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단편

erehwon [2]

챈, 앤디, , 미구엘, 앨리스, 순이, 스즈끼

식당

“이번에는 두려워들 하고 있군요. 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니까 무서운가보죠?”

순이는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는 네 명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순이”

스즈끼 선장이 나무라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순이의 말처럼 승무원들은 지난번 존의 죽음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눈가에 두려운 기운이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죽음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 해도 역시 예고치 않은 죽음은 두려운 법이다. 마치 사형집행일이 앞당겨진 사형수의 심정이 이러할까?

“앤디 뭐 조사된 것이 있나?” 스즈끼 선장이 물었다.

“지난번과 유사한 정황입니다. 칼자국으로 판단하건데 그때 존에게 사용한 그 칼로 보입니다.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만 증거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그 칼이 사라져버렸으니 거의 확실합니다.”

“칼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나?”

“제 숙소에…”

“숙소라면 누구든지 의심 없이 출입이 가능한 편이니…”

스즈끼 선장이 앤디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혼자 뇌까렸다.

“문제는 사건 당시 어디 에들 있었느냐 하는 것이로군. 사실 식물원이 이 우주선 한 가운데 놓여 있어 누구든지 맘만 먹으면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곳이긴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모두의 그 당시 위치를 말해주도록.” 스즈끼 선장은 앤디를 먼저 쳐다보았다.

“전 조종실에 있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조종간을 만지작거리며 앞에 펼쳐진 별빛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력감이 들긴 처음이라서 말이죠.”

스즈끼는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앨리스는 스즈끼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저는 휴게실에서 미구엘이 내팽개치고 간 쥐덫을 읽고 있었어요. 지금 이 상황과 너무 흡사하네요. 암튼 한마디 하자면 누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지 몰라도 너무 우스워요.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사라질 목숨들… 대체 뭐하고 있는 거죠?”

다들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냉소는 너무 직설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숙소에 있었어요.” 순이가 입을 열었다. “중식 당번이었지만 챈이 방에서 쉬라고 자꾸 권해서 방으로 갔어요.” 챈이 동의하는 몸짓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앨리스는 그런 둘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럼 저는 자연스럽게 위치가 부엌이 되는군요. 전 얼마 안 되는 식재료로 중국식 볶음밥을 만들던 참이었지요.” 챈이 말했다. 몇몇은 코를 킁킁거리며 볶음밥 냄새를 확인했다.

“선장님은요?” 챈이 물었다.

“나 역시 숙소에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체념에 가까운 냉기가 느껴졌다.

“다들 알리바이는 있는데 누구도 두 사람 이상 함께 있지 않았군. 그러니 어느 누구라도 쉽게 식물원에 접근이 가능했겠군.” 스즈끼 선장이 말했다.

“선장님 탐정놀이는 밥이나 먹고 하죠. 어쨌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역시 앨리스였다. 다들 그녀의 냉소에 화낼 기력도 없었다.

“챈. 시체는?”

“네 존의 경우처럼 밀봉 드럼통 안에 넣었습니다. 산소 한 방울이라도 아껴야죠.”

이건 냉소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우주선에 남은 산소량은 일곱 사람 기준으로 이제 약 4주 이하로 남아있다. 이제 다섯으로 줄었으니 조금은 여유가 있긴 하겠으나 시체가 썩으면서 갉아먹는 산소라도 아껴야 할 판이다. 의사인 챈은 이제 사람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시체 치우는 담당이 되고 말았다.

앤디의 일기 2057년 7월 6일

불과 며칠 만에 두 사람이 죽었다. 이전에는 전우라며 서로 목숨이라도 내줄 것처럼 굴던 이들끼리 있는 공간에서 둘이 살해당한 것이다. 우주로 나오니 사람들이 미쳐가는 것일까? 이렇게나 무력감을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배웠던 첨단기계를 통한 수사기법들은 여기서 무용지물이다. 솔직히 나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지문을 채취하는 방법조차 잘 모른다. 이럴 때는 마치 에큘 포와르의 잿빛 뇌세포와 같은 직관만이 유효한 것일까?

사실 앨리스가 의심스럽다. 그 차가운 성격, 삶을 체념한 듯한 태도, 그럼에도 뛰어난 그녀의 금발 미모, 그러한 점이 마치 독거미처럼 치명적이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천성이 바람기를 타고난 존이 그녀를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당방위로 그 녀석을? 그리고 시미치를 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구엘은? 미구엘은 그녀를 싫어했다. 그렇다면 미구엘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생각에? 가능성이 있다. 스즈끼 선장과 이 문제를 의논해야겠다.

순이의 일기 2057년 7월 6일

점점 산소가 떨어져가는 느낌이다. 숨이 미약하게 가빠졌다. 존을 죽인 범인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어렴풋이 존을 싫어하던 미구엘일거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내 생각이 틀린 것 같다.

앨리스의 죽음

앤디가 앨리스가 의심스럽다고 선장에게 보고한지 한 시간이 채 안되어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가슴이 칼에 찔린 선홍빛의 피로 물들어 있었고 휴게실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발견되었는데 소설책 쥐덫을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이제 서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 것인가?

정황상 앨리스를 의심했던 앤디는 적이 당황한 눈치였다. 스즈끼 선장에게 민망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선장은 그런 그를 위로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것이 기정사실이 된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을 담당한 형사와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챈도 순이도 더 이상 두려워할 기운이 없는 듯 초점 잃은 눈을 하고서는 선장의 뒤에서 멍하니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앨리스는 매혹적인 파란 눈을 크게 뜬 채 삶을 마감했다. 잔뜩 공포에 질린 눈이었다.

“식사 당번이 좀 더 자주 오겠네요.”

이 신랄한 냉소는 물론 앨리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순이가 한 말이었다. 모두들 그녀의 말에 놀라서 돌아보지만 힐난할 기력도 없었다. 자신들이 느끼는 두려움이 이름 모를 살인자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어느 날엔가 식량도 산소도 떨어진 뒤에 서서히 닥쳐올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체를 치우도록.”

간단히 말을 마친 스즈끼는 휴게실 문을 나섰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궁하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남은 셋은 넋 나간 스즈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이는 그들보다 대여섯 살밖에 많지 않은 마흔 초반의 젊은 선장이었지만 패기 있고 명석한 선장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식물인간처럼 무력해졌다.

(계속)

erehwon [1]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 잡글 – 다시 써봤습니다. 장르는 스페이스환타지추리소설. 너무 황당한 장르지만 하여튼 ‘뭐 이런 글이 있어’라고 탓하지 마시고 재밌게 읽어주시길…. 연재로 이어집니다.

순이의 일기 2057년 7월 4일

어제 존이 죽었다. 내 사랑. 살해당했다. 하지만 모두들 시큰둥한 반응이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을 목숨이라는 체념? 우리란 난파당한 우주선 erehwon 호의 승무원들을 말한다. 태양계를 넘어 인류의 새로운 거주지인 신천지를 개척하는 – 적어도 선장의 말로는 – 임무를 부여받고 지구를 떠난 우리 일곱 명의 우주인들은 태양계를 벗어난 순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주동력원인 헬륨3 잔량의 97%가 사라져버리는가 하면 주요전자기기의 기능이 마비되는 사고를 당했다. 덕분에 우리는 말 그대로 우주의 미아가 되어버렸다. 그 사고가 있은 지 56일 동안 얼마 남지 않은 전기와 물, 그리고 식량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눈물이 흐른다. 그가 그립다.

존의 죽음에 침묵하는 동지들. 동지? 살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 폐쇄된 우주선 공간 안에 존의 살인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숨 막힌다. 그 살인자가 당장이라도 내 방에 뛰어들어 나를 덮칠 것만 같다.

