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erehwon

erehwon [완]

“대체! 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앤디가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 질렀다. 그리고 선장을 쳐다보고는 그에게 말했다.

“스즈끼 선장 당신이 범인이지? 당신이 존이 죽던 날 그 복도에 있었지?”

스즈끼는 말없이 장비실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이었다.

“순이 이제 그만 하지.”

스즈끼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순이를 바라보았다. 앤디는 의아한 눈초리로 순이와 스즈끼 선장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뭐야 존을 죽인 사람이 순이야?”

“존을 죽인 것은 나다.”

선장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존을 승무원으로 뽑은 것도 사실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스즈끼가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앤디가 소리쳤다.

“그런데 그는 순이 너까지 함께 승무원에 넣어줄 것을 요구하더군. 나는 승낙했다. 나는 선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놈이다.”

순이는 슬픔과 호기심, 그리고 두려움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선장을 보았다.

“그 녀석은 양성애자였다. 나는…. 나는 그의 또 하나의 연인이었다. 그가 순이 너의 애정을 인질로 삼았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러했지.” 스즈끼는 힘에 부치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새 산소의 농도도 희박해져 가고 있음이 호흡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왜 죽인건데?” 앤디가 다그쳤다.

“앨리스의 일기에도 나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순이, 그리고 나를 이용하고도 또 앨리스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 날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듣고 있었고 앨리스가 떠나자 그에게 가서 따지다가 이성을 잃었던 거야.”

이제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여태껏 지휘자로서 나름대로 지켜오려 노력한 권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까지 죽인거야?” 앤디가 또 다시 다그쳤다.

스즈끼는 문득 깨달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앤디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뒤에는 순이가 있었다. 스웨덴제 군용 칼을 손에 들고 있는 순이가… 번개처럼 앤디를 지나쳐 온 순이는 스즈끼의 목에 칼을 쑤셔 넣었다. 미처 앤디가 말릴 틈도 없이…. 빨간 피가 솟구쳐 나왔고 고통에 찬 표정의 스즈끼의 단말마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앤디는 뒤늦게 순이를 거칠게 떼어 내어 밀어붙였다. 순이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앤디는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도 않았다. 처참한 표정만 지으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네가 그럼 나머지 사람들을? 왜? 왜?”

“복수했을 뿐이야. 존의 죽음에 대한… 너희들 모두 존의 죽음을 비웃었고… 처음엔 미구엘이 그를 미워한 미구엘 인줄 알고… 그런데 죽이고 나니 아닌 것 같고… 이번엔 앨리스가 그렇다고 네가 선장과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평소에 날 벌레 취급하던 그 년이 범인이라 생각했지.”

앤디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의 섣부른 추측이 죽음을 불러온 계기가 되다니….

“그렇다면 챈은 대체 왜?”

“내 방에서 칼을 발견하고는 나에게 와서 설교조로…. 나를 달래려고…. 이미 엎지러진 물인데….”

“너를 위해주었던 챈을 죽이다니 대체 제 정신이야?” 앤디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순이는 바닥에서 자세를 바꿔 앉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제 정신으로 보이니 지금?”

앤디도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살인 동기는 진정 무엇일까 하는… 존에 대한 복수?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 아니면 산소결핍으로 인한 정신착란? 그것도 아니면 그 어떤 미지의 원인?

[에필로그]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몸살을 앓던 지구는 사실 erehwon 호가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선의 기능이 마비되고 얼마 안 있어 핵전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erehwon 호는 그 뒤로도 – 둘이 남은 음식으로 간신히 연명하며 살았던 며칠 동안도 – 우주를 정처 없이 유영하였다. 그들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유영을 계속해나갔다. 실질적으로 앤디와 순이, 그 둘이 우주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두 명의 인간이었다.

erehwon [3]

챈, 앤디, , 미구엘, 앨리스, 순이, 스즈끼

그날 저녁 – 시간상으로는 저녁 – 휴게실에서는 앤디와 챈이 앉아 있었다.

