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조지 부시

현재 시점까지의 짧은 관전평

헨리 폴슨과 벤 버냉키가 만든 – 조지 부시는 아직도 그 개념도 이해 못할 – 구제금융 안이 일단 의회 지도자들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폴 크루그먼은 폴슨의 안이 좌우 모두에게 욕을 먹는데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도 정말 욕지기 나오는 사기협잡질이지만 다른 대안도 마땅히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그 거시적인 이유는 지난 번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에 대한 단상”에서 잠깐 밝혔듯이 적어도 현재의 상태는 사회화된 소비에 대한 생산 및 투자주체인 기업들을 – 사기업, 공기업 여부를 떠나서 – 방치할 경우 발생할 사회적 비용이 그 효용(그 효용이라면 부실한 기업운영을 하게 되면 망하게 된다는 교훈을 다른 기업들에게 심어주어 기업운영의 효율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점)보다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미시적인 이유라면 현재의 위기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아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 민영화라는 측면에서는 이전의 전쟁과 질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인 것처럼 이번 금융위기는 쉐도우 뱅킹 시스템(주1)이라는 이전 위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주2) 그러하기에 결국 문제해결은 ‘어떻게’가 아니라 ‘언제’인가가 관건이라고 생각될 만큼 구제금융이 시급하고 절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딜레마는 여전한데 그 대표적인 사례는 자산가치 측정의 어려움이라 할 것이다. 지금 미행정부가 사주겠다는 – 역경매라는 방식을 통하여 – 부실기업의 자산은 사실 그동안 일반인들은 알지도 못하던 복합금융상품이다. CDO, CDS 는 기본이고 온갖 복잡한 이름이 붙은 파생금융상품이 난무한다. 그동안 이런 물건을 주물럭거리던 금융회사들은 미국회계기준에 따라 이 상품들을 재무제표 상의 소위 레벨3( Level3 ) 라는 계정항목에 처박아두고 있었다고 한다.(더 자세한 설명 보기)

시가평가도 안되고 시장도 형성 안 되어 있는 상품은 거기에다 넣어두라고 미국회계규칙에 되어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해당기업들도 그 상품을 만지던 사람들이 아니면 그 존재조차도 잘 몰랐다. 그런데 이제 그 듣보잡 상품들을 국가가 사겠다고 나선 것이다. 무슨 인간문화재가 만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도자기도 아니고 이런 상품이 가격표도 안 붙어 있으니 난감한 노릇이다. 아~ 물론 이제 와서 취득가격에 사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따라서 이제 구제금융안이 의회를 통과되어도 그것의 실행과정에서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자원낭비, 그리고 비도덕적인 사기협잡이 판을 칠 것으로 예상된다. 의회와의 타협안에서 부실기업의 경영진 보수를 제한한다고 합의하였다는데 그것이 벌써 협잡질이다. 회초리라도 몇 대 때리고 시작해도 시원찮을 텐데 혼도 안내고 월급까지 주겠단다.

나중에 시간되면 좀 더 체계적으로 이번 사태를 조명해보도록 하겠다.

(주1) 이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기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으나 이른바 은행(월스트리트)과 실물(메인스트리트) 간의 관계보다 (투자)은행들 간의 관계, 그리고 상품거래가 더 주된 역할을 차지하는, 관계당국의 규제망에 잘 걸려들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주2) 그렇기에 사실 현재 구제금융안의 입안자들 중 다수 역시 현재 정확한 원인진단능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폴슨은 인너써클이었으니 어느 정도 내막을 알겠지

신(新)공산주의자들?

뉴욕주의 상원의원인 빌 퍼킨스 Bill Perkins 가 9월 23일자 뉴욕타임스에 전면으로 실은 광고라 한다. 점점 이번 사태가 이념전쟁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한편 이러한 우익의 이념공세에 대해 xuxE라는 네티즌이 그 오류를 깔쌈하게 정리해주었다.

“redistribution of wealth”
from the rich to the poor = socialism.
from the poor to the rich = capitalism.

“부의 재분배”
부자에서 빈자로 = 사회주의
빈자에서 부자로 = 자본주의

살펴보니 재밌는 댓글들이 꽤 되어 (내 구미에 맞는 ^^) 재미있는 댓글을 몇 개 퍼오기로 한다.

