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이른 아침 교정의 잔디는 6월의 아침이슬을 흠뻑 담아두고 있어 푸르름이 눈부실 지경이다. 과함도 모자람도 없이 초여름의 아름다운 교정은 크게 숨을 쉬어 그 행복한 공기를 폐속에 한껏 담아두고 싶은 경치다. 그러나 나나 그 녀석에게 있어서나 이러한 상쾌함을 느끼는 것조차 일종의 사치다. 한국땅에서의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오만함, 권모술수, 그리고 자기학대를 미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란다에 나와 이렇듯 바람을 쏘이고 있는 것도 서로를 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녀석들이 보기에는 충분한 비아냥거리가 된다.

K가 허공을 응시한 채 이맛살을 찌푸렸다. K와 나는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 같은 동네, 비슷한 취미, 비슷한 성적 – 둘 다 어림 중상위권은 유지하고 있다 – 이 자연스럽게 우릴 단짝으로 만들어 왔다. 학교생활에서 우정은 일종의 당의정이다. 겉에 발려진 달콤한 우정이라도 없으면 누가 이토록 쓴 약을 삼키려 하겠는가?

[스트레쓰가 많이 쌓이냐?]

K에게 물었다.

[자퇴해야 겠어.]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자퇴한다는게 자퇴한다는거지 무슨 말은 무슨 말?]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K에게 당혹감을 느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왜 자퇴를 해 임마.]

[너무 힘들어. 너 요즘 내가 어떤지 아냐?]

[어떤대?]

워낙에 까탈스러운 K는 쉽게 사람과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다. 우리학급에서도 나정도나 마음을 터놓는 형편이어서 속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쳐가는 것 같아.]

순간 소위 고3병이 이 녀석에게도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사 천하태평인 나는 이해못할 바였으나 신경이 예민한 K에게는 좀 다를 것이다. 그날 K가 내게 해준 이야기에서 판단하건데 K는 일종의 난독증에 걸린 것 같았다. 즉, 책을 보고 있노라면 글자들이 갑자기 춤을 춘다는 것이었다. 글자와 글자가 서로 엉키고, 섞여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어쨋든 나는 K에게 내일모레로 다가온 중간고사때문에 너무 긴장한거라고 어설픈 진단을 내렸지만 맘 한켠으로는 근본원인은 이 자그마한 적자생존의 경쟁사회를 버거워 하는 K의 나약함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수업시간에도 문득문득 앞자리에 앉아있는 K의 뒷통수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내 주위에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이 녀석은 나를 친구로 여길까?’, ‘친구라면 이럴때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여러 상념들이 머릿속을 배회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어 학교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식은 밥과 영양가없는 떡라면으로 때우고 있을때 내가 먼저 운을 떼었다.

[내가 도와줄께 좀 참아봐라.]

[니가 뭘?]

국물을 마시던 K가 대답했다.

[중간고사만 어떻게 넘기면 좀 마음이 차분해질거야.]

[머리에 들어오는게 없는데 시험이라도 제대로 치겠냐? 다 틀렸어. 더구나 내신반영비율도 큰 시험인데.]

체념한 표정으로 K는 식은 밥을 국물에 말아넣었다.

[내가 보여줄께.]

요지는 그렇다. 어차피 시험동안 자리배열은 평소와 같았다. 뒷자리에 앉은 내가 쪽지로 정답을 건네주고 K가 그걸 베끼면 되는 것이다. K는 처음엔 난색을 표명했다.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회로도 있는 거라는 거창한 삶의 방식까지 들먹이면서 우리들의 음모를 정당화시켰다. 어쩌다 도움을 주는 쪽에서 설득하는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지만 결국은 K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렇지만 나역시 마음 한구석이 씁슬함을 느꼈다.
그로부터 이틀뒤 시험이 시작되었다. 첫째 시간은 국어였다. 문제는 평이한 난이도여서 나는 일찌감치 답안작성을 마치고 약속된 쪽지를 시험감독 몰래 써내려갔다. 소위 자유적인 면학분위기를 강조하는 대머리 교장의 교육방침덕택에 시험감독은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다. 시험감독은 아예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그래도 긴장이 되어 종료벨이 울려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K가 몸을 돌려 나에게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잘썼냐?]

[오냐. 한두개는 일부러 다른 답을 적었다. 완전범죄를 위해서.]

[잘했다.]

