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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회복의 해법은 역시 분배정의 실현

미국인의 소비심리가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 CBC 뉴스에 따르면 높은 기름 값에다 신용위기까지 겹치면서 최근 미국인들의 차량 구입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자동차 업체는 포드로 지난 해 동기에 비해 무려 34.6%의 판매 하락률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The biggest loser was Ford Motor Co., which sold 120,788 trucks and cars in the month, a drop of 34.6 per cent compared with the same time last year.

국산차 역시 피해를 입고 있다. 즉 “미국 수출실적은 지난 8월 3만3,074대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27.0%나 줄었다”고 한다. 이는 미국인들의 소비심리가 전체적으로 움츠려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을 추구하는 나라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물론 수출다변화 노력에 따라 수출의 대미의존도는 한창 때에 비교하여 많이 감소하였으나 여전히 대미수출은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또한 우리의 주요 수출지역인 중국 역시 경기침체 가능성이 높고 중국 등지로의 수출도 크게 보아서는 대미수출 상품과 연계된 품목일 경우가 많다. 결국 시사점은 내수부양을 통한 경제 활성화가 대안이라는 점일 것이다.

최근 어느 글에선가 보니 그 글 역시 내수 활성화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다만 그 글에서는 그 해법을 해외자본 유입 등을 위한 규제완화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다소 엉뚱한 해법으로 여겨진다. 지금 해외자본이 우리나라가 규제가 많아서 안 들어오고 있을까? 그리고 해외자본의 투입이 예전과 같이 제조업으로의 직접투입이 아닌 기존 자산인수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것이 투자효과와 이를 통한 소비 진작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대안은 분배의 개선일 것이다. 즉 국내 소비자들에게 소비할 여력을 불어넣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배의 개선은 여러 가지 수단이 있을 것인데 먼저 누진세 등 세금을 통한 재분배, 복지예산 지출 확대,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여건 개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 정부는 지금 세금정책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으니 논평할 가치도 없고 복지예산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내년도 예산 계획을 보니 복지예산이 다소나마 올렸는데 그나마 생색용에 그치고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전체예산의 50%대에 육박하는 선진국들의 복지예산 비중에 비교한다면 20%대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복지예산 비중은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는 여전히 정부가 복지예산 지출을 낭비적 요소로 생각하는 저개발 형의 자본주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외국에 물건 내다팔아 번 돈을 다시 생산부문에 재투입해야지 복지로 돈을 허투루 쓸 수 있느냐는 박정희 시대의 남한주식회사의 관념 그대로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여당이 현행 2년으로 되어 있는 비정규직 근로기간을 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그것이 고용안정 해법이라는 것이다. 참 갑갑하다. 예전에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이목희 의원이 엉뚱한 소리를 해대더니 매한가지다. 2년 있다 잘릴 것 3년 있다 잘리게 해주겠다는 소리인가?

이명박 정부는 아직도 747이라는 허황된 구호에 연연하고 있다. 7%라는 이제는 기도 안차는 성장률에 매달릴 게 아니라 낮은 성장률이라도 그에 견뎌낼 수 있는 안정된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낮은 성장률이라도 분배가 정의로우면 서민들도 어느 정도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높은 성장률이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해줄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근거 없는 신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근거 없는 신화가 성장과 분배가 양립할 수 없다는 편견이다. 즉 앞서 언급했던 박정희 사장의 남한 주식회사 시절에 고착된 선입견이다. 이명박 정부 역시 그러한 신화에 매몰되어 있는지라 오로지 성장 이야기뿐이다. 성장만 하면 분배는 자연스레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분배는 다분히 의도적인 과정이며 성장과 분배는 이제는 상호작용을 하는 동전의 양면일 수 있다.

KBS는 그때 어디 있었을까

다리미님의 글 보기

다리미님이 속이 많이 상하셨군요. ^^; 그나저나 다른 분과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답글이 늦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답글을 달아야 할지도 망서려지는 군요. 온전히 김규항씨와 풀어야 할 문제인 것 같아서요. 그런데 김규항씨의 블로그는 댓글을 막아놨더군요.

일단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저도 김규항씨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그의 발언의 취지를 이해합니다. 즉 저도 일반민주주의가 과연 실질적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고 그것을 고양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 희망적으로 생각하여 왔으나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많이 실망 했습니다. 왜냐하면 절차적 민주주의가 고양된 이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실질적 민주주의가 역으로 파괴되는 현상을 목도했거든요.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 거론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양산과 한미FTA입니다. 두 정부는 민주화를 한다고 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방관하는 것을 떠나 양산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정규직법이 제정될 때 민주노동당이 그렇게 그 법은 보호법이 아니라 양산법이라고 저항했을 때에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아무도 이에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딴죽을 건다고 비아냥거리기만 했죠.

