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

공황의 원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역사가 긴 이론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소득 분배 때문에 생산에 대한 수요가 너무 줄어들었고, 따라서 높은 고용에서 생산되는 총생산을 구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략] 공황이 높은 고용 상태에서 사람들이 투자보다 저축을 많이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 한 가지 가능한 처방은 저축자로부터 지출자로 소득을 재분배해서 저축을 줄이는 것이었다. 케인스 자신은 그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이론에서는 그런 문제가 대규모 예산 적자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 [중략] 이런 점에서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는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사회보장제도는 원래 봉급에서 떼는 세금으로 준비 기금을 만들고, 그런 소득으로 처음에 돈을 냈던 사람들이 나중에 은퇴하게 되면 그들에게 퇴직 연금을 지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금의 축적으로 국가 저축이 크게 늘어나게 되며 따라서 과잉 저축 문제에 대한 해결은 한층 어렵게 된다. 만일 미래의 수혜자들이 사회보장제도를 믿고 개인 저축을 줄인다면, 그런 문제는 나름대로 해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제도는 애초부터 사람들이 노후를 대비해 충분한 저축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사회보장제도로 강요되는 저축이 개인 저축의 감소로 상쇄된다는 생각은 그런 시각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대통령의 경제학, 허버트 스타인 지음, 권혁승 옮김, 김영사, 1999년, pp56~57]

이글은 소득재분배 및 노후보장 역할을 하는 연기금 사회보장제도가 공황 – 또는 경기침체기에도 역시 – 시기에는 경기부양 수단으로써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임을 – 심지어는 그것을 방해함을 – 암시하고 있다. 즉 불황기에 연기금과 같은 사회보장제도 시행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저축은 “과잉저축”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이로 인해 자금순환이 어렵게 된다는 것이 필자의 논지다. 이러한 부정적 의견은 애초에 그 돈이 현재 시점의 지출자에게 즉각 재분배되어 소비증가에 쓰일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가정 하에서는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의견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재의 연기금은 경제에 어떠한 영향도 –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 미치지 않는 “과잉저축”된 유보금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모든 연기금은 예외 없이 대공황 시기(주1)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자금력으로 지구촌의 각종 투자활동에 뒷돈을 대고 있다. 자산운용사를 선정하여 자금을 운용하게 하거나 직접 펀드에 투자하는 형태가 전형적인데 그 투자자산은 주식, 채권, 부동산, SOC 등 다양하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연기금은 필자의 주장과 달리 케인스식 재정정책의 대행자 내지는 보조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엄밀하게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기금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중간쯤, 또는 그것들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연기금이 시장에 자금을 공급한다는 점에서는 경기부양에 긍정적일 수 있겠으나, 재정정책처럼 정책목표의 달성이 목표가 아니라 자금운용을 통한 목표 수익률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그 운용행태가 때로 사회적 통념에 반하기도 하여 경기부양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일례로 어떤 연금이 그 자금을 공매도를 특기로 하는 헤지펀드에 자금을 맡겨 수익을 향상시켰을 경우, 연금에게는 주식시장의 침체라는 거시경제의 적신호가 오히려 청신호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편 통화정책에서 통화 공급기관이 경기부양을 목표로 증가시킨 통화량의 사용처를 통제하기는 어려운 반면, 연기금은 어느 정도 자신들의 투자를 거시적인 경제목표에 꿰어 맞출 수 있다는(주2)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주식시장의 침체기에 국민연금의 자금이 들어와 주식시장을 지탱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어왔다. 요컨대 현재의 연기금은 국가가 미래의 수혜자들에게 강제 저축을 받아 운용하며, 수익극대화라는 민간자본이나 진배없는 운용목표를 가지면서도, 어느 시기에는 거시경제 수단으로 기능하려는 특수한 역할을 지닌, 경제의 메이저플레이어로 성장해 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에 따라 각국의 상당수의 연기금은 치명적인 자산손실을 겪어야 했다. 이는 우리의 미래가 현재의 경기변동의 영향 하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필요시(?) 정책목표를 위해 본래목표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관료적 편의주의에도 노출되어 있다. 더불어 이 양자간의 줄타기나 수익률에 대한 조급증 등은 출산율 저하와 같은 연기금에 대한 부정적인 변수에 의해 더욱 증폭될 것이다. 그리고 좌우익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기금의 사회적 통제권 강화와 연기금의 민영화라는 상반된 요구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1) 1929년에 미국의 각급 정부 – 연방, 주, 지방 정부 – 가 한 이전(移轉) 지출합계는 퇴역 군인에 대한 은급과 공무원의 퇴직 연금을 제외하고 2억5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보다 10년 후에는 … GNP 비율로 따지면 0.25%에서 2%로 상승한 것이었다.[같은 책, p60]

(주2) 물론 이는 기금의 본래 목표와 모순되고 의사결정 절차상으로 옳지 않음에도 국가 및 관료가 정책결정에 개입할 여지가 충분하기에 부단히 시도된다

5 thoughts on “연기금

  1. RedPain

    원래부터 연기금은 경기 부양책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불황이든 활황이든 소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니 automatic stabilizer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물론, 경기 부양책으로 사용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강제로(?) 걷은 돈을 위험한 시기에 투자한다는 것이 욕 먹기 딱 좋은 일이죠.

    좋은 하루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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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원래 목적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죠. 비스마르크가 처음 연금제도를 도입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금시장의 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점증하는 계급갈등을 체재 내에서 무마시키고자 하는 목적이었으니까요. 또한 당시에는 연금을 유동화시켜 투자할만큼 자금시장 자체가 발달하지도 않았고요. 현재도 엄밀하게는 자금운용위원회가 별도로 있고 투자의사결정도 크로스체크를 하게끔 되어 있기에 형식적으로야 경기부양책 용도로 쓸 수는 없는 것이고요. 하지만 가끔 현 이사장같은 똘추들이 지들 주머니라도 되는 양 주식비중을 높일거라는 둥의 월권을 해대는 것이죠. 지난 정권도 그렇게 연금을 주가부양 수단으로 쏠쏠하게 써먹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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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다시다

    항상 글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연기금을 사용하지 않으면 국가가 국채를 발행해서 할 일들에 대해, 연기금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반대로 얘기해, 연기금이 빵꾸나면 국가가 돈 빌려서 뒤를 봐줄텐데요.

    이 문제는 좌파적 접근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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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og

      “연기금을 사용하지 않으면 국가가 국채를 발행해서 할 일들에 대해, 연기금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결국 연기금은 국가의 돈이 아니라는 점에서 효율성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겠네요. 이 부분은 여유가 되면 언제 한번 별도의 글로 다뤄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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