US Stock Market $15 trillion
US Mortgage Market $7.2 trillion
CDS Market $62 trillion
Maybe I need to learn to speak chinese.
미국 주식시장 15조 달러
미국 모기지시장 7.2조 달러
CDS 시장 62조 달러
난 중국어를 배워야 할 것 같아.
Posted by: Eric Sebille

Nonsense.
If it were Communism, we’d at least GET something like universal health care or universal higher education.
This is Crony Capitalism!
말도 안돼.
이게 공산주의면 우린 최소한 보편적인 헬스케어나 보편적인 고등교육은 받았을 것 아냐.
이건 그저 구식 자본주의일 뿐이야!

Posted by: RNL

socialism my ass. a socialist government doesn’t leave a hurricane-ravaged city to fend for itself.
사회주의 까라고 그래. 사회주의 정부라면 허리케인으로 황폐화된 도시를 지 혼자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지는 않을거야.
Posted by: Schnormal

헨리 폴슨의 모순된 삶

폴슨은 1999년부터 부시 대통령이 재무부를 맡아달라고 그를 지명한 2006년 5월 30일까지 투자은행의 타이탄 골드만삭스의 회장과 CEO를 역임하면서 월스트리트가 최고의 이익을 창출하던 순간의 주역이었다.
Paulson presided over one of the most profitable runs on Wall Street as chairman and chief executive officer of investment banking titan Goldman Sachs & Co. from 1999 until President Bush nominated him on May 30, 2006 to take over the Treasury Department.

그러나 폴슨이 이제 미국 금융 역사상 가장 큰 구제를 주관할 사실상 통제받지 않는 권위를 추구하면서 많은 이들은 폴슨이 또한 거대하고 잠재적인 이해관계의 갈등들에 초연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But with Paulson now seeking virtually unfettered authority to administer the largest bailout of the financial industry in U.S. history, many are wondering whether Paulson also doesn’t come with enormous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Can You Trust A Wall Street Veteran with A Wall Street Bailout?
중에서 발췌

실제로 그린스펀보다 더 뻔뻔한 친구를 꼽으라면 헨리 폴슨일 것이다.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폴슨 또한 이번 대형화재의 방화범이다. 방화범 그린스펀이 화재의 심각성에 대해 떠들고 있다면 방화범 폴슨은 소방복을 입고 불을 끄겠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다. 그 대신 자신에게 무한정 물을 대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바로 이를 두고 미국에서는 현재 좌우가 한 목소리로 폴슨의 계획을 비판하고 있다. 우익은 현재의 사태를 ‘금융 사회주의’라면서 납세자의 돈으로 모럴해저드에 빠진 투자은행을 구해주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좌익은 비슷한 취지이긴 하나 결국 일시적인 구제 이후 예정되어 있는 광범위한 재민영화는 결국 금융자본의 배만 불릴 것이며 근본모순을 지연시키는 조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헨리 폴슨은 아마도 미국 금융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격동의 시대를 짊어진, 모순으로 점철된 재무장관으로 기록될 것 같다. 방화범 출신의 소방서장이랄까?

패니메와 프레디맥의 성장과 몰락

워싱턴포스트가 특집으로 꾸민 How Washington Failed to Rein In Fannie, Freddie를 일부 발췌하여 재구성하였다.

목적

클린턴 행정부는 1980년대 내내 65% 이하에 머물러 있던 미국인들의 주택보유 비율을 높이고 싶었다. 두 회사의 성장을 독려하는 것이 이 계획의 핵심 중 하나였다.
The Clinton administration wanted to expand the share of Americans who owned homes, which had stagnated below 65 percent throughout the 1980s. Encouraging the growth of the two companies was a key part of that plan.

부시 대통령은 “소유 사회”를 만들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회사는 1천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그들의 첫 주택을 사게끔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정부를 도왔다.
President Bush had pledged to create an “ownership society,” and the companies were helping the administration achieve its goal of putting more than 10 million Americans into their first homes.

