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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소회

이 블로그에서는 의회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생각했지만 이번 재보궐 선거를 지켜보며 느꼈던 소회에 대해선 몇 마디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글을 남긴다. 선거가 끝나고 이른바 범야권의 참패와 그 뚜렷이 보이는 패인이 안타까워서 트위터에 몇 마디 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원칙 없는 단일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여러 항의 트윗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하나는 내 트윗의 “싸가지”없음을 비판하면서 “너희나 잘 하세요”라는 내용의 트윗이었다. 그래서 나는 “왜 민주당이나 민노당을 까면 진보신당 당원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트윗을 남겼다. 그랬더니 다른 트위터러가 그 트윗을 RT하면서 “대안이 없으니 욕을 듣죠”라고 답하였다.

하지만 그 트윗은 엄밀히 말해 답이 아니었다. 난 진보신당 당원이 아니라 했는데 그 트윗은 필시 ‘진보신당이 대안이 없으니 욕을 듣는’ 것 아니겠냐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엄한 소리였다.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그 트위터러의 프로필이었다. 프로필에 보니 민주노동당원이었다. 내가 민주노동당원일때 지겹게 듣던 소리를 민주노동당원에게 들은 것이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대안이란 무엇일까? 내가 물었지만 그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내멋대로 추측해보자면 그것은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 성공했다고 자평하는 야권 단일화인 것 같다. 즉 민주노동당은 야권 단일화에 나서 성공했는데 진보신당은 그러지 않아 대안이 없는 것이라는 논리인 것 같다. 이 역시 80년대 이후 지겹게 들어오던 레퍼토리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 대안의 있고 없음을 다 떠나서 이번 은평을 선거만을 놓고 보자. 그것이 “대안”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남은 인생 내내 그것은 대안이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당의 승리를 막기 위한 범야권의 단일화라는 것이 고작 부패 의혹이 강한 전혀 개혁적이지 않은 정치인으로의 단일화라면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장상 씨는 이미 지난 김대중 정권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 인물이다. 청문회 내내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의 스타일은 그 뒤 많은 부패의혹의 공직후보들에 의해 답습될 만큼 한 전형을 만들었다. 민주노동당은 당연히 그를 반대했다. 그런데 그뒤 어떻게 상황이 바뀌었기에 민주노동당은 그를 야권의 후보로 추대한단 말인가?

그러고도 결과는 패배였다. 명분 없고 대안 없는 “대안”이 낳은 당연한 결과다. 이재오가 너무 강했다고? 그러면 문국현은 그를 어떻게 이겼을까? 정치시장에서 허접한 상품이라도 “야권”표만 붙여서 내놓으면 ‘야권 오다꾸’들이 상품을 구매해줄 것이라는 ‘애플적’ 오만함이 어느새 민주당 뿐 아니라 민주노동당에도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대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정치시장에서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과점체제가 너무 견고하기 때문에 틈이 없으니 단일화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광주의 득표를 생각해보라. 한때 10%를 훨씬 상회했던 민주노동당의 지지도를 생각해보라. 한때 “우리의 꿈은 너희와 다르다”고 선언하면서도 얻은 지지도다.

물론 민주당, 국민참여당 등 범야권 지지자들 중에는 심정적으로 사상적으로 진보정당의 지지자들과 겹치는 부분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원칙을 세운 연대도 가능하다.(주1) 그렇지만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지난 선거와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모습은 연대라기보다는 굴종이었다. 이제 유일한 로드맵은 민주당과의 합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주1) 유시민 씨로의 단일화마저 얼마나 민주노동당의 기본원칙을 깬 연대였는지는 여기를 참고하라

노동자 출신 의원이 하나도 없다는 이용득 위원장님께 부탁 하나

이런 남씹는 포스팅 자제하려고 했는데 참세상의 기사를 읽다보니 어이가 없어서 불가피하게 다시 한 번 ‘한국노총의 이명박 지지 사건(해프닝, 사태, 쇼 whatever)’에 대해서 한마디 하려 한다.

참세상 기사에 따르면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께서 “한국노총 출신들이 한나라당에 많이 가면 많이 갈수록 좋다”며 한나라당에 내년 총선 공천권을 요구할 뜻을 밝히셨다고 한다.

