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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가 다시 앞서가고 있는 미국의 자본주의

런던 경제학 스쿨의 Saez씨와 Gabriel Zucman의 새 보고서는 이전에는 최상위 부자들의 부(wealth)의 지분을 매우 과소평가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중략] 1920년대에 하위 90%는 미국의 부의 단지 16%를 소유하였을 뿐이다. 이는 1929년의 붕괴 이전까지 전체 부의 4분의 1을 통제한 상위 0.1%의 것보다도 한참 모자라는 것이었다. 대공황의 시작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까지 전체 부에 대한 중산층의 지분은 꾸준히 들었는데, 이는 주요하게는 부유한 가구가 망가진 탓이다. 그 이후로 중산층의 지분은 보다 광범위한 자본 소유, 중산층의 소득증가, 그리고 주택소유 상승률 덕분에 국부와 함께 증가하였다. 퇴직연금에 대한 세금면제 확대도 또한 기여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중산층의 가구의 부에 대한 지분은 36%까지 증가했고 거칠게 볼 때 상위 0.1%의 지분의 네 배에 달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추세는 역전된다. [중략] (차트를 보라) 1986년에서 2012년까지 상위 1% 가구의 실질소득은 연 3.4% 증가한 반면 하위 90% 가구는 0.7% 증가하였다. 그러나 Messrs Saez와 Zucman은 추락하는 중산층의 순수자산 추이의 주된 원인은 치솟는 부채 탓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치솟는 주택가격은 모기지 부채 역시 늘어났기 때문에 중산층의 부의 증가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라한 주택의 가격이 떨어져도 부채는 그대로 남아 중산층의 부를 더욱 쥐어짠다.[It is the 0.01% who are really getting ahead in America]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화, 미국 산업에서의 금융업의 예외적 성장, 배당과 소득 비중의 역전, 인터넷 산업의 융성, 노조운동의 쇠퇴 등이 떠오른다. 미국이라는 한 나라만 놓고 본다면 소위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비롯된 현상도 있을 것이지만 산업구조의 변화라는 피하지 못할 원인에서 비롯된 현상도 있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과연 부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자본주의 체제의 부의 집중 경향에 있어서의 예외적인 시기였던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출처 : cfr.org)

최근에 빌 게이츠가 토마 피케티의 책을 읽고 이에 반박하면서 최상위 부자들이 상당수 이전 세대의 부자들에서 바뀌었다는 정황을 들어 피케티의 논지를 반박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자산 축적의 작동방식은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음은 분명하며 이를 이용해 부를 쌓는 이에 대한 부의 집중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음은 추세적인 것 같다. 즉, 자본(equity)의 소유는 소득 없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보편화된 수단이며 금융위기 전까지 정치권은 “자본 소유의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 평등을 주창하였지만 부동산 거품 붕괴와 함께 그 신화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반면 최상위층의 자본 소유와 축적 방식은 세계화와 더불어 더 세련되어 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자본 소유의 민주주의”에 어느 나라보다 앞선 나라였다. 한때는 망국병이라 할 만큼 부동산 투자, 즉 자본소유를 통한 시세차익의 시현은 국민적 붐을 이루었고 이는 차입을 통해 레버리지를 들어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며칠 전에 발생한 일가족 자살사건에서 알고 보니 가족 명의로 열다섯 채나 집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화제가 되었는데, 바로 그들이 그렇게 많은 집을 갖게 된 것이 부채를 통한 주택 구입이었다. 자본의 부의 축적 방식은 진화하고 있는데 아직도 중산층의 부동산 신화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가 하락이 反美주의를 패퇴시킬 것인가?