미신

그러나 무엇보다도 — 패니메와 프레디맥이 공격적으로 퍼뜨린 것이거니와 — 그들의 성공이 바로 미국에서의 주택보유 확대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광범위한 믿음이 이들 회사를 보호해주었다. 그 믿음은 너무나 강해서 많은 율사들과 감독자들은 어느 한 기관의 실패에 의해 그 이상이 지니고 있는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
But most of all, the companies were protected by the belief widespread in Washington — and aggressively promoted by Fannie Mae and Freddie Mac — that their success was inseparable from the expansion of homeownership in America. That conviction was so strong that many lawmakers and regulators ignored the peril posed to that ideal by the failure of either company.

경쟁력

의회는 또한 패니메와 프레디맥이 모기지론을 사는 돈을 증액시키기를 원했고 이 두 기관이 펀드에 다른 금융기관들보다 더 낮은 지분을 남겨놓아도 되게끔 지정하였다. 100달러를 가진 은행이 90달러의 모기지론을 살 수 있다면 패니메와 프레디맥은 97.5달러의 론을 살 수 있었다.
Congress also wanted to free up money for Fannie Mae and Freddie Mac to buy mortgage loans and specified that the pair would be required to keep a much smaller share of their funds on hand than other financial institutions. Where banks that held $100 could spend $90 buying mortgage loans, Fannie Mae and Freddie Mac could spend $97.50 buying loans.

패니메와 프레디맥은 거의 돈을 찍어내는 권리를 가진 거나 진배없었다. 그들은 정부가 상환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인식을 기초로 시장금리 이하로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는 이 자금을 시장금리를 지불하는 모기지를 구입하는데 썼다.
Fannie Mae and Freddie Mac enjoyed the nearest thing to a license to print money. The companies borrowed money at below-market interest rates based on the perception that the government guaranteed repayment, and then they used the money to buy mortgages that paid market interest rates.

부패

공공기관과 사기업이의 장점을 동시에 누리는 행운에 힘입어 패니메와 프레디맥은 그들의 초과 이윤으로 그들을 지배하여야 하는 정치가들을 매수하는데 썼다. 이 회사들은 그들의 친구들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그들의 적들을 쫓아냄으로써 늘어가는 규제를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Blessed with the advantages of a government agency and a private company at the same time, Fannie Mae and Freddie Mac used their windfall profits to co-opt the politicians who were supposed to control them. The companies fought successfully against increased regulation by cultivating their friends and hounding their enemies.

그래서 회사는 점점 더 그들의 초과이윤을 그들의 지위를 보장받는 막대한 영업에 사용했다. “우리는 신용위험과 금리위험을 다루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정치적 위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패니메의 임원인 프랭클린 라인스가 1999년 모임에서 투자자들에게 한 말이다.
So the companies increasingly used their windfall for a massive campaign to protect that status. “We manage our political risk with the same intensity that we manage our credit and interest rate risks,” Fannie Mae chief executive Franklin Raines said in a 1999 meeting with investors.

느슨한 규제

의회는 미국 연방주택기업감독청(the Office of Federal Housing Enterprise Oversight:OFHEO)이라는 허약한 규제자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 기관은 의회의 승인을 통해 예산을 배정받아야 한다. 반면 은행들을 규제하는 기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예산을 배정한다. 이로 인해 의회와의 결탁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기가 쉬워진다.
Congress chose to create a weak regulator, the Office of Federal Housing Enterprise Oversight. The agency was required to get its budget approved by Congress, while agencies that regulated banks set their own budgets. That gave congressional allies an easy way to exert pressure.

몰락

패니메와 프레디맥의 위험한 대출에 대한 식욕은 점점 더 탐욕스럽게 자랐다. OFHEO가 2007년 1월 빨간 깃발을 쳐들기 전까지 많은 차용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하였고 패니메와 프레디맥은 몇 달 안에 손실을 커버할 돈이 말라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신용위기가 가속화됨에 따라 의회는 두 달 전에 이 회사들에 대한 강하고 새로운 규제자를 설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미 너무 늦었다.
Fannie Mae and Freddie Mac’s appetite for risky loans was growing ever more voracious. By the time OFHEO began raising red flags in January 2007, many borrowers were defaulting on loans and within months Fannie Mae and Freddie Mac would be running out money to cover the losses. Finally, as the credit crisis escalated, Congress passed a bill two months ago establishing a tough, new regulator for the companies. It was too late.

