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hwon [2]

챈, 앤디, , 미구엘, 앨리스, 순이, 스즈끼

식당

“이번에는 두려워들 하고 있군요. 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니까 무서운가보죠?”

순이는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는 네 명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순이”

스즈끼 선장이 나무라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순이의 말처럼 승무원들은 지난번 존의 죽음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눈가에 두려운 기운이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죽음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 해도 역시 예고치 않은 죽음은 두려운 법이다. 마치 사형집행일이 앞당겨진 사형수의 심정이 이러할까?

“앤디 뭐 조사된 것이 있나?” 스즈끼 선장이 물었다.

“지난번과 유사한 정황입니다. 칼자국으로 판단하건데 그때 존에게 사용한 그 칼로 보입니다.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만 증거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그 칼이 사라져버렸으니 거의 확실합니다.”

“칼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나?”

“제 숙소에…”

“숙소라면 누구든지 의심 없이 출입이 가능한 편이니…”

스즈끼 선장이 앤디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혼자 뇌까렸다.

“문제는 사건 당시 어디 에들 있었느냐 하는 것이로군. 사실 식물원이 이 우주선 한 가운데 놓여 있어 누구든지 맘만 먹으면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곳이긴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모두의 그 당시 위치를 말해주도록.” 스즈끼 선장은 앤디를 먼저 쳐다보았다.

“전 조종실에 있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조종간을 만지작거리며 앞에 펼쳐진 별빛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력감이 들긴 처음이라서 말이죠.”

스즈끼는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앨리스는 스즈끼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저는 휴게실에서 미구엘이 내팽개치고 간 쥐덫을 읽고 있었어요. 지금 이 상황과 너무 흡사하네요. 암튼 한마디 하자면 누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지 몰라도 너무 우스워요.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사라질 목숨들… 대체 뭐하고 있는 거죠?”

다들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냉소는 너무 직설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숙소에 있었어요.” 순이가 입을 열었다. “중식 당번이었지만 챈이 방에서 쉬라고 자꾸 권해서 방으로 갔어요.” 챈이 동의하는 몸짓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앨리스는 그런 둘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럼 저는 자연스럽게 위치가 부엌이 되는군요. 전 얼마 안 되는 식재료로 중국식 볶음밥을 만들던 참이었지요.” 챈이 말했다. 몇몇은 코를 킁킁거리며 볶음밥 냄새를 확인했다.

“선장님은요?” 챈이 물었다.

“나 역시 숙소에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체념에 가까운 냉기가 느껴졌다.

“다들 알리바이는 있는데 누구도 두 사람 이상 함께 있지 않았군. 그러니 어느 누구라도 쉽게 식물원에 접근이 가능했겠군.” 스즈끼 선장이 말했다.

“선장님 탐정놀이는 밥이나 먹고 하죠. 어쨌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역시 앨리스였다. 다들 그녀의 냉소에 화낼 기력도 없었다.

“챈. 시체는?”

“네 존의 경우처럼 밀봉 드럼통 안에 넣었습니다. 산소 한 방울이라도 아껴야죠.”

이건 냉소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우주선에 남은 산소량은 일곱 사람 기준으로 이제 약 4주 이하로 남아있다. 이제 다섯으로 줄었으니 조금은 여유가 있긴 하겠으나 시체가 썩으면서 갉아먹는 산소라도 아껴야 할 판이다. 의사인 챈은 이제 사람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시체 치우는 담당이 되고 말았다.

앤디의 일기 2057년 7월 6일

불과 며칠 만에 두 사람이 죽었다. 이전에는 전우라며 서로 목숨이라도 내줄 것처럼 굴던 이들끼리 있는 공간에서 둘이 살해당한 것이다. 우주로 나오니 사람들이 미쳐가는 것일까? 이렇게나 무력감을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배웠던 첨단기계를 통한 수사기법들은 여기서 무용지물이다. 솔직히 나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지문을 채취하는 방법조차 잘 모른다. 이럴 때는 마치 에큘 포와르의 잿빛 뇌세포와 같은 직관만이 유효한 것일까?

사실 앨리스가 의심스럽다. 그 차가운 성격, 삶을 체념한 듯한 태도, 그럼에도 뛰어난 그녀의 금발 미모, 그러한 점이 마치 독거미처럼 치명적이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천성이 바람기를 타고난 존이 그녀를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당방위로 그 녀석을? 그리고 시미치를 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구엘은? 미구엘은 그녀를 싫어했다. 그렇다면 미구엘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생각에? 가능성이 있다. 스즈끼 선장과 이 문제를 의논해야겠다.

순이의 일기 2057년 7월 6일

점점 산소가 떨어져가는 느낌이다. 숨이 미약하게 가빠졌다. 존을 죽인 범인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어렴풋이 존을 싫어하던 미구엘일거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내 생각이 틀린 것 같다.

앨리스의 죽음

앤디가 앨리스가 의심스럽다고 선장에게 보고한지 한 시간이 채 안되어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가슴이 칼에 찔린 선홍빛의 피로 물들어 있었고 휴게실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발견되었는데 소설책 쥐덫을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이제 서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 것인가?

정황상 앨리스를 의심했던 앤디는 적이 당황한 눈치였다. 스즈끼 선장에게 민망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선장은 그런 그를 위로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것이 기정사실이 된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을 담당한 형사와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챈도 순이도 더 이상 두려워할 기운이 없는 듯 초점 잃은 눈을 하고서는 선장의 뒤에서 멍하니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앨리스는 매혹적인 파란 눈을 크게 뜬 채 삶을 마감했다. 잔뜩 공포에 질린 눈이었다.

“식사 당번이 좀 더 자주 오겠네요.”

이 신랄한 냉소는 물론 앨리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순이가 한 말이었다. 모두들 그녀의 말에 놀라서 돌아보지만 힐난할 기력도 없었다. 자신들이 느끼는 두려움이 이름 모를 살인자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어느 날엔가 식량도 산소도 떨어진 뒤에 서서히 닥쳐올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체를 치우도록.”

간단히 말을 마친 스즈끼는 휴게실 문을 나섰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궁하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남은 셋은 넋 나간 스즈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이는 그들보다 대여섯 살밖에 많지 않은 마흔 초반의 젊은 선장이었지만 패기 있고 명석한 선장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식물인간처럼 무력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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