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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The book of dogs (1919) Timber wolf and coyote.png
The book of dogs (1919) Timber wolf and coyote” by Louis Agassiz Fuertes – The book of dogs; an intimate study of mankind’s best friend.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지미(jimy)는 사슴들로부터 바람의 반대방향에 위치한 수풀속에서 자리잡고는 멀리서 달려오는 사슴떼를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동료들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참을성있게 사슴떼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 멀리서는 무리의 알파(alpha)인 데코(deco)가 무리를 이끌고 사슴떼를 쫓고 있었다.

지미는 무리의 베타(beta)였다. 지미일행의 임무는 혼비백산한 사슴떼들이 정신없이 달아나는 측면(側面)을 공격하여 대열을 흐트려놓고는 그중 어리거나 나이 든 사슴을 타겟으로 정하여 공격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사슴떼는 ‘붉은 해가 지는 들판’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명칭은 그들 무리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장소인지법인셈이다. 그들 무리는 ‘아침을 등지는 언덕’에 살고 있었다.

사슴떼가 어느새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갈색수풀이 우거진 들판’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일행은 언제라도 뛰어나갈 기세로 귀를 앞으로 한껏 내밀고는 이빨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뛰어나간 것은 역시 지미였다. 그것을 신호로 나머지 무리들이 빠른 속도로 사슴떼의 측면을 치기 시작했다.

사슴떼의 대열은 갑작스런 측면공격으로 인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지미의 눈에 띈 목표물은 왠지 달음질이 서투른 새끼사슴이었다. 지미는 각기 자신의 목숨을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어른사슴사이에서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새끼사슴을 맹렬한 속도로 쫓았다. 새끼사슴이 계속 갈짓자 걸음으로 지미의 혼을 빼놓으려 했으나 노련한 지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미는 어느 정도 사슴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껑충 뛰어올라 사슴의 목을 힘껏 물었다.

한두번 요동을 치던 사슴이 맥없이 쓰러졌다. 그러자 지미를 따라오던 몇몇 무리가 잽싸게 사슴의 코를 물었다. 몇번의 발버둥도 무의미하게 새끼사슴은 곧 축늘어져버렸다. 데코는 어느새 새끼사슴의 옆에 와 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마리 새끼사슴의 희생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슴떼들은 저만치 달아나 발걸음을 약간 늦췄다. 그러나 여전히 데코 일행에게 긴장의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새끼사슴이라고는 했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사슴이어서 제법 살집이 도톰했다. 데코와 지미가 사슴의 가슴살을 정신없이 파헤쳐 포식을 한후 뒤늦게 도착한 무리들은 게걸스럽게 나머지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침을 등지는 언덕’에 다다랐을 즈음 어느덧 해가 늬엿늬엿 지고 있었다. 늑대무리는 포만감에 젖어 제각기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아있던 무리들도 이에 답하듯이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는 울어대기 시작했다.

지미는 아내를 위해 따로 떼어놓은 고기를 입에 문채 그의 토굴로 돌아왔다. 아내인 제니(jenny)의 품안에는 그들의 아기들이 곤하게 잠들어있었다. 모두 네마리다. 지미는 고기를 땅에 내려놓고는 파란 기운이 감도는 아기들의 하얀 털을 애정어린 몸동작으로 핧았다.

문득 앤디(andy)가 졸린 눈을 떴다. 제니는 지미에게 왜 공연한 짓을 해서 애를 깨우느냐는 투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지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애정이 담뿍 담긴 눈길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앤디의 눈은 파란색을 띄고 있었다. 앤디도 자라면 그의 부모처럼 갈색눈으로 변할 것이다.

어느새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었고 무리중 누군가의 포효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지미는 제니의 곁에 자리를 잡고 엎드려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앤디는 정말 정신없이 자랐다. 두달이 지나자 비틀비틀거리며 걷던 앤디도 어느새 곧추 서서 뛰어다니며 어른 흉내를 곧잘 내곤 했다. 앤디는 땅바닥을 기어가는 거미를 마치 사냥감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발로 채가면서 가지고 놀았다. 제니는 그런 앤디옆에서 가만히 아이가 하는 짓을 바라보곤 했다. 앤디는 그의 형제자매들보다도 성장이 빨랐으며 – 네마리의 새끼중 둘은 병치레로 한달을 넘기지 못했다 – 머리회전도 빨랐다. 그래서 부모들의 행동을 곧잘 흉내내곤 했던 것이다.

앤디가 태어나고 칠십이일이 되던 왠지 공기가 심상치 않은 아침이 밝아왔다. 이슬이 아직 이름모를 풀에 송글송글 맺혀있을 아침 무렵 데코는 자신의 영지(領地)를 한껏 느긋한 자세로 천천히 활보하고 있었다. 그가 지나갈때면 다른 늑대들은 그의 앞에서 고개를 낮추어 데코에게 머리를 부벼대며 복종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런데 왠일인지 켄조(kenzo)는 데코가 그의 옆을 지나가는데도 뻣뻣이 서서는 딴청을 피워댔다. 데코는 심사가 뒤틀려 잠시 켄조를 바라보다 무시하고는 계속 갈길을 걸어갔다. 이제 막 커가는 무리의 감마(gamma) 켄조는 슬슬 암컷을 그의 아내로 삼고 싶었지만 마땅한 배우자감이 없었다. 켄조는 자신의 넘치는 힘을 아무에게나 드러내보이고 싶은 젊은 혈기가 온몸에 뿜어나고 있었다.

