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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중 인상적이었던 책들

올해가 아직 한 달 조금 넘게 남았지만 글 올리는 것도 뜸하고 해서 올해 읽은 책들 중에서 인상 깊었던 책 몇 권을 소개할까 한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 경제 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미국

냉전 시기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문가인 그렉 브라진스키의 저서다. 저자 스스로도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쓰인 책이다. 저자는 미국이 자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하려 시도한 허다한 사례 중에 거의 유일한 성공사례로 남한을 꼽았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위정자와 시민사회, 남한의 위정자와 시민사회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이승만을 개차반 취급하는 것이 이색적임.

백은비사 : 은이 지배한 동서양 화폐전쟁의 역사

우리는 경제사조차 서구의 시각을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과거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제대국이었던 중국의 경제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다. 이 책은 그 빈틈을 어느 정도 채워준다. 왜 중국이 다른 나라와 같은 형태의 제국주의 정책을 취하지 않았는지, 왜 스페인이 남미에 진출했는지, 왜 중국은 은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다. 화폐전쟁 유의 음모론 책보다는 조금 더 차원 높은 매력을 지닌 중국인에 의한 중국과 그 주변의 경제사.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의 대표작인 ‘1984년’의 최초의 외국어 번역이 한국어였다고 한다. 당연히 대표적인 반공(反共)서적으로 유용하게 쓰였었는데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조지 오웰 스스로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였다. 이런 그의 포지션을 잘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 이 르포르타주다. 노동자의 삶에 직접 스며들어가서 느낀 불편함, 건강함, 역동성 등을 솔직한 필치로 적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기성 운동권들의 나태함, 위선, 한계 등도 적고 있다. 1984년은 아마 그러한 고민의 연장선의 작품이었으리라.

점과 선 / 모래그릇

올 한해 의미 있는 발견은 일본 최고의 추리작가로 칭송받는 마쓰모토 세이초다. 배우 김혜수 씨가 읽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고 무심코 빌려본 작품인데 패전 후 일본사회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묘사된 이 작품들을 읽고 있노라면, 시대를 뛰어넘는 그 암울함과 긴장감이 가슴에 느껴진다. ‘점과 선’은 실종된 남편을 찾는 아내의 일화를, 모래그릇은 실력을 인정받은 작곡가의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이 맘에 들어 DVD까지 직접 구해서 봤는데 영화의 작품성도 뛰어나다. 특히 ‘모래그릇’(1974년)은 걸작.

골목 사장 분투기 : 자영업으로 본 대한민국 경제 생태계

이정우 교수에 따르면 1963~1979년 동안 국내총생산은 131조 원 발생했는데, 지가는 326조 원 상승했다고 한다. 결국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위해 불로소득을 용인 내지는 독려한 것인데, 이제 그 모순이 지금의 자영업자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고 있다. 아무리 벌어도 높은 임대료 때문에 버틸 수가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 뛰어든 저자가 생각하는 자영업 생태계를 담담한 필치로 풀어나간다. 그 와중에 프랜차이즈 방식 또한 자영업자를 옭아매는데 그 올가미에서 빠져 나온 한 자영업자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는 한니발 렉터처럼 식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연쇄살인마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잔인한 캐릭터일까? 저자는 사회의 곳곳에 사이코패스가 존재하는데 경영인, 외과의사, 특수부대 요원과 같은 이들에게서 이런 특성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인간을 사이코패스와 “정상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별개로 하고라도 매우 흥미 있는 주장이다. 무엇이 그들을 사이코패스로 태어나게 또는 자라나게 했는가에 대한 이런저런 사례와 임상실험 내용등이 소개된다.

기나긴 이별 / 깊은 잠

올해의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발견은 레이먼드 챈들러. 한때 흠뻑 반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매력적인 유머코드와 문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에서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아무리 매력적인 스릴러라 하더라도 스토리의 파악을 위해 대충대충 읽어나가는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작품들만큼 한 문장 한 문장 아껴가며 읽었다. 그리고 그럴 가치가 있었다. 두 작품 역시 모두 영화화되었는데 ‘깊은 잠’의 경우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둘 다 소설이 더 재밌다.

지상의 위험한 천국 :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실체

저자는 미국의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도다. 일종의 인사이더인 셈인데 그런 그가 미국의 개신교 중 일부세력이 어떻게 파시즘적인 성향을 강화시켜가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집단 자살극이나 벌이는 “소수의 광신도”면 “사회의 다양성” 차원에서 내버려 둘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재 미국 사회 전반을 극단주의로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티파티 등의 극단주의 세력이 미국 정치를 뒤흔드는 꼴을 보면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 : 왜 보수가 남는 장사인가?