스즈끼의 일기 20057년 7월 4일

사실 삶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삶을 갈구하고 사랑하기에 태양계를 벗어나 신세계로 나아가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 두 강대국 간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얼룩진 지구, 환경오염으로 그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는 지구, 그 지구의 대안을 찾기 위한 힘겨운 첫걸음이었다. 그렇지만 결과가 이렇게 허무할 줄은 몰랐다. 우주선이 주기능이 정지된 – 다행히 약간이나마 전력은 남아있다 – 원인도 모르고 고칠 방법도 모르겠다. 지구와의 교신도 끊어졌고 그나마 유일한 밥줄인 식물원의 식물도 점점 죽어가고 있다. 가져온 비상식량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능이 정지된 우주선은? 우주선은 그냥 우주를 힘없이 유영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 같은 침묵의 우주로 무의미하게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조금 이른 죽음

존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2057년 7월 3일로 기록될 것이다. 다른 이들의 예정된 죽음보다 몇 주 앞섰다. 발견될 당시 가슴에 스웨덴제 군용 칼이 꽂혀있었다. 존 자신의 칼이었다. 지문은 없었다. 누구라도 드나들었을 그의 방에서 용의자의 흔적을 찾는 것은 무의미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다지 놀란 눈치가 아니다.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뿐이다. 그저 죽음이 자신들보다 조금 빨랐다고 생각하는 그런?

“순이 오늘 중식 당번이야” 앨리스가 말했다.

“이봐 플리즈~”

챈이 앨리스에게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이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앨리스는 그런 그에게 ‘어쩌라고’하는 표정을 지었다.

“순이 내가 식사 준비 할테니 너는 좀 쉬어.”

“아냐 내가 그냥 할게.”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게.”

챈이 뒤따라 나서며 말했다. 앨리스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앨리스와 휴게실에 남은 미구엘은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다 읽고 있던 책으로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앨리스가 책 제목을 흘낏 쳐다보았다.

‘쥐덫’

“흠 고전추리소설이군. 어쩐지 우리 처지랑 닮았는걸? 폐쇄된 공간에서의 살인극이 말이야. 차이가 있다면 그 작품의 등장인물은 죽음을 두려워했고 우리는, 적어도 나는 죽음을 냉소하고 있다는 정도?”

미구엘은 약간 미간을 찡그렸다. 이때 앤디가 들어왔다. 그는 지구방위대 소속 수사관 신분이다. 어떤 의미에선 이번 살인사건의 수사책임을 맡고 있다 할 수 있다.

“저런 때맞춰 들어오시네 수사관님이. 가만 있자 쥐덫에선 수사관이 범인이었는데 말이지.”

앨리스는 짖궂은 표정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집어치워 그놈의 냉소 짜증나!”

여태 무관심하게 책을 읽던 미구엘이 책을 팽개치며 소리쳤다.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앨리스를 바라보던 미구엘은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쟤 왜 저래?”

앨리스는 짐짓 모르는 체 빈정거렸다. 그런 앨리스를 보던 앤디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다시 휴게실을 나갔다. 앨리스는 이번에는 아무말 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식물원

미구엘은 식물원 담당이었다. 식물원에는 승무원들이 먹을 식량들을 재배하고 있었고 인공태양열과 물을 자동으로 생성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능이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마비되어 버렸다.

미구엘은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인 성격인데 더욱 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사태가 꼭 자기 책임인 것 마냥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습관적으로 식물원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 아직 소량의 물을 먹고 살아가고 있는 식물들이 살려달라고 무언의 항변을 외치고 있었다. 미구엘은 시들어가는 사과를 만지작거렸다.

문득 존이 떠올랐다. 평소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원래는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였다. 둘은 우주사관학교 동기였다. 학교성적은 미구엘이 더 우수한 편이었지만 룸메이트여서 스스럼없이 어울리곤 했다. 그러나 그런 우정은 존에 의해 깨졌다. 미구엘이 순이를 사랑한다고 수줍게 존에게 털어놓은 후 존은 관심도 없던 순이를 여자친구로 삼아버렸다. 그것은 고의적인 것이었다. 미구엘은 나중에야 존이 자신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통해 그런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구엘이 더욱 화가 났던 것은 순이의 존에 대한 애정이 진실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존의 그것은 다분히 장난기어린 것이었다. 미구엘은 용기를 내어 이런 사실을 erehwon 호의 멤버가 결정되기 전에 순이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순이에게 승무원에 지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순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No thanks”

상념에 젖어있던 미구엘은 문득 등 뒤로 인기척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 너구나. 저… 아까는 미안….”

미구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존을 찔렀던 그 칼이 그의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불에 데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정신이 희미해지는 와중에 ‘왜 왜!’라고 외쳤다. 미구엘의 가슴을 칼로 찌른 검은 그림자는 칼을 뽑아들고 식물원을 빠져나갔다.

(계속)

고양이

비누머리님의 요청도 있고 오랜만에 단편 하나 올립니다. 글 속의 날짜를 보니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끼적거린 글이로군요. 다시 읽어보니 민망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하지만 블로그 개장 1주년이라는 타이틀도 있고 하니 저를 웃음거리로 여러분 앞에 내놓습니다. 맘껏 비웃어 주시길… ^^; 

(1)

재훈은 동그마니 큰 눈에 호기심을 가득 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조그마한 동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 얼룩무늬의 새끼고양이다. 앞발을 배 밑으로 집어넣고 잔뜩 웅크려 앉은 모양새가 영락없이 고양이의 모양이다. 혼자 사는 처지에다 직장까지 다니고 있어 동물따위를 키울 여력이 없는 재훈이지만 퀭한 자취방이 영 뜨악치 않아 지인(知人)으로부터 고양이를 한 마리 얻어왔다.

잔뜩 얼굴을 가까이 댄 채 싱긋싱긋 웃으면서 바라보던 재훈은 살짝 고양이의 수염을 건드려봤다. 신경질적으로 근육을 찔끔거리며 왼쪽 눈을 가볍게 윙크한다. 재훈의 입장에서 보면 윙크한 것이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선 찡그린 것이다. 재훈은 고양이를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여전히 마음이 안 놓인 새끼고양이는 다시 따스한 침대 맡을 찾았다. 마음이 따스했던 어느 저녁은 그렇게 흘러갔다.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난 재훈이는 일어나자마자 불을 켜고 의자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긴장을 멈추지 않고 있던 고양이는 퍼뜩 눈을 뜨고 재훈을 바라보았다. 재훈은 그런 고양이를 위해 사발에 우유를 따라 주었다. 그리곤 하는 듯 마는 듯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고양이를 데려온 지 이틀이 지났건만 재훈은 아직 고양이의 이름을 짓지 못한 채 그저 ‘고양아 고양아’하며 불렀다. 고양이는 이제 방 모습에 익숙해져서 제법 재롱을 부린다. 의례 그렇듯 고양이는 아무거나 붙잡고 시비를 걸었다. 책을 보고 있던 재훈이가 연필을 휙 던져주자 고양이는 흠 놀라다가 이내 연필을 이리저리 툭툭 치며 시비를 건다. 연필을 자기 영역에 침범한 적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재훈이가 양말을 동그랗게 말아 고양이의 눈앞에서 희롱을 하자 뒷발로 껑충 서서는 앞발로 양말을 잡아채려 했다.

[하하하]

재훈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틱틱거리는 모양새가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아…]

고양이의 이름이 지어졌다. 재훈은 이름을 ‘틱’이라고 정했다. 재훈은 기분이 좋아져 ‘틱아 틱아’하며 고양이를 불러봤다. 고양이는 그게 제 이름인지 아닌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기 영역을 침범한 양말과 싸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틱은 이제 재훈이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요상한 것이 꼭 재훈의 목에 올라앉아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언뜻 잠들었던 재훈이 갑자기 목이 답답해 눈을 떠보면 어느새 엉큼하게 틱이 목에 올라와 잠을 청하려 하고 있었다.

사흘째가 되자 이제 틱은 재훈이에게 온갖 응석을 다부렸다. 책상 앞에 앉아 채팅을 하고 있으면 틱이 어느새 자기랑 놀아달라고 ‘응예 응예’하며 응석을 부렸다.

