정한 – 법에도 그렇게 정한 바 – 주식시장에서의 거래가격으로 합병하는 것에 대한 가부의 의사결정만 할 수 있었다. 일부 주장처럼 삼성물산의 장부가가 주가총액보다 높았을 수도 있는 사실은 복식부기로는 파악에 한계가 있다. 결국 이 기묘한 주주자본주의 역할극의 파국은 “총수” 구속이었다.

삼식부기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는데, ‘프로토콜을 지키지 않고 비슷한 독자적인 네트워크에 비밀스러운 가치를 숨기려 하는 부외 거래의 가능성’이 삼식부기 방식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문외한으로서도 드는 생각이 가상화폐는 프로토콜이 변경되면 새로운 가상화폐가 등장하는 것이지만, 삼식부기에서 프로토콜이 바뀌면 기존의 “불변”의 거래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럼에도 블록체인을 통한 기업 투명성 제고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야말로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효율적 시장가설의 이상향이 아닌가?

서비스 배당권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주식회사는 회사를 분할해 각 지방의 중핵에 본사를 둡니다. 주식회사의 금전 배당은 제로로 하고 서비스 배당권으로 전환합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주주가 일부러 일본에 와 서비스를 받는 것은 교통비만 해도 엄청나므로 자연히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때 제로이윤으로 고용자 보수를 올려 지역 주민이 주주가 되거나 지역 금융기관에 예금이 모이면 지역 금융기관이 주자가 되면 됩니다. [자본주의의 종말 그 너머의 세계,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미즈노 가즈오 지음, 김정연 옮김, Take One, 2017년, p104]

얼핏 들으면 웬 세계화, 전산화, 증권화의 대세를 거스르는 환경주의적 마인드의 공산주의자의 몽상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딴 후 모건스탠리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경제관료를 거쳐 니혼대 교수로 있는 분이 하는 소리니 좀 신선하기는 하다. 주식과 주주라는 근대의 발명품에 대한 발상의 대전환인 셈인데, 얼핏 드는 생각은 신규로 발행하는 주식이면 몰라도 기존의 주주들의 금전 배당을 서비스 배당으로 바꾸는 그 혁명적인 과정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든다. 거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적인 개념?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통한 사회적 통제 확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만약 그러한 연기금의 금전 배당을 서비스 배당으로 바꾼다면 대부분의 연금 수혜자는 미래수익의 상당부분을 포기하여야 할지도 모를 사태가 벌어질 듯 하다.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요즘만큼 미국의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의류업 일자리를 중국으로 옮기고 콜센터 운영을 인도로 넘기던 아웃소싱의 물결은 이제 거의 모든 업계 차원에서 미국 내의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다. [중략] 계약 모델(contractor model)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포춘誌에서 10년 중 7년 동안 가장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꼽힌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에서도 대략 정규직에 준하는 정도의 외주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다고 이 이슈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전했다. 대략 7만의 TVC가 – 임시직(temps), 판매자(vendors), 계약자(contractors)의 줄임말 – 구글의 자동운전 승용차를 시험하고, 법률서류를 검토하고, 생산품을 더 사용하기 쉽게 만들고, 마아케팅과 데이터 프로젝트들을 관리하고, 또 다른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근무 중에 빨간 배지를 착용하고 알파벳 직원들은 하얀 것을 착용한다. [중략] 얼마나 많은 미국의 노동자가 계약자로 일하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직업군이 정부부처에서 집계하는 직업군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대략 국가 노동력의 3~14%까지가 또는 2천만 명의 인구가 이 직종에 종사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중략] 궁극적으로 몇몇 대기업들은 가장 핵심적인 고용 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지치기 당할 수 있다. 컨설팅 회사인 액센추어는 10년 내에 세계에서 가장 큰 2천 개의 회사 중 한 곳은 “중역실 이외에는 풀타임 고용인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작년에 예측했다.[The End of Employees]1

기업은 확실히 20세기 최대의 발명품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도 오늘날 우리가 기업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런 기업이 지구 단위로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부터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분업이 생산성을 높이고 이 과정이 한데 모이면 한층 효율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매뉴팩처가 등장했고, 소규모의 매뉴팩처는 점차 대공장으로 흡수된다. 칼 맑스는 이러한 대공장 기업이 자본주의를 융성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는 동시에 노동자들이 조직화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업 스스로와 자본주의를 패퇴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1세기 들어 이제 기업이 기업 스스로를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액센추어의 예언처럼 중역실 이외의 모든 고용이 사라진다면, 이는 기업이 변신 프라모델처럼 여러 부속품이 결합됐다가 필요에 따라 또 다른 무언가로 변신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고, 그것을 우리가 알던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조짐은 이전 세기에도 있었다. 기업은 주식시장과 LBO를 통해 소유주와 자본가의 개념을 해체하는가 하면, 아웃소싱을 통해 노동력의 형태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이제는 전 업종, 전 업무에서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아웃소싱과 다르다 하겠다.


