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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Inside Job 短評

2008년의 금융위기는 내가 여태 살아오는 동안에 겪었던 중 가장 큰 경제위기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에는 그 이전에 외환위기라는 심각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2008년의 경우는 전 세계가 함께 지독한 몸살을 앓은 때였다. 덕분에 이 블로그도 그와 관련한 글을 올리느라 안 돌아가는 머리를 많이 굴리기도 했던 때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그 사태의 원인은 무엇이며, 누구의 책임인가? 왜 다른 투자은행들은 보호를 받았는데, 리만브라더스는 침몰했을까? 위기는 해소되었고 시장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많은 물음에 많은 대답이 책이나 보도를 통해 공개되고 있지만 여전히 이 큰 코끼리의 정체는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맷 데이몬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다큐멘터리 Inside Job은 이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Peter Gabriel의 Big Time을 배경으로 거대한 마천루의 풍경을 비추면서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금융위기 당시 당사자들이었던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코끼리의 윤곽을 더듬어 간다. 부족한 부분은 제작진의 분석으로 채워간다.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영화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는 금융위기가 월스트리트와 FRB, 그리고 이들과 친한 학계 등 금융 기득권의 내부자 소행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들은 정부의 규제를 없애 거대한 거품을 만들고 여기에서 수많은 이익을 독점했고 마침내 그 거품이 터지자 국민의 세금으로 스스로를 구제한다.

이 모든 야바위 짓은 “경제 살리기”라는 미명 하에 진행되었는데, 그런 파렴치한 짓에 분노한 유권자들이 대안으로 뽑은 오바마 조차 재빨리 금융 기득권 집단의 편으로 돌아섬으로써 유권자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이 부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켰다) 이는 또한 금융위기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위기는 이른바  “적정한 주택(affordable housing)”의 공급을 통해 자본소유의 민주주의 사회를 구축하려 했던 미국정부의 드라이브가 – 이 부분은 영화에서 많이 다뤄지진 않았다 – 금융부문 비대화와 탈규제로 이어지며 발생한 근본모순인데, 정부와 금융 모두 이러한 상황을 반성하는 기색은 없고 다만 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다.

비대해진 금융부문이 여태의 이익을 계속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거품이 필요하고 2008년 이후 구제금융이라는 이름하에 뿌려진 천문학적인 자금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거품, 이른바 ‘닷거브 거품(dot gov bubble)’이다. 이 거품이 QE3, QE4로 이어질 수 없음은 자명하고 그 끝은 어떠할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차분히 2008년 금융위기의 앞뒷면을 살펴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 영화가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전에 관련서적을 읽었거나 읽을 분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 많다. 영상은 차분한 편으로 마이클 무어식의 신세대(?) 다큐에 익숙한 분이라면 약간은 지루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MTV 스타일은 아니니까~

비디오는 영화의 엔딩타이틀에 사용된 곡이다. MGMT의 Congratulations.

Frontline : Private Warriors

이 작품은 군대의 민영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즉 공공서비스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는 군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 민간의 효율과 창의라는 이름하에 어떻게 민영화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은 누구인가를 고발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부시 행정부는 말 그대로 자본가의 정부라 할 수 있다. 행정부 수반 면면이 미국의 거대기업의 임원이나 사장을 지낸 인물들이며 그들의 중심축에는 핼리버튼의 CEO를 지낸 부통령 딕체니가 있다. 전투기능을 제외한 군이 행하는 업무를 민간에게 넘기는 방침이 확정되고 나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은 각국 – 특히 미국의 – 군사기업의 거대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최대의 수혜자는 딕체니의 본거지 핼리버튼이다. 이 기업은 모회사 및 자회사 등을 통하여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사상최대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한 이들을 둘러싼 부정과 부패의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어쨌든 군사기업으로서는 이라크 전의 단기간의 해결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이라크가 진흙탕이 될수록 그들의 이익은 증대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들 군사기업에 의해 고용되어 유사전투기능을 수행하다 억울하게 숨져간 미국인들을 조명하여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이들이 어떻게 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고 있는가를 뜻있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전 세계의 군사기업의 실태와 부작용에 대해서 알게끔 했고 이에 영향 받은 국내 공중파 방송들도 앞 다투어 비슷한 포맷으로 군민영화 실태를 고발하였다. 2005년 방영.