모두가 우려했던 일은 해가 남동쪽 산에 걸터앉을 무렵 벌어졌다. ‘아침을 등지는 언덕’에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돌고 있어 모든 늑대들이 그 흉포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뒷날 늑대들 사이에서는 이날의 사건이 과대포장되어 제각기 자신의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앞뒤가 뒤죽박죽인 가쉽거리가 되고 말았다. 혹자는 데코가 비겁하게 돌아서있는 켄조를 뒤에서 물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정정당당한 결투끝에 켄조가 꼬리를 내리고 서둘러 도망갔다고도 말하였다. 누구의 의견이 맞는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의견이 일치되는 점은 켄조가 무리로부터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무리로부터 추방된 켄조는 ‘아침을 등지는 언덕’으로부터 반나절 거리나 떨어진 늪지주변을 배회하는 모습이 몇몇의 눈에 띄었다. 그를 본 늑대들은 그가 국외자(局外者)답지 않게 털은 한층 윤기나는 갈색을 띄고 있었고 눈은 복수를 노리는 증오의 빛으로 광채를 띄고 있었다고 떠들어댔다.

켄조가 떠난지 며칠이 지났어도 반역(反逆)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데코에게는 더없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데코는 한층 더 신경질적이 되어갔다. 무리의 젊은 늑대들은 공공연히 데코의 뒤에서 그를 무시하는 듯이 고개를 뻣뻣히 쳐들고는 그들의 알파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데코는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생양은 무리의 베타인 지미로 정해졌다. 언덕을 감싸는 바람에 무더운 습기가 묻어나오는 한여름날의 오후 데코는 그날 사냥의 실패를 지미의 탓으로 돌렸다. 사슴을 쫓던 그날의 사냥에서 측면돌파조의 신참 탐(tom)은 성급하게 너무 일찍 사슴무리로 뛰어들었고 어이없게도 성숙한 숫사슴의 뒷발에 채이고 말았던 것이다. 경황없는 도중에 사슴무리는 늑대떼를 떼어버리고는 멀리 달아나버렸다.

측면돌파조의 선두인 지미였기 때문에 데코는 지미에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보이며 그르렁거렸다. 난데없는 데코의 행동에 미쳐 복종의 자세를 취하지 않은 지미의 어리둥절한 표정은 잔뜩 벼르고 있던 데코에게는 반역의 의사로 비쳐졌다. 순간적인 적개심에 지미 역시 송곳니를 드러내 같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고 사냥터는 갑자기 서열다툼의 싸움판으로 변해버렸다.

패자는 지미였다. 귀에 깊은 상처를 입은 지미는 결국 꼬리를 내리고 발을 절뚝거리면서 무리로부터 멀리 도망쳤다. 제니는 무리로부터 추방되지는 않았으나 그동안 암늑대들 사이에서의 베타의 서열이 오메가로 추락하고 마는 수모를 감수해야했다.

앤디는 이 모든 참상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뼈는 많이 튼튼해지고 털도 윤기흐르는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 특이하게도 그의 눈은 여전히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 – 이 모든 난관을 해결하기에는 힘도 지혜도 모자랐다. 그 사이 앤디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베티(betty)는 어느날 그들의 영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에서 사냥꾼의 덫에 걸려 인간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제니역시 남편이 무리를 떠난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암늑대무리의 베타인 메어리(mary)와의 싸움끝에 심한 상처를 입고 무리에서 쫓겨나 시름시름 앓다가 ‘아침을 등지는 언덕’에서 한나절 거리만큼 떨어진 어느 이름모를 들판에서 쓸쓸히 죽었다.

언덕의 나뭇잎이 늑대들의 털색과 비슷해져가는 어느 저녁이었다. 달은 왠지 붉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여느 달의 모양과는 다른 그 밤에 많은 늑대들이 저마다 하늘을 향해 짖어대고 있었다. 멍하니 앉아있던 앤디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울어대기 시작했다. 왠지 알 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치밀어올라왔다. 외로움이 그의 혈기왕성한 몸을 전율시켰다. 몸안 어딘가에서 이상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안면근육이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늑대들은 데코의 동굴에서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다. 발가벗은 인간이 피투성이가 된채 데코의 동굴 어귀에 쓰려져 있었던 것이다. 늑대들은 본능적으로 송곳니를 드러내어 으르렁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엎드린채 쓰러져있는 인간의 옆에 조심스럽게 다가갔을때 늑대들은 그가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왠일인지 그의 눈은 기쁨에 찬듯한 표정을 하고서는 동그랗게 뜨여져있었다.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빨아들일것 같은 깊은 푸른색을 띄고 있었고 살색은 탄탄한 갈색이었고 머리카락 색깔역시 갈색이였다.

더없이 탄탄한 근육이 불거져 나와있는 상체에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고 결정적으로 목에는 이빨자국이 깊게 패여져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이빨에 갈색털이 몇오라기 박혀있었다. 늑대들은 털의 냄새로 미루어 데코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둘러 데코의 동굴안에 뛰어들어간 늑대들이 발견한 것은 목이 물린채 죽어있는 데코였다.

그뒤로 늑대들은 앤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리의 알파는 치열한 서열다툼끝에 서둘러 언덕으로 돌아온 켄조의 차지가 되고말았다. 그뒤로도 한동안 늑대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오묘한 그날밤의 사건에 대해서 갸우뚱거리며 입가에 옅은 미소만을 지어댈뿐이었다.