[미안해요. 고양이가 절 불러서]

[어머 고양이를 키우세요?]

상대방 여자가 반색을 했다.

[네 새끼고양이예요.]

[이름이 뭐예요?]

[틱요.]

[와… 너무 예쁘겠다~~ 키키.]

재훈은 그 이후 그 여자와 고양이 얘기며 개 얘기 등 애완동물 이야기로 얘기꽃을 피웠다. 비교적 한적한 개인병원의 간호사라는 그 여자는 당직이면 채팅을 하며 지루한 당직을 달래곤 했다. 가끔 발생하는 이머전씨때문에 급히 톡을 끊어야 하는 점을 제외하면 좋은 말상대였다.

사건은 나흘째 터졌다. 야근 때문에 저녁 늦게야 방문을 열던 재훈에게 옆방에서 나오던 이웃이 말했다.

[고양이 키우시나보죠?]

[네.]

재훈이가 평소 서먹하게 지내던 이웃집 사람에게 계면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양이가 하루 내내 울던데요?]

[아… 네.]

하며 계면쩍은 웃음을 거두며 문을 열었다. 틱이 문 앞에 너부러져 있었다. 재훈이는 깜짝 놀라서 틱을 바라보았다. 거의 바닥에 몸을 붙이고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재훈은 당황하여 급히 114에 전화를 걸어 근처에 있는 동물병원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리고는 번호를 더듬어 위치를 확인하고는 틱을 보듬고 그의 차에 올라탔다.

의사는 장염이란 진단을 내렸다.

[새끼 고양이한테 찬 우유먹이시면 안돼요.]

[네.]

재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에 데려온 틱은 영 맥을 못 추고 갤갤거렸다. 재훈은 그런 틱을 바라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채 몇 시간도 자지 못한 재훈이 불쑥 일어난 때는 어렴풋이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틱은 축 늘어져 있었다. 죽어 있는 듯 보였다. 재훈의 눈에는 문득 눈물이 핑 돌았다.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낯선 곳에 끌려와 끝내 죽은 것이다. 그때 틱이 몸을 꿈틀거렸다. 재훈의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결국 그날 재훈은 회사를 쉰 채 틱을 돌봤다. 재훈의 간호덕분인지 하루 만에 틱은 기력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결국 재훈은 틱을 고양이 임자에게 다시 돌려보내야 했다. 틱을 고양이 임자의 손에 넘겨주고는

[이름은 틱이야.]

라고 말하면서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가 재훈은 틱을 돌아다보았다. 틱은 무심한 눈초리로 재훈을 바라봤다. 재훈은 무심한 틱의 눈이 왠지 자기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아 돌아오는 길이 편하지 못했다. 차를 몰면서 재훈은 ‘고양이는 사람보다 자기가 살던 집을 기억한다는데’하며 영 마음이 허전했다.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열었지만 재훈을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음이 허한 재훈은 냉장고 위에 놓아두었던 위스키를 한잔 따라 마셨다.

틱은 새집으로 – 아니 예전의 자기 집으로 – 와서도 재훈을 잊지 못했다. 틱이 좋아서 데리고 노는 꼬마아이도 다 귀찮았다. 꼬마는 틱에게 ‘야옹이’ 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틱이 자기가 틱이라는 사실도 개의치 않았지만 야옹이란 이름도 개의치 않았다. 이틀 여를 그 집에서 주는 넉넉한 먹이를 먹으며 틱은 기력을 되찾았다.

틱은 사흘째 되는 날 길을 나섰다. 딱히 이유를 정해놓은 것도 아니지만 어렴풋이 재훈을 다시 찾아가고 싶었나보다. 금방 그를 찾으리라는 틱의 본능은 틀린 것이었다. 길은 낯설고 공기는 차가왔다. 결국 그날 저녁 틱은 동네어귀의 쓰레기통 옆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몇 달이 지난 후 이제 틱은 자기가 왜 집을 나섰는지조차 잊은 채 완벽한 – 외모조차 – 들고양이가 되었다. 동네 이곳저곳을 제 마당마냥 휘젓고 다니며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근처에서 틱은 완벽한 자기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영역 안을 침범한 녀석은 고양이건 연필이건 양말이건 그의 날카로운 앞발톱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어느 어스름한 저녁 재훈은 친구와 얼큰하게 한잔 들이킨 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문득 무언가가 어슬렁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삐쩍 마른 그러나 덩치는 제법 큰 얼룩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마치 그곳에 재훈은 없다는 양 무시하며 지나쳐갔다.

[뭐야. 도둑고양이 주제에 어슬렁거리다니 뻔뻔하군.]

얼얼한 재훈은 고양이가 마치 사람이라도 되는 양 소리쳤다. 그 소리에 고양이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힐끗 재훈을 쳐다보았다. ‘뭐야.. 저 녀석’하며 자기 영역 안에 있는 큰 동물에게 적대감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흥하며 고개를 돌리고는 왼쪽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2)

집에 돌아온 재훈은 얼큰해져서 침대에 벌떡 드러누웠다. 문득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한동안 통신에서 만나지 못했다가 근래에 다시 만난 – 물론 통신상에서지만 – 간호사와 이야기나 나눌 요량이었다. 통신에 접속하자 예의 간호사의 아이디가 눈에 띄어 얼른 톡을 신청했다. 금방 그녀가 톡을 응해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 ]

[당직이신가요?]

[네.. 오늘은 한산하네요.]

[그렇군요. 죄송한데 오늘은 제가 한잔 했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뇨. 그냥….]

[네…]

다소곳이 그녀가 대답했다.

[인경님 사람 죽는 거 많이 보셨죠?]

[여긴 개인병원이니까 많이 보진 못했고요. 아주 가끔 근처에서 교통사고 같은 거 나면 응급실에 실려 오는 시체가 있죠.]

[그런 사람 보면 어떤 생각 들어요?]

[음… 간호사 처음 할 때는 맘이 편치 못했는데요. 이젠 좀 무감각해졌어요.]

[네….]

[왜 무감각하다니까 실망하셨어요?]

[아뇨. 그냥 죽고 산다는 게 부질없단 생각이 드네요.]

[재훈님 외로우신가보다.]

[하하… ^^; ]

[가끔 드라이브나 하시면서 바람 좀 쐬세요.]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고마워요 인경님.]

10여 분 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업무를 도와달라는 동료 간호사의 부탁 때문에 둘은 채팅을 그만둬야 했다. 컴퓨터를 끈 재훈은 어두운 방안에 멍하니 앉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너 참 불쌍하다 재훈아’

불쑥 일어나 방을 나선 재훈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창문을 내려 맞바람을 맞았다. 시원한 밤바람이었다. 문득 틱이 생각이 났다.

‘틱은 어디서 뭐할까? 그 집에서 뚱뚱이가 돼있겠지.’

20여분 여를 밤거리를 달려 재훈은 어느 낮선 거리를 만났다. 생애 한번도 와보지 않은 거리에 접어들자 재훈은 또다시 이 도시에서 자신은 이방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재훈은 눈을 감고 차가 뜸한 거리에서 액셀레터를 힘껏 밟았다. 2초 후 재훈의 차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와 충돌했다.

인경은 응급실의 간호사를 도와 응급실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그때 급히 응급실문을 들어서는 침대가 있었다. 침대위에는 참혹하게 얼굴에 피가 맺힌 한사나이가 누워 있었다. 이미 숨진 상태였다. 용무를 보다 한참 후에 돌아온 동료간호사가 빈정거렸다.

[그러게 음주 운전하는 사람들은 죽어도 싸다니까.]

인경은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나 이제 가도 되지?]

[응 그래 가서 자리 지켜야지.]