첫 붕괴는 故 우고 차베스가 그의 지역으로 수출하려고 노력했던 反美 “볼리바리안 혁명”의 고향인 베네수엘라일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예산은 배럴당 120달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가격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 나라는 빚을 갚느라 허덕였다. 외국환 보유고는 줄어들고 있고, 인플레이션은 치솟고 있고,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밀가루와 화장지와 같은 필수재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이란 역시 교묘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전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의 사치스러운 지출계획에 쓰일 방탕한 예산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가량 되어야 한다. 핵 프로그램을 좌절시키기 위한 제재조치는 특히 이를 어렵게 만들었다. 혹자는 수니파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 라이벌을 힘들게 하는데 유가를 이용하려고 미국과 공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기가 무엇이든, 하락하는 유가는 확실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Cheaper Oil : Many winners, a few bad losers]

번역한 인용문에 언급된 베네수엘라나 이란, 그리고 기사에 언급된 다른 나라인 러시아를 보면 공교롭게도 미국과 그리 친하지 않은 나라들이란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들 나라들이 지금 떨어지고 있는 기름 값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상황전개도 자못 흥미롭다. 셰일오일이라는 21세기 자원의 출현, 에너지 효율적인 자동차 등의 기술발전, 시장점유율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 또는 음모? – 사우디의 공급량 유지 등으로 말미암아 원유 수출로 먹고 살고 있는 이들 “反美” 국가들이 고통 받게 된 것이다.

즉, 미국이 과거에 반미국가를 괴롭히는 방법이 보다 직접적인 제재나 해당 국가의 독재정부 지원이었다면, 이제는 더 싸게 셰일오일을 퍼 올리고 연료효율이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된 셈이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말이다. 기사는 그런 상황을 은연중 즐기면서도 유가 하락이 지정학적 위기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이들 국가의 먹거리 중 원유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답이겠지만 국제적으로도 지정학적 위기 해소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 후 자기계발서 시장을 연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불안사회를 전제하고 있다. 가령 노후 자금을 최소한 10억은 모아놓아야 안정된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를 위해 실제 이상으로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노후의 경제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물론 금융회사와 그와 연계된 경제 연구에서 나온 공포마케팅의 일환이다. [중략]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일정한 집단과 나아가 한 사회 전체에 공포의 감정을 조장한다는 점이다.[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저, 북바이북, 2013년, p201]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영화가 있다. 제목 자체만으로도 특정상황에 대한 은유 등으로 쓸모가 많은지라 각종 지면에 꽤 많이 인용되는 영화다. 인용문의 메시지를 이 영화제목에 끼워 맞추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 후 자기계발서 시장을 연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누구에게나 잠재해있는 공포심이고 현대의 자기계발서나 재테크서는 이러한 공포심을 자극하여 시장을 창출한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계시를 통해 독자들의 불안도 잠재우고 영혼도 계발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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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cream“. 위키백과에서 제작됨.

이 그림을 자기계발서의 표지로 쓰면 어떨까?

‘거대한 사기극’의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기계발서를 읽고 신학을 전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계발서가 미국, 개신교, 자본주의라는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을 통해 탄생하고 발전했다고 분석한다. 이 세 요소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남의 도움이 아닌 자조(自助, self-help)를 최대의 미덕으로 여기는 자기계발의 메시지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마치 종교의 그것처럼 ‘믿고 실천하면 당신만은 현실의 난관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물론 그 성공은 대개 자본주의에서의 물질적 성공이다.

자기계발 전파자들은 메시지 전파의 대상을 미국의 세일즈맨에서 직장인, 여성, 심지어는 어린이까지 넓혀왔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각각의 대상에게 자기계발 신화는 불안을, 특히 물질적 빈곤에 대한 불안을 조장한다. 그나마 자본주의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류의 “윤리적 자기계발”이, 저성장으로 접어든 때에는 「시크릿」 류의 “신비적 자기계발”이 유행한다는 정도의 차이다. 이제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은 자기계발 신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개인의 불안으로 전가되었다.

2014년 4월 미국은 누구에게 빚지고 있는가?