“역시 존이 앨리스에게 치근댔더군.”

챈이 말을 꺼냈다.

“그걸 어떻게?”

“그녀의 일기를 뒤져봤어.” 앤디가 할일을 챈이 한 셈이다.

“7월 3일 그녀의 일기에 적혀있더군.”

그러면서 일기장을 앤디에게 건넸다.

앨리스의 일기 2057년 7월 3일

Son of bitch!
거만한 녀석이 성욕까지 강하다. 어디다대고 사랑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대는지… 어차피 천박한 동양년이랑 놀아나는 녀석이라 신경도 안 썼는데 기분 더럽다. 그런데 방을 나섰을 때 복도의 꺾어지는 부분으로 얼핏 그의 모습을 본 것 같다.

앨리스의 일기 2057년 7월 4일

그는 자못 태연했다. 그가 범인일까? 상관없다. 이따위 살인 게임.

어떤 남자

“어떤 남자가 있었군.” 앤디가 중얼거렸다. 챈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적어도 앨리스의 일기를 토대로 보자면 그녀는 존의 범인이 아닌 것 같고 복도에 있었다는 그 남자. 그가 의심스러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챈이 말을 이었다.

“이제 남자는 셋이야. 미구엘이 범인이 아니었다고 가정하면, 그리고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제 범인은 너하고 선장 중 한명.”

앤디는 그 말을 듣자 벌떡 일어섰다. 챈의 말에 화가 나 보인 반응은 아니었다. 서둘러 휴게실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선장의 숙소가 아닌 순이의 숙소였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그녀를 발견하자 살짝 안도의 숨을 쉬었다. 순이를 그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래?”

뒤따라오던 챈이 대신 대답했다.

“이 녀석이 그냥 네가 걱정되었나봐.”

순이는 살짝 미소지었다.

“걱정해주니 고맙네.”

둘은 살짝 눈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복도를 걸으며 둘은 말없이 눈빛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둘은 선장의 숙소로 향했다. 승무원의 숙소와 달리 조종실 쪽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순이의 일기 2057년 7월 7일

휴게실에 놓여있던 앨리스의 일기를 보았다. ‘그’는 누구일까? 그가 존을 죽인거다.

스즈끼의 일기 2057년 7월 7일

앤디가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누가 살인자든 간에 더 이상 살인하지 말자고 했다. 이유는 죽음을 대하는 것이 피곤하다는 것. 나, 챈, 앤디는 서로 약속했다. 누가 범인이든 간에 더 이상 죽이지 말자고. 희한한 도원결의였다.

또 하나의 죽음

이 도원결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챈이 죽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장비실에서였다. 여태의 죽음과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칼이 아닌 둔기로 당했다는 점. 물론 여태의 사망자를 죽인 칼도 여전히 소재불명. 셋은 이제 기진맥진해져 있을 따름이었다. 죽이는 것도 이제 관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범인은 어쩌면 우주선을 떠도는 죽음의 신?

(계속)

erehwon [2]

챈, 앤디, , 미구엘, 앨리스, 순이, 스즈끼

식당

“이번에는 두려워들 하고 있군요. 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니까 무서운가보죠?”

순이는 식당 테이블에 앉아 있는 네 명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순이”

스즈끼 선장이 나무라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순이의 말처럼 승무원들은 지난번 존의 죽음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눈가에 두려운 기운이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죽음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 해도 역시 예고치 않은 죽음은 두려운 법이다. 마치 사형집행일이 앞당겨진 사형수의 심정이 이러할까?

“앤디 뭐 조사된 것이 있나?” 스즈끼 선장이 물었다.

“지난번과 유사한 정황입니다. 칼자국으로 판단하건데 그때 존에게 사용한 그 칼로 보입니다.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만 증거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그 칼이 사라져버렸으니 거의 확실합니다.”

“칼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나?”