이렇게 속내를 거칠 것 없이 화끈하게 밝혀버리니 그 기상이 놀랍다. 그동안 혼자서 ‘이명박 지지가 한국노총이 차기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공천권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만 설마 그럴까 싶고 그런 이야기하면 음모론 주장하지 말라고 욕먹지 않을까 생각되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했던 나의 소심함이 부끄러워진다.

모름지기 사람은 이래야 된다. 이렇게 화끈하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을 요새는 보기 어려웠다. 다들 자기 욕심 때문에 무언가를 하면서도 다들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중언부언하지 않았던가.

근데 아무튼 그 공천대상자가 이용득 위원장 자신은 아니란다. 정계진출을 하지 않겠다고 수십 차례 공약했대나.(안할 줄로 믿고 있겠습니다만 갑자기 이회창이 떠오르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대목이 있다. 이 위원장이

“사용자 출신들은 많이 있는데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한나라당과 그런 얘기를 해 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일단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은 우리의 ‘액면 노동자, 행동 노동자, 복장 노동자’의 골수 노동자 의원인 단병호 의원이 있지 않은가. 그 외에도 심상정 의원도 노동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고 노동현장에서 헌신하다 온 이들로 치면 그 수가 상당수를 헤아린다. 막말로 한나라당에 배일도 의원도 노동자 출신이고 더 올라가자면 김문수 경기도 지사도 노동자 출신이다.(도바리를 까서 그렇지)

하여 나는 이용득 위원장이 이야기하는 “하나도 없다는 노동자 출신 의원”은 어떤 노동자 출신 의원을 말하는 것인지 참 궁금하다.(혹시 이명박 후보가 말씀하셨던 바이올린을 연주해서 금속노조에 소속된 금속노조 소속 예술노동자 출신 의원? 그런 분은 아마 국회에 없지 싶다.) 그렇지만 뭐 굳이 혼자서 또 추측을 하자면 ‘노동자 출신이 없다는 것이 국회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 아니었겠냐는’ 것까지 짐작을 해볼 수 있겠다. 이런 추측은 다음의 이 위원장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노조 위주의 정책정당이 없다. 민주노동당은 한국노총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결국은 자신이 보기에 한국노총과 (이념상 또는 정서상 또는 감정상) 거리가 있는 민주노동당과는 이참에 담쌓고 – 덤으로 민주노총하고도 담쌓고 – ‘노조 위주(?)’의 정책정당의 교두보 확보의 일환으로 우선 한국노총 출신 노동자가 의원 공천을 받을 수 있도록 한나라당에 애정공세를 펼치겠다는 이야기로 짐작된다.

결국 이용득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한국노총의 기조는 ‘진보와 보수 양 날개를 구성하는 노사정 공동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한나라당과 공동보조를 펼쳐나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진보는 ‘한국노총’, 보수는 ‘한나라당’인 셈이다. 상생의 정치, 뭐 그런 것 같다.

건투를 빌어주고 싶다. 지난 선거에서는 녹색사민당인가 하는 정당 만들었다가 티끌만한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스러져간 아픈 추억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노동자의 반노동자 후보 지지’라는 쇼킹한 제목의 해프닝으로 주목을 끄는데 성공하지 않았는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한들 그것이 전적으로 한국노총의 지지 덕분이라고 이 대통령 당선자께서 생각하실 리 만무하리라 여겨지지만 열심히 당사를 출입하면 전국구 자리 말석으로 두어 개는 얻을지 모르겠다. 그렇게만 되면 녹색사민당 시절보다는 성공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렇게 국회 입성하시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지금 부탁말씀 드리자면 부디 한나라당 출신 의원을 배출하시더라도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 의원’이 되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투명인간으로 여기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하나도 없다는 그 노동자 출신 의원’ 들이 또는 ‘새로운 노동자 출신 의원’들이 차기 국회에 다시 입성한다면 그들과 손잡고 일하시기 바란다. 가진 자들의 정당 한나라당에서 노동자 출신 의원이라는 희소성에 안주하지 마시고….