출처 : Political Calculations

이 차트를 제공한 사이트 Political Calculations에 따르면, 차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벨기에의 비중이 괄목할 정도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벨기에에는 주요한 국제금융기관들이 위치해있기 때문에 다른 외국기관들이 벨기에의 은행을 통해 미국의 채권을 사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Political Calculations의 설명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그 외국은 아마도 러시아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한편 Fed는 계속해서 재무부에 대한 채권 비중을 높여가고 있는데 2013년 8월에 비해 비중이 1.6% 늘어났다.

올해 읽은 중 인상적이었던 책들

올해가 아직 한 달 조금 넘게 남았지만 글 올리는 것도 뜸하고 해서 올해 읽은 책들 중에서 인상 깊었던 책 몇 권을 소개할까 한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 경제 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미국

냉전 시기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문가인 그렉 브라진스키의 저서다. 저자 스스로도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쓰인 책이다. 저자는 미국이 자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하려 시도한 허다한 사례 중에 거의 유일한 성공사례로 남한을 꼽았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위정자와 시민사회, 남한의 위정자와 시민사회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이승만을 개차반 취급하는 것이 이색적임.

백은비사 : 은이 지배한 동서양 화폐전쟁의 역사

우리는 경제사조차 서구의 시각을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과거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제대국이었던 중국의 경제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다. 이 책은 그 빈틈을 어느 정도 채워준다. 왜 중국이 다른 나라와 같은 형태의 제국주의 정책을 취하지 않았는지, 왜 스페인이 남미에 진출했는지, 왜 중국은 은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다. 화폐전쟁 유의 음모론 책보다는 조금 더 차원 높은 매력을 지닌 중국인에 의한 중국과 그 주변의 경제사.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의 대표작인 ‘1984년’의 최초의 외국어 번역이 한국어였다고 한다. 당연히 대표적인 반공(反共)서적으로 유용하게 쓰였었는데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조지 오웰 스스로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였다. 이런 그의 포지션을 잘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 이 르포르타주다. 노동자의 삶에 직접 스며들어가서 느낀 불편함, 건강함, 역동성 등을 솔직한 필치로 적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기성 운동권들의 나태함, 위선, 한계 등도 적고 있다. 1984년은 아마 그러한 고민의 연장선의 작품이었으리라.

점과 선 / 모래그릇

올 한해 의미 있는 발견은 일본 최고의 추리작가로 칭송받는 마쓰모토 세이초다. 배우 김혜수 씨가 읽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고 무심코 빌려본 작품인데 패전 후 일본사회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묘사된 이 작품들을 읽고 있노라면, 시대를 뛰어넘는 그 암울함과 긴장감이 가슴에 느껴진다. ‘점과 선’은 실종된 남편을 찾는 아내의 일화를, 모래그릇은 실력을 인정받은 작곡가의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이 맘에 들어 DVD까지 직접 구해서 봤는데 영화의 작품성도 뛰어나다. 특히 ‘모래그릇’(1974년)은 걸작.

골목 사장 분투기 : 자영업으로 본 대한민국 경제 생태계

이정우 교수에 따르면 1963~1979년 동안 국내총생산은 131조 원 발생했는데, 지가는 326조 원 상승했다고 한다. 결국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위해 불로소득을 용인 내지는 독려한 것인데, 이제 그 모순이 지금의 자영업자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고 있다. 아무리 벌어도 높은 임대료 때문에 버틸 수가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 뛰어든 저자가 생각하는 자영업 생태계를 담담한 필치로 풀어나간다. 그 와중에 프랜차이즈 방식 또한 자영업자를 옭아매는데 그 올가미에서 빠져 나온 한 자영업자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는 한니발 렉터처럼 식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연쇄살인마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잔인한 캐릭터일까? 저자는 사회의 곳곳에 사이코패스가 존재하는데 경영인, 외과의사, 특수부대 요원과 같은 이들에게서 이런 특성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인간을 사이코패스와 “정상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별개로 하고라도 매우 흥미 있는 주장이다. 무엇이 그들을 사이코패스로 태어나게 또는 자라나게 했는가에 대한 이런저런 사례와 임상실험 내용등이 소개된다.