얼마 전에 유시민씨의 동영상이 유행하더군요. 나치의 등장을 비유로 들면서 불가촉천민인 유태인, 동성애자들이 제거되기 시작하면서 일반민주주의가 하나씩 제거된 상황이 우리나라에도 벌어질 모른다는 묵시록과 같은 강연이던데요. 그러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을 공격하여 결과적으로 나치의 등장을 도왔다고 알려진 독일 공산당과 민주노동당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판하더군요. 하지만 명확하게 이야기해보자면 대한민국의 불가촉천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낭떠러지로 몰아세운 것은 사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업보를 민주노동당에 뒤집어씌운 꼴이죠.

물론 이런 제반의 것들이 KBS사태와 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결국 이런 일련의 사태를 목도한 이들 중 몇몇은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KBS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KBS는 과연 실질적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시점에 어디 있었느냐는 볼멘 소리도 전혀 억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저역시도 아직 제 입장이 무엇인지 솔직히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많이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길 바랍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

이랜드, 국내가 아닌 홍콩에서 상장 시도

우리나라에서도 서서히 ‘사회책임투자’라는 표현이 회자되고 있는데 사실 개념상으로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주식펀드상품을 기획할 때에 그 투자기준을 사회적으로 도덕적이라고 인정받는 회사의 주식을 편입시키거나, 반대로 비도덕적이라고 인정받는 회사의 주식을 제외시키면 된다. 그 판단기준은 투자자나 운용사의 판단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만약 ‘oo자산운용사회책임투자펀드제1호’ 뭐 이런 제목으로 펀드가 하나 기획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펀드매니저라면 일단 투자부적격 기업 리스트에 삼성과 이랜드를 적어둘 것이다. 이들 기업은 각각 비자금 조성 등의 기업비리와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갈등 등 그들 업종에 있어서 치명적인 구설수에 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구설수는 이익의 감소로 이어져 주가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이랜드는 비상장사다. 이 글에서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가정으로 상장사라 가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랜드 그룹이 곧 상장될 것이다. 재밌게도 상장된느 곳이 국내가 아니라 국외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그들의 계열사 이랜드상하이패션의 홍콩 증시 상장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르면 이달 말, 늦어도 다음 달 초에는 상장절차가 마무리될 전망이라고 한다.

왜 홍콩에서 상장을 시도할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중저가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는 이랜드가 중국에선 꽤 고가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지오다노와는 반대의 케이스같다. 그러니 상장될 때 공모가격이 꽤 높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여하튼 그래서 현지에서 꽤 인지도가 높은 관계로 국내 모그룹의 구원투수가 될 전망이라고 한다.

‘구원투수’가 무슨 말인고 하니 이랜드의 국내 장사는 현재 죽 쑤고 있다는 말이다. 지난해 이랜드그룹의 핵심 4개사의 실적은 줄줄이 악화돼 총 3070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그래서 신용평가기관은 여차하면 이랜드 계열사들을 투기등급으로 강등시킬 참이었다. 만약 이랜드의 홍콩시장 IPO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막대한 자금유입을 통해 이런 참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그룹의 계산이다.

이랜드의 실적악화의 이유는 역시 일차적으로 무리한 사세확장이다. 뉴코아, 까르프 등을 무리한 차입으로 인수하였고 비정규직 투쟁 등으로 영업실적까지 신통치 않다보니 실적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을 살펴보자면 위와 같은 갈등의 기저에 CEO 또는 경영진의 독단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법 강경한 종교기업(?)으로 알려진 이랜드는 처음 이러한 이미지가 오히려 플러스요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세확장에서 드러난 여러 모습을 보면 이러한 강경노선이 초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회장의 반노동적인 인식, 그에 상응하는 반노동자적인 회사정책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드러냈고 결론적으로 회사의 무리한 M&A 역시 그러한 회사의 의사결정 시스템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싶다.

