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사회적 효용

펀드사회주의

펀드자본주의라는 표현이 한때 유행했었다. 헤지펀드, 사모펀드, 최근에는 국부펀드까지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던 자금조달방법에서 진일보한 각종 펀드들이 시장의 큰 손으로 등장하면서 쓰기 시작한 표현이다. 금융자본주의와 함께 ‘금융 이니셔티브’의 경제체제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펀드 중에서도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펀드, 예를 들어 뮤추얼펀드와 같은 것들은 투자자 구성, 정보공개, 자본비율 등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운신의 폭이 좁은 반면 일반적으로 헤지펀드로 알려져 있는 법의 구속력을 받지 않는 펀드들은 베일에 가려진 채 무차별적인 투자를 선호하여 비판자들로부터 금융업계의 교란자 내지는 악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제 여하간의 부작용과 그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펀드’라는 일종의 ‘집합적 투자를 위한 결사체’를 빼놓고 경제를 굴러가게끔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져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뮤추얼펀드, 헤지펀드, 사모펀드, 인프라펀드, 부동산펀드, 국부펀드, 인사이트 펀드 등 구성요건, 투자방식, 투자대상, 구성목적, 펀드의 특성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붙어 있는 펀드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금융시장을 쏘다니고 있다.

이제 여기에서 어렸을 때 만화를 보며 ‘착한 나라’와 ‘나쁜 나라’를 구분했던 것처럼 ‘착한 펀드’와 ‘나쁜 펀드’를 가려내보자. 뮤추얼펀드는 법을 지켜가며 하니까 ‘착한 펀드’, 헤지펀드는 볼 것도 없이 ‘나쁜 펀드’, 부동산펀드는 부동산투기를 불러일으키므로 ‘나쁜 펀드’, 인프라펀드는 그나마 사회간접자본을 공급하니까 ‘착한 펀드’ .. 아니 가만 이것도 민영화를 부추기니까 ‘나쁜 펀드’, 국부펀드는 한 나라의 공익을 위해 운영되니까 ‘착한 펀드’, 인사이트 펀드는 박현주가 멋대로 운용하니까 ‘나쁜 펀드’… 아~ 정리가 무척 쉽다.

사실은 쉽지 않다. “금융업자들은 죄다 도둑놈들이다”라고 해버리면 편하게 모두 나쁜 환전꾼들이지만 금융이 장래 다가올 어떠한 대안 경제체제에서도 역시 산업의 동맥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단순무식한 난도질보다는 정밀한 신경외과 수술과 같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미 저들 펀드들은 무수히 복잡한 신경망을 통해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은행에 예금한 돈이 내가 욕을 바가지로 하는 헤지펀드의 종자돈으로 쓰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국민연금이 펀드에 운용을 맡겼는데 그 펀드가 공매도에 베팅했다가 개박살 났으면 나는 화를 내야할까 웃어야할까?

지금 금융선진국들은 이렇게 통제되지 않는 펀드들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 부산을 떨고 있다. 한편으로 그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두려워하고 있는 중동이나 아시아로부터의 국부펀드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을 통일되게 합리적으로 만드는 작업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일단은 보편적인 가치기준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투자’와 ‘투기’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만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나 역시도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작정하고 투기 질을 일삼는 이들도 상당수지만 무릇 모든 투자에는 투기적 요소를, 즉 위험감수(risk taking)의 구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구간을 잘 넘어서면 사회적 선순환을 유도한 투자일터이고 그게 실패하면 ‘양아치’가 되어버린다. 그러한 고민 등 제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등장한 것이 ‘사회책임투자’라는 개념일 것이다. 어떠한 도덕적 투자의 기준을 만들고 그 가이드라인에 충실하여 투자를 하자는 것이 그 원칙이고, 일정기간이 경과한 후 보니 이른바 ‘나쁜 펀드’들보다 수익률도 좋다는 것이 찬성론자들의 설명이다.

각설하고 바로 이 시점에서 오늘 문득 ‘펀드사회주의’라는 대안을 생각해보면 어떨까하는 엉뚱한 공상을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사회책임투자도 어찌하든 경제적 효용의 극대화가 최우선순위다. 그것이 달성되지 않으면 용도폐기 당한다. ‘경제적 효용’은 어찌 되었든 아무리 펀드가입자수가 많더라도 – 심지어 한 국가의 국민이 통째로 가입했어도 – 한 개인의 투자이익 극대화의 논리와 똑같다. 이타주의의 논리가 개입되지 않는다. 사회책임투자는 ‘착한 산업’에 투자하겠다는 것이지 ‘이타적인 투자’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반면 오늘 내가 구상한(?!) ‘펀드사회주의’하에서의 펀드들은 경제적 효용과 사회적 효용 – 즉 공익적인 측면에서 계량화될 수 있는 효용 – 의 조화를 추구한다. 개별펀드의 수익률도 극대화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효용에 대한 ‘정의 외부효과’를 창출하여야 하고 최소한 ‘부의 외부효과’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법령이나 투자 가이드라인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다만 그것은 ‘계몽주의적 오만’이라는 비판을 받는 중앙집중식의 통제경제가 아닌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의회나 행정부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시절이 수상해서 횡설수설했다. 그래도 쓴 게 아까워서 발행을.. 그리고 깊은 사과를…

