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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나나 공화국 이야기

1983년에 국무원은 「도시 비농업 개체 공상업(工商業)의 몇 가지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도시의 개체 공상업은 7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할 수 없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저술에 근거한 규정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해 8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가상의 공장을 예로 들었는데, 중국 당국은 이를 ‘노동착취’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중국 정부가 보기에 자영업이 7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하면 사영기업이 되고, 사영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개혁과 개방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I, 조영남 지음, 민음사, 2016년, p228]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이념적 경직성 내지는 이념적 조악함을 설명하는데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보았다. 언뜻 보아도 이는 자본론을 마치 종교경전 마냥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직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큐란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감싸고 순종을 강조하는 무슬림의 해석이나, 성경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극악하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도의 해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경전을 지킴으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는 기여한 바는 없으나 그 교리를 강요한 이의 권력이나 도덕적 순결성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한 채 시장경제를 성공리에 –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 도입하여, 오늘날 미국을 위협할 다음 국가로 평가받는 등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단순히 인용문에서처럼 「규정」이 교조적으로 끝까지 관철됐더라면 달성하지 못했을 위치라 할만하다. 중국이 경제에 있어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유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추동했던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정치체제는 유지하면서도 경제체제는 바꿀 수 있다는 – 1992년 10월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라 할 수 있다.1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 계획경제”라는 도식을 포기한 것은 여러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계획경제/자원동원경제는 사실 戰後 경제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하는 대다수 국가들에서 체제와 관계없이 시도했던 개발전략이랄 수 있다. 혁명 후의 소비에트가 그랬고, 대공황을 겪은 미국이 그랬고, 10억 인구의 중국이 그랬고, 도시국가로서 살아남아야 할 싱가포르가 그랬고, 북괴와 체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남한이 그랬다. 국가 스스로가 하나의 거대기업으로 기능하는 것은 일종의 戰時경제체제랄 수 있고 체제경쟁에 직면한 많은 나라들은 어느 기간까지는 계획경제 요소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2


“제국주의 전쟁의 음모를 분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아가자!”(출처)

하지만 경제가 전간기와 질적으로 다른 고도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상명하달식의 행정기능만으로 경제 시스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됐다. 빅데이터 혹은 인공지능이 진정 시스템 전체의 원인과 결과를 예측하여 투입-산출을 조정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시장에서의 개별 경제단위가 경쟁하며 우열을 평가받고 진화-퇴보를 거듭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더 좋은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는 경제발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역할에서 “정의로운 심판”의 역할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과 합당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공유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 트럼프의 행보는 역사의 퇴보를 초래할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느니, 그 재원을 멕시코로부터의 수입관세로 마련하겠다느니 하는 경제원론에도 안 맞는 소리를 해대는 것은 가장 천박한 수준의 “가부장적 아버지” 역할이다. 더욱 불행하게도 트럼프는 일당독재를 통해서가 아닌 대의적 민주제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라는 점이다. 즉, 그는 선거를 통해 일당독재 지도자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본을 얻게 됐지만,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집단적 논의를 통해 시행착오를 수정할 정치적 의지는 가지지도 가지려 하지도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기간산업과 핵심 산업(예를 들면 금융업)은 공공적 기능이 관철되도록 “사령탑”적인3 통제를 강화하되 전 세계적 시장경제는 정의롭게 유지되도록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술이 잘못된 시장경제는 경제격차와 이념적 편견의 격차만 벌려놓아 보호주의, 인종주의, 독자주의 노선만을 강화시켰고, 그 가장 흉악한 결과가 트럼프의 당선이다. 그는 개별기업에 입지를 지정하고, 도드-프랭크법 규정을 무력화시키고, 이민을 통제한다. 7인 이하의 사영기업 허용이 희극이라면 이번 버전은 비극인가?

80년대 중국이 일당독재 바나나 공화국이었다면 현재의 미국은 민주적 바나나 공화국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변명으로써의 예술의 효용성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 주연의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라는 영화가 있다. 부도노동자인 테리 멀로이(Terry Malloy; 말론 브랜도)가 항구의 부패한 노조의 끄나풀로 일하다가 양심과 사랑을 위해 불의에 맞선다는 내용으로, 강렬한 스토리텔링,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충격적인 사회적 메시지 등에 힘입어 미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에 늘 꼽히는 작품이다.

