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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노동관

인류가 향유(享有)하고 있는 고도의 물질 문명(物質文明)과 정신 문화(精神文化)는 그 모두가 사실상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며, 근로자의 노동력이야말로 국가 사회를 발전시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하고도 존귀(尊貴)한 원동력(原動力)이라 할 것이다. – 66.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1

흥미롭게도 박정희 前 대통령의 이 발언만을 놓고 보면 그가 노동가치론자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일찍이 윌리엄 페티, 존 로크 등의 사상가들이 주창하였고 고전경제학의 거두 아담 스미스가 이론적으로 정립하였으며 칼 맑스에 의해 “반역의 경제학”의 재료로 쓰였던 노동가치론이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사장님의 치사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다.

노동을 천(賤)하게 여기고, 근로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가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인 것이다. 특히 조국 근대화의 드높은 기치(旗幟) 아래 한마음으로 뭉쳐서 모든 국민이 생산과 건설과 수출에 총진군(總進軍)해야 할 이 마당에 우리 근로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사명은 실로 막중(莫重)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66.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대통령의 앞서의 발언은 노동가치론의 이론적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바로 이 주장을 위한 말머리로 꺼낸 것 같다. 즉 “노동을 천하게 여기고 노동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적 풍토를 나무라기 위해서 모든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노동력의 산물임을 강조한 것이다. 노동이 없었으면 그 모든 것이 없었을 것이기에 “근로자”를 “공돌이”라 비웃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만이 “생산과 건설과 수출에 총진군”할 수 있다.

만일 노임을 노동 생산성을 훨씬 넘게 비싸게 올린다고 생각해보자. [중략] 상품의 가격이 따라서 올라가게 될 것이고, 상품 가격이 오르면 수출 증대가 어려워 질 것이다. [중략]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업자(失業者)가 늘어나고, [중략] 결국 얼마 안 가서 자연적으로 근로자 여러분의 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 70.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어감이 조금 이상하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는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고 “근로자의 존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근로자의 임금은 노동생산성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임금이 오르면 결국 근로자의 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고 한다. 익숙한 수출주도형 “先성장 後분배” 논리이자 “트리클다운 효과” 논리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서구(西歐)의 여러 나라에서는 노사(勞使)의 협조 문제가 제기되었고, 오늘날 발전 도상에 있는 신생 국가(新生國家)들은 성장과 균형된 배분(配分)이라는 문제가 때로는 서로 상충(相衝)되는 현실 문제로서 대립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 67.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주창되는 “先성장 後분배” 의 논리다. “먼저 파이를 키워야 나눠먹을 것이 있다”는 “트리클다운 효과”의 논리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노선은 명확하게 저임금을 기조로 하는 수출주도를 통한 경제 발전을 최우선시하는 노선이었다. 상품경쟁력이 없는 제3세계의 흔한 노선이었고 박정희 역시 이 노선을 채택했다.

二차 대전 후 독일의 노동자들은 독일의 경제가 다시 부흥(復興)될 때까지 노동 쟁의(勞動爭議)를 하지 않겠다 하는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일은 지난 二O여 년 동안에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기적이다, 경이적(驚異的)이다 하는 이런 소리를 들을 만큼 놀랄 만한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국가도 그만큼 발전하고, 기업주도 그만큼 발전하고, 모든 사람들이 직업을 얻고,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처우(處遇)와 사회 보장(社會保障)을 받게 된 것이다. – 69.1.10 기자 회견에서

1964년 박정희는 서독을 방문했다. 그는 이 방문에서 서독의 여러 모습, 특히 노사관계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어록집 여러 군데에서 이 발언과 같이 서독의 노사관계와 남한의 그것을 비교하는 발언이 꽤 있다. 결국 그는 서독식 사회적 합의주의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독과 달리 남한의 사회적 합의주의에는 결여된 것이 있었다. 노동자의 발언권.

전후 독일에 있어서 어떤 회사가 종업원에게 노임을 올릴 것을 제의하자, 공장의 노동자들은 공장이 더 건전하고 충실하게 될 때까지 보류해 달라고 결의했다는 갸륵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이러한 미담은 한국의 현실에서도 수없이 꽃을 피워야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 65.3.10 <근로자의 날> 치사에서

우리는 누구 덕에 잘 살게 되었을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은 흔히 “누구 덕에 이렇게 잘 살게 된 줄 아느냐?”라는 호통을 치며 박정희의 “영도력”을 내세우곤 한다. 그 “영도력”은 가난한 신생국이 주기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대의민주제를 곧바로 수용하기 보다는, 독재나 변칙적인 대의민주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곧잘 사용하는 표현이다.

