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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정국에 즈음한 쇠라의 그림에 대한 상념

인류는 엄중한 “팬데믹”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갖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각 나라 혹은 지자체의 수장(首長)들이 여태 하지 않았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황도 그러한 유례없는 현상 중 하나인데, 바로 이들이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러있으라고 달래거나, 윽박지르거나, 읍소하는 업무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내가 우연히 접한 기사는 로리 라이트풋이라는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는 예의 그 희한한 업무를 수행하는 상황을 묘사한 기사다.

어찌 보면 – 요즘 상황에 비추어볼 때 –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 기사에서 내 눈을 잡아끈 것이 있는데 바로 시장의 얼굴을 찍은 자료 사진이다. 시장으로서 흔치 않은 흑인 여성이라서 눈여겨 본 것은 아니고 배경으로 쓰인 그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가 그린 그의 필생의 역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이 그림은 현재 시카고 미술원에 전시되어 있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중이라는 상황 설정의 사진에 이 그림이 배경으로 찍히게 된 것이다.

A Sunday on La Grande Jatte, Georges Seurat, 1884.jpg
By 조르주 쇠라 – Art Institute of Chicago, 퍼블릭 도메인, 링크

개인적으로 이 사진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매체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진이 현 상황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지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응축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유원지와 같은 공공공간(公共空間)과 그곳에서의 휴식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시민의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이고, 어찌 보면 쇠라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자유를 암암리에 묘사한 작품인데, 시장이 그 작품 앞에서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야외에서의 휴식, 혹은 이동의 자유를 공공(公共)의 이익을 위해 제한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여겨지기에 아이러니하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개인의 이동과 휴식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렇기에 유사 이래 이윤창출을 위해 쉼 없이 일해야 했던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그 자유를 쟁취하려 했고,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문명사회에 접어들어 휴식의 자유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공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전 세계 상당수의 시민들은 광학현미경으로는 볼 수도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그 자유가 자율적/타율적으로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료보건의 팬데믹에 대한 확실한 인프라의 구비 역시 여태의 자유를 보장하는 또 하나의 전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인프라 중 핵심은 의료 인프라겠으나, 또 하나 한국에서의 코로나19 통제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인프라가 디지털화된 개인정보 데이터 축적과 이 정보의 공유 시스템이다. 한국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은 달성했다는 유리한 여건 이외에도 사실상 전 국민을 코드화한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개인정보 빅데이터가 존재하고 국가가 그것을 통제하기에 역설적으로 도시폐쇄 없이 주민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 “프라이버시”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유럽인들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국가 혹은 여하한의 기관이 개인정보 빅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활용할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조직범죄나 다름없는 “n번방” 사건 역시 개인정보를 시골 면사무소 286 컴퓨터에서조차 검색할 수 있는 한국이기에 더 범행이 용이했을 것이라는 개연성도 그러한 불편한 상황의 한 사례다. 하지만 어떤 유튜버도 말하듯 어차피 개인정보 빅데이터는 이미 구글과 페이스북이 일개국가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1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통제 없는 개인의 완벽한 자유는 이제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우연치 않게 한국이 현재 코로나19 사태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각국은 이 사태가 진정된 이후 복기를 통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반성 없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라면 ‘민주적 의사결정’, ‘투명성’, ‘적절하게 통제되는 정보의 활용’이라는 교훈을 얻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21세기 형 경찰국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미 어떤 나라는 그러한 황폐한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나라는 아직도 우월감에 빠져 다른 나라를 까기 바쁘고.

현 정부는 자유주의 정부일까?