어느 눈보라를 예고하는 제법 강한 겨울 바람이 부는 공원벤취에 레인코트차림의 한 남자가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읽고 있었다. 가판대에서 파는 썬(SUN)이라는 싸구려 취향의 이 신문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실제로 일어나기라도한양 부풀려 써갈겨대는 신문이었다. 일면에는 런던에 늑대인간이 나타났다는 기사였다.

“소호의 밤거리에 늑대의 이빨자국이 온몸에 찍혀져 있는 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되다”라는 부제가 붙은 기사를 남자는 무심한듯 읽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옆에는 남루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홈리쓰가 빵을 씹어대며 남자의 신문을 흘낏거리고 있었지만 남자는 신경쓰지 않았다.

“쳇 늑대인간이라고? 썬지는 늘 이모양이라니까-”

입안에 잔뜩 빵을 우물거리며 홈리쓰가 중얼거렸다. 레인코트의 남자는 홈리쓰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미 그만 가요. 눈이 올것 같아요.”

저만치서 더플코트차림의 여자가 소리치며 벤취로 다가오자 지미는 보던 신문을 벤취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로또

김씨는 손님에게 한 개비씩 파는 소위 ‘까치담배’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가뜩이나 비좁은 , 거기에다 가연성 물질이 많은 버스 정거장 옆 가판대 안에서의 흡연은 절대 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경우는 처음이다. 급히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로또 당첨금액 점검기의 액수를 확인해 보았다.

‘삼십육억 원’

지난 주 최고금액인 것이다. 하지만 이 당첨된 로또는 김씨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조금 전에 당첨금액을 확인해달라던 어떤 초췌한 아줌마의 로또였다. 당첨금액을 확인해달라고서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서있던 그 아줌마. 당첨금액을 확인하는 순간 김씨는 숨이 멎을 듯 했고 오만생각이 머릿속을 배회하였다. 그의 생각을 정리해준 것은 아줌마의 짧은 푸념이었다.

“꽝이죠?”

김씨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그것이 불과 30초 전이었다. 김씨의 생애에 있어 가장 긴 30초였지만 말이다. ‘어서 가서 돌려주자’라는 생각과 ‘하늘이 날 도운거야’라는 생각이 한 백만 번쯤은 머릿속을 반복 교차한 것 같다. 그리고 담배연기 속에서 해답을 찾았다. 담배를 휴지통에 버리고는 서둘러 가판대 밖으로 나왔다.

급히 아줌마가 발길을 옮긴 방향으로 뛰어갔다. 마음속으로 결정한 바는 있으나 애써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시나리오만이 파편적으로 흘러 지나다녔다. 한때의 직장생활, 정리해고, 아줌마가 번호를 따로 적어놓았을 가능성, 백혈병으로 고생하는 큰애, 나가기 싫은 동창회, 뛰어가는 앞을 방해하는 수다스러운 여학생들… 모두가 김씨의 적들이다.

아줌마를 발견한 곳은 500미터 쯤 가서였고 그녀는 막 후미진 골목으로 접어들려던 차였다. 조심스럽게 그녀로부터 50미터쯤의 간격을 유지한 채 따라갔다. ‘따라가서 어쩔 건데?’라고 자문하였다. 따라가서…. ‘사실대로 말하고 로또를 돌려주자’, ‘사실대로 말하고 반씩 나누자고 하자’, ‘왜 반씩?’, ‘턱도 없는 소리’, ‘그냥 이대로 다시 돌아가자’, ‘우선 빚 2천을 갚고’….

아줌마가 그때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자리에 서서는 퍼뜩 놀라며 핸드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역시 적어놓았어 제길’ 김씨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에서 피가 날 정도로 담벼락을 긁었다. 길옆의 돌멩이 하나가 김씨를 비웃는다. ‘헛물 켠 거야 남의 돈 먹기가 쉬운 줄 알아?’ 돌멩이를 집어 들고 강하게 부인한다. ‘절대 아니야 이것보다 쉬운 돈벌이가 어디 있어?’

김씨는 그 뒤에 벌어진 일이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돌멩이의 조소, 손톱에서 흐르던 피,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던 아줌마, 돌멩이, 돌멩이, 피 묻은?, 누구의 피지?, 황급히 내달려 큰길가로 나왔다. 방금 전의 인적 없는 골목길이 꿈만 같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적댔다. 서둘러 가판대로 뛰었다. 길가의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바보 같은 놈 로또를 가판대에 놓고 문도 안 잠그고! 정말 지랄한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가판대 근처 치킨집의 대머리 정 사장이었다.

“어이 김씨 어디 갔다 와?”

할 수 없이 달음질을 멈춰야했다. 무릎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골랐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정 사장님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무슨 소리야. 지금 김씨 가게가 난리 났어.”

“네?? 무슨 소리에요?”

“불이 나서 뼈대만 남고 홀라당 탔어. 가게에서 불 피웠어?”

‘꼬… 꽁초가….’

김씨는 맥없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꿈이라면 좋겠다. 꿈이라면…. 꿈이라면…

미소를 파는 여자

한동안 글이 너무 딱딱해서 예전에 끼적거린 글을 퍼 나릅니다. 글에 98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니 11년 전에 쓴 글이로군요.(세월 잘 간다~)

성재는 탁자위에 놓인 치킨버거를 한입 베어 물고는 콜라를 한 모금 빨았다. 그러면서도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표지엔 월간문학 7월호라고 쓰여 있었다. 화창한 일요일 점심시간이라서 주위탁자엔 학생인 듯한 손님들이 많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적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패스트푸드 점의 깔끔한 풍경을 연출하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바깥을 바라보자 전면유리창 너머로 맞은편 백화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창한 파란 하늘을 배경이 화려한 백화점의 외양을 부추기고 있었다. 전면 벽의 커다란 광고판에는 넓은 차양모자에 파란색 주름치마차림의 한 소녀가 금방이라도 돌아설 듯이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뒤돌아 서있었다. 치마 아래로 보이는 늘씬한 다리와 하얗고 긴 목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98년 여름과 어울리는 시원한 모습이었다.

