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노동

쿠팡 사태 관련 트윗 모음

# 사실 미국에서 자라 교육받으며 미국식 경영마인드를 골수까지 장착한 Bom Kim(a.k.a 김범석) 씨는 지금 상황이 매우 기이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비즈니스는 정확히 아마존이나 우버의 그것과 같은데 왜 한국인은 미국인과 달리 불매를 외치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 그만큼 사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는 기술, 유통, 금융이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의 – 야니스 바루파키스라는 학자는 “기술봉건주의“라 명명한 – 시대를 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여태의 노동-자본 관계를 붕괴시킨 새로운 착취의 – 고도의 기술적 착취 – 시대로 접어든 정황이 있다.

# 팬더믹 상황에서 기술봉건주의의 영주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각국 정부는 그들의 노동착취를 통제하기는커녕 소득세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는 시도가 G7에서의 최저 글로벌 법인세율. 그야말로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인터내셔널이라도 조직해야 할 판.

# 어쩌면 이것이 여태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각자도생과 약육강식을 당연시하는 자본의 “공정함”. 법과 제도가 – 친자본이거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 허락하면 어떠한 비인간적 착취도 당연하다는, “능력주의”로 인종 차별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포퓰리즘과 결합하면 거칠 것이 없는 이들

# 주52시간 근무제? 노동자를 노동자라 칭하지 않으면 된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우선 법을 솜사탕법으로 무력화시키고 찝찝하면 법적 책임을 질 자리에서 물러나면 된다. 노동착취의 방법? AI와 빅데이터를 통해서 노동자를 마이크로 단위로 닦달하면 된다. 영업적자? 크게 키워 엑시트하면 된다.

# 엑시트에 대해 : 舊자본과 新자본의 차이는 구자본은 영업흑자를 만든 후 사세를 키워나가는 방식을 주로 택했다면, 신자본은 일단 사세를 키워 플랫폼을 독점한 후 돈을 벌겠다는 식. 이게 가능한 건 그 기간을 버티게 해줄 자금투입이 가능한 금융시장 구조.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인 시대인 것이다.

# 뉴욕증시 상장 당시 앵커는 ‘흑자전환’ 시기에 대해 물었으나 김 의장은 “장기투자자들과 함께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 국내 이커머스 시장 점유율 2위생산자 쥐어짜기와 노동착취로 유지되는 만큼 이용자 이탈은 장기적으로 호구 짓을 해줄 투자자를 끌어모으는데 가장 큰 장애물. 불매가 답

“時間의 主人”은 누구인가?

그보다도 더 큰 이익은 노동자 자신의 시간과 고용주의 시간 사이에 드디어 명백한 구별이 생겼다는 점이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가 판매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언제부터 자기 자신의 시간이 시작되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리고 이것을 미리부터 정확히 알고 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미리 배정할 수 있게 된다.(공장감독관 보고서, 1859년 10월 31일, p52) 그것(공장법)은 노동자들을 자기 자신의 時間의 主人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권력의 궁극적 장악으로 향하게끔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그들에게 부여하였다.(같은 보고서 p47)[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노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時間의 主人”이라 칭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공장감독관으로서는 – 특히 노동자에게 온정적이었을 공장감독관이라면 더욱 – 자못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에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영국 사회는 19세기 중반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던 자본주의 시스템이었으니 이미 자본주의의 온갖 모순과 갈등이 표출되었고 결국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치열한 내전(內戰)의 결과로 노동자는 ’10시간 노동법’이나 ‘아동노동 금지’라는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時間의 主人”으로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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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ino Antero Bergius – http://www.uta.fi/koskivoimaa/tyo/1900-18/index.htm, Public Domain, Link

앞서 말했듯이 노동시간의 규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개혁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부수적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는 이전의 가내 수공업 중심의 상품생산 시스템을 대규모로 지어진 건물 내에서의 기술집약적인 프로세스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 발달로 대규모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1 노동자는 그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할 조직화가 용이해졌고2,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노동력은 사회적 평균의 균질화로 이어져 단일한 노동시간 제한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내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기술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들 이롭게 만들었던 셈이다.