오늘날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간섭과 복지 국가를 지지하는 미국식의 자유주의를 지칭한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경제적 자유와 개인자유로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려면 국가가 시장경제와 개인의 자유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이러한 자유주의는 국가와 자유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4가지로 구분된다. 경제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Libertarian), 양쪽도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Authoritarian), 경제적 자유에는 개입하지 말고 개인의 자유에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Conservative), 경제적 자유에는 개입하고 개인의 자유에는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Liberal)으로 구별된다.[David Boaz, Liberationism, A Primer; The Free Press, 1977, p. 22. / 자유주의만이 살길이다, 한국하이에크 소사이어티 엮음, 평민사, 2006년, p80에서 재인용]

우리가 흔히 혼동하고 있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차이와 이것들에 대한 입장에 따른 사상적 지형을 대체로 잘 설명해주고 있는 글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의 오류는 분명하다. 대의제 정치지형이라면 국가는 인민의 의지에 대한 신탁의 형태를 띠는 것이므로 또 하나의 독립적인 의지의 주체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애초에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 개인의 범위에는 자연인뿐 아니라 기업이라는 법인(法人)이 포함되어 애초 불공정한 게임의 개연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민주대의제라는 제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자본은 면밀히 유착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여하튼 위 분류법으로 현재 한국정치를 보면 현재의 한국사회는 어떠한 입장에 경도되는 사회일까? 적지 않은 이들이 적어도 리버타리안과 리버럴은 우선 배제하지 않을까 싶다. 남은 둘 중에서 우선 컨저버티브에 대해 살펴보자. 이는 미국정치에서 많이 관찰되는 유형이다.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기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애 반대, 임신중절 반대, 공적의료보험 반대, 총기 소유의 자유 등에 소리 높인다. 오쏘리타리안은 제3세계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형이다.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되었건 칼로 정권을 잡았건 오만한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경제와 정치를 마음대로 농단한다.

애초 현 정부는 집권초기 한미FTA라는 우익의 주요정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어가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분명히 하다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닥친 적이 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은 컨저버티브 쪽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강력한 저항과, 이어 불어 닥친 금융위기로 말미암아 한미FTA는 적어도 당분간은 시급한 정치적 의제에서 밀려난 느낌이다. 그리고 꺼내든 카드는 구시대적인 관치다. 박정희 식 개발독재를 연상시키는 4대강 정비사업 속도전, ‘일자리 나누기’라는 미명 하의 기존 직원들의 감봉, 기업들의 특정회사에 대한 기금 출연 요구 등의 행태는 적어도 리버타리안이 지향하는 ‘경제적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즉 오쏘리타리안 행태에 가까워지고 있다.

희한하게 이러한 비이성적인 행태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에 대한 지지도는 50%를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 발표되고 있다. 어떤 식의 설문조사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바닥이 없을 것처럼 떨어지던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민심의 향방은 소위 이명박식 중도실용주의, 보금자리 주택 공급 등 일련의 대중추수주의적인 서민행보와 표면상으로는 호전되고 있는 경제상황이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더불어 민심이 그의 권위주의적인 경제개입에 대해서도 별로 개의치 않지 않는가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오랜 기간 그러한 행태에 익숙해있기 때문일까. 심지어는 그에 대한 향수까지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남자에게서 박정희의 냄새가.

나는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이미 국가는 그 자체로 거대한 시장참여자라는 점, 대의제 하에서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유권자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국가의 개입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리버타리안의 아이디어는 실현 불가능한 이데아에 대한 아집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불가피한 국가개입을 어떻게 최적화시키느냐 하는 문제다. 이는 물론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대해 수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만큼이나 치열한 논쟁에 휩싸여온 주제다. 개입의 범위, 타당성 분석, 의사결정 과정, 투입재원 확보 등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이 소위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통제’의 한계인데, 재밌는(?) 것은 현 정부는 그러한 절차를 과감히 생략한다는 점이 오히려 강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최초의 주식회사에 관하여, 그리고 딴 소리

1.

회사(會社)란 무엇인가? 상법상의 정의는 상행위(商行爲) 및 기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단법인(社團法人)이다.(주1)자본주의의 발전은 회사라는 이러한 영리 단체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자본주의 이전에도 이윤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사업을 벌인 일은 많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업공동체는 오늘날의 주식회사로 대표되는 사업체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것이었다.