카운터로 돌아온 인경은 컴퓨터를 켜서 통신에 접속했다. 재훈의 아이디인 blue를 찾아보았지만 그는 로그아웃상태였다. 왠지 마음이 답답한 인경은 재훈에게 편지를 띄었다.

“안녕하세요.
인경이예요.
오늘은 어쩐지 재훈님의 마음이 심란한가봐요.
재훈님의 웃는 얼굴을 보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재훈은 그이후로도 통신에 접속하지 않았다. 인경은 몇 통인가 재훈에게 편지를 띄우다가 이내 제풀에 지쳐 그만두고 말았다. 90일이 지나자 재훈의 아이디는 삭제되었다. 그 무렵 인경은 어느덧 그를 잊고 새로운 통신친구들을 사귀고 있었다.

어느 저녁 통신을 하던 인경은 문득 문밖을 내다보았다. 갈색 얼룩무늬의 도둑고양이 한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병원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3)

햇살이 흔들거리는 아침이 찾아오면 인경은 나른한 하품을 한다. 그리고는 전에는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새아침을 맞을 준비에 부산해진다. 종일근무에서 풀려나 비번인 날이 찾아오면 하루쯤 늦잠을 자두어도 좋으련만 인경은 부지런히 잠의 먼지를 털어내고 얼굴에 물을 끼얹는다.

인경은 나태를 혐오한다. 그녀는 이제 지나가버리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오늘 1998년 3월 18일을 사랑하는 여자이다. 그녀는 삶의 한 귀퉁이를 살갑게 애무하는 타입이다. 그녀는 또한 독신자의 적이 나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찮은 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짓은 하지 않는다.

3월의 햇살은 아직도 서툰 냉기를 간직한 채 처마 끝에 머물러 있다. 인경은 반가운 햇살이 몸에 와 닿는 것을 즐기면서 부엌으로 가 콩나물을 물에 담가둔다. 오늘은 콩나물국을 끓여둘 참이다. 오늘은 모처럼 서점에 들를 예정이다. 평소에 신문을 뒤적거리며 꼼꼼하게 수첩에 받아 적어놓은 시집을 몇 권 살 계획이다.

인경은 부산을 떨다가 잠시 숨을 돌릴 참으로 마당에 나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엉성한 체조를 했다. 어디선가 희미한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막 팔을 휘돌려 허리운동을 할려는 참이었다. 어찌 들으면 애기 울음소리와도 같은 가녀린 울음소리였다. 인경은 체조를 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떠서 귀를 기울였다. 다시 갸냘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주인집 헛간 쪽이었다. 인경은 조심스레 헛간 쪽으로 다가가서 슬며시 헛간 문을 열어보았다.

햇살아래 있어서인지 어둑한 안을 들여다보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잠시 후에야 인경은 헛간 안쪽 자전거 뒤쪽에서 울음소리의 발원지를 발견했다. 울음소리의 정체는 커다란 얼룩고양이 품안에 엉겨 붙어 있는 새끼고양이들이었다. 고양이라고 하기에도 애처롭게 털도 채 마르지 않은 핏덩이들이 이리저리 엉켜 꼼짝도 않고 있는 어미젖을 허겁지겁 빨아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어미는 죽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새끼고양이는 모두 다섯 마리였으나 이미 몇 마리는 어미와 저승길을 동행한 모양이었다.

인경은 서둘러 삶의 빛을 좇아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고양이 세 마리를 신문지를 깐 종이박스에 담아 동네어귀에 보아둔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고목의 나이테 수만큼 얼굴에 주름이 진 늙은 수의사가 그녀를 맞았다. 수의사는 고양이들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어미는 어찌 됐는가?”

“죽은 거 같던데요.”

아직도 어리둥절한 인경이 어수룩하게 대답했다. 수의사는 안경너머로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거 같다니?”

“사실은 저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들고양이인 모양인데 저희 집 헛간에서 애를 낳은 모양이에요. 제가 얘들을 데리고 올 동안에도 어미는 꼼짝도 않고 몸도 식어있었어요.”

“쯧쯧, 사산한 모양이군. 어린 것들이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었구먼.”

“얘들을 어떻게 하죠?”

“놔두고 가게. 일단 고양이 꼴이 될 때까지는 내가 돌봄세.”

인경은 안심과 걱정이 뒤섞인 한숨을 지으며 병원 문을 나섰다. 동물병원이라 하기에는 영 마땅치 않은 – 주인을 닮은 – 허름한 병원이었지만 그만큼의 경륜도 있을 것이다. 인경은 집에 돌아와 멍하니 마루에 앉아 있다가 퍼뜩 생각이 들어 헛간에 가서 삽을 챙겨들고 죽은 어미와 새끼고양이들을 자루에 담아 뒷동산에 올랐다.

제법 땀을 흘린 후에야 그들을 묻을 만한 구덩이를 팔 수 있었다. 1시간여를 씨름한 끝에 고양이 무덤을 만들었다. 인경은 파헤쳐져 붉은 흙을 드러낸 무덤을 바라보았다. 삽을 챙겨든 인경이 허리를 한번 쭉 펴고 돌아서려는 순간 왠지 고즈넉한 고양이 무덤이 쓸쓸해 보였다. 인경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제법 곧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무덤 맡에 꽂았다. 십자가 모양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비석흉내를 내었다.

집에 돌아와 말라붙은 땀을 닦아내고 방에 누워 있던 인경은 문득 서점에 가기로 한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서점 시집코너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렸지만 인경은 자꾸 아침녘의 새끼고양이들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며칠을 인경은 가축병원으로 출근해 고양이들의 상태를 살폈다. 며칠이 지나자 고양이 세 마리는 나름대로 기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안경 낀 늙은 어미덕분에…

그러는 동안 고양이들은 젖을 뗄 무렵이 될 만큼 후딱 시간이 흘렀다. 이제 어느새 응석을 부리는 고양이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인경은 언젠가 통신에서 만났던 한 사나이가 말했던 고양이가 생각났다. 고양이들은 그 때 그 남자가 말하던 갈색 얼룩고양이들이었다.

‘그 고양이도 얘네 들처럼 귀여웠겠지?’

인경의 입가엔 웃음이 담겨졌다. 그때 잠시 밖에서 담배를 사러나간 늙은 수의사가 들어왔다.

“이제 데리고 가게. 뭐하면 여기서 주인들을 찾아 주던지.”

“네에..”

인경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대답했다. 문득 그간의 진료비 – 어찌 보면 양육비 – 가 걱정이 됐다.

“저 진료비는 어떻게….”

“놔두게. 뭐 딱히 수고스러운 일도 없고 몇푼 받자고 한 일도 아니니…”

“그래도…”

“자네 고양이도 아니었다면서… 내가 여기 들르는 사람들한테 수소문해서 고양이들 주인을 찾아봄세.”

인경은 칭얼거리면서 서로 아옹다옹하는 고양이들을 바라보았다.

“저 제가 한 마리 가져가도 될까요?”

의자에 앉아 녹차를 마시던 수의사가 잔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인경을 바라보았다.

“좋을 대로 하게.”

인경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세 마리의 고양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맨날 찾아오는 언니의 얼굴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고양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친근했다. 인경은 손을 살짝 들었다 놨다 하며 망설였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예전 그 사나이의 고양이와 가장 닮았을 것 같은 고양이를 집어 들었다. 어디가 닮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다만 느낌일 뿐이다. 인경은 다시 한번 그동안의 노고를 감사드린다고 수의사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고양이를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병원을 나섰다.

오는 길에 괜히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혼자 사는데다 밤샘근무까지 하는 처지에 애완동물이라니 하는 생각에 맘이 불편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맘을 다잡아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아양이라도 떨어서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는 인경의 청을 선선히 들어주었다.

“아 우리 집 헛간에서 난 동물이니 우리가 주인인 게지.”

고양이는 낯이 선지 인경의 방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영역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 고양이를 인경과 주인집 아주머니는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 사나이와 그가 며칠간 키웠던 고양이가 떠나간 1998년 3월 어느 따뜻한 저녁이 저물고 있었다.