위에 소개한 책과 함께 읽으면 미국 사회의 극우 세력의 실체가 좀 더 명확히 다듬어진다. 원제는 The Wrecking Crew로 ‘자신이 탄 배를 스스로 파괴시키는 선원들’을 일컫는 표현인데,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우파들의 행태를 보면 이 표현이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다. 즉, 정치권에 진입한 우파들이 스스로를 반정부 세력으로 자처하며 정부의 긍정적 기능을 약화시키고 파괴시키는데 주력한 결과, 현재의 미국사회는 비효율적이고 사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부조직으로 변질됐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

“독재는 했어도 경제는 살렸다”는 주장이 당연시되는, 또는 더 노골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린 요즘 이러한 시도는 분명 유의미하다. 민주당 의원을 지낸 경제학자 유종일 씨가 주축이 되어 이정우 씨 등 진보적인 연구진이 박정희 경제신화의 허상을 고발하고 있다. 충분히 좋은 내용이 담겨 있으나 다만 기획의 제약조건 때문인지 좀 더 입체적인 모습을 조명하지 못하는 미흡함이 아쉽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시도들을 아예 기획 시리즈로 해서 내면 어떨까 싶다. 레이디 가카가 분노하시겠지만.

6인의 용의자

비카스 스와루프는 ‘엄친아(저씨)’다. 인도의 법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역사, 심리학, 철학을 공부하고 외무부의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양호한 약력인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영화로도 큰 인기를 얻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작가이기도 하다. 외교관으로 근무하는 틈틈이 두 달 만에 썼다고 알려져 더 사람 기를 죽이는 아저씨다.

‘6인의 용의자’는 비카스 스와루프의 신작이다. 미스터리적 기법을 차용했던 전작에서 나아가 이 작품은 본격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다. 소설은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州)의 내무장관이자 라이 그룹의 소유주인 자간나트 라이의 개망나니 아들 비키 라이가 파티를 연 날 살해당하고, 그 파티에서 총을 가지고 있었던 여섯 명의 용의자에 관한 범행동기와 그 추리과정을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인도 작가가 인도를 배경으로 쓴 스릴러라는 점이다. 팝송처럼 스릴러도 영미권이 큰 축을 이루고 프랑스나 일본, 기타 서구권이 나머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면 인도는 분명히 이 업계에서 ‘듣보잡’일 뿐이다.(maybe 한국 too?) 비카스는 그런데 이 한계를 서구적인 스토리텔링과 인도라는 배경이 지닌 오리엔탈적 판타지가 버무려진 전작 ‘슬럼독’을 통해서 어느 정도 뛰어넘었다.

그리고 ‘6인의 용의자’는 그 특권을 이용하여 전작의 미장센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인도산 스릴러를 시도하여 제1세계에 도전하였다. 자의적인 개념정의로 영국이 ‘응접실 스릴러’, 미국이 ‘테크노 스릴러’, 일본이 ‘한(恨)을 소재로 하는 스릴러’ 정도의 이미지를 구축하였다면, 인도의 비카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도의 정치사회적 복합성을 소재로 하는 스릴러’ 정도의 틀을 구축하려 하지 않는가 하는 짐작을 해본다.

그 다음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소설의 복합적인 시점(視點)이다. 서술에 있어 이제 복합적인 시점은 그리 신선할 것도 없지만 추리소설에 있어서만은 상당히 공을 들여 써야하는 장치다. 자칫하면 드러내지 않아야 할 사건해결의 실마리가 (독자에게) 새어나갈 수 있고, 또는 (독자에게) 어느 정도는 인지를 시켜줘야 할 실마리를 감추어버리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소설은 여섯 명의 용의자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를 따로 떼어 내어 1인칭과 3인칭의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비슷한 방식으로는 보리스 아쿠닌의 ‘리바이어던 살인’이 떠오른다) 관건은 이 방식이 독자의 몰입에 도움이 되었는지의 여부일 텐데 일단 개인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입체파 미술작품적인 쾌감을 제공하기도 하므로…….