특히 회사가 자연인이 아니면서도 권리와 의무를 갖는 존재라는 점에서 중세의 수도원과 대학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유한책임 – 특히 주식회사 – 의 원리는 길드와 상인조합의 그것을 적용한 것이다.

위와 같은 폐쇄적 공동체에게 주어졌던 특권이 공개적 사업공동체에 주어진 것은 1555년 영국에서의 일이었다. ‘머스코비 회사(Muscovy Company)’ 혹은 ‘러시아 회사(Russia Company)’로 불린 사업공동체에 법인의 지위가 부여되고 주식 발행 및 거래가 허용된 것이다. 이 회사는 정부로부터 ‘무역에 관한 특허권’을 부여받았기에 ‘수탁회사(Chartered Company)’라 불리었다.

이 회사는 여왕 메리 1세로부터 러시아무역독점의 특허권을 획득한 후 6천 파운드의 자본금으로 3척의 상선과 기타 상품을 구입하여 설립되었다. 이 시대 이전의 대부분의 무역상들도 투자자들에게 투자를 끌어 모으긴 했지만 – 예를 들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 ‘주식’을 발행하고 법인의 성격을 지닌 것은 최초라 할 수 있다.

머스코비 회사가 활약하던 이 시기는 영국이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노예독점권을 깨뜨리면서 스페인과 제해권 다툼에서 승리한 시기이고,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영국해군의 사기가 한껏 고양된 시기였다. 그러므로 머스코비 회사를 비롯하여 이후 설립된 여러 수탁회사들의 목적은 콜럼버스, 마젤란 등이 발견한 신대륙의 상권을 정부와 상인이 공동으로 장악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라 할 수 있는 머스코비 회사는 17세기에 네덜란드 상인이 강력한 경쟁자로서 대두하고, 러시아 황제의 영국 상인에 대한 태도가 냉담해지자 점차 쇠퇴하여 갔다. 그렇지만 1600년 설립된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등 뒤를 잇는 수탁회사들은 200여 년을 넘게 존속하는 등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며 성장해갔다.

2.

21세기 세계화가 일상적인 화두가 되어버린 요즈음은 ‘회사’ 또는 ‘기업’은 이미 한나라에서, 그리고 지구촌에서 가장 강력한 법적권리주체다. 그들의 선조인 수탁회사들이 정치권력의 비호 아래 그들의 잇속을 챙겨주는 한편으로 부를 축적한 ‘정치권력 기원의 정경유착’의 형태를 보인 반면(주2) 오늘날에는 경제 권력의 극대화를 위해 정치권력을 조율하는 ‘경제권력 기원의 정경유착’의 형태로 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주3)

개인적으로 기업의 행태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비롯한 친기업주의자들의 논리가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축적한 보편타당의 원리의 왜곡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극대화를 위한 행동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프랑스 혁명 등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의 발전에서 ‘침해받을 수 없는 인권’ 등을 ‘침해받을 수 없는 이익추구 행위’ 등으로 치환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익추구를 정당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의 전 시기에서 기업은 일상적으로 권리를 제한받아 왔다. 대표적으로 ‘주식회사 설립금지’가 바로 그 사례다. 주식회사는 주주가 회사의 채무 등에 대하여 유한책임을 진다는 것으로 이익추구 행위를 정당화한 이 중 가장 유명한 아담스미스마저 반대하였던 방식이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주식회사는 여러 법적제한을 받아오다. 19세기가 되어서야 허용되었던 제도다.