미국의 석유 파이프라인 정치와 러시아-그루지야 사태

US oil pipeline politics and the Russia-Georgia conflict

By Alex Lantier
21 August 2008

미국언론들이 그루지야의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그루지야 대통령 미하일 사카쉬빌리를 미국이 지원했던 분명한 이유 하나는 그루지야가 코카서스와 카스피 해로부터의 석유와 가스 수출의 주요 통행국가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루지야가 그루지야에서 탈퇴한 남오세아티아에 있던 러시아의 평화유지군에 폭격을 가하면서 그루지야와 러시아 사이의 적대가 분출된 8월 7일은 파이프라인 정치와 중앙아시아에서의 그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대리국가들(proxy states)을 공격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정책의 큰 윤곽은 소비에트의 1991년의 붕괴 이후부터 과거 소비에트 국가였던 곳들과 미국과의 관계를 규정하였다. 그 시절 미국의 투자자들은 이전 소비에트 경제의 많은 부분을 획득하고자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카스피 내만의 석유 및 가스 산업에 몰려들었다. 1990년대 초반 서방의 에너지 기업들은 카자흐스탄의 텡기즈(Tengiz) 유전, 아제르바이잔의 Azeri-Chirag-Guneshli(ACG) 유전,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의 다울레타바드(Dauletabad) 천연가스전과 같은 수많은 사업들을 개발할 수 있는 지분을 확보하였다.

착수단계에서부터 미국 회사들과 자문들은 과거 소비에트 국가들에로 하여금 미국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적대적이라고 여기는, 특히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나라들을 우회하는 파이프라인 경로에 동의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한 파이프라인은 미국의 라이벌에게서 통행료 수입과 파이프라인 흐름을 차단할 수 있는 그들의 권한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적 레버리지를 제거했을 뿐 아니라 친미 지역 동맹을 함께 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워싱턴에 제공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빌 클린턴 정부는 러시아, 이란, 중국의 영토를 우회하면서 카스피 해의 석유와 가스를 수출하기 위한 두 개의 주요한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를 착수한다. 첫 번째 것은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통해 인도양의 항구들로 수출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 때문에 워싱턴은 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TAP)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 위해 1995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일하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탈레반을 지원하였다. 이 계획은 결국 북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는데 실패한 탈레반의 무능력 때문에 좌초되었다.

또 하나의 계획은 코카서스에의 친미 성향의 소국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서쪽으로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카스피 해의 동쪽해안에 위치한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연결하는 해저 카스피해 횡단 파이프라인과, 바쿠(아제르바이잔)-티빌리시(그루지야)-세이한(터키) 파이프라인은 카스피 해 에너지 수출의 상당량을 지중해로 보낼 것이었다. 이 파이프라인은 특히 카스피에서 서구로 향하는 에너지 루트에 대한 러시아의 오랜 지배에 대한 결정적인 반격으로 여겨졌다.

이 사업의 정치적 성격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가 최근 “브리티시 페트률룸이 30%를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는 40억 달러짜리 BTC 파이프라인은 카스피의 석유를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또는 러시아를 통해 보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루지야로 길이 잡혀있었다. 10마일짜리 파이프라인이 카스피 해의 석유를 잘 설치된 이란의 파이프라인 시스템으로 연결할 수도 있었다.”라고 보도하였다.

클린턴 정부의 관리들은 무모하게도 바쿠-티빌리시-세이한(BTC) 파이프라인을 위해 로비를 감행했다. 이 파이프라인은 아제르의 수도 바쿠 근처의 ACG 유전에서 그루지야의 수도 티빌리시를 거쳐 세이한의 지중해 항구까지 석유를 수송할 것이었다.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터키가 BTC 파이프라인에 찬성하는 국제조약에 서명한 후 클린턴은 2000년에 그 파이프라인이 “20세기 말에 가장 중요한 성취”였다고 말한바 있다.

