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정리신탁공사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에 대한 단상

요즘 미국의 자본주의를 두고 ‘이익은 사유화되고 비용은 사회화되는 부자들의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아주 유행하고 있다. 특히 자신들의 돈으로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기업주들의 목숨을 연장시켜주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미국 납세자들이 이러한 주장에 심히 공감할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실 이러한 ‘부자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어떠한 사회인가. 생산수단을 집적하고 대규모화시켜서 소비할 것을 만들어내는 사회다. 그곳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은 만들어낸 이가 쓰기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에게 팔려고 만든 것들이다. 즉 상품(商品)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경제/시장경제의 시스템이 본격화된 사회다. 즉 소비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사회화’되었다.

한편 (생산수단의) 소유와 투자는 여전히 ‘개인화’되어 있었다. 주식회사라는 신종 기업형태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사기업들은 개인 또는 가족의 소유였다. 주식의 공개가 ‘사회주의’를 재촉할 것이라는 피터 드러거와 같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식, 즉 회사의 소유권은 소수 자본의 손에 집중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와 투자 ‘개인화’는 자본주의의 본질 중 하나이다.

사기업은 사회화된 소비를 담당하는 주요주체다. 특히 오늘 날과 같이 국가의 공공서비스가 민간부문으로 이전되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 할 수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국가가 망해가는 기업을 구제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화된 소비를 담당하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방기하면(주1) 그것은 체제의 – 자본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닌 물질문명의 –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소비와 소유/투자의 불일치가 납세자들을 분노하게 한다. 기업의 상품을 국민이 소비하는 한편으로 그 기업을 국민이 소유하고 있다면 – 물론 그 집단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 불만은 한층 줄어들 것이다. 반면 국민이 소비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소유주, 그리고 의사결정의 주체가 회장 일가, 론스타, 듣보잡 소버린 펀드, 또는 헤지펀드일 경우, 그리고 그들이 구제 금융으로 한숨을 돌릴 경우 왕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일개국가는 여전히 소유와 투자의 개인화는 손댈 의지가 없다.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능력이 없다. 조지 부시, 헨리 폴슨, 고든 브라운, 니콜라 사르코지, 이명박 등등 국가의 수반 중 위와 같은 기업의 모순에 대해 1초 이상 고민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미행정부가 정리신탁공사(RTC·Resolution Trust Corp.)를 신설하지만 이를 기업형태의 본질을 손대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세상은 더욱 복잡해져가고 있다. 예전처럼 단순히 노동자와 자본의 갈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으로만 관찰할 수 없는 현상이 늘어가고 있다. 미행정부가 자국의 모기지 사용자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소버린 펀드의 이해관계를 위해 프래니를 구제해준 것에 대해 누가 약자고 누가 착취자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다 딴에는 국가를 위하고 서민을 위한 일들을 하고 있다.

‘이익의 사유화되고 비용은 사회화’되었다고 볼멘소리 하는 납세자들 중에서도 자신이 투자한 간접투자펀드가 그 ‘이익은 사유화’되는 과정에서 구제받은 아이러니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결국 모순의 본질을 살펴보는 것, 그리고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은 ‘악랄한 자본가를 몰아내자’라는 좌익적 도덕론만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주1) 즉 시장근본주의자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방임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 생각엔 시장근본주의자들이 가장 위험한 반(反)자본주의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