“제 숙소에…”

“숙소라면 누구든지 의심 없이 출입이 가능한 편이니…”

스즈끼 선장이 앤디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혼자 뇌까렸다.

“문제는 사건 당시 어디 에들 있었느냐 하는 것이로군. 사실 식물원이 이 우주선 한 가운데 놓여 있어 누구든지 맘만 먹으면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곳이긴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모두의 그 당시 위치를 말해주도록.” 스즈끼 선장은 앤디를 먼저 쳐다보았다.

“전 조종실에 있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조종간을 만지작거리며 앞에 펼쳐진 별빛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력감이 들긴 처음이라서 말이죠.”

스즈끼는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앨리스는 스즈끼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저는 휴게실에서 미구엘이 내팽개치고 간 쥐덫을 읽고 있었어요. 지금 이 상황과 너무 흡사하네요. 암튼 한마디 하자면 누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지 몰라도 너무 우스워요.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사라질 목숨들… 대체 뭐하고 있는 거죠?”

다들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냉소는 너무 직설적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숙소에 있었어요.” 순이가 입을 열었다. “중식 당번이었지만 챈이 방에서 쉬라고 자꾸 권해서 방으로 갔어요.” 챈이 동의하는 몸짓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앨리스는 그런 둘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럼 저는 자연스럽게 위치가 부엌이 되는군요. 전 얼마 안 되는 식재료로 중국식 볶음밥을 만들던 참이었지요.” 챈이 말했다. 몇몇은 코를 킁킁거리며 볶음밥 냄새를 확인했다.

“선장님은요?” 챈이 물었다.

“나 역시 숙소에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체념에 가까운 냉기가 느껴졌다.

“다들 알리바이는 있는데 누구도 두 사람 이상 함께 있지 않았군. 그러니 어느 누구라도 쉽게 식물원에 접근이 가능했겠군.” 스즈끼 선장이 말했다.

“선장님 탐정놀이는 밥이나 먹고 하죠. 어쨌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역시 앨리스였다. 다들 그녀의 냉소에 화낼 기력도 없었다.

“챈. 시체는?”

“네 존의 경우처럼 밀봉 드럼통 안에 넣었습니다. 산소 한 방울이라도 아껴야죠.”

이건 냉소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우주선에 남은 산소량은 일곱 사람 기준으로 이제 약 4주 이하로 남아있다. 이제 다섯으로 줄었으니 조금은 여유가 있긴 하겠으나 시체가 썩으면서 갉아먹는 산소라도 아껴야 할 판이다. 의사인 챈은 이제 사람들의 건강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시체 치우는 담당이 되고 말았다.

앤디의 일기 2057년 7월 6일

불과 며칠 만에 두 사람이 죽었다. 이전에는 전우라며 서로 목숨이라도 내줄 것처럼 굴던 이들끼리 있는 공간에서 둘이 살해당한 것이다. 우주로 나오니 사람들이 미쳐가는 것일까? 이렇게나 무력감을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배웠던 첨단기계를 통한 수사기법들은 여기서 무용지물이다. 솔직히 나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지문을 채취하는 방법조차 잘 모른다. 이럴 때는 마치 에큘 포와르의 잿빛 뇌세포와 같은 직관만이 유효한 것일까?

사실 앨리스가 의심스럽다. 그 차가운 성격, 삶을 체념한 듯한 태도, 그럼에도 뛰어난 그녀의 금발 미모, 그러한 점이 마치 독거미처럼 치명적이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천성이 바람기를 타고난 존이 그녀를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당방위로 그 녀석을? 그리고 시미치를 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구엘은? 미구엘은 그녀를 싫어했다. 그렇다면 미구엘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생각에? 가능성이 있다. 스즈끼 선장과 이 문제를 의논해야겠다.

순이의 일기 2057년 7월 6일

점점 산소가 떨어져가는 느낌이다. 숨이 미약하게 가빠졌다. 존을 죽인 범인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어렴풋이 존을 싫어하던 미구엘일거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내 생각이 틀린 것 같다.