P.S. 군사기업은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그들을 지원한 정치가는 뒷돈을 챙길 텐데 정작 나머지 행정부 자체는 어떤 이익이 있을까? 정답은 미군의 사망자 숫자를 조작하여 국내 반전 여론을 무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군사기업의 고용인들의 죽음은 산업재해 일뿐 군인으로서의 영예로운(?)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상보기
http://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warriors/view/

The Road to Guantanamo

관타나모로 가는 다소 복잡한 경로에 관해 서술한 영화이다. 관타나모는 쿠바 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1903년 이래 미국이 자국의 해군기지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위 미국의 테러세력과의 전쟁 이후 불법적인 전쟁포로 수용소로 유명해진 지역이었다.

관타나모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미국 당국의 불법감금, 폭력행사 등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 정부는 그 곳이 자국의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어 각종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는 파키스탄계 영국청년 네 명이 충동적으로 아프카니스탄에 들렀다가 부당하게 관타나모 기지에 2년여를 불법감금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극은 실제인물의 증언, 전문배우들의 재연, 그리고 각종 언론에 공개된 필름 등을 섞어서 일종의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진행된다. 역동적인 카메라는 마치 우리자신들이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한 이미 24 Hour Party People 등을 통해 음악에도 적지 않은 공력이 있음을 증명한 마이클윈터바텀은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음악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긴장감 조성만을 위한 음악을 화면에 깔아 사실성을 높이고 있다.

이 영화는 영국의 ‘채널4’에서 방영되어 영국 내 반전여론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 ‘순수한(innocent)’ 네 명의 영국청년의 기구한 운명은 제3세계의 인종적 ’운명‘을 지닌 이들이 아무리 제1세계에 편입되어도 결국은 얼마나 당연하게도 다양한 인종적 편견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 일어난 알제리계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유색인종의 폭동 역시 그 나라 안에서조차 제3세계 인종은 내부식민지화 되어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기에 이들의 에피소드는 그 사연이 좀 더 기구할 뿐 예외적인 경우로 치부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좀 더 나아가서 관타나모 기지에 감금된 ‘불순한’ 젊은이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작심하고 ‘성전(聖戰)’에 참여했기에 기꺼이 인권을 유린당하여도 정당한 것인가? 영화 속의 부시의 말처럼 “그들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저버린 살인자”들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부시가 선거에서 참패하고 럼스펠드를 희생시켰다 할지라도 여전히 세상은 주류에 의해 주입된 편향된 가치가 지배하고 있다. 약자가 하면 ‘불순한’ 테러이고 강자가 하면 자위적 수단으로써의 ‘순수한’ 응징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영화의 후속편으로 ‘불순한’ 젊은이들의 관타나모 여행기를 다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Sicko(2007)

미국영화계에서 가장 급진적인 영화감독 중 하나인 Michael Moore 의 최신작. 전작에서 미국의 총기소유의 자유에 대해 비판을 가했던 Michael 이 이번에는 미국의 의료시스템에 메스를 가했다. 가장 부유한 나라이면서도 열악하고 냉혹한 의료시스템을 갖춘 모순을 지닌 이 나라에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Michael 은 현재까지도 오천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나머지 미국인마저 의료보험 사기업의 냉혹한 치료거부로 인해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후진적인 의료시스템의 주범은 바로 이익추구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의료보험 사기업과 이들에게 매수당한 닉슨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그는 캐나다, 영국, 프랑스, 심지어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돌아보면서 이들 나라에서 자국민들에게 제공하는 무상의료 시스템을 소개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자유’라는 미명 하에 ‘사회주의적 정책’이라는 매카시즘의 칼날을 들이대며 짓밟고 있는 나라에서 진정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의료보험 사기업과 이들의 뒷돈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뿐임을 잘 말해주는 작품이다.

예의 MTV 적인 편집을 통해 심각한 주제에도 웃음을 짓게 하는 여유를 잊지 않고 있다. 다만 의료현실의 대비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무상의료를 제공하는 나라들의 재원마련 등 시스템의 해부 등에는 소홀한 측면이 있다.