2001년에 입각한 부시 행정부는 동일한 기본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의 군사력과 전략적 영향력을 사용하기로 계획하였다. 많은 고위관리들이 소비에트에서의 미국 에너지 기업의 초기투자에 직접 개입하였다. 국가안보 보좌관을 거쳐 국무장관이 된 곤돌리자 라이스는 1991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의 석유 메이저 쉐브론의 이사회에 소비에트 관련 전문가의 자격으로 종사하였다. 이 시기 쉐브론은 텡기즈 유전에서 주요지분을 획득한다.

부통령 딕 체니는 석유 인프라회사인 핼리버튼의 CEO로 재직하였고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에 의해 조직된 카자흐스탄의 석유자문위원회 위원이었다. 이 자문위원회에는 석유 메이저 쉐브론과 텍사코의 CEO들도 위원이었다. 1990년대에 체니는 또한 아버지 부시의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했던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해 핼리버튼 이사진과 아제르 정부사이의 회담을 주선하였다.

부시 행정부는 러시아에서 전혀 다른 정부를 만나게 된다 :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2000년에 자신이 고른 후계자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권력을 넘겼다. 석유 매출 덕에 러시아의 경제가 소비에트의 붕괴를 초래했던 절망적인 추락로부터 서서히 살아났다. 그리고 푸틴은 보다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실행할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회복은 푸틴의 권력쟁취 이후에 전 세계 유가가 치솟기 시작하자 가속도를 낸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의 테러리스트 공격의 여파로 푸틴은 표면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대한 미군의 공격을 위한 물류기지라는 명목으로 실시된 카스피 지역 군사기지에로의 미군배치를 묵인한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배치를 통해 미국은 자신들의 파이프라인에 대한 이해관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가장 명확하게 중동, 중앙아시아, 그리고 러시아를 중국의 태평양 해안과 연결하는 경쟁적인 네트웍인 “범아시아 글로벌 에너지 가교”를 마련하겠다는 중국측 계획의 일시적인 좌절을 초래하였다.

그루지야는 곧 서방의 파이프라인 계획에서 주요한 통과국가로 부상하였다. 2002년 런던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샤 데니즈(Shah Deniz) 가스전에서 바쿠와 티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동쪽 도시 에르주룸으로 이어지는 천연가스 수송관(BTE)과 함께 BTC 파이프라인의 건설을 시작하기 위한 국제 컨소시엄이 출범하였다. 또한 BTE 파이프라인을 에르주룸에서 비엔나까지 연장되는, 소위 “나부코(Nabucco)”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 시장으로 연결하는 계획들도 세워졌다.

그 결과로 그루지야는 2003년 겨울 예두아르드 세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의 축출로 이어진 “장미 혁명”이 벌어진, 러시아와 미국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지역이 되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야당에 의해 선거결과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던 총선에서 야당은 일련의 시위를 조직했고 결국 의회를 장악했다. 미국의 집중적인 훈련을 수료한 그루지야 군부는 당시 국무부장관인 콜린 파웰을 비롯한 미국의 최고위 관리들이 세바르드나제가 사임하라고 개인적으로 개입하는 동안 한쪽으로 비켜나 있었다.

이런 미국산(made-in-the-USA) 공격은 세바르드나제의 협력자 중 좀더 미국과 친했던 이들에게 일련의 권력을 안겨주었는데 가장 주되게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육받은 변호사 미하일 사카쉬빌리를 들 수 있다. 사카쉬빌리는 2004년 1월 공식적으로 그루지야의 대통령에 취임한다.

2003년 있었던 의회 선거 캠페인에서 세바르드나제와 사카쉬빌리의 가장 큰 차이은 그루지야에서의 인종적 소수 지역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있었다. 세바르드나제는 아드자리안(Adjarian)의 정치가 아슬란 아바쉬드제(Aslan Abashidze)와 연합했다. 반면 사카쉬빌리는 노골적으로 이 지역 전체에 대해 티빌리시가 총체적인 통제를 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세바르드나제가 아드자리아, 아브카지아, 남오세아티아 등과 같은 그루지야의 지방정부의 탈퇴와 독립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스크바의 명백한 허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2004년 사카쉬빌리는 아드자리아에 그루지야 군대를 동원해 침공하여 협박함으로써 아바쉬드제를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러시아의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오세아티아와 아바카지아를 위협하였다. 