자동차인 줄 알았더니 로봇(출처 : 영토이)

앞서 말했듯이 20세기형 기업은 비교적 동질의 노동력을 지닌 노동자를 한데 모아 분업화된 공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20세기형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 혹은 유사 군대조직과 비슷한 규율과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하다. 이런 질서는 심지어 그 기업에서 태어난 반항아 노동조합에서도 유지됐다. 그런데 이제 社內 노동력은 더 이상 가족도 군대도 아니다. 운전사는 빨간 배지를 단 A 파견회사 소속이고 프로그래머는 노란 배지를 단 B 파견회사 소속이다. 20세기 자본주의가 소규모 매뉴팩처를 합병 또는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었다면 21세기 자본주의는 이를 다시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은 20세기 이전의 그것처럼 뭔가 목가적인 뉘앙스의 자영업자의 형성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개별 부속품을 담당하는 파견회사는 파견회사대로 하나의 거대화된 새로운 형태의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다. 1970년대 SF영화인 Rollerball에서는 기업의 독점이 완성되어 회사명이 그저 “기업(Corporation)”이라 불릴 따름이라는 설정인데, 파견회사 역시 비서 파견이 전문인 거대기업은 그저 “비서 회사”로 불릴 따름인 세상이 21세기형 기업의 해체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동화를 통한 인간 노동의 배제 자체를2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띄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게 더 중요”가 아니고요

특검이 이재용 씨의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한 사실에 대한 브리핑의 캡처 이미지를 트위터에서 봤다. 자막에는 “특검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게 더 중요’”라고 쓰여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무딘 칼날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특검의 결기를 느낄 수 있는 브리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아쉬움도 있는 발언이다. 오히려 “경제를 세우기 위해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식의 브리핑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어느 발언이 더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은 정의가 경제를 희생하고서라도 이 사회가 지켜야 할 상보(相補)적 성격의 개념인지, 아니면 정의(正義)와 경제가 함께 가는 것이라는 – 또는 부정적 효과를 가지는 – 상관(相關)적 성격의 개념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해야 할 것이다.

우선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보기 드물게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그 저자가 내한공연(!)을 열만큼 신드롬을 연출했던 책이 있다.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명불허전 우리가 정의에 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많이 깨부수면서도 동시에 대중의 통념을 위로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정의는 공동체의 정서를 지켜내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공동체가 계급, 성별, 인종별 분화를 거듭하게 되면 정의의 정의(定義)가 달라지는 것이 문제다. 특히 분단 상황에서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1 체제를 유지한 남한에서는 특히 그렇다.


정의를 제멋대로 정의한 유신 시대의 포스터 (c) 민족문제연구소

이재용 씨의 혐의는 무엇인가? 뇌물공여를 통해 소위 “삼성그룹” 내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안에 대한 주주의 의사결정을 왜곡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사태의 진행상황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글로 적은 바 있는데, 과연 합병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닌지는 우선 논외로 하겠다.2 문제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기능적 분화를 유지해야 할 현대사회에서 이재용 씨가 그 기능적 분화를 정치적 압력으로 무마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즉,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정부가 아닌 보통사람의 돈으로 운용되는 투자도구이니 만큼 그들에게 있어 “정의”는 보통사람의 경제적 이익에 복무해야 하는 독립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오히려 엉뚱한 “국익”을 내세운 사적이익 추구에 복무한 것으로 보이는 혐의다.

분화는 근대사회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근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한 세계이다. 전체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의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한다. [중략] 이렇게 분화한 각 사회적 단위들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기능이 주어진다. [중략] 그리고 다양한 영역이나 조직은 갈등하거나 투쟁할 수 있다. [중략] 아니 갈등하거나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다양한 국가기관과 그 기관들에 속한 수많은 국가관료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국가이성비판, 김덕영 지음, 다시봄, 2016년, pp121~122]

정의의 문제로 돌아가자. 근대사회의 한 기능인 기금운용본부에게 있어 정의는 무엇인가? 연금 납입자의 경제적 이익이다. 운용본부가 그 이익을 위해 결정을 했다면 본부가 합병을 찬성했든 반대했든 그 결정을 존중해줄 합리적 이유가 있다. 그런데 만약 외압에 의해 합병을 찬성했다면 정의가 무너졌다고 여길 합리적 이유가 있다. 이때 실현된 정의는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 상층부를 위한 정의다. 한편, 그렇다면 이 정의가 최소한 국가 단위의 공동체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재벌 체제에 내재화된 경제신문들은 하나같이 특검 때문에 나라 망한다고 곡소리가 났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주가로 관찰할 수 있는 시장은 별로 반응이 없다. 재밌는 일이다.

기금운용본부의 기능적 분화 무력화 시도가 경제에 장단기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3 하지만 원론적인 부분에서 살펴볼 때 이재용 씨의 혐의가 사실이라면 그는 시장의 본원적 기능, 즉 균형가격의 탐색을 방해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가 기금운용본부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본부는 시장의 합병할 양사의 합병비율이 균형가격에 부합하는지 독립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장주의자들이 경제발전의 대전제로 여기고 있는 이상향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즉, 기능적 분화를 거친 독립적 기관의 각각의 정의가 서야 원론적 경제가 바로 서는 것이다. 이재용 씨는 시장의 균형가격 탐색을 방해한 자본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본가는 적어도 시장주의자가 아니다.