기나긴 이별 / 깊은 잠

올해의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발견은 레이먼드 챈들러. 한때 흠뻑 반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매력적인 유머코드와 문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에서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아무리 매력적인 스릴러라 하더라도 스토리의 파악을 위해 대충대충 읽어나가는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작품들만큼 한 문장 한 문장 아껴가며 읽었다. 그리고 그럴 가치가 있었다. 두 작품 역시 모두 영화화되었는데 ‘깊은 잠’의 경우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둘 다 소설이 더 재밌다.

지상의 위험한 천국 :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실체

저자는 미국의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도다. 일종의 인사이더인 셈인데 그런 그가 미국의 개신교 중 일부세력이 어떻게 파시즘적인 성향을 강화시켜가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집단 자살극이나 벌이는 “소수의 광신도”면 “사회의 다양성” 차원에서 내버려 둘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재 미국 사회 전반을 극단주의로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티파티 등의 극단주의 세력이 미국 정치를 뒤흔드는 꼴을 보면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 : 왜 보수가 남는 장사인가?

위에 소개한 책과 함께 읽으면 미국 사회의 극우 세력의 실체가 좀 더 명확히 다듬어진다. 원제는 The Wrecking Crew로 ‘자신이 탄 배를 스스로 파괴시키는 선원들’을 일컫는 표현인데,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우파들의 행태를 보면 이 표현이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다. 즉, 정치권에 진입한 우파들이 스스로를 반정부 세력으로 자처하며 정부의 긍정적 기능을 약화시키고 파괴시키는데 주력한 결과, 현재의 미국사회는 비효율적이고 사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부조직으로 변질됐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

“독재는 했어도 경제는 살렸다”는 주장이 당연시되는, 또는 더 노골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린 요즘 이러한 시도는 분명 유의미하다. 민주당 의원을 지낸 경제학자 유종일 씨가 주축이 되어 이정우 씨 등 진보적인 연구진이 박정희 경제신화의 허상을 고발하고 있다. 충분히 좋은 내용이 담겨 있으나 다만 기획의 제약조건 때문인지 좀 더 입체적인 모습을 조명하지 못하는 미흡함이 아쉽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시도들을 아예 기획 시리즈로 해서 내면 어떨까 싶다. 레이디 가카가 분노하시겠지만.

‘국가 단위의 기억’의 時限에 대한 단상

그러나 여기서 ‘소박한 의문’이 생긴다. 왜 두 차례의 참화를 겪으면서도 인류는, 특히 서양사회는, 자본주의 원리에 대해서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슈펭글러나 폴라니 같은 뛰어난 사상가가 나타났는데도 왜 ‘이성신앙은 위험하다’든다 ‘자본주의는 악마의 맷돌이다’고 한 의식을 공유할 수 없었던 것일까. [중략]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가설’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다. [중략] 자국이 한 번도 전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던 미국인에게 그런 유럽인의 쓰라린 경험이 다른 사람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폴라니가 필생의 대저 “대전환”을 쓴 것은 대전 중의 미국이었지만, 그 의미를 미국인들은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국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한층 더 확대된 것은 아닐까. 사실 현대경제학의 이론체계에서 주요한 부분은 전후의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서 신자유주의나 글로벌자본주의가 강력한 경제철학으로서 세계에 침투해 들어갔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p169~171]

인용문에서 “현대경제학의 이론체계에서 주요한 부분은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약간 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전후의 쓰라린 상처를 딛고 일어나기 위해 서구세계가 공통적으로 채용했던,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 수행이라는 사고방식은 케인즈 적이라는 점에서 歐洲의 아이디어에 가깝고, 더욱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한층 더 확대된” 계기를 만든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역시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가렛 대처,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가깝게는 알란 그린스펀 등의 시장자유주의 전도사들은 하이에크의 저서와 소련에서 망명한 소설가 아인랜드(Ayn Land)의 사상을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직접적인 전쟁의 경험이 없기에 자본주의의 궤도를 수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저자의 가설보다는, 오히려 전쟁의 부산물로서 탄생한 “공공의 적” 소비에트 집단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반발이 더 미국식 자본주의를 일종의 안티테제로 내세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가설이 타당해 보인다.