앞서 사회책임투자펀드의 매니저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기업의 주식은 펀드에 편입시키지 않을 것 같다.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병폐인 황제식 경영의 전형이 종교적 근본주의와 결합하여 회사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큰 기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홍콩의 펀드매니저라면? 편입시킬 것이다. 현지에서는 이런 사실관계도 잘 모를뿐더러 오로지 브랜드이미지로만 승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랜드그룹의 입장에서는 홍콩 증시의 상장에 사활을 걸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IPO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면 한다. 경영진이 한번 혼쭐이 났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기업의 쇠락은 나머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종업원들에게 엄청난 고통이기에 그 숨통을 틔워줄 필요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경영진들도 이번 기회에 회사경영에 대한 마인드를 바꿨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업이 주주에 대한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닌 사회에 대한 책임도 있고 이를 충실히 이행하면 실적도 좋아질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국내 주식시장에도 상장을 하여 높은 가격도 유지하시라… 뭐 이 말씀을 드리고 싶다.

노동자는 아직도 시민권이 없다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솔직히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분노와 투쟁의지보다는 무력감이다. 아주 옛날 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이래 수많은 이들이 산업현장에서, 그리고 스스로 몸을 살라 사라져 갔지만 시간은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여전히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목숨을 끊어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고 정해진 씨는 한국전력공사 인천사업본부로부터 수주 받아 배전 업무를 하는 협력업체 소속 노동자였다. 그가 요구한 사항은 어처구니없게도 △주 44시간 노동 △토요 격주 휴무 보장 등의 근로조건 개선 내용이 들어가 있는 단체협약 체결이었다. 그런데 협력업체들로부터 단협 체결권을 위임받은 대성건설 유해성 사장은 기본적으로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주의자였다. 그러니 노동자는 40년 전에 외치던 구호를 다시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태일 시절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일까?

(역설적이지만) 변화는 있다. 전태일은 청계천 ‘하꼬방’에서 일하던 노동자라면 정해진 씨는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정해진 씨는 속된 말로 전태일 시절에는 없던 ‘비정규직’ 노동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즉 정해진 씨는 꼬박 꼬박 한국전력공사를 위해 일하고 있으면서도 한전의 노동자로 취급받지 못하는 아웃소싱 업체에서 항시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노동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쩌면 법적지위로 보자면 전태일 열사보다 더 비참한 지경이 된 것이다. 한전을 위해 일하면서도 한전 노동자라 불리지 않고 그마저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날품팔이 신세가 바로 정해진 씨가 처해 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44시간 노동이라는 정말 상식적인 요구에 목말라 할 정도로 상황은 비참했던 것이다. 민주노조가 생긴 이래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가꾸어오던 ‘노동자의 시민권’이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한전 측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공사가 바로 이 정부가 만들어준 비정규직 법안의 방패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 예전에는 노동자들이 들이밀 목표라도 있었다. ‘A가 나를 고용하여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못하면 나는 A에게 항의한다’라는 단순논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복잡해진 고용구조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관련법규로 인해 노동자는 멀쩡히 눈앞에 보이는 A가 아닌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해 들이받아야 한다. 그 신기루가 바로 시대착오적인 협력업체 사장님들이시다.

오늘자 동아일보 사설 <‘법대로 세상’을 위한 불법 파업 배상 판결> 에서는 “직권 중재를 무시하고 불법 파업”을 했던 철도노조에 대한 51억 원 배상 판결을 법치주의의 기본을 지킨 판결이라고 칭송했다. “직권 중재”라는 것에 대한 계급 차별적 성격은 둘째로 치고라도 노동이 뭇매를 맞아야 기사에 올리는 저 메이저 언론의 행태가 가증스럽다. 그들은 100일을 훌쩍 넘기고 있는 이랜드/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도 거의 같은 기간 동안 파업하고 있는 바로 이들 한전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려온 적이 없다. 정해진 씨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들 노동자들이 업무방해죄로 대규모 배상판결이라도 받아야 사설에 실릴 것이다.

21세기 남한 땅에서 노동자는 아직도 시민권이 없다.

관련기사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1028150054

노예에서 노동자로, 다시 노예로

■ 설탕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을 하나 언급해보자. 노예제도 반대론자들이 먹지 않는 음식이 있다고 한다. 무엇일까? 설탕이라고 한다. 설탕 사업은 17세기와 18세기 남미 등지에서 특화된 대규모 플랜트 농업으로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수송해온 노예를 쓰는 대표적인 사업이었기 때문에 노예제도 반대론자들은 차마 도의적 차원에서 설탕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설탕 대신 꿀을 먹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노예제도를 기초로 한 설탕 플랜트의 대량생산 덕에 설탕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였고 유럽인들은 상류층은 물론 중하류 층까지 설탕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차와 초콜릿 등 연관 산업이 크게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열량이 높은 설탕을 섭취한 덕에 유럽 소재 공장의 생산성도 크게 증가하였다. 결국 남미로 끌려간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부유한 유럽 만들기, 즉 자본주의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셈이다.

