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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E. Stiglitz: Rethink GDP fetish

지구적인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동시에 세계경제를 되살리려는 열망은 해결이 어려운 질문 하나를 던져주고 있다. : 통계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신호”를 보내주고 있는가? 우리의 실행 위주의 세계에서 측정의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 우리가 측정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우리가 후진 측정법을 쓴다면 우리가 하고자 열망하는 것들은 (예로 GDP를 증가시키는 것) 실제로는 삶의 수준을 퇴화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또한 산출물과 존재하지 않는 환경보호 사이의 상쇄를 바라며 잘못된 선택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제활동의 어떤 더 나은 측정법은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이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18개월 전에 프랑스의 니콜라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경제와 사회에 관한 통계적 정보의 현 상태에 –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에 – 불만을 품고 경제활동과 사회과정의 측정에 관한 국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9월 14일 이 위원회는 오랜 동안 기다려왔던 그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다.

GDP가 생활수준의 좋은 측정단위냐 하는 것은 큰 의문 중 하나다. 많은 경우 GDP 통계는 대부분의 시민들의 직감보다 더 경제가 잘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GDP에 대한 강조는 갈등을 야기했다. 정치지도자들은 그것을 극대화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또한 안전망을 개선하고 오염을 줄이고 등등 – GDP성장을 낮아지게 할지도 모르는 것들에도 관심을 쏟을 것을 주문하였다.

물론 GDP가 웰빙에 대한, 심지어 시장 활동에 대한 부실한 측정단위일수도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인지되어 왔었다. 그러나 사회와 경제의 변화들은 그 문제를 심화시킬 수도 있었고, 동시에 경제학과 통계학적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측정법을 향상시킬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GDP가 재화와 용역의 산출물에 대한 가치를 측정한다고 여겨지는 동안, 주요 부문 중 하나인 – 정부는 – 우리가 통상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 비록 비효율적일지라도 – 산출물을 증대시킨다. 지난 60년간 GDP의 산출물에 있어 정부의 비중은 미국에서 21.4%에서 38.6%로, 프랑스에서 27.6%에서 52.7%로, 영국에서 34.2%에서 47.6%로, 독일에서 30.4%에서 44%로 증가하여왔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미미한 문제였던 것들이 주요한 문제로 변화하였다.

마찬가지로 질적 개선이 – 단순히 더 많은 자동차보다는 더 좋은 자동차들 – 현재는 GDP의 더 많은 부분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질적 개선을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헬스케어는 이러한 문제의 좋은 예다. 많은 좋은 약들이 공공 차원에서 공급되고 있다. 그리고 질적으로도 많은 개선이 있었다.

시간에 따른 비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문제가 나라 간의 비교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헬스케어에 많은 돈을 쓴다.(일인당 그리고 소득의 비율 양면에서 모두 그렇다) 그러나 그 산출물은 더 나빠지고 있다. 미국에서의 일인당 GDP와 유럽에서의 그것과의 차이의 일부는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측정하는 방식의 결과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또 하나의 두드러진 변화는 불평등이다. 이는 평균[average] (중간[mean]) 소득과 중간[median] 소득(소득이 모든 소득의 분배의 중앙에 위치한 “전형적인” 사람의 그것) 간에 불일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소수의 은행가들이 보다 부유해진다면 대부분의 개인소득이 감소할지라도 평균소득은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일인당 GDP 통계는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반영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매기기 위해 시장가격을 쓴다. 그러나 이제 시장을 가장 신뢰하는 이들까지도 마크-투-마켓(mark-to-market) 가치측정에 반대하였으니 만큼 시장가격에 대한 의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은행들의 위기 직전의 이윤은 – 전체 기업 이윤의 1/3 – 신기루였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실현은 실행에 대한 우리의 측정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측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또한 서광을 비추고 있다. 위기 이전에 (표준의 GDP 측정을 사용했던) 미국의 성장이 유럽의 그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많은 유럽인들은 유럽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도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렇게 하고 싶은 이는 누구라도 – GDP 통계에서의 성공하고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교정해줄 머나먼 길인 – 미국 가계의 늘어나는 부채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의 방법론적 진보를 통해 우리는 시민들의 웰빙에 대한 생각에 어떤 것들이 기여하는지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정기적 차원에서 그러한 평가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예를 들면 절대적이어야 하는 것들을 검증하고 수량화하는 것이다. 일자리의 손실은 단순한 소득의 손실에 의해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은 사회적 연결에 대한 중요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얼마나 잘 하고 있는 가에 대한 여하한의 우량한 측정법은 또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설명할 것이다. 어떤 기업이 자본의 감가상각을 측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역시 우리의 국가 계정들도 자연자원의 고갈과 환경의 악화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통계적 틀은 우리의 복잡한 사회를 몇 개의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숫자들로 요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떠한 이도 모든 것을 하나의 숫자, GDP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경제 활동과 사회 진보의 측정법에 관한 위원회의 보고서는 – 바라건 데 – 통계의 사용과 남용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이해로 이끌 것이다.

