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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그때 어디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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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미님이 속이 많이 상하셨군요. ^^; 그나저나 다른 분과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답글이 늦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답글을 달아야 할지도 망서려지는 군요. 온전히 김규항씨와 풀어야 할 문제인 것 같아서요. 그런데 김규항씨의 블로그는 댓글을 막아놨더군요.

일단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저도 김규항씨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그의 발언의 취지를 이해합니다. 즉 저도 일반민주주의가 과연 실질적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고 그것을 고양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 희망적으로 생각하여 왔으나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많이 실망 했습니다. 왜냐하면 절차적 민주주의가 고양된 이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실질적 민주주의가 역으로 파괴되는 현상을 목도했거든요.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 거론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양산과 한미FTA입니다. 두 정부는 민주화를 한다고 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방관하는 것을 떠나 양산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정규직법이 제정될 때 민주노동당이 그렇게 그 법은 보호법이 아니라 양산법이라고 저항했을 때에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아무도 이에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딴죽을 건다고 비아냥거리기만 했죠.

얼마 전에 유시민씨의 동영상이 유행하더군요. 나치의 등장을 비유로 들면서 불가촉천민인 유태인, 동성애자들이 제거되기 시작하면서 일반민주주의가 하나씩 제거된 상황이 우리나라에도 벌어질 모른다는 묵시록과 같은 강연이던데요. 그러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을 공격하여 결과적으로 나치의 등장을 도왔다고 알려진 독일 공산당과 민주노동당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판하더군요. 하지만 명확하게 이야기해보자면 대한민국의 불가촉천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낭떠러지로 몰아세운 것은 사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업보를 민주노동당에 뒤집어씌운 꼴이죠.

물론 이런 제반의 것들이 KBS사태와 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결국 이런 일련의 사태를 목도한 이들 중 몇몇은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KBS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KBS는 과연 실질적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시점에 어디 있었느냐는 볼멘 소리도 전혀 억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저역시도 아직 제 입장이 무엇인지 솔직히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많이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길 바랍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

진보신당을 “비판적”으로 지지 한다

이 블로그에 나는 나름 진보적인(?) 관점을 지닌 경제 분석 글을 주로 올렸다. 그런 한편으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 특히 정당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정치인의 이름은 몇 번 거론했으되 정당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랬는지 생각하면 딱히 이유는 없다. 원래 블로그란 손가는 대로 끼적거리는 데니까 뭐 이유를 댈 이유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정당을 지지하여 왔는가 생각해보면 나름 일관되게 좌파적 성향을 지닌 정당, 또는 정치인을 지지하여 왔었다. 한 5년 정도 민주노동당의 당원이기도 하였다.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대선 이후의 엑서더스 대열에 동참하였다. 사실 그 이전부터 이번 대선과 비슷한 스타일의 지역위원회에서의 갈등 때문에 상당히 오랜 동안 애정 없이 지내온, 쉽게 말하면 당과의 별거상태로 지내긴 했었다. 아무튼 대선을 계기로 탈당했다.

하지만 진보신당에는 입당하지 않았다. 왜 가입하지 않았냐고 한다면 우선은 귀차니즘인 것 같다. 민주노동당의 탈당도 귀차니즘 때문에 상당히 지체되었으니 할 말 다했다. 두 번째는 태생에 대한 불만이다. 현재로서는 명백히 노회찬/심상정 당의 모양새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셋째는 정당정치에 대한 회의감이다. 민주노동당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면서 느낀 점이다.

나 스스로 정치적 지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지속적인 화두인데 최근 내린 결론은 적어도 사회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이 결론이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서 나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표현이 결국 ‘자기파괴적 자본주의자’다. 자본주의적 삶을 지향하면서 끊임없이 그 한계를 알아채며 좌절하는 그런 녀석인 것 같다.

현실에서는 ‘자기파괴적 무산계급’이 상당히, 깜짝 놀랄 정도로 많다. 분명히 경제지표로 보면 우리나라 인구 구성의 절대다수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받을 상태에 놓여 있음이 분명한데 그들은 어찌된 일인지 자신들의 경제적 상태를 고착화 내지는 악화시켜줄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자기파괴적’이다. “경제를 살리자”라는 근본 없는 구호에 도취된 것인지 알량한 자산으로 인해 허위의식을 갖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모순된 투표행태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모순은 집권당뿐 아니라 전 집권당의 의원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야당을 지지하는 이들에게서도 제법 발견된다. 적어도 집권당의 지지자보다는 덜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정치현장에 유의미한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남겨놓는 데에 철저히 실패한 전임대통령의 서민적 이미지를 ‘노간지’라 부르며 환호하는 팬덤 현상을 보면 박근혜에게 박정희의 향수를 느끼며 환호하는 이들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더욱 희극적인 모습은 현재의 신자유주의화 현상에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당시의 집권당(이름도 잊혀져 가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알리바이를 주장하는 이들의 행태다. 현재의 의료보험 민영화나 은산분리 등에 대해 게거품을 무는 이들이 실상 전임 정부가 그러한 초석을 다지는 일을 해온 데에 대해서는 편의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고 용감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알아야 할 점은 막말로 통합민주당이 다수당이 될지라도 기차는 달린다는 점이다.