참세상 기사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41862

좌파 후보는 ‘성장’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왕따 당하고 있는 좌파 후보

실질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소위 ‘좌파’ 후보로 자임하는 후보는 두 명이다. 하나는 비교적 잘 알려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다른 하나는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따돌림 당하고 있는 한국사회당의 금민 후보다. 두 후보 간의 지지율의 차이는 있으나 둘 다 대선의 메인스트림에서 소외받기는 매한가지다. 권 후보의 지지율은 대략 2~3%대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도보다도 떨어져 당의 역대 최저 지지율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금민 후보의 지지율은 1%대 미만으로 1%대의 벽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러한 지독한 우편향의 정치지형은 이념적 포지셔닝에 대한 일천한 역사적 경험도 한 몫 하겠지만 내부적인 역량의 한계도 있음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두 후보는 다른 어떤 후보들보다 현재의 경제, 정치,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는 있지만 국민들에게 그 비판이 전달되지도 않고 있고,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이 유권자의 마음을 효율적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보니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명박 후보에게서 희망을 찾는 어처구니없는 희극적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정치지형이다.

선거판이 X판이어서 그런가 후보의 잘못인가

이 두 좌파 후보가 선거판에서 돌풍을 일으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선거판이 BBK 등으로 진흙탕이 되고 있는 탓이겠지만,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선거판의 천박함을 뛰어 넘을 ‘경제적 대안과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이명박 후보의 ‘경부대운하’ 공약은 터무니없는 공약이긴 하지만 적어도 유권자들에게 확실히 각인되는 ‘경제적’ 약속으로 느껴진다. 박정희 식 개발독재의 냄새도 진하게 배어 있다. 유권자들은 박정희의 독재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때의 경제적 활력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른다.

우파 후보들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고 있다. 일자리가 없으면 건설경기를 살려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주장한다. 이런 약속에서 ‘토건국가’ 비판은 파고들 자리가 없다. 정확히 말해 현재의 ‘고용 없는 성장’은 자본집약적 산업구조화, 주주자본주의 강화, 제조업 공동화 등으로 말미암은 노동유연성 강화와 고용불안에 기인하고 있음에도 유권자 대다수는 삽질이라도 해야 일거리가 생긴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한편 문국현 후보는 이 틈새시장을 ‘일자리 나누기’라는 상품으로 교묘히 파고들고 있다.

좌파가 오히려 성장을 부르짖어야 한다

경제적 대안에 있어 ‘대운하’ 공약과 같은 단순무식하고 개발주의적인 공약을 좌파 후보들이 낼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탓에(?) 좌파 후보들은 늘 ‘성장 없는 분배’만 외치는 이들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하고 이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좌파 후보들은 ‘성장’은 제켜두고 ‘보전’과 ‘분배’에만 몰두하는 것이 사실인가. 어찌 보면 좌파 후보들마저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의 도그마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 후보는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해야 한다. 사회총체적으로 볼 때 성장은 필요불가결하다. 국민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의 삶의 질에 대한 수요가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공공성이나 환경보전(주1),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 성장에 대한 적정한 통제와 정당한 분배를 주장하는 좌파적인 대안이 ‘분배 -> 소비 -> 생산 -> 성장’ 으로 이어지는 경제 선순환적인 진정한 성장 대안임을 주장하여야 한다.

어떻게 성장의 재원을 마련할 것인가

즉 좌파 후보들은 현재의 우파들의 성장론은 명백하게 주주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주주와 투기적 금융자본의 약탈적인 자원독점을 정당화시키고 있으며 이의 확대재생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비판하여야 한다. 또한 이러한 시스템은 자원분배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은 모기지론이나 신용카드 빚으로 소비를 해야 하는 구조를 온존시켰고 이것이 현재 직면한 전 세계적인 신용경색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폭로해야 한다. 한마디로 시장맹신의 무정부성이 우파 성장론의 핵심이다.

한편 성장을 이야기함에 있어 일차적으로 제기되는 물음은 역시 투자재원이다. 자본은 자본주의를 싫어하는 이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이명박 후보는 대운하 건설재원을 민영화를 통해 마련하겠다고 했다. 민영화가 철밥통을 깨는 개혁으로 치장되고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 참 하기 편한 발언이다. 미래세대의 부담일진데 그들은 유권자들도 아니다. 그러니 좌파들은 이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올바른 성장’을 위해 좌파는 어떤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가.