그 보고서는 또한 웰빙과 지속가능성을 보다 정확히 담아낼 수 있는 보다 광범위한 지표를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여야 한다. 그리고 경제와 사회의 활동을 평가하는 GDP와 관련된 통계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자극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한 개혁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개선할 수 있는 길을 향한 우리의 노력을 (그리고 자원들)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보기

Joseph E. Stiglitz, economics professor at Columbia University and a Nobel Prize winner, served as chairman of the Commission on the Measurement of Economic Performance and Social Progress. This column was provided by Project Syndicate, a Prague-based not-for-profit association of 390 newspapers in 145 countries.

채승병님 글에 대한 댓글

채승병님이 고맙게도 지난 번 끼적거린 내 글트랙백 보내주신 글에 대해 댓글을 쓰다가 너무 길어져 여기 올려두도록 한다. 너무 좋은 글이니 꼭 가서 읽으시도록~ (채승병님 글읽기)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외람되지만

“어설프게 읊어대고 으스대던 시장과 정부의 문제점들이 실은 그들이 이미 치열하게 고민하며 펼쳐낸 것임을 발견했을 때의 화끈거림이 아직도 생각난다.”

에서 뭐 얼굴이 화끈거릴 것까지야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어차피 학술논문도 아니고 블로그인바에야 자신의 생각을 정밀소묘하기보다는 캐리커쳐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작용해가며 선조들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블로깅아니겠습니까? ^^;

여하튼 제가 이야기했던 바에 대해서는 큰 첨삭이 없으시니 따로 드릴 말씀은 없지만 굳이 제 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적어도 해당 글에서는 “시장이냐 정부냐”라는 질문을 던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오히려 정부가 시장의 동조자 내지는 방관자?) 그보다는 전후 어떤 식으로든지 “진화”해온 시장이, 과연 언급하신 고전적 물리학에서의 어떠한 이상적인 모형처럼 자연법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티글리츠가 ‘결국 시장은 복구되어야 한다’기에 더더욱 그런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sonnet님께 그 부분을 넌지시 여쭈었더니 ‘두통감기에 뇌수술’한다는 핀잔만 들었습니다.^^(뭐 보론을 하신다니 기대해보도록 하고요)

또 하나 이 글을 읽으면서 불현듯 느낀 점이 있는데요. 대개 그 시대의 경제학자들은 좌우를 떠나서 역시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시장만을 바라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이에크의 ‘결과론적 옹호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만약 그 당시 시장이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은 제1세계의 시장의 성공이었을 따름이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시장만을 분석하였을 것이고요. 인도의 발달한 직물산업을 폭력으로 좌절시킨 영국의 무력사용은 그 분들에게 영국 면화산업의 발전요인의 고려사항이었을까요?

문득 에르제(Herge)라는 만화가가 생각나네요. 벨기에 만화가인 이 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땡땡의 모험’이라는 불어권, 아니 유럽 최고의 인기 만화를 그려낸 작가입니다.(이 만화를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 실사영화로 만들 거라는군요. 기대만빵!) 왜 이 분이 생각났는가하면 이 분은 나름 흑역사를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죠.