가설은 가설일 뿐이니 가설을 까기 위해 이 글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인용문에 깔고 있는 전제로써의 “국가 및 지역 단위의 기억”이라는 가정이 맘에 들어서 인용을 했다. 사실 유럽은 아직도 전쟁 당시의 기억을 국가 및 지역 단위에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반세기가 훨씬 넘은 지금까지 끔찍했던 전쟁을 피하기 위해 EU라는 연방국가를 꿈꾸고 있고, 독일은 그렇게도 인플레이션을 혐오하고 있으며, 주변국들은 압제적으로 보이는 독일의 모습에서 서슬 퍼런 파시즘을 연상하고 있다.

전쟁과 같은 혹독한 경험이 아닐지라도 국가/지역의 기억은 존속된다. 외환위기를 경험한 국가는 경제이론이야 어떻든 그 비용이 얼마든 간에 일단 외환보유고를 늘리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부동산 시장이 쭉 상승했던 국가는 빚내서 집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기억이 전쟁의 기억만큼은 치열하지 않아서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데, 대개 그 기억의 시한은 거시적 상황인가 미시적 상황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경제주역의 세대가 물러가는 30~40년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후 자본주의 영국은 노동당을 선택했고 미국은 진작 뉴딜이라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받아들였다. 전간기의 자유방임적 체제의 폐해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국가주도의 자본주의가 30~40년 쯤 지나고 석유위기가 봉착하자 이전의 기억이 퇴색하며 결국 국가 및 사회의 역할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채택하게 된다. 용어에 ‘신(neo)’자를 붙였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의 폐해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국가 단위에서의 기억력이 쇠퇴한 셈이다.

시장근본주의의 폐해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기억은 또 한 번의 파괴적(일뻔 했던) 시스템의 위기를 겪고 나서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글래스-스티걸 법을 만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도드-프랭크 법을 가다듬고 있다.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물적 조건은 한층 악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엔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금의 원천이 있었다. 현재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후보인 중국은 사실 허울 좋은 껍데기에 가깝다. 그런 상황에서 개혁조치마저 전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만큼 미봉책에 가깝다.

전후 영국의 노동당은 지금의 기준으로 봐서도 ‘소비에트와는 다른, 그러나 명백한 사회주의 국가’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변혁을 추구했다. 주요기간산업은 빠르게 국유화되었고, 부자에 대한 세율은 혁명적으로 높아졌다. 유럽 대륙의 조치도 이와 비슷했고, 미국은 反소비에트 연합의 유지를 위해 이런 혁신조치를 용인하면서도 돈을 쏟아 부었다. 미국 또한 혁신적인 재분배 정책을 통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국가주도의 자본주의 선순환을 이끌었는데 그 정점은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이었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유럽이랄 수 있는 미국에서의 개혁조치는 지지부진하다. 애초 양적완화 자체가 기만적인 미봉책이었는데 단기적인 경기호전으로 벌써 원대 복귀할 태세다. 앞서 말한 도드-프랭크 법은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주장을 섞다보니 분량이 무려 330만 단어에 3,500페이지에 달하는 규모임에도 이 법을 두려워하는 이가 별로 없어 보일 정도다. 가장 근본적으로 패니메, 프레디맥 두 거대한 정부보증회사의 처리방안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변혁적인 조치는커녕 개혁조치마저 벽에 부닥치고 있다.