현재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대표적인 재원이 바로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지난 4월 적립금 규모가 200조원을 돌파하여 8월말 현재 213조원으로 세계 5위의 거대 기금으로 성장했다. 국민연금의 주인은 국민이다. ‘투자의 사회화’를 이야기할 때에 이보다 더 명분 있고 현실성 있는 재원은 사실상 없다. 따라서 향후 선거에서 ‘성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좌파 후보라면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여야 하는 일종의 당위성이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주2)

두 후보의 공약 비교

사실 이 부분이 권영길 후보의 공약과 금민 후보의 공약의 주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먼저 권 후보의 공약을 들여다보자. 결론적으로 말해 국민연금의 활용방안에 대한 언급, 더 나아가 경제체제 정비의 재원조달 방안이 없다. 그의 경제 관련 공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재벌과 외국자본 중심의 수출주도형 경제를 중소기업과 노동대중 중심의 내수주도형 경제로 전환할 것이다. 주요 기간산업과 은행을 재국유화할 것이다. 한미FTA를 무효화하고 외국투기자본을 강력하게 규제할 것이다.”(원문 보기)

이 문장으로만 본다면 권 후보의 공약은 사회주의적인 대안 – 또는 反자본주의적 대안 – 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 내지는 폐쇄형의 자본주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출주도형 경제를 내수주도형 경제로 전환하고 외국투기자본을 규제한다는 발상은 사실 비판할 부분이 많지만 논지에 벗어나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문제는 “주요 기간산업과 은행을 재국유화”하는 부분에 대한 ‘어떻게‘라는 부분을 이 공약이 나와 있는 장이나 다른 공약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주3)

금민 후보는 이에 반해 ‘연기금으로 거대기업 국민통제’를 타이틀로 하여 국민연금을 통한 투자의 사회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이 기금으로 주식에 투자하거나 회사채 시장이 형성될 경우 회사채에 투자하면, 국민이 대주주 역할을 할 수”(원문 보기)있다는 로드맵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투자우선순위, 금융공공성, 사회책임성(주4)을 담보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2000년 7월 발효된 영국의 수정연금법의 사례를 들고 있다.

연기금을 통한 기업통제, 과연 가능한가

물론 ‘연기금을 통한 기업통제’라는 공약은 좌파 입장에서는 여전히 우편향적인 공약일터이고 우파 입장에서는 지극히 혁명적인 불온한 발상이라는 애매한 지점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그 논의도 이제 막 시작된 시점이다.(관련 기사 보기) 미국의 진보진영에서 독특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는 마르크스 이론가 더그 헨우드 Doug Henwood 는 그의 저서에서 공공연금이 기업의 대주주로 나섰음에도 실제로 다른 주주들보다 보다 급진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이는 공공재원의 의사결정구조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여하튼 기업을 군대를 동원하여 통째로 접수할 생각이 아니라면 대안 경제 체제를 고민하는 데에 있어 연금 활용론은 앞으로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할 로드맵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 지금 진보 진영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재벌과의 사회적 타협이라는 이슈가 실현가능할 것이다. 힘도 없고 돈도 없는데 재벌이 뭐하러 진보진영과 타협을 하겠는가.

소비의 사회화에서 투자의 사회화로

지난 대선에 민주노동당은 ‘무상교육 무상의료’라는 ‘소비의 사회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공약 역시 아직 실현이 요원한 현실에서 폐기되어서는 안 되는 공약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우파 후보들마저 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환심성 복지공약을 남발하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좌파의 근본적 존재의의를 놓고 보자면 이제는 ‘투자의 사회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워야 한다. 투자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소비재원도 마련될 턱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경제는 ‘투자 -> 생산 -> 유통 -> 소비 -> 재투자’의 흐름이 연속되는 유기체적인 시스템이다. 그 생산력의 중추는 역시 ‘노동’이지만 노동은 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돈을 쥐고 있는 자가 노동을 쥐고 있는 자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장래의 대안 체제는 돈을 생산주체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지 않았을 때에 나타나는 부작용이 현재 벌어진 삼성의 부정부패일 터이고, 더 나아가서는 시장파괴와 환경파괴인 것이다. 그 악순환이 이제는 선순환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점이다.

참고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41758

 

(주1) 성장은 당연히 환경을 파괴한다는 생각이 꽤 설득력 있게 맹목적인 일부 환경보호론자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2) 이미 박근혜 씨가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연기금 사회주의라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적절한 지적이었다

(주3) 사실 민주노동당에서 연기금을 통한 투자사회화를 공약으로 내걸은 후보는 심상정 후보 하나다

(주4) 현재 삼성 사태를 근본적 해결로써 바로 삼성에 대한 사회적 투자를 통해 사회적 기업으로 바꾸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