핸드폰

다소 딱딱한 글만 연속으로 올린 것 같아서 분위기 전환으로 어릴 적 끼적거린 유치뽕짝의 단편 하나 올립니다.

김반장는 탁자위에 놓여진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달랬다. 맞은편에 앉은 가족들은 어수선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게 애초에 다 큰것이 혼자 나가 산다고 했을때부터 말렸어야지.]

가장인듯한 초로의 사나이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그마한 여인에게 벌컥 성을 냈다.

[지금 그런거 따질때가 아니잖아요.]

탁자옆에 서있던 25세쯤 되어보이는 삐쩍 마른 젊은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김반장옆에서 이들 가족을 쳐다보던 박형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자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죠. 전화는 언제쯤 왔죠?]

[아까 오후 6시예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는 젊은이가 대답했다.

[전화해선 곧장 여동생을 데리고 있으니 천만원을 준비하라고 했단 말이죠?]

[네. 혜정이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렀어요. 혜정이라고.]

[면식범일 가능성이 있군.]

박형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전화통화하면서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잠자코 앉아 있던 김반장이 끼어들었다. 박형사보다 늦게 도착한 관계로 김반장은 다소 어수선했다.

[다 이상하죠. 새벽 3시에 공원으로 나오라는거 하며 노란 파커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쓰라는거 하며….]

[그거 참.]

김반장은 소파뒤로 고개를 한껏 젖힌채 천장을 응시하며 탄식을 질렀다. 흘릴 눈물도 말라버린듯한 건조한 눈의 어머니는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로 김반장을 응시했다.

[전화는 공중전화같던가요?]

[아뇨. 핸드폰같았어요.]

[여동생은 전화를 안받던가요?]

[네 계속 안 받아요. 어쩌면 그녀석이 혜정이의 핸드폰을 이용하고 있겠죠.]

[그럴 가능성이 높군요. 다시 전화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 발신자 추적도 어렵고…]

김반장은 힐끗 박형사를 쳐다보았다. 나이는 그보다 위지만 실력 탓인지 그의 하급자인 초라한 박형사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짜증이 났다.

[어떻게 할까요 박형사님?]

[일단 범인의 요구대로 이 젊은이가 공원에 나가고 우리가 근처에서 잠복근무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뻔한 답이다. 그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김반장은 얼른 이 지루한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최종정리를 했다.

[박형사의 말대로 그 도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은 마음 놓으시고 좀 쉬시지요. 그리고 젊은이는 오늘 수고좀 해줌세.]

[네.]

수심에 가득찬 부모와 달리 의외로 담담한 젊은이는 선뜻 대답했다.

[자식이 왜 하필 새벽 3시야. 귀찮게스리]

새벽의 잠복근무가 귀찮은지 집을 나서던 박형사가 불쑥 내뱉었다. 김반장은 그런 박형사를 쳐다보며 ‘그러니 승진이 안되지’하고 속으로 빈정거렸다.

김반장은 강력반원 다섯명을 12시부터 일찌감치 공원 곳곳에 배치시켰다. 크지 않은 동네공원인탓에 인적은 거의 없었다. 애써 몸을 감추느라 외진 나무숲속에 숨어있자니 숨통이 막혀오는듯 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유괴범때문에 담배도 피우지 못해 답답할 지경이었다. 하릴없이 기다리자니 이 생각 저 생각이 다들었다.

‘천만원이라니 너무 적은 액수아닌가?’

‘노란 파커에 모자를 쓰라?’

김반장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핸드폰으로 유괴당한 혜정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한참이나 신호가 갔는데도 받지 않았다. ‘역시 안받는군’하며 전화를 끊은 김반장은 다시 ‘이놈의 핸드폰때문에 세상이 더 골치 아파졌어’라고 뇌까렸다.

새벽 2시 30분이었다. 때때로 상황을 체크하던 김반장은 혜정의 오빠와 함께 있는 이형사를 무전기로 불렀다.

[이형사 오빠를 보내라 오버.]

애써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보내겠습니다 오버.]

칙칙거리는 무전기소음사이로 이형사의 목소리가 나왔다. 공원 입구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노란파커에 빨간 캡을 쓴 모양이 혜정의 오빠였다. 혜정의 오빠는 다소 뻣뻣하게 걸어오더니 약속장소인 벤취앞에 서있었다.

긴장된 침묵이 흘러 어느덧 2시 43분이 되어가던 즈음 일이 터졌다. 벤취 뒤에 있던 수풀사이로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혜정의 오빠를 무언가로 찌르는 것이었다. 혜정의 오빠는 힘없이 쓰러졌다. 김반장은 급박스런 사태에 당황하며 급히 무전기로 잠복요원들을 불렀다.

[사태발생! 사태발생!]

그말을 외치며 김반장이 뛰쳐 나갔다. 그림자는 수풀속에서 뛰쳐나오는 형사들을 보더니 황급히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거기 서!]

김반장이 앞서 뛰어가는 그림자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그림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총성이 들렸다. 김반장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박형사가 하늘에 대고 총을 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박형사 안돼 쏘지마.]

그림자는 하늘의 총성에 더욱 두려움을 느꼈는지 더 속도를 냈다. 다시 한 번 총성이 울리고 그림자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림자가 누워있는 곳에 도착한 김반장은 숨을 헐떡이며 급히 그림자의 몸을 살폈다. 총알은 정통으로 가슴을 관통했다. 비참한 노릇이다. 못난 하급직원때문에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뒤따라 오던 박형사역시 헐떡거리면서 김반장이 앉아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게 뭐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김반장은 울컥하는 마음에 연장자인 박형사를 다그쳤다. 박형사는 난감한 표정과 울먹거리는 표정이 교차하는 기묘한 얼굴을 하며 김반장을 쳐다보았다.

그날 아침 아홉시 김반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팔에 기댄채 그의 책상에 앉아있었다. 혜정의 오빠도 죽고 용의자도 죽었다. 시말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때 사무실로 이형사가 들어왔다.

[반장님 죽은 녀석의 신원이 밝혀졌습니다.]

[말해보게.]

[이름은 김지원. 유괴된 이혜정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녀석입니다. 주변사람말로는 소위 캠퍼스커플이라더군요.]

[캠퍼스커플? 애인사이란 말이지?]

[네.]

[그 녀석 주위를 샅샅이 뒤져봐. 그리고 이혜정의 핸드폰은 발견됐나?]

[아니요. 가지고 있지 않던데요? 김지원의 핸드폰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그 녀석 아예 이혜정의 오빠를 죽일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 목장갑을 끼고 있던걸 보면…]

[흐음…]

알 수 없는 용의자의 행태에 김반장은 다시 머리를 감싸쥐었다. 왜 돈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만 죽였을까?

그날 오후 김반장은 서장실에 불려가 한바탕 혼쭐이 났다. 거기에다 경찰서에 들이닥친 혜정의 부모로부터 모멸찬 멸시까지 받아야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하루였다. 그러나 다음날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듯한 단서가 발견됐다.

죽은 김지원의 주위를 수사하던 이형사가 김지원이 몰던 차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김지원은 혜정의 오빠가 유괴소식 전화를 받던 전날 저녁에 차를 정비센터에 맡겼다. 정비센터를 찾아간 이형사는 정비사로부터 다소 당황한 표정의 김지원이 라이트프라스틱이 깨진 차를 맡겼다는 증언을 얻어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 아마도 이혜정을 – 친 김지원이 사고를 숨기기 위해 차를 정비센터에 맡겼을거라는 추리를 한 이형사가 김지원의 부모로부터 김지원이 군에 있는 친구의 면회를 갔다가 전날 저녁 늦게 술에 취해 돌아왔다는 증언을 받아냈다.이형사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김반장은 한숨 돌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군부대에서 집까지 오는 사이에서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거군.]

