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는 反자본주의적인가?

비버리지는 전후의 복지 공급에 관해 네 가지 가정을 세웠는데, 그 전부가 다음 세대 동안 영국의 정책으로 흡수되게 된다. 공공 의료 서비스, 적절한 국가연금, 가족 수당, 완전 고용이 그것이다. 이중 완전 고용은 그 자체로 복지 공급은 아니지만, 전후 건강한 성인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정규 직업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되었기에 다른 모든 것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가정에 따라 실업보험과 연금, 가족 수당, 의료 서비스와 기타 복지의 풍부한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비용은 노동 인구 일반에 부과한 누진세는 물론 임금에 부과된 세금으로 지불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중대했다. 개인 건강보험에 들지 못한 일하지 않는 여성들이 처음으로 의료 서비스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 거의 구빈법과 자산 조사 제도가 강요하는 굴욕과 사회적 의존은 제거되었다. 복지 국가의 시민은 이제 공적 부조가 필요한 (추정컨대) 드문 경우에 당연한 권리로서 이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포스트워 1945~2005, 플래닛, 2008년, pp 136~137]

1942년 발표되어 전후 영국 복지정책의 근간을 수립한 비버리지 보고서에 관한 이야기다. 이 보고서는 영국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W. H.비버리지가 정부의 위촉을 받아 사회보장에 관한 문제를 연구 · 조사한 보고서다. 완전고용을 정책목표로 정했다는 사실에서 풍기는 케인즈 주의적인 분위기는 영국의 출발이 대륙의 그것과 달랐음을 잘 알 수 있다.

한편 토니 주트는 그의 저작 ‘포스트워’에서 비버리지 보고서가 특히 보편적 복지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쟁 이전의 유럽이 비록 다른 대륙에 비해서는 복지 수준이 월등하였지만 그 복지가 노동자 개인이나 특수계층에게 집중되었다면 영국이 채택한 의료 서비스의 대상은 그 범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였다는 설명이다.

즉, 전간기 영국에서 실업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자산 조사’를 통해 결정되었는데, 19세기 구빈법의 ‘최소 선정 least eligibility’ 원칙에 근거하여 공공 지원 신청자가 수급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빈곤이 실제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국의 전후 복지 제도는 이러한 자산 실사를 통한 차별성이 가지는 폭력성을 제거한 것이다.

사람들이 밥 좀 먹여 달라고 요구하자 지배계급은 분배보다 성장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이제 성장이 어느 정도 됐으니 분배를 하자고 말하자 지배계급은 그 분배를 “복지포퓰리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원문]

어제 트위터에서 올린 글이다. 요즘 틈만 나면 등장하는 “복지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이 짜증나서 올린 글이다. 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하여 리트윗을 했지만 반론도 있었다. 반론의 요지는 북구의 복지가 언제나 좋은 것이란 국민의 시선이 변화할 필요가 있으며 “자신에게 알맞은 복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시장에게 맡기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이분의 주장은 보편적 복지에서 선택적 복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지 자체를 시장화하자는 주장에 가까워 보인다. “복지를 시장에서 선택하자”는 표현은 엄밀하게는 맞지 않을 것이다. 복지의 영역을 축소화하여 그 부문을 상품화하여 시장에 넘기는 표현이 맞을 것인데, 이를테면 보편적인 건강보험을 시장화하는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이후, 이미 공공서비스로 인식되던 여러 가지 것들이 시장화되긴 했다. 유럽식 복지의 한 축을 구성하던 영국에서 바로 그러한 보편적 복지가 폐해가 크다면서 등장한 민영화는 이런 시장화를 시행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재정위기의 논쟁이 뜨거운 상황에서 언제든지 고려 가능한 옵션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영역에서의 복지를 축소하는 것이 올바른 대안일까? 그 수혜자가 시장에서 선택하게 하면 최적의 대안이 도출될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이 전후 유럽인들의 생각이었고 그들이 택한 대안은 보편적 복지였다. 절대적 빈곤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을지 몰라도 한편으로 그것은 극단적 선택에 대한 중도적 해결책이기도 했다.

현대 유럽의 복지 국가가 탄생한 배경에도 동일한 동기가 숨어 있었다. 1940년대의 통념에 따르면, 지난 전간기의 정치적 양극화는 경제 불황과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둘 다 사회적 절망이,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엄청난 간극이 키워냈다.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려면, ‘인민의 상태’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토머스 칼라일은 100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은 누군가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저절로 벌어질 것이다. 누구도 만족시키지 않는 방식으로”[같은 책, p 132]

복지 국가의 전반적인 취지는 사회적 재분배였지만 (다른 제도보다 재분배의 의미가 조금 더 컸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다. ‘부자들의 피를 빨아먹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즉각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느낀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장기적으로 실질적인 수혜를 입은 자들은 전문직과 상인들로 구성된 중간 계급이었다. [중략] 유럽의 복지 국가는 사회 계급들을 분열시켜 상호 간 적대하게 만들기는커녕 이전보다 더욱 긴밀하게 결합시켰고, 따라서 복지 국가의 보존과 방어는 공동의 관심사가 되었다.[같은 책, pp 138~139]

요컨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온존하는 와중에서의 보편적 복지는 자본주의 지지자들이 보기에 더 극단적인 방식을 방지하고자 하는 사회 안정책이다. 복지는 못사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수혜차원이라기보다는,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중산층에게까지 혜택이 전염됨으로써 이런 사회를 보호해야겠다고 하는 보수적인 사회를 조성하는 역할도 한 것이다.

남한에서는 남북대치 상황 등으로 인한 이념적 극단성이 좀 더 기묘한 측면이 있다.  경제 국면으로 보면 우리도 복지에 대한 당위성이 초정파적으로 공유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이제야 집권당이 찔끔찔끔 이야기하고 있고, 좌파를 자처하는 정당조차 ‘소비의 사회화’ 공약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 복지는 사실 생각만큼 “좌파”적이 아님에도 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복지가 지속가능한 대안이냐 하는 문제는 별도로 논의될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과연 남한 사회에서의 복지 확충을 “복지포퓰리즘”이라 딱지 붙이며 – 포퓰리즘을 절대악적인 뉘앙스로 쓰는 나라에서 – 재정위기의 심각한 원인이라고 매도하는 분위기가 올바른 – 최소한 형평에 맞는 – 논의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복지포퓰리즘” 드립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비디오가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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