성재는 느지막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서점을 들러 이책 저책을 뒤적거리다 월간문학을 구입한 후 끼니를 때우기 위해 이 패스트푸드 점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월간문학에는 그의 새 단편이 실려 있었다. “미소를 파는 여자”라는 제목의 짧은 단편이다. 성재는 반년 전 바로 이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로 두세 번 이 책에 글을 내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쓴 글은 그의 경험담을 반쯤 섞은 자서전적인 글이었다. 성재는 작가들이 삶을 팔아먹고 사는 파렴치 한 존재라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황급히 자신처럼 상상력이 부족한 녀석들이나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중얼거리며 나머지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들에게는 면죄부를 발행해주었다.

글을 읽어보니 그가 쓴 문구 하나 하나마다 또다시 1년 전 그날이 떠올려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이미 감정이 식었어요.>

<오빤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난 그냥 나의 길을 가고 싶을 뿐이에요.>

성재는 아픔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자신이나 미소를 팔아 명성을 얻으려 했던 그녀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의 그녀를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만히 입을 벌려 ‘혜원아’하고 불러보았다.

그때 문을 열고 한 소녀가 들어왔다. 줄무늬 티셔츠에 베이지색 멜빵바지 차림의 경쾌한 스타일의 아가씨였다. 가게 주위를 둘러보다 성재를 발견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냐. 나도 금방 왔는걸.”

성재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탁자위엔 반쯤 남은 치킨버거와 콜라컵, 그리고 월간문학이 놓여져 있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선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둘은 어색한 침묵에 쌓여 있었다. 성재가 먼저 입을 뗐다.

“어제 전화로 한 말 진심은 아니겠지?”

“….”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성재도 역시 입을 다물어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둘을 감싸고돌았다. 1분 후 이번엔 소녀가 입을 뗐다.

“진심이에요.”

또다시 침묵…

“네가 그런 일 하는 것 나는 개의치 않아. 너의 미소가 내 것만은 아니니까.”

“그런 게 아녜요.”

“그럼 무엇 때문이야?”

성재의 음성이 높아졌다. 건너편의 소녀들은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여전히 재잘거리고 있었다. 또다시 침묵…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이미 감정이 식었어요.”

성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빤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난 그냥 나의 길을 가고 싶을 뿐이에요.”

성재는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패스트푸드점이 얼마나 부적절한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이는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소녀였다.

“먼저 갈게요.”

“혜원아.”

성재가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건너편 테이블의 소녀들도 듣지 못할 만큼 조그마한 부름이었다. 몸을 잠깐 일으켜 세웠으나 소녀가 문을 나서자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성재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건너편의 소녀들의 흔적도 사라지고 가게안도 많이 한산해졌다. 성재는 앞에 놓인 치킨버거를 한입 베어 먹었다. 콜라 잔의 컵을 떼어버리고 식은 콜라를 들이켰다. 눈을 들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백화점 광고판의 소녀는 돌아서서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들 만한 시원한 미소였다. 그녀의 미소는 성재만을 위한 미소가 아닌 만인을 위한 미소 – 또는 상품구매자를 위한 – 였다.

한동안 대형광고판을 바라보던 성재는 이내 체념의 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소설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한동안 대형광고판을 바라보던 성재는 이내 체념의 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소설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Grey Town

아침 회의가 끝나 모두들 서둘러 자리를 뜨고 있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반장이 김정훈에게 다가 왔다.

“이봐 김 형사 내 사무실로 잠깐 오게.”

김정훈은 5분후 반장의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의자에 앉아 있는 반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거기 앉게.”

김정훈은 반장이 가리킨 검정색 가죽의자에 몸을 기댔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네. 어느 소식을 먼저 듣고 싶나?”

“이왕이면 좋은 소식먼저 듣고 싶군요.”

김정훈이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반장은 그의 책상에 놓여있던 서류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김정훈을 바라보았다.

“상반기 업무적격테스트에서 자네가 서(署)에서 가장 성적이 좋군.”

“잘됐군요.”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부하직원을 반장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별로 기쁘지 않은 모양이군.”

“아뇨. 기쁩니다.”

그 대답역시 감동과는 거리가 먼 대답이었다.

“이제 나쁜 소식이네.”

다시 한번 반장은 김정훈의 표정을 살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업무부적격 판정이 내려졌네.”

“그거 재미있군요.”

“자네의 성적은 각 부문 모두 최상위이지만 심리테스트에선 꼴찌네. 이렇듯 기복이 심한 성적 때문에 업무부적격 판정이 내려진 거야.”

무표정한 김정훈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업무부적격 판정이란 흔히 내려지지 않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얼 말하는 겁니까?”

김정훈의 표정이 변하는 걸 눈치 채고서는 반장은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이 업계를 떠나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업계를 떠난다.

“우선 교육과에 가서 카운슬러와 상담을 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게.”

그의 키는 190cm는 족히 넘어 보였다. 얼굴은 거인증에 걸린 사람 모양으로 이마가 돌출되어 있었다. 카운슬러치고는 평안함을 주지 않는 – 오히려 불안감을 조성하는 – 얼굴이었다. 드디어 그 큰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실연(失戀)의 아픔이 있군요?”