[그렇다고 봐야지만 어디서 사고가 났는지 알 수가 없잖습니까?]

[으음…]

김반장은 다시 한번 멍청한 짓을 저질러 버린 박형사가 원망스러웠다. 곰곰히 생각해보던 김반장은 결국 우연히 이혜정을 치어버린 김지원이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혜정의 집에 딸을 유괴했다고 헛소리를 하고는 그의 오빠까지 죽여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후 또하나의 희소식(?)이 들려왔다. 이혜정이 발견된 것이다. 국도변 수풀속에서 싸늘히 식은 시체로… 그 국도는 김지원이 면회갔다는 군부대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국도였다. 시체를 검시한 의사는 이혜정의 직접적인 사인이 교통사고로 인한 것이 아니라 도로 바깥으로 튀겨나가 넘어지면서 돌에 머리를 부딪혀서 생긴 뇌진탕이라고 결론내렸다.

쌀쌀한 오후 김반장은 책상에 앉아 사건을 해결했다는 안도감에 다소 느긋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김지원의 행동에 아직도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이혜정의 핸드폰은 어디있는걸까? 김지원이 내버렸나?’

김반장은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수화기를 들고 이제 머리속에 박혀버린 이혜정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뚜우 뚜우 신호가 갔다. 서너번쯤 울렸을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김반장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김반장은 급히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이형사를 향해 외쳤다.

[이형사 내 전화가 어디로 신호가는지 발신지 추적해.]

역시 느긋한 자세로 앉아있던 이형사는 갑작스런 김반장의 명령에 급히 몸을 일으켜 추적장치를 작동시키기 위해 건너방으로 건너갔다. 건너방으로 건너간 이형사를 쳐다보던 김반장이 다시 수화기에 급히 입을 댓다.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상대방이 대답했다. 스무살 안팎의 젊은 목소리였다.

[그거 이혜정씨 핸드폰 아닌가요?]

[맞는데요?]

천연덕스럽게 상대방이 대답했다.

[전화받은 분은 누구시죠?]

[하하… 김반장님이신가요? 저는 이혜정과 친한 사이입니다.]

김반장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대방이 마치 그를 바라보며 통화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당신 누구요. 어떻게 나를…]

[으음.. 그건 알 필요없고요. 마침 전화하신김에 김반장님의 의문사항을 풀어드리죠. 왜 김지원이 이혜정의 오빠를 죽였는지 궁금하시죠?]

[….]

넋이 나간 김반장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원래 이혜정은 제 여자였지요. 그년이 인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혜정이 김지원과 놀아나기 시작한 이후로 저는 지옥의 나날이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죠. 그래서 제가 혜정이한테 선물을 하나 하기로 했죠. 손수건을요. 음… 포르말린액을 약간 묻힌..아무튼 손수건을 선물한 날 저는 잠든 혜정이를 제차 뒤에 태운 채 제 아지트로 가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고 있는데 혜정이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더군요. 너무나 요란하게 울려 귀찮아서 차를 도로위에서 세워야 했죠. 전화한 녀석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줄 요량으로요.]

거기까지 말한 상대방은 숨을 고를 요량인지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이야기해드릴까요?]

넋이 나간 채 듣고 있던 김반장은 서둘러 대답했다.

[말해봐.]

[음… 말끝이 짧으시네요. 아무튼 전화를 받으려고 차를 세우고 뒷좌석으로 가고 있는데 이년이 잠든척하고 있다가 갑자기 반대편 문을 열고 뛰쳐나가더라고요. 그러더니 맞은편에서 오던 차를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더군요. 근데 이차가 그냥 혜정이를 지나치려 했고 피하려던 혜정이는 안타깝게도 그 차에 치이더니 도로 바깥으로 튀어나가더군요. 그 차가 누구차인지 아십니까?]

[김지원의?]

김반장이 대답했다.

[역시 강력계 반장다우시군요. 사실 제가 눈이 좀 밝은데 그 멍청한 녀석의 얼굴이 눈에 금방 띄더군요. 근데 한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는 거예요. 그 멍청한 녀석이 바로 혜정이한테 전화를 걸어 날 귀찮게 하던 녀석이죠. 지 애인한테 전화하다 부주의로 제 차로 지 애인을 죽이다니 멍청한 녀석.]

김반장은 어이없는 상대방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날 오후 아지트로 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 녀석 도대체 맘에 안 들더군요. 그래서 우선 혜정의 집에 전화를 걸었죠. 메모리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내가 혜정이를 유괴했으니 노란파커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공원에 나와있으라고 이르고는 김지원한테 전화를 걸어 내가 혜정이를 죽였는데 너도 죽여주겠으니 공원으로 나오라고 했죠. 그리고 친절하게 내가 입을 옷차림도 알려줬죠.]

[반장님. 바로 경찰서 앞입니다.]

급히 이형사가 사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빨리 나가봐.]

김반장은 급히 수화기를 막으며 소리치고는 다시 수화기를 가까이 댔다.

[하하하… 김반장님 절 잡으실 모양인데 무슨 죄로 잡아넣을 작정입니까?

살인죄? 유괴범? 아니면 공갈범? 글쎄요. 어렵네요.]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김반장은 급히 사무실을 나서 경찰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김반장이 발견한건 황당한 표정으로 이혜정의 핸드폰을 들고 서있는 이형사뿐이었다.

求道者로서의 野球人의 자세

삼진아웃을 당한 김명지는 락커로 돌아와 벤취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나 실망스런 표정은 아니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초연한 의지가 표정에 나타나 있었다. 2루수가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봐. 슬러거 또 삼진이네?]

[그러게.]

김명지는 마치 남의 일인양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자네 20타수 연속 무안타에 6연속 삼진인거 알고나 있나?]

[알지 알고 말고.]

2루수에게 눈도 돌리지 않은채 김명지는 역시 조금의 사심도 없이 대답했다. 저멀리 떨어져 있는 수비코치는 둘의 대화를 바라보다 기가 찬듯외면했다. 말많은 2루수는 눈치도 없이 계속 시비를 걸었다.

[자네 요새 무슨 고민있나?]

[아니? 컨디션 아주 그만이야.]

[엥?]

2루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김명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질문공세가 이어질 법 했으나 공수교체가 되어 2루수는 땡볕이 내려쬐는 운동장으로 뛰쳐 나가야 했다. 김명지는 지명타자여서 예의 자비로운 표정으로 두손을 깍지낀채 배에 올려놓은 편안한 자세로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팀내에서 유일하게 그의 지성을 인정하는 에이스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자네 요새 타격자세 좋더군.]

김명지는 에이스를 힐끗 쳐다보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그런데 6타석 연속 삼진이라…]

[그러게.]

[뭐야. 불교에 귀의라도 했나?]

상대팀 수퍼브로스(Super Bros)의 수위타자가 막 포수의 미트로 들어갈 공을 시원하게 쳐내어 2루타를 뽑아 냈다. 수퍼브로스의 홈구장이어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었다. 에이스의 궁금해하는 눈빛을 조롱하던 김명지가 한마디 툭 던졌다.

[자네 야구가 뭔지 아나?]

[뭐라고? 음… 야구야 스포츠지.]

난데없는 질문에 에이스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끼고 있던 팔짱을 거꾸로 바꿔 끼면서 대답했다.

[요즘 그 생각을 하고 있지.]

[야구가 뭔가 하고 말인가?]

[응.]

수퍼브로스의 날쌘돌이 유격수가 다시 단타를 쳐내어 상황은 무사 일삼루가 되었다. 그러자 코끼리처럼 구석에 앉아 있던 거대한 몸집의 감독이 에이스를 찾았다.

[어이 에이스 몸풀어.]

에이스는 철학적 대화를 끝내지 못한게 못내 아쉬운듯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 글러브를 집더니 불펜쪽으로 향했다. 이번엔 타격코치가 다가 왔다.

[4할을 눈앞에 두던 친구가 3할도 위험하게 되었네 그려.]