이분의 첫 작품들은 1930년대 초반 그린 ‘땡땡 소련에 가다’와 ‘콩고에서의 땡땡’입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벨기에의 우익 소년잡지에 그림을 담당한 백인 에르제가 지니고 있던 이념적, 종교적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에르제는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심지어 ‘땡땡 소련에 가다’는 흑백 버전을 칼라 버전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조차 거부하죠. 그분의 최후 작품은 쿠바혁명에 감화받아 남미 게릴라의 활약상을 담은 ‘땡땡과 피카르소’입니다.

다른 데로 많이 샜네요. 🙂

요는 이렇습니다. 많은 이도 그렇거니와 저도 사물을 바라볼 때에 수많은 편견에 사로잡히곤 한다는 것을 수시로 깨닫곤 합니다. 그래서 저와는 조금은 다른 시각을 지니고 계신 것으로 간주되는 sonnet님을 가끔 들이받기도 하고 또 이렇게 채승병님의 주옥같은 글에 많은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모든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 콩고인을 하인처럼 여긴 한때의 자신을 극복한 에르제처럼 – 언젠가는 더 넓은 시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 석학들의 주장에서도 그들만의 편견을 느낀 것도 사실이기에, 그래서 솔직히 솔직담백하게 세계관을 바꾼 에르제가 더 멋져보여 예로 들었습니다. 글이 삼천포로 갔네요. 🙂 (글에 대한 독후감에서 boys be ambitious 분위기로~)

여하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이래서 블로깅하는 보람이 있는 거죠.

“결국 시장은 복구되어야 한다”

시장은 분명히 현재 시점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sonnet님이 재인용한 스티글리츠가 말하기를 “비시장 메커니즘은 이 오랜 시간 동안 작동하게 되는데, 그것이 사용하는 정보는 시장이 작동하고 있는 동안 제공된 정보이다.” 라고 하였는데 나 역시 이에 동의하는 바다. 이것이 후진적인 구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딜레마였다. 그들은 정보를 얻기에 너무도 능력이 안 되었고 그나마 시장도 암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보란 다양한 것들이 있겠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정보는 역시 공급과 수요를 일치시켜주는 정보일 것이다. 또한 새로운 공급이나 새로운 수요의 창출에 대한 동기도 부여해준다. 또한 시장이 없었다면 facebook이나 아이폰, 그리고 구글과 같은 유연성 있는 혁신이 가능했을까? 어느 정도는 회의적이다.(주1) 어쨌든 경제에 관한 정보의 제공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우리는 이보다 나은 수단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한편 sonnet님의 글에서 지적하고 있다시피 “경험적으로 보면, 시장은 위기에 취약”하다. 즉 시장이 위기에 빠지게 되면 전통적으로 고르게 분산되어 있다고 가정되던 공급과 수요가 순식간에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변동가능한) 고정환율제이던 브레턴우즈 체제 시절, 자유변동환율제를 지지하던 밀튼 프리드먼은 환율이 비정상적으로 오르거나 떨어질 경우 이를 공격하는 반대투기가 일어나 투기꾼들은 환율 안정화 세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논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환율 안정화 투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세를 거스를 수 있는 배짱투자가는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sonnet, 시장원리주의에 대한 단상]

이 블로그에서도 윗글에서 언급한 투기와 반대투기의 개념을 간략하게 설명한 적이 있어 재인용하겠다.

파생상품시장의 참여자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위험을 분산하고자 하는 자(hedger)’, ‘그 hedger에게 위험을 넘겨받는 대신 수익을 취하려는 투기자(speculator)’,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시적인 시장의 교란으로부터 무위험차익을 실현하려는 자(arbitrageur)’가 그들이다. 이 체제의 신봉자들은 위험은 분산되어야 하며 두 번째 주체 즉 speculator가 없으면 hedger는 위험을 분산하지 못하여 시장의 안정성이 저해된다는 논지다.[foog, 부시 행정부의 새 금융규제 수단은 솜방망이?]