요기요 AI는 먼저 들어온 주문을 제쳐두고 뒤에 들어온 주문을 우선 배달하라고 명령했다. 첫 번째 주문을 한 손님은 화가 날 터이지만, 욕은 라이더가 들어야 한다. 돌발 상황도 벌어졌다. 12층에 올라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계단으로 뛰어간 라이더, [중략] 주소를 잘못 적은 손님 때문에 20분 동안 헤맨 라이더, 조리가 늦어져 식당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라이더까지. AI는 이런 변수를 계산하지 않는다. [중략] 누군가는 우리를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라 부르지만 족쇄와 ‘캐삭’ 사이를 아슬아슬 달리는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디지털일터에 AI라는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됐다. AI에 대한 규제와 통제 없이 플랫폼노동 대책도 없다.[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다]

이제 기술발전이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가 처음에 “공유경제(共有經濟)”라는 기만적인 이름표를 달고 사회 모두에게 이로운 시스템인 것처럼 행세했으나 이내 플랫폼이 자본에 의해 점령될 경우 “공유경제”는 그 즉시 “플랫폼은 사유(私有)지만, 사회적 비용은 공유(共有)”인 시스템으로 고착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칼 맑스가 서술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인 것처럼 보였고 아직도 플랫폼의 점령자들은 그러하다 주장하고 있는 우리의 “자유로운 생산자”도 사실은 자신이 AI라는 신개념 콘베이어벨트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19세기 노동자보다 더 퇴행적인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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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to by CEphoto, Uwe Aranas or alternatively © CEphoto, Uwe Aranas, CC BY-SA 4.0, Link

이제 그들은 더 이상 “時間의 主人”이 아니다. AI는 그들의 편의대로 절대적인 노동시간을 임의로 늘려버린다. AI는 배달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을 노동시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 정부는 집권 초기 주52시간 근무제라는 엉성하지만, 그럼에도 살인적인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 다소 개혁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였지만, 플랫폼 경제의 자본은 다시 노동자에게 “자유로운 플랫폼노동자(생산자)” 혹은 “개인사업자”라는 직함을 씌워주고서는 노동시간 제한의 “족쇄”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해방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AI라는 족쇄를 씌워서 그들이 “時間의 主人”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21세기의 정부와 공장감독관은 새로운 노동법을 만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을 감독해야 한다. 자본가의 행태와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이차산업 중심의 대규모 공장을 짓던 자본과 그곳에서 근무하던 노동자에게 적용되던 법과 제도는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어떤 자본은 플랫폼을 선점하자마자 지분을 일본의 사모펀드에게 넘겨 엄청난 투자금을 받아 그걸로 플랫폼을 독점하였고, 미국 주식시장에 회사를 상장시킨 후 창업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피해 모든 공식직함을 던져버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 플랫폼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의 진화는 한국 사회가 부담하였으며 그 보험료는 한국 보험사에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늘 그랬듯이 자본은 “時間과 空間의 主人”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

자본가는 노동일을 될수록 연장해서 가능하다면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는 구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판매된 이 상품의 특수한 성질은 구매자에 의한 이 상품의 소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노동일을 일정한 표준적인 길이로 제한하려고 할 때 그는 판매자로서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이율배반이 일어나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교환의 법칙에 의해 보증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에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자본론 I상, Karl Marx 저,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4년, p296]

자본론에서 처음으로 “투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결기가 차고 넘치는 “불온서적”치고는 꽤 늦게 투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느낌이다. 여기서 투쟁이라는 표현은 바로 냉철한 상품교환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하는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갈등은 통상 거래가격에 대한 갈등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보통의 거래는 상품의 양도 시점과 가격의 지불 시점을 일치시킨다. 그런데 어떤 상품은 – 대표적으로 노동력 – 이 양자 간의 시점이 일치하지 않아1 갈등을 초래한다. 또는 시점이 일치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과대추정 혹은 과소추정되어 갈등을 일으킨다. 역사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판매자인 노동자계급에 의해 그 가격이 과소추정되었다는 주장에 따라 노동시간의 단축 등의 투쟁을 촉발하였던 것이다.