미국의 석유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장미 혁명은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것은 2005년의 BTC 파이프라인의 개통의 1년 전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미국 대외정책에서 가지는 가치는 그루지야 정부가 러시아의 압력으로부터의 자유에 의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장미 혁명으로 말미암아 그루지야 정부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루지야 민족주의에 굳게 헌신하던 세바르드나제를 교체하고, 그루지야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사카쉬빌리 치하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그루지야의 항상적인 공격위협에 놓여있던 소수지역에 국한되었다.

장미 혁명 이후 중앙아시아 파이프라인 정치지형의 보다 광범위한 전개는 미국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점증하는 모스크바와의 무모한 대립에서 사카쉬빌리를 지원하는 미국의 계산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대한 저항이 커감에 따라 결국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양으로 잇는 TAP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루지야를 통한 코카서스 파이프라인이 워싱턴이 용인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가스 수출의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통로가 되었다.

2007년 12월 러시아가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동 카스피 해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새로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연간 200억 큐빅미터의 최초 수출용량을 지닌 이 파이프라인의 건설은 중앙아시아 정부들이 주요한 석유 및 가스 자원을 코카서스에서 현존하는 미국이 지원하는 파이프라인에 연결될 잠재적인 카스피 횡단 파이프라인에 의존할 것이라는 미국의 희망에 엄청난 일격을 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이웃한 서쪽의 중국으로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에너지 공급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2001년 미국의 중앙아시아로의 주둔으로 인해 좌절을 맛본 중국은 이후 많은 파이프라인 계약을 체결하였다. 카스피 북쪽 지역의 카자흐 유전과 중국 북쪽의 신장(Xinjiang) 자치지역의 중국 파이프라인 네트웍을 잇는 카자흐스탄-중국 석유 파이프라인이 현재 건설 중이며 2009년 10월에 운영을 개시할 것이다. 그 지선이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유전을 향하는 평행하는 천연가스 라인도 건설 중이다.

** 파이프라인 링크를 클릭하시면 지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원문보기

공감대 형성과 정상회담 시간의 상관관계

요즘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의 웹사이트를 찾는 개인적인 이유가 혹시 개그 소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재밌는 개그 소재가 많이 눈에 띈다.

청와대 관계자는 “여러 의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기 위해 회담시간을 1시간으로 했으나 한미동맹관계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북핵문제, 한국의 미국 비자면제프로그램 등 각종 현안에 대해 양 정상이 많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공감대가 이미 형성돼 있었고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됐기 때문에 회담이 빨리 끝났다”고 밝혔다.[한미정상회담, 당초 예정보다 32분 단축된 이유는, 조선일보, 2008.7.9]

당초 1시간으로 예정되었던 정상회담이 28분 만에 끝난 것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의 변명이다. 정말 웃기려고 한 소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조선일보도 어이가 없었는지 제목 신공도 신랄하다.(28분을 기사화시킨 의도 자체가 청와대에 심사가 뒤틀어져 있던 차에 한번 까겠다는 의도가 눈에 훤히 보인다)

각설하고 청와대 관계자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이번을 교훈삼아 다음 번 혹시라도 정상회담이 또 있다면 ‘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공감대를 형성시켜’ 회담을 한번 10분 안에 끝내도록 노력해보기를 부탁드린다.

영변 냉각탑의 폭파는 20세기형 냉전의 폭파?

북한의 영변 핵시설은 그동안 한국전쟁 이후의 북미관계의 미묘함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이었다. 그런데 그 조형물이 이제 북한의 핵신고에 즈음하여 폭파되었다고 한다. 이 이벤트를 계기로 하여 북미관계, 나아가 동북아의 정치지리학 지형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The Bush administration’s policy towards North Korea – isolating it and threatening it with military force, in order to break up a potential realignment in Northeast Asia unfavorable to US strategic and commercial interests – is in shambles. With the US military absorbed by bloody and unpopular occupations of Iraq and Afghanistan, US geopolitical influence is receding, even as the region’s strategic importance grows rapidly.