즉 파생상품시장도 그렇지만 많은 여타 시장은 hedger와 speculator(또는 risk taker)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주2) 이 둘이 없으면 거래가 없고 시장은 돌아가지 않게 된다. 아파트 시장에서 아파트를 팔아 현금을 확보하면 hedger에 가깝고 그 아파트를 사서 자산가치 상승을 노리면 risk taker에 가깝고 뭐 이런 식이다.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는 hedger에 가깝고 자본가는 speculator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시장이 위기에 도래하면 갑자기 모두가 hedger가 된다. 지금 시장의 자산가치들이 폭락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 와중에 speculator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은행은 자산을 청산하며 디레버리징에 몰두하고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들은 중도금내기 싫다고 시청 앞에서 데모를 한다. 현 시점에서 당장 생각나는 speculator는 두명 정도인데 하나는 워렌 버핏이고, 또 하나는 박현주다.

좀 지루하게 썼는데 사실 여기까지의 요지는 내 잡문보다 sonnet님의 유려한 글을 읽는 편이 훨씬 심미적으로 유익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과드린다. 하지만 내가 이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기에 독자 분들의 양해 바란다. 즉 이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sonnet님이 스티글리츠의 입을 빌어 하고 싶은 글의 또 다른 요지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결국 시장은 복구되어야 한다.”

sonnet님은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에 대해 본능적인 혐오와 거부를 보이는 것처럼” 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것이 반드시 “본능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또 모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whatever가 그렇게 생각한다고는 여겨지지 않거니와, 더불어 더 나은 시장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시장의 한계 또한 다시 한번 짚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즉 시장을 거부하는 이들을 또 싸잡아 “시장반대원리주의자”로 몰아붙여서는 곤란하다.

그린스펀이 이번에 자신이 Fed 의장에 있을 때 취했던 행동이 “부분적으로(partially)”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였는데 그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회위원회의 민주당 의장 헨리 왁스만이 그를 압박했다. “당신의 세상에 대한 관점, 당신의 이데올로기가 옳지 않다고 알아챘고 그것이 작동 안 하지 않았느냐?” 그린스펀이 인정했다. “그게 정확히 내가 40년여 동안 일해 왔기에 그것이 예외적으로 잘 작동하였다는 상당한 증거에 놀란 이유다.”
The congressional committee’s Democratic chairman, Henry Waxman, pressed him: “You found that your view of the world, your ideology, was not right, it was not working?” Greenspan agreed: “That’s precisely the reason I was shocked because I’d been going for 40 years or so with considerable evidence that it was working exceptionally well.”[guardian, Greenspan – I was wrong about the economy. Sort of]

즉 그는 지난 40년간 시장은 정상적으로 잘 작동했기에 그가 부분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극히 최근, 길게 잡아도 그가 물러나기 몇 년 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그는 “백년에 한번 일어날만한 신용 쓰나미(once-in-a-century credit tsunami)”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이번 신용위기가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시장경제에 내재된 모순이 발현된 것이라기보다는 극히 예외적으로 순식간의 불가항력적인 교란에 의해 발생된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스티글리츠와 같은 상대적인 진보주의자 역시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요컨대 sonnet님의 글에서 비판받고 있는 시장원리주의자, 또는 시장근본주의자는 – 그린스펀은 시장근본주의자 중 체제내 세력? – 시장주의자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오른 쪽에 위치하고 있고 스티글리츠나 sonnet님은 – 또는 크루그먼까지? – 그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의 공통점이 신용위기가 시장의 근본모순이 아닌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하는 관점, 즉 시장본질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내가 궁금한 점은 그것이다. 현재의 시장위기를 해결한 후 그것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을 만큼 시장은 절대적으로 보존할 가치 있는 것인가? 또는 적절한 통제장치만 마련되면 시장은 다시 순수한 시장예찬론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상태의 시장으로 순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만 되면 시장은 공산주의자들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경기변동 및 공황의 두려움으로 해방될 수 있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위 질문 중 어떤 것에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것에는 회의적이다. 전후 자본주의는 그 기간 동안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였다기보다는 주로 임시변통적인 변수에 의해 “예외적으로” 작동하여왔다고 할 수 있다. 과도할 정도의 저유가(低油價), 이를 위한 침략전쟁, 이를 지원하는 군사력과 방위산업, 노동운동 해체/비정규직 확산 등을 통한 소득양극화, 이에 따른 소비침체를 이연시키는 모기지와 같은 대부(貸付)경제, 기축통화인 달러의 발권력을 이용한 과소비, 중국 등 신흥국으로부터의 저가상품 유입 등 몇몇 특수한 변수가 운 좋게도 그때그때 시장의 위기를 지연시켜왔다. 그리고 그 모순은 지금 폭발한 것이다. 이건 쓰나미가 아니라 화산폭발이다. 오랜 동안 마그마가 내부에서 응축되어 왔던 산에서 터진.