요컨대 인도의 다양한 계급, 정치적 부패, 종교적 갈등 등의 혼란상은 스릴러의 소재로 써먹기에 양호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고, 비카스는 외교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복합시점은 그 다양한 인도의 얼굴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결정적으로 역시 미스터리의 미덕은 ‘재미있냐’인데 재미는 있다. 학점을 주자면 B+정도다. 하찮은 내가 건방지게 A를 주지 않는 이유는 ‘슬럼독’을 수작으로 평가하지 않는 이유와 유사하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꾼일지 몰라도 미묘한 예술적 쾌감에 한방을 먹이는 훅은 없다.(한 예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은 여러 허술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훅이 있다) 이 작품 역시 다 읽고 나서 둔중한 여운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하튼 조만간 영화화될 가능성이 큰 작품이다. 🙂

리바이어던 살인

무엇보다 고전적인 아가사 크리스티 풍의 세팅이 맘에 든다. 여러 국적의 유럽인들이 모여서 저마다의 우아함을 뽐내지만 결국은 잿빛 세포의 소유자인 에큘 포와르라는 탐정의 명민함 앞에 무릎 꿇게 되는 결론 부분의 회합 부분이, 이 소설에서도 세계 최대의 여객선 리바이어던의 윈저홀에서 오마쥬처럼 재현된다. 그렇지만 아쿠닌은 한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인 고슈 경감이 연출하고자 했던 그 장면이 대망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오히려 이후의 추가적인 사건을 예고하는 암시였을 뿐이라는 것을 밝히며 일종의 변칙플레이를 시도한다. 그 시도 역시 제법 맘에 든다. 이외에도 단순히 고전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변칙플레이는 다양한 인칭을 사용한 글의 서술방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인 에라스트 판도린을 제외한 여러 명의 탑승객은 일기 또는 편지를 쓰면서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입체적 조명은 내 어설픈 단편에서도 가끔 시도되었던 것이지만 글을 입체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다. 잘만 쓰면 꽤 쓸 만하고 이 소설 역시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특히 외로운 동양인 아오노에 대한 묘사는 당시 유럽인들의 인종적 편견에 대한 고발 형식을 띠면서도 웃음을 선사하는 그런 것이었다. 국내에 아쿠닌의 추리소설이 두 편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은 그 중 한편이다.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을 다시 읽었다. 내가 어릴 적 좋아했던 일본의 추리작가 모리무라세이치(森村誠一)가 1975년 ‘야성시대(野性時代)’에 연재한 것을 1976년 단행본으로 발간한 작품으로 500만부가 팔려 가히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한번 읽은 적이 있는데도 줄거리가 전혀 생각나지 않아 마치 새로 읽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읽어버렸다. 이럴 때는 건망증 증세가 심한 것이 도움이 된다.

여하튼 …

그의 작품은 사실 서구권 작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틱한 반전(反轉)은 별로 없다. 그의 작품이 맘에 드는 점은 그러한 반전보다도 등장인물들을 마치 실험 상자에 넣고 요리조리 흔들어 그들의 반응을 즐기는 듯한 그의 상황설정과 사건전개가 맘에 들기 때문이다. 다분히 새디스틱한 감정이다. -_-; 이러한 인간에 대한 실험정신은 무릇 다른 추리작가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무리무라세이치가 더욱 맛깔스럽게 해낸다.

이 작품은 전쟁 통에 엄마와 헤어져 뉴욕의 할렘가에 내팽개쳐진 동양인과 흑인의 혼혈인 조니 헤이우드가 일본에 남은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가 한 빌딩 엘리베이터에서 살해당하면서 시작한다. 인간에 대한 증오가 가득한 형사 무네스에가 이 사건을 맡아 결국은 사건을 해결해낸다는 것이 큰 줄거리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에서 큰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 중반 정도 읽다보면 이미 유력한 용의자도 밝혀진다. 그 밝혀지는 과정도 약간은 억지스럽다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끝까지 소설을 읽어 내려가게끔 만드는 매력은 앞서 말했듯이 무리무라세이치의 집요한 인간성 탐구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아집과 이기심 때문에 극한으로 몰고 가는 인간 군상들의 몸부림이 매우 선명하게 느껴진다.

다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검색해보니 우리나라에선 이 소설을 1991년도에 출간된 문고판으로밖에 구할 길이 없다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도 그 책이다. 한편 이 소설은 일본에서 1977년부터 몇 차례 극화되었었다고 하고 2004년에도 미니시리즈로 극화되었다. 2004년 판은 이미 구했고 – 어둠의 경로를 통해 ^^; – 느긋하게 감상할 생각을 하니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