자꾸 맥 빠지는 이야기뿐인데 결국 이번 선거 최대의 관전 포인트는 한나라당이 단독 개헌가능의석을 확보하는 것이냐 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 눈이 삐었다든지 세상이 미쳐가고 있달 지 푸념해봐야 현실은 그런 상태다. 결국 이런 비참한 한국의 정당정치 상황에서 나는 정당정치에 대한 회의감을 뒤로 한 채 투표장으로는 갈 것이다. 그리고 나의 계급적 이익을 완전히 대변한다고는 여겨지지 않지만 가장 근사치로 접근한 진보신당을 선택할 것 같다. 그것은 ‘부패한 보수’대신 ‘무능한 보수’를 지지하자는 그런 비판적 지지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비판적 지지라고 스스로 이름붙이고 싶다.

“찍어줄 테니까 좀 똑바로 해봐”

노예에서 노동자로, 다시 노예로

■ 설탕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을 하나 언급해보자. 노예제도 반대론자들이 먹지 않는 음식이 있다고 한다. 무엇일까? 설탕이라고 한다. 설탕 사업은 17세기와 18세기 남미 등지에서 특화된 대규모 플랜트 농업으로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수송해온 노예를 쓰는 대표적인 사업이었기 때문에 노예제도 반대론자들은 차마 도의적 차원에서 설탕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설탕 대신 꿀을 먹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노예제도를 기초로 한 설탕 플랜트의 대량생산 덕에 설탕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였고 유럽인들은 상류층은 물론 중하류 층까지 설탕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차와 초콜릿 등 연관 산업이 크게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열량이 높은 설탕을 섭취한 덕에 유럽 소재 공장의 생산성도 크게 증가하였다. 결국 남미로 끌려간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부유한 유럽 만들기, 즉 자본주의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셈이다.

■ 노예에서 노동자로

그러함에도 원칙적으로 노예제도는 자본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제도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 부단히 자신의 모습을 변신해야 하는 제조업의 자본가들에게 식솔의 생계까지 챙겨줘야 하는 일종의 재산 개념인 흑인노예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근로대중에게 신체의 자유를 줌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노동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이익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 북부의 자본가들은 인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이윤추구의 동기로써 노예해방을 추구하였다.

이후 노동-자본의 대립관계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과제로 노동해방을 둘러싼 갈등이라 할 수 있으나 현실적이고 단기적인 과제는 역시 고용안정과 임금상승에 관한 것들이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와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고용계약을 체결하며 노예와는 또 다른 해고의 자유를 누리는 한편, 유아노동의 교육효과를 강조하면서 노동자를 ‘해고’의 자유를 가진 노예로 다루곤 하였다. 노동자와 좌익은 이에 맞서 파업의 권리를 획득하고 고용안정, 노동시간 등 근로조건의 개선에 힘을 쏟았다.

■ 노동의 시민권 획득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시기 동안 자본주의의 고유한 재생산 위기와 노동계급의 부단한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의 고용안정은 이른바 케인즈 주의적인 국가기제 안에서의 계급타협의 산물인 ‘노동기본권’의 쟁취를 통하여 일정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이 자본가들에게 자신을 자르지 말아달라는 구걸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가 기업을 가꾼 주인임을 선언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한편으로 노동의 안정은 그 시기 재생산의 기제에 도움이 되었기에 자본으로서도 노동에게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숨통을 튀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안정 등 ‘노동의 기본권’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가 또 한 번 위기를 겪게 되는데 주요하게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산의 유연적 축적, 자본의 세계화, 공공서비스의 후퇴, 보다 강화된 경쟁의 도입 등으로 특징져지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일개국가가 더 이상 자본을 규제하는 것이 아닌 초국적 자본에게 자신의 국가를 세일즈 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달으며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 시민권 박탈의 주역, 신자유주의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 계급이 일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사민주의 국가들마저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해치는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하였고 그것은 ‘국가경쟁력의 강화’라는 레토릭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의 유연화’는 아직 노동기본권의 본래적 의미조차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 제3세계 국가에게마저 무차별적으로 강요되었다. 비정규직에 대해서 네델란드의 반절만큼도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서 네델란드식 노사협조 체제를 구축하자는 웃기지도 않는 난센스가 주장되어지는 남한 땅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9월 13일 노동부가 입법예고한 파견근로 관련 법안의 개정안과 제정안은 이 난센스 희극의 최신판이다. 입법 예고된 안을 보면 지난 90년대 말 제정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비정규직을 생산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근로자파견법이 또 한 번 무소불위의 군홧발로 노동기본권을 작살내게 될 것이다. 노동문제에 조예가 깊다는 한 여당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 법의 취지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굴복하는 법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며 알아서 잘 하라는 뻔뻔한 멘트를 잊지 않는다.

■ 노예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지난 시기 피로써 쟁취한 투쟁의 성과는 ‘세계시민권’을 갖고 있는 초국적 자본과 자국의 시민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노동, 그리고 이에 무력하게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을 드는 국가권력 사이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해있다. 그 옛날 노예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며 공장에 취업했던 노동자는 이제 그나마 신분이라도 보장되었던 노예생활을 그리워해야 할 판이다. 아무리 무자비한 주인이라도 자기 노예가 다쳤다면 그것은 재산의 손실이기 때문에 치료는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남한 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다치면 그것은 바로 노동자 신분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지금 열린우리당을 점거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또 내일 비정규직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정규직들은 더 이상 ‘노동귀족’이 아니다. 여태까지 근로파견업종을 몇몇 직종으로 제한하였던 기존법이 새로 고쳐질 법에서는 몇몇 직종을 제외하고 전 업종에 걸쳐 파견근로를 허용하는 이른바 네거티브리스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길은 하나다. 또다시 노동의 정당한 시민권을 획득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1세기 최고의 유망직종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다. ‘인력파견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