만약 다시 시장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우리는 이전의 시장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몇 가지 핵심적인 구성요소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예외적인 변수들 말이다. 저것은 전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예외적인 변수였지 모든 시장에 항상 따라다니는 행운의 과자들이 아니다.

(주1) 또 역으로 어느 정도는 부정적이기도 한데 한 예로 월드와이드웹의 창시자로 알려진 Tim Berners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지적재산권으로 묶어 배타적인 사업이윤을 취득하려 들었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조화의 문제이기는 하다.

(주2) arbitrageur는 좀 특수한 존재니까 생략

이코노미스트에서의 재미있는 논쟁, 그리고 마이런 숄즈

경제 블로그 Big Picture 가 한 흥미로운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마이런 숄즈와 조셉 스티글리츠가 “현재의 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을 강하게 규제하는 것은 실수다”라는 의견에 대해 각각 찬성과 반대의 의견으로 논쟁을 벌이고 이를 이코노미스트가 중재하는 형식이다. 둘 다 당대의 경제학적 주장을 대표하는 이들이라 각각의 주장이 매우 선명하다.

스티글리츠
보다 일반적으로 문제는 너무 적은, 또는 너무 많은 규제가 아니다. 그 대신 올바른 규제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제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규제 시스템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리스크는 이 위기 이후의 너무 많은 규제를 하게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적은 규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위기가 끝난 후, 최근 몇 년간 그들 스스로 아주 일을 잘 해온 자본가들은 그들 돈의 일부를 정치적 프로세스를 왜곡하는 데 쓸 것이다. – 과거의 선거기부금이 높은 수익 투자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The question, more generally, is not so much too little or too much regulation, but the right regulation and a regulatory system that enforces the regulations we have. The risk we face is not that we will have too much regulation in the aftermath of the crisis but too little. After the crisis is over, the financiers who have done very well by themselves in recent years will use some of that money to distort the political process – campaign contributions have proven in the past to be high return investments.

숄즈
경제이론에 따르면 금융혁신은 실패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특별히 성공적인 혁신은 예측하기 힘들다. 혁신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스트럭처는 혁신 그 자체를 낙후시킨다. 이는 통제가 그 당시의 관리 메커니즘에서의 몰락을 방지하는 데에는 부족할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실패가 미래의 실패를 제거하는데 재규제가 성공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회가 더 적은 자유를 통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Economic theory suggests that financial innovation must lead to failures. And, in particular, since successful innovations are hard to predict, the infrastructure necessary to support innovation needs to lag the innovations themselves, which increases the probability that controls will be insufficient at times to prevent breakdowns in governance mechanisms. Failures, however, do not lead to the conclusion that re-regulation will succeed in stemming future failures. Or that society will be better off with fewer freedoms.