앨리스의 죽음

앤디가 앨리스가 의심스럽다고 선장에게 보고한지 한 시간이 채 안되어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가슴이 칼에 찔린 선홍빛의 피로 물들어 있었고 휴게실에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채로 발견되었는데 소설책 쥐덫을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이제 서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 것인가?

정황상 앨리스를 의심했던 앤디는 적이 당황한 눈치였다. 스즈끼 선장에게 민망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선장은 그런 그를 위로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것이 기정사실이 된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을 담당한 형사와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챈도 순이도 더 이상 두려워할 기운이 없는 듯 초점 잃은 눈을 하고서는 선장의 뒤에서 멍하니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앨리스는 매혹적인 파란 눈을 크게 뜬 채 삶을 마감했다. 잔뜩 공포에 질린 눈이었다.

“식사 당번이 좀 더 자주 오겠네요.”

이 신랄한 냉소는 물론 앨리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순이가 한 말이었다. 모두들 그녀의 말에 놀라서 돌아보지만 힐난할 기력도 없었다. 자신들이 느끼는 두려움이 이름 모를 살인자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어느 날엔가 식량도 산소도 떨어진 뒤에 서서히 닥쳐올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체를 치우도록.”

간단히 말을 마친 스즈끼는 휴게실 문을 나섰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궁하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다. 남은 셋은 넋 나간 스즈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이는 그들보다 대여섯 살밖에 많지 않은 마흔 초반의 젊은 선장이었지만 패기 있고 명석한 선장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식물인간처럼 무력해졌다.

(계속)

erehwon [1]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 잡글 – 다시 써봤습니다. 장르는 스페이스환타지추리소설. 너무 황당한 장르지만 하여튼 ‘뭐 이런 글이 있어’라고 탓하지 마시고 재밌게 읽어주시길…. 연재로 이어집니다.

순이의 일기 2057년 7월 4일

어제 존이 죽었다. 내 사랑. 살해당했다. 하지만 모두들 시큰둥한 반응이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을 목숨이라는 체념? 우리란 난파당한 우주선 erehwon 호의 승무원들을 말한다. 태양계를 넘어 인류의 새로운 거주지인 신천지를 개척하는 – 적어도 선장의 말로는 – 임무를 부여받고 지구를 떠난 우리 일곱 명의 우주인들은 태양계를 벗어난 순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주동력원인 헬륨3 잔량의 97%가 사라져버리는가 하면 주요전자기기의 기능이 마비되는 사고를 당했다. 덕분에 우리는 말 그대로 우주의 미아가 되어버렸다. 그 사고가 있은 지 56일 동안 얼마 남지 않은 전기와 물, 그리고 식량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눈물이 흐른다. 그가 그립다.

존의 죽음에 침묵하는 동지들. 동지? 살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 폐쇄된 우주선 공간 안에 존의 살인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숨 막힌다. 그 살인자가 당장이라도 내 방에 뛰어들어 나를 덮칠 것만 같다.

스즈끼의 일기 20057년 7월 4일

사실 삶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삶을 갈구하고 사랑하기에 태양계를 벗어나 신세계로 나아가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 두 강대국 간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얼룩진 지구, 환경오염으로 그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는 지구, 그 지구의 대안을 찾기 위한 힘겨운 첫걸음이었다. 그렇지만 결과가 이렇게 허무할 줄은 몰랐다. 우주선이 주기능이 정지된 – 다행히 약간이나마 전력은 남아있다 – 원인도 모르고 고칠 방법도 모르겠다. 지구와의 교신도 끊어졌고 그나마 유일한 밥줄인 식물원의 식물도 점점 죽어가고 있다. 가져온 비상식량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능이 정지된 우주선은? 우주선은 그냥 우주를 힘없이 유영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 같은 침묵의 우주로 무의미하게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조금 이른 죽음

존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2057년 7월 3일로 기록될 것이다. 다른 이들의 예정된 죽음보다 몇 주 앞섰다. 발견될 당시 가슴에 스웨덴제 군용 칼이 꽂혀있었다. 존 자신의 칼이었다. 지문은 없었다. 누구라도 드나들었을 그의 방에서 용의자의 흔적을 찾는 것은 무의미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다지 놀란 눈치가 아니다.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뿐이다. 그저 죽음이 자신들보다 조금 빨랐다고 생각하는 그런?