“그게 중요합니까?”

“그걸 극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극복했소.”

문득 언젠가 여자와 비스킷을 나눠 먹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입에서 그녀의 입으로 비스킷을 넘겨주면서 바라본 그녀의 아름다운 눈썹이 떠올랐다. 그 미간사이로 거인 카운슬러가 비집고 들어와 빈정거렸다.

“극복하지 못한 것 같은데요?”

김정훈은 자신의 감정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카운슬러의 억지를 무시하기로 했다.

“실연으로 인해 망가진 당신의 감정체계가 업무수행에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형사도 인간이오.”

김정훈이 대답하자 카운슬러는 마치 미끼에 걸린 고기를 바라보는 듯한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뛰어난 형사는 인간이 아니오.”

“그건 또 웬 궤변이지?”

“경찰국장, 당신 반장 모두 인간이기를 거부했죠.”

김정훈은 문득 생기는 호기심에 상체를 바짝 당겨 앉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비단 당신처럼 감정체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뿐 아니라 좀더 상위직급으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이 치료를 받습니다.”

“치료?”

카운슬러는 마치 누가 이 말을 들을까 주위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찬찬히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감정제거수술.”

“감정제거수술?”

“형사에게 있어 감정개입은 치명적인 것이오. 이러한 사실은 형사정책연구원의 비밀프로젝트에서 보고되었고 이 보고에 따라 지난 16차 전국경찰국장회의에서 감정제거수술의 도입이 결정되었소. 그때 이후 모든 경찰간부는 이 수술을 받았고 그 결과는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소.”

김정훈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다시 상체를 의자에 한껏 기댔다.

“당신은 감정제거수술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따른 결과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날 저녁 바에서 마티니를 마시던 김정훈의 뇌리에서는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당신은 감정제거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수술날짜는 8월 둘째 주로 결정되었다. 반장은 옳은 결정을 내린 거라고 김정훈을 위로했다. 수술전날 저녁 김정훈은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므로 수술 전 2주일동안은 절대 금주하라는 의사의 경고도 무시한 채 그의 어두운 방안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락음악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웃집의 패기만만한 펑크족이 음악 감상 중인 모양으로 멜로디는 미약했으나 강한 비트가 건물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김정훈은 빈 잔을 채우며 지나간 추억들을 가슴에 떠올렸다. 4월의 잿빛하늘, 6월의 푸름, 9월의 낙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했던 12월의 여인을….

수술은 간단한 것이었다. 간단한 각막수술이 있었고 그 뒤에 앉은 채로 귀에 총한방을 발사한 것이 끝이었다. 총에서 발사된 아주 작은 크기의 캡슐이 뇌를 떠다니며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병원을 나선 김정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상쾌한 바람이 부는 더없이 쾌청한 하늘이었다. 그레이타운(Greytown)이라는 도시이름이 어색할 지경이다. 고개를 내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김정훈은 사람마다 어렴풋한 색깔이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수술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실적은 놀랄 정도로 향상되었다. 그가 1년 동안 공을 들인 거물 마약밀매업자를 잡아들이는데 성공했고 그 외에도 몇 건의 마약사건을 해결해냈다. 그는 경찰서에서 월마다 시행하는 ‘이 달의 형사’로 선정되었다.

어느 한가한 오후 점심식사를 마치고 반장과 김정훈은 반장의 사무실에서 한가로이 헤이즐넛을 즐기고 있었다. 반장이 피워 문 여송연 향기가 사무실안을 떠다니고 있었다.

“최근 자네 심리치료의 효과가 눈부시더군.”

“고맙습니다.”

“다음주에 화잇타운(Whitetown)에 가줘야겠네. 그 곳에서 대규모의 마약거래가 있을 거라는 정보가 있어.”

화잇타운, 그가 1년 전에 머물렀던 곳이다. 전 같으면 그 이름만으로도 아픔을 안겨주었을 그런 곳이다. 김정훈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매리제인(mary jane)건 말씀이시군요?”

“역시 벌써 알고 있었군.”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반장이 대답했다. ‘저 녀석은 너무 똑똑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눈에 비치던 김정훈의 모습에 붉은 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김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참에 뒤를 돌아보며 반장에게 물었다.

“반장님 눈에는 제가 무슨 색으로 보입니까?”

“물론 무색이네 자넨 부하직원일 뿐이니까. 자네는 내게 색깔을 느끼나?”

“저도 물론 무색입니다.”

하며 문을 닫고는 나가버렸다.

사무실로 향하는 김정훈의 눈에는 온통 붉은 색뿐이었다. 수많은 범죄자들, 창녀들, 몰염치한 들의 몸은 붉은 색을 뿜어내며 경찰서안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10월의 첫째 주 수요일 오후 화잇타운에 도착한 김정훈은 그녀가 머물고 있는 – 혹은 그녀가 머물렀던, 그러나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다 – 빌딩의 1층에 있는 스낵바에서 해물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파스타를 입안에 우물거리면서 밖을 바라본 김정훈의 눈에 한 남루한 밤색코트 차림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사이 무색이던 그녀의 모습이 푸른색으로 변해가는 걸 느꼈다.

‘그래 저 여자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여자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김정훈은 지금이 아니면 남은 평생 그녀와 말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예언적인 직감이 떠올랐다. 그래서 스낵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챘다.

“너.”