결국, 노동자계급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력을 시장에서 제값을 받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이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과 유급휴가의 확보라는 결실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역사적 재평가에 급제동을 걸고 있는 조류가 새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것은 플랫폼 경제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해체다. 이 조류는 자유로운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를 플랫폼에 예속시켜 마치 봉건시대의 농노처럼 플랫폼의 농노로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 맑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의 주장이다.2 노동시간은 노동자 각각의 특성에 따른 저마다의 노동시간이 아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서만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3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균일한 노동력의 보유자인 조직 노동의 투쟁을 통해서 보다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자본이 택한 전략은 이 노동자성의 해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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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lin HeijnenDSCF2049.jpg, CC BY-SA 2.0, Link

이미 서구국가에서의 제조업의 쇠퇴로 인해 이전과 같은 노동조직은 약화되어왔다. 그런 한편으로 우버와 같은 플랫폼 경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제거시켰다. 즉, 노동력의 구매자인 자본가는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에게 ‘너는 더 이상 나에게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운행 서비스와 같은 용역을 파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운행 서비스라는 사용가치를 창조해내는 노동력이라는 교환가치를 보유한 노동자로부터 기적처럼 노동자성을 삭제함으로써 노동자를 개인사업자(혹은 자신의 자동차를 생산수단으로 하는 자본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에 각국 사법체계가 어느 정도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성과도 얻어내고 있으나 아직도 자본은 아직 조직적 행동 역량이 떨어지는 배달 노동자와 같은 이들에게 노동시간이 아닌 업무성과라는 기만적인 노동관행을4 강요함으로써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 지부장에 따르면 쿠팡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배송현황 애플리케이션은 휴게시간에도 접속할 수 있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쉬는 시간에도 배송을 계속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한다.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터라 노동자끼리 배송물량 경쟁을 부추긴다. 또 최근 사측이 인센티브 정책을 변경하면서 그 기준을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일하는 일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정규직도, 계약직도] 쿠팡 노동자 2명 또 쓰러졌다, 매일노동뉴스, 2021년 3월 9일]

쿠팡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대다수를 일용직으로 채용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쿠펀치라는 어플을 통해 매일 일용직을 ‘선별’ 채용하는 것이다. 쿠팡은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상시직을 제안하고 있다고 했지만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을 제안한다. 3개월·9개월·12개월 쪼개기 계약을 하고, 이렇게 2년을 다 채운 노동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선별적으로’ 무기계약직을 시켜 준다.[쿠팡의 쪼개기 계약, 노조탄압 수단되나, 매일노동뉴스, 2021년 6월 10일]

사업자등록을 한 적도 없고 사업한다고 표방하지도 않았지만 배민·쿠팡·네이버 같은 플랫폼사업자가 미리 세금을 떼고 인적용역 사업자로 보고해 졸지에 ‘사업자’가 된 그들은 자신이 왜 사업자인지, 수입 대비 소득률은 왜 전문직보다 높은지 의아해한다. 플랫폼경제가 커지고 플랫폼노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무시로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만 정부와 국회는 문제의식도 고민도 없다.[고삐 필요한 ‘플랫폼경제’, 경향신문, 2021년 6월 10일]

이 기사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기술문명이 이루어낸 새로운 업적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노동자성 제거, 극한경쟁을 통한 24시간이라는 제한된 노동시간 내에서의 노동력 쥐어짜기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조직화되고 집단화된 노동이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 얻어낸 노동시간의 집단적 통제를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인센티브 (혹은 패널티) 제공이라는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적(?) 노동을 추출해내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기술 봉건주의”가 다소 과한 표현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봉건제의 농노가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것처럼 오늘날의 플랫폼 노동자는 애플리케이션에 예속되어 있는 노예일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시장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거래했던 자본주의의 거래방식이 새로운 질적 국면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대를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지금 투쟁을 촉발할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이제 투쟁은 노동일에 대한 투쟁과 함께, 노동자성 제거 시도에 대한 투쟁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앱 뒤에 노동자 있어요

혁신은 상층부에서의 고숙련의 소수 일자리들이 상대적으로 저숙련인 일자리들을 감시하는 전통적인 노동의 피라미드 구조를 교체하지 않는다. 대신 기술이 바꾸는 것은 자동화를 통해 대부분의 반복적인 작업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새롭고 보다 복잡한 작업을 계속하여 채워 넣음으로써 피라미드의 구성이다. [중략] 이러한 경향은 특별히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이 실존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구체적인 서비스를 팔기 위한 (양방향 시장의) 플랫폼을 제공하는 긱이코노미(gig economy)에서 명백하다. 우버의 차량호출과 배달 앱이 아무리 세련됐을지라도 이 회사는 차량 운전자와 배달 노동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The Revenge of the Precariat]