비록 최근 극심한 난조를 보이고 있지만 4년연속 리그수위타자였던 김명지에게 타격코치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3할이던 4할이던 그게 중요한건 아닙니다.]

에이스와의 대화가 도중에 끊어진 것이 신경에 거슬린 김명지는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럼 어떤게 중요한가?]

배불뚝이 타격코치가 모자를 고쳐 쓰면서 비꼬듯이 물었다.

[야구의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대답을 했지만 타격코치가 이해할리 만무하다.

[뭐라고? 야구의 본질?]

어이없다는듯 타격코치는 따분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야구의 본질.]

김명지는 ‘본질’에 힘주어 대답했다.

[야구의 본질이 뭔데?]

[여타 구기와 비교해 경기방식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야구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앞으로의 나의 야구인생에 있어 이정표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저는.]

대답하기가 귀찮았던 더이상의 질문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김명지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실으면서 또박또박 대답했다.

[어떻게 다르지?]

거기서 물러날 타격코치가 아니었다. 김명지는 짝발을 짚고 서있는 타격코치를 한심하다는 듯이,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거의 모든 구기는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공을 몰고 갑니다. 그리고 목표지점에 공을 가져다 놓으면 점수가 나지요. 마치 섹스와 같습니다. 하지만 야구는 공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점수나기가 유리합니다. 또한 처음 출발한 지점에 다시 돌아와야만 점수가 나는 경기입니다. 됐습니까?]

심기가 불편해진 김명지는 더이상 묻지 말라는 의미에서 ‘됐습니까’에 힘을 주어 대답하고는 운동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명지의 소원이 이루어지려는지 김명지의 소속팀인 보어텍스(Vortex)의 환상적인 트리플플레이가 성공하였고 공수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도대체 뭔 소린지 의아해 하던 타격코치가 운동장으로 나가버렸다. 동시에 운동장에 있던 선수들이 락커로 밀려들었고 이번에는 팀내에서 그에 이어 타격 2위인 루키 3루수가 김명지의 옆에 자리잡았다.

[선배님 제 수비 어땠어요?]

날카롭게 뻗던 공을 라이너로 잡아내어 트리플플레이에 한몫을 한 3루수가 으스대면서 은근히 자신의 호수비를 확인하려 했다.

[스타트가 느리더군.]

기껏 자랑스럽게 물었던 3루수는 무안해져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야구계의 전통적인 서열관계도 무시한채 운동화끈을 조여매면서 비아냥거렸다.

[조금만 있으면 제가 선배님 제치겠어요?]

[그럴것 같아.]

마음좋은 선배는 아무런 사심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머쓱해진 3루수가 제풀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아이고 제가 설마 하늘같은 선배님을…]

[우리가 5할타자가 되지 않는 이상 항상 지는거야.]

[예?]

[보게 반타작도 못하는 타율을 가지고 수위타자라 한들 무슨 소용있나? 나하나 아무리 잘났다고 몸부림친들 결국 상대팀의 9명의 수비수에게 지는거야.]

끈을 조여매던 3루수는 돌연 이 구도자적 자세로 게임에 임하는 대선배에게 알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다.

[과연 그렇군요.]

문득 이 선배는 자신의 야구철학을 이 새까만 후배에게 설파하고 싶은 지적허영심에 사로잡혔다. 김명지는 3루수쪽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6번타자가 타석에 들어섰고 7번타자가 배트 2개를 락커앞에서 연신 흔들어대고 있었다.

[우리는 야구를 시작한 이래 수많은 타이어를 작살내고 수없이 미트질을 했지만 정작 야구 그 자체로부터는 소외되고 있었던 거야. 자네 소외에 대해서 알고 있나?]

[아뇨.]

3루수는 바보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오무려서 대답했다.

[하기야 나도 그 소외라는 것에 대해서 요즘 이책 저책 보면서 공부하고 있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소외란 말이야. 이놈의 야구에서보다 확실하게 나타나지. 야구는 스포츠야. 스포츠란 무었인가? 수렵과 전쟁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아가던 미개한 인간이 수렵과 전쟁없이 먹을걸 얻으면서 분출할 길없는 그들의 폭력적 성향을 스포츠를 통해서 풀어낸거야. 그것까진 좋다 이거지. 그런데 어느날 경제활동과 폭력을 분리하였던 인간들이 그들의 대안적 폭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족속이 생겨나기 시작한거야. 남의 폭력을 지켜보면서도 그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는거야. 이게 바로 소외야. 그리고 이제 한번 보자고. 야구는 그 소외된 스포츠중에서도 최고야. 야구는 바로 경기에 임하는 야구선수도 소외되는 운동이야. 야구선수는 짜릿하게 공을 쳐내는 그 순간에 자기의 폭력성을 해소시키기 보다는 그날의 타율, 최다안타기록, 그날의 삼진아웃수, 그날의 실책수등 왠갖 숫자놀음에 찌들어 야구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숫자를 신봉하는 거지. 숫자 그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야. 더나아가 야구도 아무것도 아니지. 루상에 나갔다가 홈에 들어오지 못한들 어떠한가? 1루에 나가서 1루수의 엉덩이를 한번 톡 쳐주는 것도 기분좋은 일아닌가? 삼진을 당한들 어떤가? 상대팀 투수가 정말 멋진 공을 한번 던져 자기를 속인다면 ‘녀석 솜씨좋은데’하면서 한번 웃어주면 그만 아닌가? 이제야말로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숭배해 마지않던 그 지긋지긋한 숫자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구.]

봇물터지듯 터져나오는 대선배의 충고아닌 충고에 루키 3루수는 매던 끈을 다시 매야할지 아니면 ‘잘알아들었습니다 선배님’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몹시 갈등을 겪었다. 그런 그의 난처한 입장을 해결해준겄은 보어텍스의 갑작스런 타격 폭발이었다. 일순간에 2점이 났고 다음 타선을 위해 이 철학자 야구인은 자기 배트를 들고 타격준비를 해야만 했다.

타석에 들어선 철학자는 그의 20타수 연속 무안타라는 숫자를 통렬하게 깨버리는 만루 장외홈런을 날렸다.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인 관계로 수퍼브로스의 팬들은 다이아몬드를 돌던 김명지에게 경기 그자체를 즐기는 태도로써의 격려의 박수보다는 차가운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그리고나서도 김명지가 한일이라곤 락커로 돌아와 앉아 양손을 깍지끼어 배에 척 얹어놓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경기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우정

이른 아침 교정의 잔디는 6월의 아침이슬을 흠뻑 담아두고 있어 푸르름이 눈부실 지경이다. 과함도 모자람도 없이 초여름의 아름다운 교정은 크게 숨을 쉬어 그 행복한 공기를 폐속에 한껏 담아두고 싶은 경치다. 그러나 나나 그 녀석에게 있어서나 이러한 상쾌함을 느끼는 것조차 일종의 사치다. 한국땅에서의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오만함, 권모술수, 그리고 자기학대를 미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란다에 나와 이렇듯 바람을 쏘이고 있는 것도 서로를 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녀석들이 보기에는 충분한 비아냥거리가 된다.

K가 허공을 응시한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K와 나는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 같은 동네, 비슷한 취미, 비슷한 성적 – 둘 다 어림 중상위권은 유지하고 있다 – 이 자연스럽게 우릴 단짝으로 만들어 왔다. 학교생활에서 우정은 일종의 당의정이다. 겉에 발려진 달콤한 우정이라도 없으면 누가 이토록 쓴 약을 삼키려 하겠는가?

[스트레쓰가 많이 쌓이냐?]

K에게 물었다.

[자퇴해야 겠어.]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자퇴한다는게 자퇴한다는거지 무슨 말은 무슨 말?]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K에게 당혹감을 느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왜 자퇴를 해 임마.]

[너무 힘들어. 너 요즘 내가 어떤지 아냐?]

[어떤대?]