하고 김정훈이 말했다. 그가 팔을 낚아채는 바람에 여자는 몸을 돌려야 했다. 그녀는 짧게 ‘오랜만이군요.’라고 대답했다. 김정훈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강렬한 코발트빛 때문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김정훈의 양복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익숙한 동작이었다. 양복 바깥으로 나온 그녀의 손에는 김정훈의 리볼버가 쥐어져 있었다. 김정훈의 눈에는 방아쇠를 당기는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붉은색이 순식간에 그녀의 팔, 어깨, 가슴으로 퍼져나가 그녀의 온몸이 붉은색으로 보였다.

김정훈의 하얀 셔츠역시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어이없게도 과일가게 문 앞에 진열된 오렌지 상자위로 넘어졌다. 오렌지가 여기저기 굴러 떨어졌다. 여자는 총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White Town

눈을 떴다. 흘낏 블라인드 너머 창밖을 바라본다. 늘 그렇듯이 하늘은 옅은 잿빛이다. 습관적으로 침대 맡에 놓여 있는 박하담배를 꺼내 문다. Salem. 누운 채로 가만히 허공에 연기를 날려 보낸다. 시계 초침소리가 들린다. 째깍 째깍 째깍 다시 담배를 한껏 깊이 들이마셨다. 몸속을 온통 담배연기로 채워 버리겠다는 듯이…. 훅 뿜어내는 순간 의식하지 못했던 소리가 다시 귓속을 이명(耳鳴)시킨다. 째깍 째깍 째깍….

여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 뇌 아래쪽에 침전되어 있던 기억의 찌꺼기가 또다시 흔들려 뇌 속을 부유하기 때문이다.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담배를 두 개비나 피운 끝에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예상했던 바대로 또다시 상처투성이의 기억이 불현듯 뇌 속을 직립보행 한다.

여자는 애써 빨라지는 심장박동수를 진정시키며 외투를 걸쳐 입었다. 때는 이른 여름이라 할 수 있는 6월 말이었지만 여자는 여전히 심한 한기를 느꼈다. 임신중절후 산후조리가 부실한 탓에 냉증(冷症)에 걸렸다는 것이 의사의 진단이었다. 여자는 내켜하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섰다. 목구멍에 먹을 것은 처넣어야겠기에….

여자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건물 일층에 위치한 스낵바에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입속에 구겨 넣었다. 맞은 편 식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카페오레를 마시며 조간지의 정치면을 읽고 있었다. 창밖에는 누추한 옷차림의 홈리스(homeless)가 멀거니 서서 안쪽을 바라보다 멍청한 걸음걸이로 저만큼 가버렸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가로수 잎이 여기저기로 흩날리고 있었다. 비라도 올 기세였다.

여자가 스낵바를 나서자 은색 비행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얕은 하늘을 날아갔다. 남쪽으로 3km 내려가면 화이트타운(whitetown)공항이 있다. 항상 잿빛 날씨인 이곳에 화이트타운이라는 명칭이 붙다니 도대체 모순이다.

여자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우울한 – 냉랭한 습기를 머금은 – 바람을 맞았다. 식사를 하고 있는 사이 온도가 많이 떨어져 여자는 더욱 한기를 느꼈다. 스낵바에서 사온 비스킷을 한 조각 꺼내 입에 물었다. 여자는 문득 언젠가 비스킷을 입에 물어 자신의 입으로 옮겨 넣던 남자의 입을 떠올렸다. 바로 눈앞에 보이던 남자의 미소속의 주름진 눈가가 떠올랐다.

옥상 난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고소공포증이었다. 언젠가 남자는 그런 그녀를 억지로 떠밀어 번지점프를 시킨 적이 있다. 사랑의 확인이라면서 둘이 같이 뛰어내리자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 때 허리를 삐끗하여 일주일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주일동안 지속된 공포감은 별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고요와 적막 속에서 평화를 느끼고 있다. 이제야말로 중력에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은 상상이 들었다. 옥상은 칠층 높이로 제법 높이가 있었다. 비스킷의 마지막 찌꺼기가 식도로 넘어간 순간 그녀는 앞으로 힘없이 쓰려졌다. 마치 침대로 쓰러지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여자가 눈을 떴을 때 억울해 보이는 눈썹을 가진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떼려 했지만 갑자기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신음을 낼 뿐이었다. ‘억지로 말하지 마요’라고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복장이나 벽의 색깔로 보아 병원이겠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이 곳은 병원 이예요’라고 남자가 그녀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자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한 채 아래로 수직 하강하였으나 몸이 닿은 곳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대신 한 건물에 사는 한 퇴역군인의 밴(van) 지붕이었다. 후에 노인은 시(市)를 상대로 그의 애마(愛馬)를 잃은 것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지만 법원판결에 의해 기각되었다.

남자 – 인턴 내지 레지던트로 추정되는 – 는 며칠 동안 틈나는 대로 그녀에게 와서 편의를 봐주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늑골이 두대 부러졌다는 것과 전치 2개월의 진단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일주일째 되던 날 남자는 그녀에게 자살동기가 – 그녀의 행동을 자살시도였다고 인정한다면 –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비스킷 때문에 무게중심을 잃었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그날 오후 학교선배인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여자에 대해 상의했다. ‘무언가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은 듯 한데요. 상담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남자가 운을 뗏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에게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만큼 한가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후배의 부탁을 일축해버리려는 하려는 찰나 최근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치료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뇌작용의 바이너리(binary)化.

‘부상이 어느 정도 치유되면 이쪽으로 한번 데려와 봐.’