한편 이 영화의 좀 더 깊은 속내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감독과 제작년도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이 영화를 감독한 이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덴의 동쪽’ 등 작품성과 상업성 양쪽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은 엘리아 카잔(Elia Kazan)이다. 제작년도는 1954년이다. 감독과 제작년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감독이 그 이전인 1952년에 겪은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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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a Kazan” by Unknown – http://mythicalmonkey.blogspot.com.au/p/katie-bar-door-award-nominees-and.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엘리아 카잔

1952년 엘리아 카잔은 당시 미국사회를 광풍으로 몰아넣은 매카시즘의 진원지인 하원비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HUAC)에 증인으로 참석해야 했다. 이 자리에서 카잔은 자신이 16년 전에 공산당 당원이었음을 밝힌다. 당시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처음에는 거부하다, 결국 Group Theater의 멤버였던 공산주의자 여덟 명의 이름을 댄다.

이 일로 인해 카잔은 밀고자로 낙인찍힌다. 아마도 카잔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 ‘워터프론트’는 2년 후에 제작된다. 한편 흥미롭게도 영화의 아이디어는 원래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것이었지만 아서는 카잔의 배신을 비난하며 대본 집필을 거부하고, 그 작업은 카잔과 함께 HUAC에 협조했던 버드 슐버그(Budd Schulberg)가 맡게 되었다.

영화 줄거리를 보자. 항구의 부패한 노조는 그들의 방해자를 살인도 불사하며 제거한다. 멋모르고 동참했던 테리는 차차 사건의 실상을 알고 갈등한다. 노조가 간부였던 친형마저 죽이자 마침내 청문회에 나가 진실을 증언한다. 이로 인해 밀고자로 욕을 먹지만 노조 위원장 자니 프렌들리(Johnny Friendly)와 담판을 지으며 영웅으로 거듭난다. 뭔가 이야기가 겹치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명백히 카잔 자신의 심정을 테리에게 투영한 것이다. 자니는 어쩌면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아서를 설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카잔은 자서전 ‘인생(A Life)’에서 ‘워터프론트’가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석권한 날 “복수의 달콤한 맛을 봤고, 나를 비판하는 놈들이 처박혀서 엿을 먹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기분”이었다고 썼다. 통쾌한 복수극인 셈이다.

이 때문에 영화가 비판받기도 했다. 몇몇 평론가들은 결국 좌익을 범죄자로 치부하는 반공영화였다고 비판하거나, 영화를 자기 변호수단으로 쓴 사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평론가 수잔 손택(Susan Sontag)이라면 카잔을 옹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예술작품은 그것이 예술작품인 한 어떤 것도 옹호하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는 숭고한 중립성을 획득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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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Waterfront poster” by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84aa1bc0.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On the Waterfront“>Fair use via Wikipedia.

이 반공영화스러운 포스터를 보라~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무엇이건 간에 감상자에게 전해지는 그 쾌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예술작품이 반인륜적일 경우에도 보존할 가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묘한 문제는 그것이 가지는 영향력이 현실세계에 막강할 경우에 발생할 것이다.

한편, 여기 다른 영화가 있다. ‘굿나잇 앤 굿럭(Good Night, and Good Luck)’. 2005년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감독한 이 영화는 카잔과 아서가 반목했던, 조지프 맥카시(Joseph McCarthy) 의원이 활개 쳤던 당시를 그리고 있다. 맥카시즘의 공포 분위기에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시절, 용기 있게 맞선 CBS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에 관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에드워드는 동료 프레드 프렌들리(Fred Friendly; 조지 클루니)와 함께 ‘사람 대 사람’이라는 쇼를 통해 맥카시즘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들이 옹호했던 것은 공산주의나 “사상의 자유”라기보다는, 한 개인을 단죄할 때에는 정해진 절차와 증거에 근거해야 한다는 인권적 차원에서의 저항이었다. 우리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적 발상이다.

에드워드 머로우의 실제 방송 장면

이 영화를 ‘워터프론트’와 함께 놓고 보면 흥미롭다. ‘워터프론트’의 영웅은 테리 – 청문회에서 용감히 공산주의자를 고발한 카잔 – 이고, ‘굿나잇 앤 굿럭’에서는 공산주의자 사냥에 나선 맥카시에 대항한 에드워드다. ‘워터프론트’에서의 악의 세력은 카잔을 밀고자라 비난한 항구의 노동자들인데, 에드워드는 거꾸로 그들이 정당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워터프론트’를 네거티브 필름처럼 색깔을 바꾸어 볼 때 두 영화는 잘 포개진다. 악당 자니가 맥카시, 테리가 맥카시에 저항한 에드워드일 경우 두 영화의 영웅주의는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둘 간의 가치를 전복한 것이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있어서, 적어도 현재까지의 역사의 평가에 따르면 조지 클루니 보다는 엘리아 카잔이라는 점에서 큰 이의는 없을 것이다.

