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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가 나무랐던 지주의 뻔뻔함

토지지대는 지주가 토지개량에 투자한 자본에 대한 합리적인 이윤(또는 이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이것은 부분적으로 타당하지만 그 이상 타당할 수는 없다. 지주는 개량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까지 지대를 요구하며 개량비용에 대한 이자 또는 이윤은 일반적으로 이 원래의 지대에 대한 추가분이다. 더욱이 이러한 개량은 반드시 지주의 자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가끔 차지인의 자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차지계약이 갱신될 때 지주는 (마치 자기 자신이 개량한 것처럼) 지대의 증액을 요구한다.[國富論 상권, 애덤 스미스 지음, 김수행 옮김, 두산동아, 1998년, pp149~150]

토지의 독점성에 따른 이러한 부당한 추가지대를 요구하는 한 사례가 요즘 많은 이들에게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도심재생화 현상의 한 부정적인 모습일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본래적인 의미는 도시 중심가의 쇠퇴했던 주변에 상류층의 주거지가 다시 조성됨에 따라 재생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경리단이나 서촌과 같이 번화가의 주변 상권에 트렌디한 상권이 조성되면서 지대가 오르는, 주거보다는 상권에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표현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소비패턴의 변화에 따라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최근 몇 년간 경리단, 서촌, 가로수길 등 소위 트렌디한 상권이 여러 군데 등장하였다. 이전의 중심상권과의 차이라면 한번 도시 기능이 발전했다가 어느 정도 쇠퇴과정을 거치고 다시 활발해졌다는 점에 있고, 그렇기에 젠트리피케이션의 정의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바로 애덤 스미스가 지적하는 추가지대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즉, 상권의 활성화에 기여한 독립 자영업자가 치른 개량비용도 지주의 추가지대 요구의 근거가 되어버리는 상황 말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는 곳에서 만의 일도 아니다. 그러한 곳에서 추가지대의 요구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관찰이 가능할 뿐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부동산의 소유가 소수에게 극도로 집중되고12 자영업자의 비중이 예외적으로 높은 나라에서 지주는 자영업자, 즉 차지인의 자본에 의해 이루어진 개량도 자신의 지대로 전유할 개연성이 매우 높으며 실제로 이런 일들은 종종 사회적 이슈가 되어 많은 이들을 분노케 하기도 한다. 결국 토지의 사적소유의 모순은 이미 애덤 스미스에서부터 관찰되던 보편적 모순이었던 셈이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언급되는 “보이지 않는 손”에 관하여

부자는 단지 큰 덩어리의 생산물 중에서 가장 값나가고 기분 좋은 것을 선택할 뿐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보다 별로 많이 소비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들의 천성의 이기심과 탐욕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들이 자신만의 편의(便宜)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중략]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량의 성과(成果)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이끌려서 토지가 모든 주민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졌을 경우에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분배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무의식(無意識) 중에, 부지불각(不知不覺) 중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인류 번식(繁殖)의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 저, 박세일/민경국 공역, 비봉출판사, 2014년, pp345~346]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술활동 중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총 3번 언급하였다고 한다. 그가 1758년 쓴 『천문학(Astronomy)』에서 자연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법칙을 설명하고자 할 때 “주피터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최초의 언급이었다. 두 번째 언급은 이듬해인 1759년 쓴 바로 인용한 책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에서다. 그리고 마지막 언급은 1776년 쓴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였고, 이 언급이 가장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 되었다.

『도덕감정론』의 편집자였던 A. L. Macfie는 한 저널에서 『도덕감정론』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부론』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공통점은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의도함이 없이 증진되는 목적을 사회의 이익으로 간주”하였다는 점이다. 한편 차이점을 보면 “『도덕감정론』에서는 행복을 위한 수단의 분배를, 『국부론』에서는 이익의 극대화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부자의 행동동기에 대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과정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한편 애덤 스미스가 최초로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였을 때 그 손의 소유주가 주피터였고, 스미스가 그 주피터의 손을 통해 자연법칙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그 손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아직 손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기 때문이며 스미스는 그 손의 행동이 바로 신(神)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편 인간이 개입된 사회 역시 이 철학자에게는 다른 자연이나 큰 차이가 없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연법칙에 지배되는 장소일 것이다.

그곳에서도 신은 자신의 일은 자신의 준칙에 따라 인간의 일은 인간의 준칙에 따라 진행되게 (지도)하고 이는 결국 사회에 이익이 되는 자연법칙이 관철될 것이다. 어제의 글에서 살펴본 인용문에서 애덤 스미스는 악인의 재산이 선인에게 옮겨지는 신의 섭리를 설명하였다. 이번 인용에서 역시 그는 인간의 의도와는 다른 신의 섭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사견으로 그에게 있어 탐욕에 따른 행위는 결국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용인되어야 한다기보다는 신의 섭리이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애덤 스미스가 생각했던 “보이지 않는 손”의 프로세스

부지런한 악인(惡人)은 땅을 경작하는 반면에 게으른 호인(好人)은 땅을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누가 수확(收穫)하는 것이 옳은가? 누가 굶주리고, 누가 부유하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사물의 자연적 진행은 이것을 악인에게 유리하도록 결정한다. [중략] 그러나 인류 감정의 결과인 인류의 법률은 부지런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반역자(叛逆者)의 생명과 재산을 몰수하고, 절약하지도 않고 조심하지도 않았지만 선량한 시민의 충성과 공익정신에 특별한 보상을 한다. 조물주는 이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조물주 자신이 다른 방식으로 행하는 사물의 분배 방식을 어느 정도 바로잡도록 지도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조물주가 인간으로 하여금 따르도록 촉구하는 준칙들은 조물주 자신이 준수하는 준칙과는 다른 것이다.[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 박세일/민경국 공역, 비봉출판사, 2014년, p312]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이라는 고전적인 경제학 서적을 내놓은 경제학자 이전에 『도덕감정론』을 내놓은 도덕철학자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경제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의 이 저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장 위의 인용문만 보아도 우리는 우리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알고 있는 그의 사회에 대한 생각, 즉 개개인의 효용 및 이익의 극대화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사회전체의 후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조금은 냉정하고 메마른 사회의 모습과는 다른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는 심증을 가지게 된다.

한국금융연구원의 박종규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메시지’라는 글에서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보이지 않는 손”은 바로 “신(神, Providence)의 손”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용문을 보더라도 그의 설명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애덤 스미스는 악인과 호인의 경제행위에 대한 결과는 조물주의 준칙에 따라 정해질 것이지만, 또한 조물주는 인간이 그 둘 간의 도덕성에 따른 대가를 “바로 잡도록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진행과정은 이 과정까지가 완결인 셈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팔며 경제행위를 하는 상당수는 조물주의 추후 보완작업을 그리 탐탁해 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 작업이 경제효율성을 저해하고 “보이지 않는 손”의 작업을 역행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이든 일시적인 불황이든 간에 전세계가 불황의 늪에서 헤매고 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각국 지도자와 국제기구가 임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런 주장은 한국적 스미스주의자들에게는 “사회주의자들의 음습한 노림수” 쯤으로 치부된다. “호인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