숄즈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70년대 초반 피셔 블랙(Fischer Black)과 함께 주식옵션의 가격을 결정하는 문제에 돌파구를 여는 논문을 발표하여 투자이론의 새 장을 연 이로 평가받고 있다. 그들의 논문은 옵션의 가격결정 방법과 옵션의 헤지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옵션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숄즈는 역시 같은 분야에서 학문적인 업적을 달성한 로버트 머턴 Robert Merton 가 함께 199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다. 이들의 다소 ‘실용적’인 이론이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이 현실참여적인 두 학자는 그들의 이론을 현실에 접목시키기로 마음먹는다. 바로 90년대 가장 큰 금융사고의 진원지였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얼굴마담이 된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러한 점에서 숄즈의 ‘자유’ 주창은 다소 뻔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이는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전직 헤지펀드 엠피리카의 소유자였고 현재 리스크엔지니어링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나심 니콜라스 테이럽은 국립 공공 라디오의 아침 방송에서 현재의 시장 혼란은 1997년 로버트 머턴과 마이런 숄즈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던 주식-옵션 가격결정 모형이 작동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수상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머턴과 숄즈는 1998년 몰락하여 그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헤지펀드 실패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두뇌들이었다. 테이럽에 따르면 그들의 예전 회사를 침몰시킨 리스크 관리 실패가 금번 월스트리트를 침몰시키는데 공을 세웠는데, 바로 그것이 투자회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리스크로부터 절연되어 있다고 (그릇되게)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Nassim Nicholas Taleb, the former owner of hedge fund Empirica and current risk engineering professor and best-selling author, told National Public Radio’s Morning Edition that the current market turmoil proves that the stock-option valuation process that Robert Merton and Myron Scholes won a Nobel for in 1997 doesn’t work. And he wants that prize revoked.
Merton and Scholes, of course, were the brains behind Long-Term Capital Management, whose collapse in 1998 was the largest-ever hedge fund failure at the time. According to Taleb, the risk management failures that torpedoed their old firm have now helped to torpedo Wall Street by leading investment companies to believe (wrongly) that they were insulated from risk.[출처]

나는 이 의견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다. 그에 대한 과도한  그런 면에서 보자면 숄즈에게 필요한 것은 규제 반대 주장이 아니라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아닐까 싶은데…

단순히 숄즈가 헤지펀드를 하나 말아먹었다는 이유만으로 규제반대를 부르짖는 그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은 가혹한 면이 있을 것이기에 탈규제의 폐해 사례를 하나 알아보도록 하겠다.

NCR(주1)제도는 비록 정치하고 세련되지 못한 매우 단순한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적어도 2004년까지는 증권회사의 재무건전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규제로서 훌륭히 그 기능을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는 2004년 6월 8일, 투자은행지주회사에 대해서 법적인 감독권한은 없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감독하는 자발적 통합감독 프로그램(consolidated supervised entities:CSE)을 마련했다.

대형 투자은행들은 집요하게 앞에서 살펴본 표준 NCR 제도가 투자은행의 위험관리 능력을 무시하고 레버리지를 과도하게 규제하는 제도라고 주장하며 이의 완화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규제완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당시 골드만삭스의 CEO였으며 현재 미국 재무장관인 Paulson이었다.
이러한 규정이 마련되자마자 곧 Goldman Sachs, Morgan Stanley, Merril Lynch, Lehman Brothers, 그리고 Bear Stearns 의 5개 대형 투자은행은 SEC로부터 CSE 자격을 승인받았다. 이 5개 투자은행이 CSE 자격을 획득한 유일한 투자은행들인데, 공교롭게도 이번 월가의 금융위기에서 모두 부실화된 투자은행들이기도 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월가의 금융위기와 자기자본규제, 연구위원 한상범, 자본시장 Weekly 2008-40호 II, 한국증권연구원, pp2~3]

이러한 5대 투자은행들의 “자발적 감독”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 이전까지 그나마 12배를 유지했던 이들의 레버리지는 2004년의 예외인정 이후 40배까지 상승한다. 수익률은 놀랄 만큼 향상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제 다들 아시다시피 기업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어쨌든 이코미스트에서 진행하고 있는 독자 찬반투표에서 현재까지의 결과에 따르면 규제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61%로 규제를 하지말자는 의견 39%가 훨씬 우세하다.