‘워터프론트’에서의 악인들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현실에서의 악인들은 – 몇몇은 간첩행위로 고발당했음에도 – 그렇지도 않았는데 정당한 절차 없이 단죄 받았던 것이 차이다. 불의(不義)에 맞서는 행위가 용기 있는 행위임은 두 말할 나위 없지만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청문회에 가서 공산주의자라 고발하는 행위가 불의에 맞선 행위라 칭해지긴 곤란한 일이다.

앞서 말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문제’에 대해 말해보자. 이 이슈는 세기말까지 헐리우드를 짓누르는 민감한 주제였고 어쩌면 여전히 그렇다. 체제순응적인 아카데미조차 한참을 머뭇거리다 1999년에야 엘리야 카잔에게 평생공로상을 준 것이 그 반증일 것이다. 당시 배우들의 반응도 다른 공로상과는 달리 엇갈렸다. 어떤 이는 기립박수를, 어떤 이는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엘리아 카잔의 아카데미상 수상 장면

당시 워렌 비티와 메릴 스트립 등은 기립박수로 환영했지만, 에드 해리스와 닉 놀테 등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그 후 서로의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더 중요한 점은 조지 클루니 등이 여전히 당시를 소재로 영화로 만들만큼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그리고 반대 측에서는 부지런히 당시 고발당한 이의 간첩행위를 들추어내고 있고.

우리 역사에도 엘리아 카잔과 비슷한 행동을 한 이가 있다. 남로당 당원으로 몸담았다가 동료를 고발하고, 결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그다. 박정희가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엘리아 카잔이 미국사회에 미친 영향보다 훨씬 크고, 스토리는 ‘워터프론트’보다 훨씬 방대하다. 그 여파는 이번 대선까지 미치고 있다. 거기에다 그 스토리에는 비극적이게도 ‘워터프론트’와 같은 예술도 없다.

예술을 자기변명의 도구로 쓴 엘리아 카잔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을 것 같다.

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큐비즘, 기계, 건축, 공산당, 서민적 레크리에이션 등등. 우리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큐비즘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인 페르낭 레제(Jules Fernand Henre Léger)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나열해보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 중 하나로는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립 퐁피두 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2008년 한국에서 열린 ‘퐁피두 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이 열릴 때에 국내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작품이 앞서 나열한 페르낭 레제의 그림에 관한 키워드가 포괄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Les Loisirs. Hommage à Louis David
huile sur toile de Fernand Léger – 1948-1949
Pari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 Centre Georges Pompidou
© ADAGP Paris 2004
© CNAC / MNAM – distr : RMN / Jean-François Tomasian

1881년 생인 페르낭 레제는 건축을 공부하다 1910년경부터 큐비즘 운동에 참가, 피카소, 로베르 들로네 등과 함께 적극적인 추진자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위대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그는 기계문명, 건축, 추상회화의 접점을 모색하는 그림을 즐겨 그렸다. 1919년 그린 ‘도시’라는 작품을 보면 이러한 경향을 잘 목격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기계문명에 대해 낙관적이었고 이를 즐겨 표현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기계문명과 기술진보에 대해 낙관적이란 점에서 목가적인 反기계문명론자와는 다른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이 유별날 것은 없다.

그의 작품만의 특징을 하나 들자면 유난히 원통형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기계 플랜트에 들어가는 각종 배관을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의 경향에 대해 한 평론가는 큐비즘이란 단어를 재밌게 비틀어 튜비즘(Tubism)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런 레제의 원통형에 대한 집착은 구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가 그린 사람들은 원통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사람들은 뚱뚱해 보인다기보다는 튼튼해 보이는 골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뚱뚱한 사람을 즐겨 그렸던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다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작품을 맥락 없이 전시장에서 만난다면 그저 평범한 남녀가 여가를 즐기는 모습쯤으로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술진보로 노동자들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담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작품이다. 예의 원통형 몸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천국” 미국에서 유입된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하고 하이킹을 즐기고 있는데, 기술진보로 직장에서 잘리는 대신 여가를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그린 사회는 이미 이상적인 노동자 중심의 사회가 전제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퐁피두 센터의 설명에 따르면 레제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노동자를 위한 유급휴가를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휴가는 이전까지 귀족이나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잘 느낄 수 있다. 프랑스 노동자는 마티뇽 협정 이전까지는 유급휴가를 즐길 수 없었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가와의 타협, 기술진보로 인한 사회잉여의 증가 등이 노동자의 여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래서 자연히 이 작품에는 혁명까지는 아니어도 사회개혁을 통한 노동자 세상에 대한 낙관이 담기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가 오늘날 당연시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노동자의 유급휴가는 – 사실 잘 알다시피 그마저도 여전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그렇듯이 이렇게 지난한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 그리고 레제와 같은 예술가들의 선전선동에 의해 기틀을 다져온 것이다. 일단 무엇이든지 가지게 된 자들은 웬만해선 기득권을 잘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평론가는 그의 작풍을 “사회주의 이론의 결과이되, 전투적인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적인 것이라 평했는데, ‘여가’는 이러한 평가에 잘 어울리는 작품일 것이다.