* 기왕에 의료를 소재로 영화도 찍었으니만큼 Michael Moore 본인의 건강도 생각하여 살을 좀 뺏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한편 그는 영화후반부 관타나모를 간다는 핑계로 (매우 의도적이게도) 쿠바에 미국인 환자들을 데리고 가서 쿠바의 병원 서비스를 받는다. 최근 미재무부는 그의 쿠바 방문이 미국인의 공산주의 국가 방문을 금지하고 있는 규정을 위반하였다고 보고 (매우 속보이게도) 그를 소환조사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럼 미국인은 중국도 못 가나?

*** 얼마전 미국의 리뷰 사이트 zmag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힐러리클링턴, 오바마를 포함한 민주당의 대선주자들은 어느 하나 의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칭찬받아야 할 TV프로그램 ‘아워아시아(Our Asia)’

필자는 집에서 TV를 시청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기료에 포함되는 TV시청료도 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얼마 전부터 체력단련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러닝머쉰(한글날 특집으로 우리말 표현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실패 “뜀박질 기계”정도?)을 하면서 가끔 TV시청을 한다. 역시 최고의 애청 프로그램은 CSI.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폼생폼사의 호라시오 반장과 냉정일급의 그리섬 반장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얼마 전부터 내 눈을 끌어 잡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채널도 기억나지 않는다(하도 많기 때문에). 바로 아워아시아(Our Asia). 이 프로그램의 공략 목표는 분명해 보인다. 아시아의 일원인 한국 땅의 방송에서조차 소외받고 있는 아시아에서, 계층적으로 소외받고 있는 여성과 아동의 실태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일종의 틈새시장 공략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 전략이 훌륭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본 몇 번의 에피소드에서 그들은 태국의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미성년자들, 스리랑카에서 정부군과 반군의 총알받이로 몰리는 어린 전투병들(전체 전력의 3분의 1가량이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네팔에서 미니버스의 차장으로 일하며 하루 천원을 버는 12살 소년 등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어제 본 네팔의 버스 차장 순버하둘의 에피소드(검색 결과 재방송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자못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세 시간을 차를 타고 가서 다시 다섯 시간을 걸어가야 하는 깊은 오지에 가족과 살던 이 꼬마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고자 도시로 도망쳤다. 부랑아 생활 끝에 어느 착한 버스 운전사의 도움으로 차장 일을 맡게 되었고 그 운전사의 집에서 머물 수도 있게 되었다. 분명 현대사회에서 금지되어 있는 아동노동이었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버스기사가 되고 싶은 순버하둘의 꿈은 덧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버스 운전사의 승낙으로 하루 휴가를 내어 13개월 만에 찾아간 그의 가족은 낯선 카메라 앞에서 뚱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하다가 선물을 사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아들의 말에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순버하둘은 오랜 동안 산중턱에서 집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린다.

분명 제3세계의 이러한 수탈적 상황에 대한 근본적 모순을 파헤치거나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공중파 방송의 인기프로그램 ‘인간극장’의 아시아 버전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약간은 ‘세상에 이런 일이’ 풍의 인간극장과 달리 아시아의 빈국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수탈적 상황과 그로 인해 피해 받고 있는 약자들을 담담히 비출 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어느 나라나 잘 살수 있다는 ‘근대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순버하둘은 카트만두 시내의 매연을 맡아가며 하루 12시간을 일해서 천원을 버는데 더 이상 열심히 노력할 기운이 있을까? 그가, 그의 나라가 게을러서 못살게 되었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좀 더 잘사는 나라와 그 기업들이, 또 그 기업의 일거리를 받아 아동노동을 이용하는 현지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국제적 차원의 수직계열 노동분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나이키의 축구공을 어린 인도 소녀가 직접 손으로 꿰매어 만들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삶에서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는 상품의 먹이사슬에서 우리와 그들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고 우리 또한 일정정도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아워아시아 같은 프로그램이야말로 방송의 존재의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방송인들끼리도 서로 반말과 막말을 하면서 시청률을 높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난무하고 있는 요즘, 그 리얼리티마저 조작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방송계에서 차분한 영상으로 이 지구촌의 현 주소를 보여주고 우리의 성찰을 요구하는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참고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24/20070824000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