LBO 단상

폴린 카터라는 여성이 남긴 유산에서도 이런 사례를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식당에서 30년 가까이 일했다. 비록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주급 12달러밖에 벌지 못했지만, 이 얼마 되지 않는 벌이 가운데 일부를 떼어 종업원을 위한 레이놀즈 ‘A’ 주식을 샀다. [중략] 그러다가 회사가 KKR에 팔리자 카터는 분통을 터트렸다. 회사는 어떻게 되고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식은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어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였다고 조카는 증언한다. [중략] 커터는 그동안 RJR 주식을 4만 2,500주를 모아두고 있었다. 카터에게 떨어진 돈은 세금을 빼고도 300만 달러였다. 카터는 그 뒤로도 계속 검소하게 살다가 2000년, 사망하기 직전에 270만 달러를 윈스턴살렘 재단에 기부했다.[문 앞의 야만인들, 브라이언 버로/존 헤일러 지음, 이경식 옮김, 크림슨, 2009년, pp906~907]

1980년대 M&A 열풍이 월스트리트를 휩쓸던 당시 역대 가장 큰 M&A 거래가 됐던 RJR 내비스코 거래에 관한 책인 ‘문 앞의 야만인들’의 대미를 장식하는 후기에 나오는 일화다. 비록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여느 경제보다 더 활발했고 그에 따라 주식의 손 바뀜이 잦았던 나라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노동윤리를 가진 노동자들은 이러한 세태와 상관없이 주식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곤 했던 목.가.적.인 자본주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라서 옮겨 적어 보았다. 거래가 이루어진 뒤 십 몇 년 동안 그 거래규모의 기록이 깨지지 않았던 엄청난 규모의 거래였던 지라 식당 종업원마저 300만 달러의 거금을 거머쥘 수 있었지만, 카터의 관심사는 그 액수가 아니라 자신이 신념처럼 믿고 있었던 직장의 견고한 존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LBO라는 금융기법을 유명하게 만든 M&A 시장의 활성화는 인수기업을 카터와 같은 이의 소박한 꿈과는 거리가 먼 – 매드맥스 퓨리로드에서의 모래폭풍과도 같은 – 광풍이 휩쓸고 가는 난장판으로 –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 만들었다. 주식시장이 활성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수의 주식을 소유하게 된 또는 전문경영인이었던 경영진은 기업이 거대화된 후 기업을 지키거나 기업가치의 재고를 위해 분투해야 했고, 이러한 요구를 금융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바로 LBO였다. LBO의 창시자들이 스스로를 MBO(Managed Buyout)라 불러주길 바랬듯이 LBO는 새로운 관리와 구조조정을 의미했다. 기득권, 비용초과, 관행 등이 관리의 대상이었는데,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기존 멤버들에게는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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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부인이 기업의 가치를 공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방법은 바로 해당 기업의 주식 매입이다. 이 방법의 단점은 – 특히 외부인에게 있어 – 주식가치의 재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LBO인데 주식을 아예 통으로 매입하여 스스로 가치 재고를 위한 대수술에 돌입한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 프로세스였다. 이러한 수술 기간은 주식투자자에게 있어서는 영겁의 세월이나 다름없는 3~5년 정도였고 때로는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질 수도 패배로 이어질 수도 있는 확률게임이다. 어쨌든 통상의 주식 거래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규모의 거래인지라 투자은행, 변호사, 회계사 등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떡고물을 위해 주변에 몰려들었다.

몇몇 사람들에게 이 책이 다룬 이야기는 단지 RJR내비스코라는 한 회사가 몰락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장차 미국 기업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게 되는 ‘나도 한몫 챙겨야지’하는 풍조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한때 착실하던 회계 법인들의 회계사들도 자기들이 회계 감사 대상 회사를 감사하는 게 아니라 그저 고객 회사가 바라는 대로 모든 걸 맞춰주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죽어가던 회계법인 ‘아서 앤더슨’의 회장이던 폴 볼커는, 자기 회사 직원들이 ‘엔론’의 공범이 되었던 이유는 그런 회사들과 그 직원들이 누리는 엄청난 부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같은 책, p908]

LBO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공사례도 많고 실패사례도 많다. 금융시장의 발달에 따라 이전과 같이 “안정적인” 경영권이 반드시 정의롭거나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만도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엔론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LBO 또는 사모펀드라는 소수 플레이어의 시장에서의 무규칙 플레이는 왕왕 기업의 발전과는 상관없는 – 당초 LBO의 이상향이기도 했었을 – 플레이어들의 초기 배당 잔치로 끝나 버리기도 한다. 길지 않은 우리의 사모펀드의 역사에서도 벌써 딜라이브와 같은 실패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시위에 나섰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생업의 현장을 떠났지만, 그 거래의 플레이어들은 과연 GP라는 이름에 걸맞은 책임을 졌을까? 사실 책임의 방식조차 룰로 자리 잡지 않은 시장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