어쨌든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말미암아 집밖에 섣불리 나가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이동의 제약을 우리는 배민과 같은 첨단 배달앱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편리해지고 있는 세계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이러한 편리성의 뒤편에는 바로 인용문에서 언급하는 저숙련 노동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자주 잊곤 한다. 앱 이용 과정에서 그들을 마주치는 순간은 배달음식을 전해 받는 바로 그 짧은 순간에 국한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라는 유명한 유머 게시물도 있었지만, 이 경우를 그 표현에 빗대어 보자면 “앱 뒤에 노동자 있어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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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 FUKA from Yokohama, Japan – Cleaner [Suzhou Station / Suzhou], CC BY-SA 2.0, 링크

우버와 에어비앤비와 같은 “공유경제” 모델이 등장할 때만 해도 혁신이 노동의 피라미드 구성을 바꿀 것이라는 꽤 낭만적인 전망도 있었다. 노동과 자본을 공유하면서 세상은 좀 더 친환경적이 되고 계급의 피라미드 구성도 완화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예전에 JP모건 체이스가 분석한바 에어비앤비와 같은 자본 플랫폼의 참여자는 플랫폼 참여를 통해 실질적인 소득증가로 이어진 반면, 우버와 같은 노동 플랫폼의 참여자에게는 플랫폼 참여는 소득증가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대체소득의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었다. 즉, 노동 플랫폼에서 노동의 전통적인 피라미드 구성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직노동이 비조직노동,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는 상황만 초래했다.

긱이코노미의 비조직노동은 점차 노동자성을 인정받으며 지위를 개선해가고 있지만, 아직도 상당수 노동자는 전통적 노조나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화려한 조명을 받는 “혁신” 주도자들의 천문학적 부의 창출에 푼돈을 받아가며 기여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전통적인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산업예비군들이 또 긱이코노미에 참여하게 되면 기존 노동자들의 지위는 더 열악해질지도 모른다. 우아한형제들은 최근 배달 노동을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를 냈는데, 실제로는 경쟁 증가로 인해 소득이 감소하는 추세여서 노동자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노동의 피라미드는 상층부에 세련된 소프트웨어, 하층부에 불안정 비조직노동이 자리잡는 형태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어떤 기념일에 대한 괴롭힘,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일제가 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1938년 메이데이도 ‘근로일’로 창씨개명을 한다. [중략]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의 선전 도구라는 이승만의 훈시에 따라 1957년 대한노총은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하고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생일을 바꾼 것이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개칭했다. 역사적으로 근로자란 지칭에는 천황과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일제의 통치 음모가 배었다고 한다. [중략] 1989년 재야의 민주 노동 세력은 “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탄압의 상징인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함과 아울러 메이데이를 우리의 진정한 노동절로 엄숙히 선포한다”, 그리고 1990년 메이데이 기념 100년 만에 민주노총의 누룩 전노협이 결성된다.[정운영,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웅진지식하우스, 2006, pp22~23]

이 기념일이 뭐라고 이렇게 끊임없이 일제가, 이승만이, 박정희가 괴롭힐 일인가 싶다. 하지만 그만큼 어떠한 대상물에 – 여기서는 기념일 – 대한 호칭은 중요하다. 모욕적인 호칭은 대상물의 지위를 규정하고 많은 경우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한다. 일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주체성을 말살했다. 우리가 건설노동자를 “노가다”로 부르고 나이 어린 편의점 서비스 노동자를 “알바”라고 부르면 그들의 노동자로서의 존엄성을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더 나아가 현재 많은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법에 의해 자영업자로 규정 ‘당하고’ 있다. “사장님”이니까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바로 실질적인 사장님이 노동자를 고용하며 응당 치러야할 노동의 대가를 회피하기 위해 그들을 그렇게 부른 것이 문제다. 호칭은 그만큼 중요하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 비대면(非對面) 경제

코로나19 사태를 소재로 무언가 글을 쓰려는 전업 작가가 있다면 이번 사태가 미치는 그 방대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어떠한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될 것 같다. 앞으로는 전 세계를 공간적 배경 삼아 정치, 사회, 경제, 기술, 법률, 문화, 환경,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코로나19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불안감 혹은 기대감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사태가 몇몇이 말하는 “문명사적 전환”의 서막이라는 것이 호들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나는 총론을 쓸 능력이 없는 경제적인 관심사나 블로그에 끼적거리는 블로거이므로 그때그때 생각나는 각론에 대해서나 사견을 적어놓을까 생각하고 있다.