네팔 국민에게 축하의 박수를

가난한 이들, 특히 가난한 나라에 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독립된 국가를 가지는 것이나 왕정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것인가? 이때 그 자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억압자들에게 저항의 외침을 부르짖을 수 있는 자유인가 아니면 굵어죽을 자유인가?

이러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언론들은, 그리고 자연스럽게 많은 국민들은 대표적인 국가로서 티베트를 주목하고 있다. 국제화 시대에 걸맞게 오늘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올림픽 성화 봉송 의식과 맞물려 티베트 사태를 둘러싼 다국적 소요가 일어났다고 한다. 맹목적 민족주의를 비롯한 다소 복잡한 이념과 종교적 신념이 결합된 희한한 사례라 할만하다.

한편 우리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는 사이 – 고의적 무시에 가까울 것 같은데 – 중국과 인접한 또 하나의 분쟁지역인 네팔에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10년간의 내전을 끝내고 지난 4월 10일 치러진 선거에서 어이없게도(!) 시대착오적인 마오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네팔공산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제3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연대 네팔공산당이다. 그야말로 빨갱이 판이다.

일단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나 줏어 듣기로 마오주의자 네팔공산당은 제도권에 진입한지 이제 2년밖에 안된 정당이라고 한다.(1994년 정치적 해빙기에 한번 주류로 떠올랐으나 이후 탄압받았다 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태껏 왕정종식을 위한 폭력투쟁 노선을 걷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정당이 총 601석의 제헌의회 의석 중 3분의 1이 넘는 217석을 차지했다.

무엇이 이러한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중국의 붉은 별’에서 에드가 스노우가 칭송하던 중국 공산당의 인민에 대한 애정과 헌신을 네팔 공산당이 충실히 재현한 덕택일까? 아니면 국민의 왕정종식에 대한 강한 열망을 받아줄 유일한 대안세력이었을까? 아니면 치솟는 물가와 빈곤에 따른 사회주의적 대안의 요구일까?

어느 하나일수도 있고 복수의 답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유일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세 번째 상황이 인민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역시 혁명은 – 폭력혁명이든 선거혁명이든 – 숭고한 정치적 의지보다는 굶주린 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네팔은 국민의 30% 이상이 빈곤층인 절대빈곤의 국가이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는 왕이 아무리 자비롭고 자시고 간에 절대왕정은 빈곤해결의 답이 아닌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일단 자신들의 문제를 자결권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이라는 점에서는 적어도 티베트나 팔레스타인보다는 나아 보인다. 역시 미국이 네팔공산당을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있기는 했고 네팔 정부에게 무기를 제공하기는 했다지만 티베트나 팔레스타인에서와 같은 직접적 군사행동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또한 계급정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는 점도 티베트보다는 나아 보인다.(나는 독립 티베트의 지배계급이 종교지도자들이 될 것이라면 그것 또한 암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앞날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오마주인지 패러디인지 공산당이 집권했으나 공산당을 지지해줄 프롤레타리아가 없다는 20세기의 우울한 후진국형 공산혁명이 21세기에도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투기자본이건 건전한 자본이건 간에 이들에게는 외세의 도움 없이는 경제 자체를 지탱시키는 것조차 어려워 보인다. 이를 즉시 간파한 네팔공산당은 외국자본의 지속적 유입을 장려할 것이고 이를 보호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무늬는 공산당이고 속은 후진국형 자본주의인 또 하나의 기형국가로 당분간은 지내야 할 공산이 커 보인다. 너무 냉소적일지 몰라도 계급억압적인 계급정당이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달리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다. 베네수엘라처럼 석유라도 있어야지 비빌 언덕이라도 있을 텐데 말이다. 네팔공산당과 네팔 국민에게 던져진 어려운 과제다.

그렇더라도 어찌되었든 자주적으로 해묵고 시대착오적인 절대왕정이라는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고 근대적인 국가를 탄생시킨 네팔의 국민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다. 예전에 우리나라 이주노동자의 사연을 전하는 중에 네팔의 노동자의 사연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는 네팔의 왕족이었으나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 활동비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아마 이번 선거결과에 그도 만족하고 한껏 웃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