현시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가 그 “영도력”을 통해 경제개발에 성공한 소수의 나라 중 하나기에, 우익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력”에 대비되는 “근대화 세력”이라 포장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런데 한 주체가 근대화되고자 한다면 필요한 요소가 단순히 “영도력”만은 아니고, 생산을 할 뭔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주류 경제학에서 드는 3대 생산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자본이었다. 자금조달난을 겪던 군사정부는 화폐개혁을 통해 內資를 끌어내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외자유치 전략이었지만 이 역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 어렵사리 외자유치에 성공한 사례를 살펴보자.

박정희 정부는 미국 등 외국에서 경제개발에 필요한 돈을 빌리려 애를 썼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끈질긴 노력 끝에 1961년 서독으로부터 1억5,000만 마르크(약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약속받는 데 성공했다. [중략] “서독은 지급보증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최빈국 한국에 보증을 서줄 수 있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때 군사정부는 서독이 필요로 하는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는 묘안을 찾아내면서 이들의 3년간의 노동력과 노임을 담보로 서독은행에서 지급보증을 받아냄으로써 드디어 1962년 10월 서독으로부터 최초로 차관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백영훈,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김흥기, 1999, pp 72~73, 장미영/최명원, 2006, p244, 재경회/예우회 엮음, 한국조세연구원 기획, 한국의 재정 60년 건전재정의 길, 매일경제신문사, 2011년, p86에서 재인용]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리 군의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가 먼저 미국정부에 제의하여 이루어졌다. 5.16 쿠데타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지지와 지원을 필요로했던 박정희는 19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였고, 방미일정중에 케네디 행정부와의 비공개회의를 통해 최초로 파병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종필 공화당의장도 1962년 2월 베트남을 방문하여 파병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중략] 박정희 정부에게 있어서 베트남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 경제적 대가를 챙기는 일종의 거래와도 같은 것이었다. 베트남 참전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전쟁특수를 누렸고 수출을 늘렸는가 하면, 미국의 차관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파병 뒤에는 언제나 미국이 있었다’미국 결정’ 마감, 국민의사 물어야]

드디어 1969년 12월 韓日간에 종합제철에 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어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韓日 국교정상화 때 양국간에 합의된 청구권 및 對韓차관 공여액은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서 무상 및 유상자금 각 3억 달러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유공자보상, 對日민간청구권보상, 평화선철폐에 따른 어민보상 등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다. 朴대통령은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 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종합제철건설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pp138~139]

이 사례들은 각각이 당시 경제개발의 주요국면에서 매우 요긴하게 자금을 조달한 사례랄 수 있다. 이들 자금을 종자돈으로 해서 남한은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는 공업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생산요소 중 노동력을 수출하거나 착취하는 박정희의 “영도력”이다.

이런 “영도력”이 물론 박정희만의 독특한 “영도력”은 아니다.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노동력 수출을 통해 자본을 조달해왔고 여전히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노동자, 군인,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민간피해자들 역시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 희생을 제공했고, 또 이를 통해 이른바 “조국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즉, 처음 사례는 상업차관의 지급보증을 노동력으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우리 노동자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거래였다. 두 번째 사례는 인과관계를 명확히 규명하기엔 문제가 있지만 파병이 전쟁특수의 상당한 개연성을 제공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 사례 역시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이는 공개된 정부자료에 의해서도 증명됐다.

“영도력”과 노동 중에 어느 요소가 경제발전의 공과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느냐를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박정희의 영도력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역사적 가정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국민들이 제공한 노동에 – 심지어 강탈당한 對日 청구자금 – 대해서도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유무상 자금 5억 달러는 1966년부터 10년간 연차적으로 전액 차질없이 도입됐다. 청구권 자금은 포항종합제철공장 건설에 23.9%, 기타 원자재도입에 26.5%가 각각 투입됐다. 또 소양강다목적댐 건설에 4.4%,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1.4%(689만 달러)가 투입되는 등 광공업을 비롯한 기간산업 시설건설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중략] 1973년까지 8년간 모두 31만 2,000명의 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했다. 이 기간 동안 월남파병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 외화는 1966~1970년 5년간 총 6억2,501만 달러에 달했다. [재경회/예우회 엮음, 한국조세연구원 기획, 한국의 재정 60년 건전재정의 길, 매일경제신문사, 2011년, p88]

“누구 덕에 이렇게 잘 살게 된 줄 아느냐?”고 누가 물으면 “국민”이라고 대답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