오늘 날 거칠 것 없이 영역을 확장하는 금융자본 역시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서구 전반에 걸쳐 각종 제재를 받아왔었다. 그러던 것이 미 정부의 경제정책과 더불어 탈규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오늘날 금융세계화로 지칭되는 지구촌 전반의 금융 탈규제와 자유화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각종 탈규제와 이를 통한 기업집중 및 거대화, 이후의 초국적화는 기업을 어느덧 국가라는 단위를 넘어선 거인으로 둔갑시켰다. 이미 오래전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경제단위 중 대다수를 국가가 아닌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주4)

그러다보니 어느덧 자유주의는 ‘정치적’이라는 수사 대신에 ‘경제적’이라는 수사를 대표하는 표현이 되었고 ‘기업의 자유’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자유’가 되어버렸다. 그 하이라이트가 ‘WTO협정’과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이들 ‘자유’라 이름 붙여진 협정 들은 머스코비가 왕으로부터 부여받은 특허권(charter)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예전의 특허권이 개별 회사가 일개 국왕에게 개별 사업에 대해 부여받았던 한시적인 독점권이었다면 이번 특허권은 전체 회사가 – 물론 초국적 독점기업이 가장 유리하다 – 세계 모든 정치지도자에게 모든 사업에 대해 부여받는 영구적인 독점권이다. 심지어 한미FTA는 ‘투자자-국가소송제’라는 국가의 항복문서까지 별책부록으로 있다.

East India House by Thomas Malton the Younger.jpg
East India House by Thomas Malton the Younger” by Thomas Malton the Younger (1748-1804) – Yale Center for British Art [1].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3.

그러면 기업을 하지 말란 이야기냐 혹은 정부의 과도하고 무원칙한 규제가 타당하다는 이야기냐 하는 분이 계실까 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몇 마디 더 적도록 하겠다.(물론 무원칙하고 과도한 규제는 반대한다)

기업은 1인1표가 아닌 1주1표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개념이다. 민주주의라 함은 자유주의와 함께 인류가 오랜 투쟁을 통해 쟁취해낸 보편타당한 정치원리다. 경제체제가 어떻게 되었든 민주주의는 사회구성원의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를 지켜야 하는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복지제도 등 공적 부조는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주5)

기업은 한편으로 사회구성원 대다수에게 일자리를 주는 순기능을 하면서도 이윤극대화라는 내부동인에 의해 자신들의 자유를 외치면서 사회전체의 공익을 침해하면서 발전해온 측면이 크다. 더욱이 오늘 날 가속화되고 있는 민영화 논리는 민간의 효율성이라는 또 다른 자유주의 논리로 무장하고 사회적 자산과 복지제도를 공격하고 있다.(주6)

자연인도 극단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사회를 위해 그의 자유는 일정 정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면 사회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해서 세금으로 내는 것이다. 오늘날 초국적 기업은 세금감면을 미끼로 던지는 국가, 혹은 지방정부로 이리저리 자유롭게 움직인다.(주7)

이를 가리켜 비판자들은 ‘바닥을 향한 경주(race to the bottom)’라고 부른다. 개별 정부는 고용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기업에 단물만 빨리고 공적재원은 세금감면 탓에 바닥날 것이기 때문이다.

4.

두서없이 이야기했지만 이상이 바로 사람을 닮은 또 하나의 거대한 권리주체, 기업의 자유가 제한되어야 할 이유다. 기업의 건전한 경제활동은 사회 공공성이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사회전체의 경제적 효용이 있는 한에서만 허용되어야 한다. 선출되지 않는 권력 기업이 극단의 자유까지 보장받게 되고 나머지 사회의 공공성은 해체된다면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공멸뿐이기 때문이다.

 

(주1) 오늘 날의 회사 형태는 합명회사, 합자회사, 주식회사, 유한회사 등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주2) 아직도 부르주아지는 평민들과 함께 제3계급일 뿐이었다

(주3) 어쩌면 우리는 이미 기업이 하나의 국가권력과 동일시되는 ‘로보캅’이나 ‘에일리언’과 같은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4)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상품은 ‘Made in USA’나 ‘Made in China’가 아니라 ‘Made by Samsung’ 혹은 ‘Made by Google’이라고 해야 타당할 것이다.

(주5) 복지제도는 어쩌면 체제 옹호적이고 사회재생산에서 자본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주6) 복지제도에 대한 극단적 자유주의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았는지 보려면 마이클무어 감독의 Sicko를 보라

(주7) 개인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개인이 이렇게 하면 비참한 이주노동자 신세로 전락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