“순이 오늘 중식 당번이야” 앨리스가 말했다.

“이봐 플리즈~”

챈이 앨리스에게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이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앨리스는 그런 그에게 ‘어쩌라고’하는 표정을 지었다.

“순이 내가 식사 준비 할테니 너는 좀 쉬어.”

“아냐 내가 그냥 할게.”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게.”

챈이 뒤따라 나서며 말했다. 앨리스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앨리스와 휴게실에 남은 미구엘은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다 읽고 있던 책으로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앨리스가 책 제목을 흘낏 쳐다보았다.

‘쥐덫’

“흠 고전추리소설이군. 어쩐지 우리 처지랑 닮았는걸? 폐쇄된 공간에서의 살인극이 말이야. 차이가 있다면 그 작품의 등장인물은 죽음을 두려워했고 우리는, 적어도 나는 죽음을 냉소하고 있다는 정도?”

미구엘은 약간 미간을 찡그렸다. 이때 앤디가 들어왔다. 그는 지구방위대 소속 수사관 신분이다. 어떤 의미에선 이번 살인사건의 수사책임을 맡고 있다 할 수 있다.

“저런 때맞춰 들어오시네 수사관님이. 가만 있자 쥐덫에선 수사관이 범인이었는데 말이지.”

앨리스는 짖궂은 표정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집어치워 그놈의 냉소 짜증나!”

여태 무관심하게 책을 읽던 미구엘이 책을 팽개치며 소리쳤다.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앨리스를 바라보던 미구엘은 휴게실을 나가버렸다.

“쟤 왜 저래?”

앨리스는 짐짓 모르는 체 빈정거렸다. 그런 앨리스를 보던 앤디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다시 휴게실을 나갔다. 앨리스는 이번에는 아무말 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식물원

미구엘은 식물원 담당이었다. 식물원에는 승무원들이 먹을 식량들을 재배하고 있었고 인공태양열과 물을 자동으로 생성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능이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마비되어 버렸다.

미구엘은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인 성격인데 더욱 말이 없어져 버렸다. 이 사태가 꼭 자기 책임인 것 마냥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습관적으로 식물원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 아직 소량의 물을 먹고 살아가고 있는 식물들이 살려달라고 무언의 항변을 외치고 있었다. 미구엘은 시들어가는 사과를 만지작거렸다.

문득 존이 떠올랐다. 평소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원래는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였다. 둘은 우주사관학교 동기였다. 학교성적은 미구엘이 더 우수한 편이었지만 룸메이트여서 스스럼없이 어울리곤 했다. 그러나 그런 우정은 존에 의해 깨졌다. 미구엘이 순이를 사랑한다고 수줍게 존에게 털어놓은 후 존은 관심도 없던 순이를 여자친구로 삼아버렸다. 그것은 고의적인 것이었다. 미구엘은 나중에야 존이 자신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통해 그런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구엘이 더욱 화가 났던 것은 순이의 존에 대한 애정이 진실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존의 그것은 다분히 장난기어린 것이었다. 미구엘은 용기를 내어 이런 사실을 erehwon 호의 멤버가 결정되기 전에 순이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순이에게 승무원에 지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순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No thanks”

상념에 젖어있던 미구엘은 문득 등 뒤로 인기척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 너구나. 저… 아까는 미안….”

미구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존을 찔렀던 그 칼이 그의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불에 데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정신이 희미해지는 와중에 ‘왜 왜!’라고 외쳤다. 미구엘의 가슴을 칼로 찌른 검은 그림자는 칼을 뽑아들고 식물원을 빠져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