공공정책 수행의 제약조건

지난번 [공공의 이익 vs 사적 이익]이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적은 바 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국민의 돈을 걷어서 그들이 늙었을 때 적정수익을 합쳐 연금을 줘야 하는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는 기관이다. 국민연금은 그래서 마땅히 최대의 수익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연금이 터널을 인수해 MRG를 기반으로 수익을 창출하려고 했는데 도가 승인권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혈세”를 절감하였다. 이때 국민, 더 구체적으로 강원도민은 국민연금 편을 들어야 할까 강원도 편을 들어야 할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국민연금이 대변하는 이해관계자의 숫자가 강원도가 대변하는 이해관계자의 숫자보다 크다. 강원도민의 세금이 “혈세”1인만큼 국민연금 납부금도 “피의 납부금”일 수 있다. 액면으로만 보면 강원도는 세금절감이라는 이유로 보다 큰 공공의 이익을 침해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내 미래의 연금수익이 미시령 터널을 통과하는 통행자가 더 싼 값에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쓰였다는 소리다. MRG가 있기에 또한 통행료 인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독자들이 헷갈리게끔 일부러 약간 트릭을 썼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위 사례를 단순히 보면 언뜻 강원도가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글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이해관계와 강원도의 이해관계가 꼭 상충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금전적이냐 사회효용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즉 국민연금은 연금가입자에게 화폐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투자이익의 최대화가 사업추진의 목적이라면 강원도는 어느 정도는 미시령 터널 이용이라는 – 화폐가치로의 환원이 쉽지 않은 – 사회적 효용의 극대화가 사업추진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그 사회적 효용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갈등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수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 정도의 타협을 감수할 수도 있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어느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에서 수적 다수의 의견이 대체적으로 옳은 의견이고 설사 그렇지 않다 치더라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특정 사안이 결정되면 그에 따라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하여야 할 것이 다수일지라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상대적 소수의 의견이 여전히 관철되어야 할 것들이 다수 존재함을 유의해야 한다. 즉 수적으로는 다수이나 권력관계에서 소수인 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뿐만 아니라(주1) 수적으로도 소수인 이의 이해관계가 상대적 다수의 이해관계를 침해한다 할지라도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다면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 다수가 금전적 이해에 매몰되어 상황을 그르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지난 총선 여러 선거구에서 불었던 이른바 뉴타운 열풍으로 인한 다수당의 승리도 이러한 경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국제관계에서 보면 거대한 인구의 중국이나 미국이 경제적이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때문에 적은 인구의 나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나는 “다수에 의한 이기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각설하고 질적 양적 소수를 보호하여야 함이 타당한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장애인에 대한 교통정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은 분명히 권력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소수다. 그렇기에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는 대중교통을 장애인까지 배려한 방식으로 조직하려면 사업타당성 측면에서는 분명히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배려하기 위한 비용은 지출되어야 하고 오늘날에도 많은 장애인들이 이를 관철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점점 사회적 인식도 바뀌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러한 질적/양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배려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적으로는 그 배려를 통한 효용의 가치측정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연금이 미시령 터널 인수를 통해 얻어지는 이익은 수익률이라는 숫자로 명확하게 표시되고 주주에 대한 배당금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미시령 터널 이용을 통해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효용을 얻었는지는 참으로 측정하기 어렵다. 심지어 일부 사회적 효용은 그 정당성마저 의심받을 때도 있다.(주2) 이것이 공공정책 시행의 딜레마다.

사회적 효용을 계량화시키는 방식에 대해 사회 대다수가 동의할 시점이 언제쯤이나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주1) 이에 관련하여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여기 등장하고 있는 국민연금이고 또한 국민건강보험이다. 이들 공적기금은 각각 가진 사람이 더 내고 못 가진 사람이 더 혜택을 받는 평등주의적 성격이 강한 공적부조다.

(주2) 이를테면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피해 받는 어느 도롱뇽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 문제는 혹자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환경과 생태보호의 차원으로 다가오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그깟 도롱뇽 몇 마리 때문에 뭐하는 짓이냐는 비난을 받고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특히 도시정책에서는 때로 사회적 효용이라는 것이 이해관계자에 따라 제각각으로 나눠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