단기적으로 미국의 경제가 호전될 수는 있다. 제조업이 호전되면서 고용도 활성화되고 소비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조업 공장으로서의 과거 미국의 영광을 되돌려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Made in USA”보다 “Made by Apple”이 더 유의미한 세상이 됐다. 공장은 수시로 입지를 옮기고 초국적 자금 운용에 따라 稅收는 바닥을 기고 있다. “위대한 사회”를 외치기에는 사회 자체가 와해되고 있다. 미국인들의 기억력을 되살리려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젠 과거의 경험보다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할 것 같다.

미국의 교도소에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다

이번 주, 버락 오바마 정부의 법무부 장관인 에릭 홀더는 미국에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 교도소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상황을 부드럽게 설명한 것이다. 이 자유의 땅에는 전 세계 인구의 5%가 살고 있는데, 수감자는 25%다. 모두 합쳐 220만 명의 미국인들이 쇠창살 뒤에서 썩고 있다. : 성인 107명 당 1명 꼴. 경범은 엄하게 다뤄지고 있고, 중범은 가혹하게 다뤄지고 있다. 비용은 증가하고 있는데 1년에 800억 달러, 수감자 당 3만5천불 꼴이다. [중략] 몇 십 년간 미국의 정치인들은 더 강화된 판결 법령을 통한 대량투옥이 유권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 이후의 극적인 범죄율 감소가 이러한 가정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중략] 감옥을 통한 효용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을 가둬놓는 것이 이치에 닿던 지점을 지났다. 홀더 씨가 말하듯이 이 시스템은 “비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하지 않다”.[One nation, behind bars]

감옥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대표적인 공공서비스 중 하나다. 감옥의 일차적인 목적은 범죄자들을 교정시키는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감옥은 교정시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차적인 목적은 범죄자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를 지은 이의 교화와 사회를 안전하게 하는 것, 이보다 더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는 서비스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문제는 지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수감자의 25%에 해당할 만큼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그야말로 “썩고” 있다는 것은, 그들을 썩히는데 드는 비용, 그리고 그들이 밖에서 사회활동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를 한꺼번에 잃는 셈인데, 이를 사회적 비용으로 환산한다면 정말 비효율적인 상황인 것이다. 물론 개인으로서도 매우 불행한 상황이고 말이다.

기사는 미국의 형법 시스템이 너무 가혹하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수감자가 마약 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그 비효율성의 원인으로 들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마약의 합법화가 – 물론 약한 종류의 마약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 상황의 개선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까지 조언하고 있다. 최근 우루과이가 약한 중독성의 마약과 강한 중독성의 마약 관리를 분리하기 위해 대마초를 합법화하였듯이 말이다.

한편, 기사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수감자가 이렇게 많아진 것의 또 다른 배경에는 감옥의 민영화도 한 몫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감옥의 건설과 운영을 민간의 손에 넘겼으며 미국교정회사와 웨클허트 교정회사가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이들이 수용하고 있는 수감자는 미국 전체 수감자의 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들 회사에게 있어 수감자는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다.

마이클 무어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 보면 교정회사와 결탁한 사법부가 어떻게 하찮은 사건들에 대해 엄격한 금고형을 내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들 교정회사들은 다른 거대산업들이 그렇듯이 사법제도의 강화를 위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했을 것이고, 때마침 정치권의 보수화 현상과 맞물려 이러한 추세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결국 더 많은 이들이 더 가혹한 기준 하에 감옥에 머물러야 했다.

요컨대, 홀더 장관의 선언은 단순히 미국정부의 과잉(?)공급되고 있는 특정 공공서비스에 대한 반성을 넘어 문명 그 자체의 한 축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선언으로 간주되었으면 한다. 격리를 통해 사회 안정을 도모하는 체제에서 과연 어떤 행동을 범죄라 규정할 수 있으며 또 얼마만큼의 벌을 내려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볼 수 있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기준은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