워낙에 까탈스러운 K는 쉽게 사람과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다. 우리학급에서도 나정도나 마음을 터놓는 형편이어서 속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쳐가는 것 같아.]

순간 소위 고3병이 이 녀석에게도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사 천하태평인 나는 이해못할 바였으나 신경이 예민한 K에게는 좀 다를 것이다. 그날 K가 내게 해준 이야기에서 판단하건데 K는 일종의 난독증에 걸린 것 같았다. 즉, 책을 보고 있노라면 글자들이 갑자기 춤을 춘다는 것이었다. 글자와 글자가 서로 엉키고, 섞여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어쨋든 나는 K에게 내일모레로 다가온 중간고사때문에 너무 긴장한거라고 어설픈 진단을 내렸지만 맘 한켠으로는 근본원인은 이 자그마한 적자생존의 경쟁사회를 버거워 하는 K의 나약함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수업시간에도 문득문득 앞자리에 앉아있는 K의 뒷통수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내 주위에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이 녀석은 나를 친구로 여길까?’, ‘친구라면 이럴때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여러 상념들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어 학교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식은 밥과 영양가없는 떡라면으로 때우고 있을때 내가 먼저 운을 떼었다.

[내가 도와줄께 좀 참아봐라.]

[니가 뭘?]

국물을 마시던 K가 대답했다.

[중간고사만 어떻게 넘기면 좀 마음이 차분해질거야.]

[머리에 들어오는게 없는데 시험이라도 제대로 치겠냐? 다 틀렸어. 더구나 내신반영비율도 큰 시험인데.]

체념한 표정으로 K는 식은 밥을 국물에 말아넣었다.

[내가 보여줄께.]

요지는 그렇다. 어차피 시험동안 자리배열은 평소와 같았다. 뒷자리에 앉은 내가 쪽지로 정답을 건네주고 K가 그걸 베끼면 되는 것이다. K는 처음엔 난색을 표명했다.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회로도 있는 거라는 거창한 삶의 방식까지 들먹이면서 우리들의 음모를 정당화시켰다. 어쩌다 도움을 주는 쪽에서 설득하는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지만 결국은 K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렇지만 나역시 마음 한구석이 씁슬함을 느꼈다.
그로부터 이틀뒤 시험이 시작되었다. 첫째 시간은 국어였다. 문제는 평이한 난이도여서 나는 일찌감치 답안작성을 마치고 약속된 쪽지를 시험감독 몰래 써내려갔다. 소위 자유적인 면학분위기를 강조하는 대머리 교장의 교육방침덕택에 시험감독은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다. 시험감독은 아예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그래도 긴장이 되어 종료벨이 울려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K가 몸을 돌려 나에게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잘썼냐?]

[오냐. 한두개는 일부러 다른 답을 적었다. 완전범죄를 위해서.]

[잘했다.]

맥이 빠진 나는 싱겁게 대답하고는 교실을 나와버렸다. 일종의 가속도가 붙은 우리의 음모는 여타 과목시험에서도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이틀동안 보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남은 과목 공부를 위해 나는 도서관으로 K는 집으로 갔다. 어차피 그녀석은 책도 읽을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도서관쪽으로 발길을 돌린 나를 향해 K가 소리쳤다.

[고맙다.]

‘그래 고마워야지.’

형광등 불빛아래서 영어참고서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뭔지 모를 역겨움이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포화속에 피어난 알량한 우정이라는 꽃 한송이… 친구를 위함인가 나를 위함인가. 나혼자 도덕군자인 것처럼 행세한들 세상의 비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를 책상에 쳐박은 200여명의 무뇌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지함과 단순함이 행복의 조건이라더니 과연 행복한 녀석들이다. 자꾸 딴생각이 들어 화장실에 들어가 담배를 한대 물어 피웠다. 자비로운 이 학교에서는 화장실에 재떨이까지 비치해놓았다. 길게 한모금을 들여마시고 천정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결국 그날은 학교에서 밤을 샜다. 샜다고는 하지만 밀려드는 피로에 제대로 공부한 것도 없이 새벽 4시경에 수학참고서를 배게삼아 선잠을 청했다.

1교시 수학시간은 부족한 잠때문에 머리가 멍했다. 어차피 수학은 주관식인 관계로 K나 나나 수학은 쪽지를 건네지 않기로 했을뿐 아니라 그나마도 시간이 모자랐다. 종료벨이 울린뒤 피곤한 눈을 부비고 있을때 K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피곤해보인다.]

[아냐.]

펴놓은 영어참고서에 눈길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K는 잠시 무언가 말하려는듯 머뭇거리다 잠자코 밖으로 나갔다.

영어시간이었다. 영어는 내가 자신있어 하는 과목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문제가 난이했다. 너댓개가 애매했다. 종료를 15분여 남겨놓고 답안을 작성한후 쪽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 실수였기를 마음한구석에 바라지만 – 6번답을 빠뜨리고 적었다. 덕택에 번호가 달려있지 않은 쪽지를 K가 그대로 받아베끼가다가는 한칸씩 답을 올려 적은 꼴이 되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나는 6번답을 적지 않은채 K의 어깨밑으로 쪽지를 슬며시 밀어넣었다. 나머지 시간동안 나는 모래성같은 나의 우정에 착잡함을 느꼈다. 종료벨이 울리고 나서 나는 K에게 말도 건네지 않은 채 묵묵히 독일어참고서를 보고 있었다. K가 먼저 말을 건넸다.

[정말 고맙다.]

[고맙긴 무슨…]

가슴 한쪽이 뜨끔했지만 능청을 떨었다.

[이번에 난 너가 진짜 내 친구라는 것을 알았어. 비록 우리가 옳은 일을 한건 아니지만 너가 많은 힘이 됐다.]

[그래. 다행이다. 내가 뭐랬어.]

기분이 우울해졌다.

[어제 집에 갔는데 마음이 무척 차분해지더라고. 그래서 책을 들여다보았더니 글자가 엉키지 않는 거야. 머리도 맑아지고. 그래서 오늘은 네 쪽지를 보지 않고 내가 직접 풀었다. 두세 개 빼고는 다 맞은 것 같아.]

K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보고 있던 독일어참고서의 글자들이 베베 꼬이기 시작하면서 제각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아침 일곱 시였다. 느긋하게 늦잠을 자도 될 일요일 아침이었지만 방금 꾼 꿈이 너무 생생해서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여보 여보”

벌써 일어나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아내를 불렀다.

“왜~”

귀찮은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안방으로 들어와 내가 누워 있는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뭔데”

“있잖아 꿈을 꾸었는데 좀 소름끼친다.”

“뭔데 이야기해봐.”

“어 바로 우리 집에 나 혼자 있는데 누가 초인종을 누른 거야.”

“현관에서 아니면 대문 앞에서?”

여러 세대가 사는 빌라형인 우리 집은 아래 현관문에서 방문자가 호수를 눌러서 현관문을 여는 타입이었다.

“음… 바로 대문 앞이었던 같아. 누가 어느새 현관문을 열어줬나.. 아무튼…”

잠시 다시 꿈 생각이 나 살짝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인터폰을 들고 물었지. ‘누구세요?’하고 .. 그랬더니 저 쪽에서 그러는 거야. ‘예’ 딱 그 이야기뿐이었어.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뭐야. 다시 물었어. ‘누구세요?’ 그러니까 또 ‘예’ 하는 거야. 기분이 불쾌해서 약간 톤을 높여서 ‘누구세요?’하니까 이러는 거야. ‘예?’”

아내는 잠시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뭐야 그게 다야?”

“응. 근데 소름끼쳤어.”

“음 그래 은근히 소름끼친다.”

“그치?”

동의를 구했던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아침부터 누구야?”

아내는 의아해하며 인터폰을 받기 위해 마루로 나갔다.

“누구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불을 정리해서 몸을 덮으며 아내에게 물었다.

“누군데?”

얼어붙은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