현재의 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을 강하게 규제하는 것은 실수다
( surveys)

(주1) 표준 순자본규칙(Uniform Net Capital Rule)의 약자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등록된 증권회사에 대한 자기자본규제 제도

조셉 스티글리츠의 폴슨 계획 비판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조셉 스티글리츠는 이번 폴슨의 계획을 무용지물로 간주하고 있다. 그 이유로 크게 두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이는 적하(滴下) 경제학에 – 또 다시 – 의존하고 있다. 아무튼 월스트리트에 많은 돈을 던져주면 메인스트리트에 드문드문 흘러들어가 보통의 노동자와 주택소유자를 도울 수도 있다. 적하 경제학은 거의 전혀 성공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이번에도 성공할 것 같지 않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 계획은 근본적인 문제가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문제의 일부인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근저에 깔린 문제는 금융기관이 매우 악성의 부채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주택 버블이 있었고 대출은 가격 인플레이션에 기초하여 일어났다.

First, it relied – once again – on trickle-down economics: somehow, throwing enough money at Wall Street would trickle down to Main Street, helping ordinary workers and homeowners. Trickle-down economics almost never works, and it is no more likely to work this time.
Moreover, the plan assumed that the fundamental problem was one of confidence. That is no doubt part of the problem; but the underlying problem is that financial markets made some very bad loans. There was a housing bubble, and loans were made on the basis of inflated prices.[Stiglitz: Bailout Blues]

‘적하 경제학(trickle-down economics)’은 “정부가 투자 증대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富)를 먼저 늘려주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론(?)으로 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시절 채택한 정책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냈던 스티글리츠가 이 이론을 좋아할 리 없다. 실제로도 이 논리를 그대로 따른 조지 부시의 대규모 감세 정책은 경제 활성화에 기여를 하지 못했다. 두 번째 그의 주장은 실물경제가 박살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뢰의 상실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는 현 정부의 오진에 대한 비판이다. 같은 민주당 색채의 폴 크루그먼이 그럼에도 이번 폴슨 안이 반드시 하원을 통과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는 반면 그는 보다 더 회의적인 것 같다.

신용위기, 그 1년 후

인디펜던트紙가 신용위기가 도래한 지 일 년여에 즈음하여 ‘Credit crunch one year on’이라는 제목으로 금융계 인사 10명의 감회를 엮은 기사를 게재했다. 이 중 현재 콜롬비아의 교수로 재직중인 저명한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 씨의 글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다른 이들의 글 중에서도 쓸만한 글이 있으면 따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Joseph Stiglitz, professor at Columbia University and 2001 recipient of the Nobel Prize for economics

미국과 영국에서 기업이윤의 약 40%가 금융업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산업에 대한 그런 후한 액수를 정당화시켜주는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이 산업은 위험을 관리하고 자본을 할당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음 그것들은 그 둘 다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1년 전에 나는 현재 드러난 것만큼 나빠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는다.

베어스턴스, 패니메, 그리고 프레디맥의 구제는 파렴치한 짓이었다. 유동성에 관해서는 무엇인가는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적 해이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취해질 필요는 없었다. 이 구제는 처음 문제를 야기했던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었다. 베어스턴스 주주들은 10억 달러를 손에 쥐고 걸어 나갔다. 패니와 프레디를 위해 납세자들은 그들(패니와 프레디 : 역자주)의 주주와 채권보유자들이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공수표를 내주십사 요구당하고 있다.

미국은 너무 많이 소비하는 나라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의 반응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소비하라는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사회간접자본, 대중교통시설, 그린테크놀로지에 투자를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여야 한다.

은행들이 자율규제를 하고 자신들만의 위험관리 시스템과 평가기관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터무니없다. 우리는 왜 규제가 필요한지에 대해 망각하고 있다. 문제는 규제자들이 그들이 규제하고 있는 사람들과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한때 파티가 열렸었고 아무도 흥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