맥이 빠진 나는 싱겁게 대답하고는 교실을 나와버렸다. 일종의 가속도가 붙은 우리의 음모는 여타 과목시험에서도 무리없이 진행되었다. 이틀동안 보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남은 과목 공부를 위해 나는 도서관으로 K는 집으로 갔다. 어차피 그녀석은 책도 읽을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도서관쪽으로 발길을 돌린 나를 향해 K가 소리쳤다.

[고맙다.]

‘그래 고마워야지.’

형광등 불빛아래서 영어참고서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뭔지 모를 역겨움이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포화속에 피어난 알량한 우정이라는 꽃 한송이… 친구를 위함인가 나를 위함인가. 나혼자 도덕군자인 것처럼 행세한들 세상의 비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를 책상에 쳐박은 200여명의 무뇌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지함과 단순함이 행복의 조건이라더니 과연 행복한 녀석들이다. 자꾸 딴생각이 들어 화장실에 들어가 담배를 한대 물어 피웠다. 자비로운 이 학교에서는 화장실에 재떨이까지 비치해놓았다. 길게 한모금을 들여마시고 천정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결국 그날은 학교에서 밤을 샜다. 샜다고는 하지만 밀려드는 피로에 제대로 공부한 것도 없이 새벽 4시경에 수학참고서를 배게삼아 선잠을 청했다.

1교시 수학시간은 부족한 잠때문에 머리가 멍했다. 어차피 수학은 주관식인 관계로 K나 나나 수학은 쪽지를 건네지 않기로 했을뿐 아니라 그나마도 시간이 모자랐다. 종료벨이 울린뒤 피곤한 눈을 부비고 있을때 K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피곤해보인다.]

[아냐.]

펴놓은 영어참고서에 눈길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K는 잠시 무언가 말하려는듯 머뭇거리다 잠자코 밖으로 나갔다.

영어시간이었다. 영어는 내가 자신있어 하는 과목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문제가 난이했다. 너댓개가 애매했다. 종료를 15분여 남겨놓고 답안을 작성한후 쪽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 실수였기를 마음한구석에 바라지만 – 6번답을 빠뜨리고 적었다. 덕택에 번호가 달려있지 않은 쪽지를 K가 그대로 받아베끼가다가는 한칸씩 답을 올려 적은 꼴이 되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나는 6번답을 적지 않은채 K의 어깨밑으로 쪽지를 슬며시 밀어넣었다. 나머지 시간동안 나는 모래성같은 나의 우정에 착잡함을 느꼈다. 종료벨이 울리고 나서 나는 K에게 말도 건네지 않은 채 묵묵히 독일어참고서를 보고 있었다. K가 먼저 말을 건넸다.

[정말 고맙다.]

[고맙긴 무슨…]

가슴 한쪽이 뜨끔했지만 능청을 떨었다.

[이번에 난 너가 진짜 내 친구라는 것을 알았어. 비록 우리가 옳은 일을 한건 아니지만 너가 많은 힘이 됐다.]

[그래. 다행이다. 내가 뭐랬어.]

기분이 우울해졌다.

[어제 집에 갔는데 마음이 무척 차분해지더라고. 그래서 책을 들여다보았더니 글자가 엉키지 않는 거야. 머리도 맑아지고. 그래서 오늘은 네 쪽지를 보지 않고 내가 직접 풀었다. 두세 개 빼고는 다 맞은 것 같아.]

K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보고 있던 독일어참고서의 글자들이 베베 꼬이기 시작하면서 제각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12 thoughts on “우정

    1. foog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블로그도 문을 닫으신 것 같더니.. 지금 가보니 재개장을 하셨군요. 화분이라도 하나 보내드려야 할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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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agle2

    이 글 무척 재미있네요. 제 딴엔 선의로 시작했지만 결국엔 내 일이 아니라고 무성의하게 마무리 지었던 옛날 일도 생각나고요.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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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j4blog

    이런 이런…눈을 질끈 감고 쪽지를 전해주는 그 혼란함이 친구의 감사의 소리를 듣고 얼마나 가중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 없던 고3병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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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요새는 중2병도 있다고 레진사마의 블로그에서 봤는데 허세근석 포스팅 엄청 웃기더만요..

      “뉴욕 해럴드 트리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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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rince

    정말 멋진 글인걸요 ^^;
    아직까지 글자들이 춤을 추는 경험을 겪어보지 않은게 다행인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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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저처럼 고3병 없이 차분한 학창시절을 보내셨나 보군요. 🙂
      근데 저같은 경우는 요즘 세상을 보면 세상이 베베 꼬여서 춤을 추니 큰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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