■ 노예에서 노동자로

그러함에도 원칙적으로 노예제도는 자본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제도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 부단히 자신의 모습을 변신해야 하는 제조업의 자본가들에게 식솔의 생계까지 챙겨줘야 하는 일종의 재산 개념인 흑인노예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근로대중에게 신체의 자유를 줌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노동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이익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 북부의 자본가들은 인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이윤추구의 동기로써 노예해방을 추구하였다.

이후 노동-자본의 대립관계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과제로 노동해방을 둘러싼 갈등이라 할 수 있으나 현실적이고 단기적인 과제는 역시 고용안정과 임금상승에 관한 것들이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와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고용계약을 체결하며 노예와는 또 다른 해고의 자유를 누리는 한편, 유아노동의 교육효과를 강조하면서 노동자를 ‘해고’의 자유를 가진 노예로 다루곤 하였다. 노동자와 좌익은 이에 맞서 파업의 권리를 획득하고 고용안정, 노동시간 등 근로조건의 개선에 힘을 쏟았다.

■ 노동의 시민권 획득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시기 동안 자본주의의 고유한 재생산 위기와 노동계급의 부단한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의 고용안정은 이른바 케인즈 주의적인 국가기제 안에서의 계급타협의 산물인 ‘노동기본권’의 쟁취를 통하여 일정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이 자본가들에게 자신을 자르지 말아달라는 구걸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가 기업을 가꾼 주인임을 선언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한편으로 노동의 안정은 그 시기 재생산의 기제에 도움이 되었기에 자본으로서도 노동에게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숨통을 튀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용안정 등 ‘노동의 기본권’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가 또 한 번 위기를 겪게 되는데 주요하게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산의 유연적 축적, 자본의 세계화, 공공서비스의 후퇴, 보다 강화된 경쟁의 도입 등으로 특징져지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일개국가가 더 이상 자본을 규제하는 것이 아닌 초국적 자본에게 자신의 국가를 세일즈 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달으며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 시민권 박탈의 주역, 신자유주의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 계급이 일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사민주의 국가들마저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해치는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하였고 그것은 ‘국가경쟁력의 강화’라는 레토릭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의 유연화’는 아직 노동기본권의 본래적 의미조차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 제3세계 국가에게마저 무차별적으로 강요되었다. 비정규직에 대해서 네델란드의 반절만큼도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서 네델란드식 노사협조 체제를 구축하자는 웃기지도 않는 난센스가 주장되어지는 남한 땅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9월 13일 노동부가 입법예고한 파견근로 관련 법안의 개정안과 제정안은 이 난센스 희극의 최신판이다. 입법 예고된 안을 보면 지난 90년대 말 제정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비정규직을 생산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근로자파견법이 또 한 번 무소불위의 군홧발로 노동기본권을 작살내게 될 것이다. 노동문제에 조예가 깊다는 한 여당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 법의 취지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굴복하는 법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면서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며 알아서 잘 하라는 뻔뻔한 멘트를 잊지 않는다.

■ 노예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지난 시기 피로써 쟁취한 투쟁의 성과는 ‘세계시민권’을 갖고 있는 초국적 자본과 자국의 시민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 노동, 그리고 이에 무력하게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을 드는 국가권력 사이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해있다. 그 옛날 노예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며 공장에 취업했던 노동자는 이제 그나마 신분이라도 보장되었던 노예생활을 그리워해야 할 판이다. 아무리 무자비한 주인이라도 자기 노예가 다쳤다면 그것은 재산의 손실이기 때문에 치료는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남한 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다치면 그것은 바로 노동자 신분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지금 열린우리당을 점거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또 내일 비정규직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정규직들은 더 이상 ‘노동귀족’이 아니다. 여태까지 근로파견업종을 몇몇 직종으로 제한하였던 기존법이 새로 고쳐질 법에서는 몇몇 직종을 제외하고 전 업종에 걸쳐 파견근로를 허용하는 이른바 네거티브리스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길은 하나다. 또다시 노동의 정당한 시민권을 획득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1세기 최고의 유망직종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다. ‘인력파견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