여자가 그 뻔뻔한 정신과 의사를 처음 만난 건 그녀가 입원한지 한 달 열흘이 지난 후였다. 의사는 대뜸 ‘당신 같은 미인이 왜 자살을 하려 했지?’라는 그의 직업적 소양을 의심케 하는 질문을 했다. 그는 그녀와 약 30여 분간에 걸쳐 단문식 대화를 나누고는 여자를 임상실험의 대상으로 결정해 버렸다.

치료는 일주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동안 여자는 여섯 번의 약물투여와 세 번의 최면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그녀가 말한 뇌 속의 침전물이라는 단어에 특히 역점을 두어 침전물 제거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입원한지 한 달하고도 이십일이 지난 후 퇴원했다. 레지던트 – 억울한 눈썹을 가진 남자는 레지던트로 밝혀졌다 – 는 그녀에게 들꽃 한 다발을 퇴원선물로 안겨주었다. 그녀는 들꽃을 받아 들고 ‘꽃이로군요.’라고 짧게 말했다. 레지던트는 무표정한 그녀의 한마디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방안에 혼자서 멍하니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느끼던 망연한 상실감은 더 이상 느끼지 않았다. 다만 어두운건 날이 흐리기 때문이라는 적실한 진단만을 내렸다.

이튿날 잠에서 깨었을 때 여자는 이제 확실히 뇌 속의 침전물이 제거된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도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창밖을 바라보니 전날 내리던 비가 개고 하늘은 쾌청했다. 그녀는 ‘비가 온 다음날은 음이온이 발생한다. 음이온은 빗방울이 땅에 부딪히면서 발생하는데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상쾌하게….’라고 중얼거렸다.

대충 얼굴을 물기로 추슬러 잠기운을 떨어낸 후 여자는 피씨앞에 앉았다. 그동안 미루어 졌던 번역작업을 재개하기 위해서다. 출판사의 배려로 일거리를 잃지는 않았다. 그녀가 번역해야 하는 책은 J.D Salinger의 Franny and Zooey였다. 그녀는 책을 펴들고 읽어 나갔다.

10여분을 씨름한 끝에 그녀는 번역작업을 포기했다. 번역이 불가능했다. 단어가 전혀 맘에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sympathetic, afraid, sorry 등 온갖 단어 자체가 지닌 느낌이 그녀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었다. 그 대신 sympathetic은 형용사와 명사가 있고 sympathetic ink, sympathetic nerve와 같은 관련단어가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 달 후 그녀는 세 들던 집을 나와야 했다. 일거리를 잃은 후 수입이 없어진 그녀는 좀 더 싼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그 집에서마저 나와야 했다. 예금 잔고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불행을 예정된 수순인양 무감동적인 얼굴로 받아 들였다. 그리곤 당연하다는 듯이 지하철 한구석을 차지하고는 홈리스의 집단에 편입하였다.

10월의 어느 오후 그녀는 유일한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밤색 외투를 걸친 채 언젠가 그녀가 머물렀던 건물의 일층에 위치해 있는 스낵바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았다. 안쪽에서 남자가 해물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입을 우물거리면서 밖을 바라보던 남자는 깜짝 놀라 여자를 바라보았다. 둘은 약 5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10초 후 스낵바의 문이 열리더니 남자가 뛰쳐나왔다. 남자는 여자에게로 곧장 뛰어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너.>

하고 남자가 말했다. 남자가 그녀의 오른팔을 낚아채는 바람에 여자는 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는 짧게 ‘오랜만이군요.’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왠지 묘한 얼굴표정을 하고 있었다. 쥐색 슈트(suit)에 노란 타이 차림, 왼쪽 가슴이 불룩하다.

여자는 갑자기 그의 양복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사향고양이가 물고기를 잡을 때처럼 재빠른 동작이었다. 양복 바깥으로 나온 그녀의 손에는 리볼버가 쥐어져 있었다. 연속동작으로 방아쇠를 당기기까지는 찰나였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은 공포영화 한 한편을 감상하는 동안 지을 수 있는 모든 표정을 담고 있었다.

남자의 하얀 셔츠는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남자는 어이없게도 과일가게 문 앞에 진열된 오렌지 상자위로 넘어졌다. 오렌지가 여기저기 굴러 떨어졌다. 여자는 총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오렌지는 과일의 한 종류이며, 오렌지 쏘싸이어티(orange society)는 18세기 아일랜드 신교도가 결성한 비밀결사. 피? 피는 혈통, 열정, 범죄 등을 의미 또는 은유한다.’

erehwon [완]

“대체! 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앤디가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 질렀다. 그리고 선장을 쳐다보고는 그에게 말했다.

“스즈끼 선장 당신이 범인이지? 당신이 존이 죽던 날 그 복도에 있었지?”

스즈끼는 말없이 장비실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이었다.

“순이 이제 그만 하지.”

스즈끼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순이를 바라보았다. 앤디는 의아한 눈초리로 순이와 스즈끼 선장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뭐야 존을 죽인 사람이 순이야?”

“존을 죽인 것은 나다.”

선장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존을 승무원으로 뽑은 것도 사실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스즈끼가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앤디가 소리쳤다.

“그런데 그는 순이 너까지 함께 승무원에 넣어줄 것을 요구하더군. 나는 승낙했다. 나는 선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놈이다.”

순이는 슬픔과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선장을 보았다.

“그 녀석은 양성애자였다. 나는…. 나는 그의 또 하나의 연인이었다. 그가 순이 너의 애정을 인질로 삼았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러했지.” 스즈끼는 힘에 부치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새 산소의 농도도 희박해져 가고 있음이 호흡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왜 죽인건데?” 앤디가 다그쳤다.

