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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과연 신용평가사를 단죄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호주법원에서 인상적인 판결이 하나 있었다. 이 판결은 호주의 지방자치단체들이 구입한 증권의 투자손실에 대해 스탠다드앤푸어스(Standard & Poor’s)가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다. 이번 판결은 지난 2012년 호주 법원이 S&P에 부과한 3천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판결에 불복해 제기한 항소에 대한 판결이었다. 이 판결에서 Peter Jacobson 판사는 S&P의 증권에 대한 신용평가가 “비이성적이고, 부도덕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ABN암로 호주 지사는 2000년대 중반 투자등급 회사들의 CDS와 연계된 소위 “렘브란트 채권”을 만들었다. 이들은 2006년 S&P로부터 해당 상품에 대해 최고 투자등급을 얻어내 호주 뉴사우쓰웨일즈州의 13개 지방의회에 판매했다. 대부분은 농촌지역으로 손해액이 그들의 예산집행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만한 조그만 동네들이다. 이러한 풍경은 금융의 세계화로 말미암아 신용평가사 등 금융주체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이 전 세계적임을 알려주는 모습이다.

S&P와 이 회사의 모회사 맥그루힐은 이 판결로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됐다. 미국 법무부 역시 지난해 2월 4일 S&P의 파생상품에 대한 평가행위에 대하여 투자자 사기 혐의로 고소하여 50억 달러에 이르는 벌금 부과를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S&P는 “호주법상 신용평가사의 투자자에 대한 주의의무 관련조항이 다른 지역의 잘 다듬어진 조항과는 차이가 있다”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하고 있지만, 이 판결은 서구에서의 다른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지난 신용위기에서뿐만 아니라 이전의 다른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신용평가사의 신용평가에 대한 비난과 책임 규명 시도는 여러 번 있어왔다. 하지만 신용평가사는 그때마다 법의 처벌을 교묘하게 피해왔다. 부실한 신용평가가 투자손실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던 가장 강한 신평사의 논리는 ‘그들이 언론사이며 신용평가행위는 일종의 언론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논리였다. S&P가 언론재벌 맥그루힐의 계열사라는 사실과 이들의 주장이 묘하게 겹친다.

이런 논리 안에서 그들은 “비록 소가 만든 상품이라도 평가를 해야한다”는 막말을 하고 실제로 리스크가 결코 작다할 수 없는 파생상품들에 대하여 최고 등급을 부여하여 시장의 흥청망청한 투자성향에 한 몫 하였다. 2008년 이후 이들의 평가행위로 말미암아 입은 손실은 약2조 달러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평가사들은 신용위기 이후 금융기관들이 정신없이 통폐합되는 과정 속에서도 손해도 보지 않았고 시장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도 줄지 않았다.

S&P가 이번 판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이 또 하나 있다면 “등급 의견을 사용하는 투자자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S&P와 같은 당사자에게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나쁜 정책이고, 스스로 자산실사(due diligence)를 해야 하는 투자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본다면 과연 신용평가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자산실사는 투자자 책임이라면 대체 왜 신용평가사가 그렇게 막강한 권한을 누리는 걸까?

이 질문에 대답해줄 이는 많지 않다. S&P를 비롯한 3대 신용평가사가 누리는 권력은 대공황 이후부터 그 실효성을 인정받아 미국정부로부터 권력을 보호받아왔고 어느새 권력은 개별정부 단위를 벗어난 것 같다. 대안적 경향으로 미국 내에서의 독립적인 신용평가사가 독점구조를 깨려하거나 중국과 러시아가 주축이 된 별도의 신용평가 체계를 수립하려 하고, 장하준 교수와 같은 학자는 국제 공공기구의 설립을 주장하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미국과 유럽에서 진행 중인 또 다른 소송에 영향을 미쳐 어떤 식으로든 신용평가사의 책임을 묻게 된다면 공고한 독점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미국 법무부의 벌금부과 계획만 하더라도 신용평가사의 행위에 대한 연방정부 차원의 첫 법적조치다. 이는 어쨌든 미국정부조차도 신용평가사의 전횡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자국 신용평가사의 이니셔티브를 뺏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조항에 관한 호주 정부의 결정

시장선거가 끝나자마자 한미FTA 이슈로 나라가 시끄럽다. 지난번엔 찬반 양측이 한바탕 “끝장토론”을 벌였지만 예상대로 끝장은 나지 않은 채 팽팽한 평행선만 그렸다. 하지만 역시 의회는 찬성론자들이 장악하고 있어 한미FTA의 비준이 유력한 상황이다. 이 와중에 반대론자의 대표적 이론가인 송기호 변호사가 정 한미FTA를 통과시키고 싶으면 이 조항만이라도 빼달라고 애걸하는 조항이 하나 있는데,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조항이 그것이다.

ISDS는 외국 투자자가 투자국 정부의 정책 등으로 피해를 봤을 때 해당 국가를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등에 제소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즉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 사법체제를 벗어나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인데, 이는 주로 “간접수용”이라는 희한한 개념과 쌍으로 같이 다닐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제도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을 것이나 소위 “사법주권”의 측면에선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 한미FTA 협상에서도 법무부와 재경부가 이 제도를 다 반대했다. 하지만 통상교섭본부는 이를 무시하고 추진했다. 부처간 힘의 논리에 따라 과거 같으면 가능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참여정부 시절 권력이 강화된 통상교섭본부는 이를 밀어붙였다 한다. 한편 FTA에서 이 조항이 빠진 사례도 있다. 2003년 체결된 호주와 미국의 FTA의 경우에는 ISDS 조항이 협약에 반영되지 않았다. 반대론자들은 주로 이 사례를 들어 반대를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호주에선 이 사례를 계기로 NGO들이 이 이슈를 제기하여 급기야 금년 4월 정부는 향후 호주가 체결할 모든 무역협정에서 이 조항을 채택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고 한다. 사실 당시 해당 조항이 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미 양국의 법률 시스템이 분쟁을 조정하는데 있어 충분히 법적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왕성한’ 제도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사례가 호주 사회에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킨 셈이다.

금년 4월 국제무역협상에로의 호주의 접근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재고의 일환으로, 길러드 정부는 양자간과 지역간 무역협정에서 더 이상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조항을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 새로운 정책은 공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외국 투자자들에게 ‘더 큰 권리는 없다’는 원칙과, 이를 위해 ‘규제를 할 수 있는 정부의 권리’ 라는 원칙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NGO들은 오랫동안 이 원칙을 지지해왔는데 정부는 보통 립서비스로만 일관해왔었다.
In April of this year, as a part of a broader rethink of Australia’s approach to international trade negotiations, the Gillard Government vowed that it will no longer include provisions on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ISDS) in bilateral and regional trade agreements. The new policy is justified by reference to the principles of ‘no greater rights’ for foreign investors and the government’s ‘right to regulate’ to protect the public interest. These principles have long been advocated by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NGOs) but have generally only been paid lip service by governments.[Australia’s rejection of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Four potential contributing factors]

ISDS에 대해 ‘위헌이다’, ‘지나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힘의 균형상 한국이 불리하다’, ‘투자자 호보를 위해 불가피한 제도다’ 등 갑론을박이 있다. 현재 그 유사한 사례로는 국제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한 용인경전철 사업을 들 수 있다. 이 경우를 보면 주무관청의 잘잘못을 떠나 사법권이 해외기관에게 맡겨진 사례의 결과를 잘 살펴볼 수 있다. 과연 이 낯선 풍경이 일상화되었을 때 사법주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때서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