북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 미국의 전략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저해할 북한과 동북아 사이의 잠재적인 재편성을 분쇄하기 위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것 –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미군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피를 부르지만 인기 없는 점령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전략적 중요성이 빠르게 증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치지리학적 영향력은 감소하고 있다.(North Korea makes initial nuclear disarmament gestures, 28 June 2008, Wold Socialist Web Site)

World Socialist Web Site 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미 미국의 동북아에서의 군사적 입지는 그 중요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눈에 띠게 약화되어 왔다. 특히 꽤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미국의 대중국 포위 전략이(주1) 동북아에 와서는 바로 그 골치 아픈 북한 때문에 아작 나고 있다는 상황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는 굴욕적인 상황일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부시 행정부가 처음 들어섰을 때의 대북정책은 ‘없었다’. 한국에 방영될 광고를 찍은 맥라이언이 TV쇼에 나와서 어느 나라 광고를 찍었는지 기억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섹시한 장관으로까지 거론된 도널드 럼즈펠드는 취임 당시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북한 뿐 아니라 한반도 자체가 존재감이 없었다는 증거다.

그러던 것이 대중국 전략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다음에야, 그리고 중동을 기어코 쳐들어가야겠다는 부시의 의지가 단순히 석유 때문만은 아니라고 우기기 위해 “악의 축”에 서둘러 북한을 추가시키고 나서야 북한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그리고 설설 길 것으로 알았던 북한이 핵무기가 있다고 개꼬장을 부릴 때쯤 북한은 가장 댄디한 007 피어스 브론스난의 상대가 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은 양국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여타 동북아 국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북한에게도 그렇지만 미국 역시 굴욕의 시대였다. 정말 가진 것 달랑 방울 두 쪽인 나라에게 온갖 험한 소리 다 듣고 6자 회담에서 중국한테 형님 자리 뺏기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되는 것도 하나 없던 부시 행정부의 지난 8년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제 겨우 자신들의 압력이 아닌 북한의 의지로 영변 냉각탑을 폭파하여 겨우 제대하는 부시 병장의 추억록에 넣을 사진하나 얻었으니 이런 개쪽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다고 북한으로서도 여태 개기고 있어서 득이 된 것은 없다. 그 기간 동안 본인이야 억울할지 몰라도 적어도 서방에게는 ‘자기 몸 난도질 하는 부랑자 국가’로 인식되었고 내부적으로는 거의 재앙적인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호전될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데 경제적으로는 현재의 테러지원국 해제 등의 조치가 사실상 다분히 상징적일 뿐 그 효과는 장기적이고, 정치적으로도 부시가 물러나고 설령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하더라도 북미관계가 급진전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판단해 보건데 미국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든 공화당이 정권을 잡든 대외정책이나 경제정책의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대북정책에 있어 그러할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의 미국이 어느 한 정파의 이해에 따라 정책을 시험해볼 국력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달러는 휴지조각이 되어가고 있고 유가는 치솟아 국민들이 바깥출입을 삼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도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붓고 있는 중동에 박아놓은 미군을 철수시키면 본전생각에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 뻔하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지들이 여유가 있어야 북한도 눈에 들어오고 도와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북미관계는 한동안 정체상태, 즉 부시의 유산이 한동안 방치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북미관계는 북미관계 그 자체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중미관계, 더 나아가 미국과 동북아와의 관계의 틀 안에서 해석될 것이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미국과 동맹을 형성하고 있는 남한과 일본은 지금 중국의 가장 긴밀한 무역 파트너다. 이를 이제 와서 과거로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경제적으로 얽혀있다. 곤돌리자 라이스가 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사문제는 또한 경제문제이기도 하다.

점점 더 패권을 잃어가는 미국, 21세기 신흥강국으로 부상할 중국과 러시아,… 이러한 것들을 고려해 볼 때 북한의 핵포기 의지는 어쩌면 미국과의 화해 제스처를 위해서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북한은 이미 21세기의 새로운 정치지형도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 상황에서 가장 개념 없는 정부가 8년 전의 부시 행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아예 대북정책이 존재하지 않는 식물정부 이명박 정부라는 사실이다.

(주1) 21세기 군사강국으로 성장할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정책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황을 보고 싶으면 세계지도를 펴놓고 중국을 둘러싼 인접국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확대정도를 가늠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