“앨리스의 일기에도 나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순이, 그리고 나를 이용하고도 또 앨리스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 날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듣고 있었고 앨리스가 떠나자 그에게 가서 따지다가 이성을 잃었던 거야.”

이제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여태껏 지휘자로서 나름대로 지켜오려 노력한 권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까지 죽인거야?” 앤디가 또 다시 다그쳤다.

스즈끼는 문득 깨달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앤디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뒤에는 순이가 있었다. 스웨덴제 군용 칼을 손에 들고 있는 순이가… 번개처럼 앤디를 지나쳐 온 순이는 스즈끼의 목에 칼을 쑤셔 넣었다. 미처 앤디가 말릴 틈도 없이…. 빨간 피가 솟구쳐 나왔고 고통에 찬 표정의 스즈끼의 단말마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앤디는 뒤늦게 순이를 거칠게 떼어 내어 밀어붙였다. 순이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앤디는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도 않았다. 처참한 표정만 지으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네가 그럼 나머지 사람들을? 왜? 왜?”

“복수했을 뿐이야. 존의 죽음에 대한… 너희들 모두 존의 죽음을 비웃었고… 처음엔 미구엘이 그를 미워한 미구엘 인줄 알고… 그런데 죽이고 나니 아닌 것 같고… 이번엔 앨리스가 그렇다고 네가 선장과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평소에 날 벌레 취급하던 그 년이 범인이라 생각했지.”

앤디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의 섣부른 추측이 죽음을 불러온 계기가 되다니….

“그렇다면 챈은 대체 왜?”

“내 방에서 칼을 발견하고는 나에게 와서 설교조로…. 나를 달래려고…. 이미 엎지러진 물인데….”

“너를 위해주었던 챈을 죽이다니 대체 제 정신이야?” 앤디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순이는 바닥에서 자세를 바꿔 앉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제 정신으로 보이니 지금?”

앤디도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살인 동기는 진정 무엇일까 하는… 존에 대한 복수?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 아니면 산소결핍으로 인한 정신착란?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미지의 원인?

[에필로그]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몸살을 앓던 지구는 사실 erehwon 호가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선의 기능이 마비되고 얼마 안 있어 핵전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erehwon 호는 그 뒤로도 – 둘이 남은 음식으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았던 며칠 동안도 – 우주를 정처 없이 유영하였다. 그들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유영을 계속해나갔다. 실질적으로 앤디와 순이, 그 둘이 우주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두 명의 인간이었다.

erehwon [3]

챈, 앤디, , 미구엘, 앨리스, 순이, 스즈끼

그날 저녁 – 시간상으로는 저녁 – 휴게실에서는 앤디와 챈이 앉아 있었다.

“역시 존이 앨리스에게 치근댔더군.”

챈이 말을 꺼냈다.

“그걸 어떻게?”

“그녀의 일기를 뒤져봤어.” 앤디가 할일을 챈이 한 셈이다.

“7월 3일 그녀의 일기에 적혀있더군.”

그러면서 일기장을 앤디에게 건넸다.

앨리스의 일기 2057년 7월 3일

Son of bitch!
거만한 녀석이 성욕까지 강하다. 어디다대고 사랑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대는지… 어차피 천박한 동양년이랑 놀아나는 녀석이라 신경도 안 썼는데 기분 더럽다. 그런데 방을 나섰을 때 복도의 꺾어지는 부분으로 얼핏 그의 모습을 본 것 같다.

앨리스의 일기 2057년 7월 4일

그는 자못 태연했다. 그가 범인일까? 상관없다. 이따위 살인 게임.

어떤 남자

“어떤 남자가 있었군.” 앤디가 중얼거렸다. 챈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적어도 앨리스의 일기를 토대로 보자면 그녀는 존의 범인이 아닌 것 같고 복도에 있었다는 그 남자. 그가 의심스러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챈이 말을 이었다.

“이제 남자는 셋이야. 미구엘이 범인이 아니었다고 가정하면, 그리고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제 범인은 너하고 선장 중 한명.”

앤디는 그 말을 듣자 벌떡 일어섰다. 챈의 말에 화가 나 보인 반응은 아니었다. 서둘러 휴게실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선장의 숙소가 아닌 순이의 숙소였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그녀를 발견하자 살짝 안도의 숨을 쉬었다. 순이를 그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래?”

뒤따라오던 챈이 대신 대답했다.

“이 녀석이 그냥 네가 걱정되었나봐.”

순이는 살짝 미소지었다.

“걱정해주니 고맙네.”

둘은 살짝 눈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복도를 걸으며 둘은 말없이 눈빛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둘은 선장의 숙소로 향했다. 승무원의 숙소와 달리 조종실 쪽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순이의 일기 2057년 7월 7일

휴게실에 놓여있던 앨리스의 일기를 보았다. ‘그’는 누구일까? 그가 존을 죽인거다.

스즈끼의 일기 2057년 7월 7일

앤디가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누가 살인자든 간에 더 이상 살인하지 말자고 했다. 이유는 죽음을 대하는 것이 피곤하다는 것. 나, 챈, 앤디는 서로 약속했다. 누가 범인이든 간에 더 이상 죽이지 말자고. 희한한 도원결의였다.

또 하나의 죽음

이 도원결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챈이 죽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장비실에서였다. 여태의 죽음과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칼이 아닌 둔기로 당했다는 점. 물론 여태의 사망자를 죽인 칼도 여전히 소재불명. 셋은 이제 기진맥진해져 있을 따름이었다. 죽이는 것도 이제 관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범인은 어쩌면 우주선을 떠도는 죽음의 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