오늘 논할 키워드는 “비대면(非對面) 경제(Non-face-to-face Economy)”다. 감히 예언하자면 앞으로의 시대는 이전과 다른 차원의 비대면 경제의 시대가 될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경제활동을 비대면으로 영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온라인 쇼핑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제 시장에서 상인을 대면할 필요 없이 원하는 상품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1 인터넷의 발전, 온라인 결제, 배달업의 발전 등으로 인해 가능해진 경제활동이다. 한국은 온라인 쇼핑에 있어서만큼은 이미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고2 여타 국가들 역시 온라인 쇼핑은 전체 쇼핑 활동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 비대면 경제는 온라인 쇼핑과 같은 소비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사전적 의미로 ‘얼굴을 접하지 않고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것’은 생산의 영역에서도 가능한 일이고 앞으로 그 비중이 획기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는 이전의 ‘소비의 비대면화’를 넘어서 ‘노동의 비대면화’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 판단된다. 이번 사태로 인해 재택근무가 반강제적으로 활성화되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의외로 재택근무로도 기업이 제법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업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던 주5일제 노동이 당연시되듯 앞으로 ‘주3일 사무실 + 2일 재택 옵션’이 자연스러워 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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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간 우리는 왜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노동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규율이다. 사실 기업은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군대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기업’이라는 경제단위가 경제의 큰 축을 차지하면서 자본가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군대식 규율이었다. 특히 제조업 공장에서의 규율이 강한 편이었고, 이는 사무직 노동자의 근무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3 그렇기에 노동자가 한 공간에 모여 규율을 지키는 것은 일종의 부가 노동이랄 수 있다. 그렇기에 노동의 비대면화는 어찌 보면 업무 진행에는 큰 차질이 없을지라도 이러한 규율을 효과적으로 아우르기에는 부족하였기에 아직까지 일상화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기업은 노동자들이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 제대로 규율을 지켜가면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 한편 기업의 전면적인 재택근무를 막는 장애물은 관성(慣性)과 보수주의다.4 기업역시 시도해보지 않았던 영역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5 하지만 팬데믹이라는 외부의 충격에 의해 사태가 심각한 동안 꽤 많은 기업이 자율 반 타율 반으로 재택근무 체제로 전환하였고 의외로 업무성과가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됐다. 일종의 재택근무에 대한 패러다임 적 전환의 순간이 온 것이다. 사태의 조기종식이 요원한 현 상황에서 이에 많은 기업은 진지하게 강도 높은 재택근무를 고려할 것이다.

향후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재택근무가 활성화되면 노동환경에는 어떠한 변화가 올까? 트위터에 재택근무가 ‘잠옷을 입고 근무할 수 있어 장점, 잠옷을 입어도 근무해야 하는 게 단점’이라는 취지의 트윗이 인기를 얻었는데 어쨌든 노동자로서는 출퇴근 시간의 절약이라는 꿀 같은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주 52시간 노동과 결합하면 꽤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6 한편, 반면 기업이 노동자의 퍼포먼스를 노동시간이 아닌 별도의 퍼포먼스 측정 수단으로 측정할 경우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노동의 유연화 헬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다.7 또한 노동시간 이외 추가적인 노동을 강요받는 의사(擬似)노동의 증가8라는 악영향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유연적 축적이 자본주의의 생존기제로 자리 잡기 시작한 즈음부터 그러했지만, 노동자와 노조로서는 변화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노동조합은 기업의 군대식 문화를 親노동적인 조직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9 따라서 기업이 脫공간 脫규율적으로 행동하며 보다 교묘하고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노동을 규율하게 되면 노동자와 그 조직 역시 그 방식에 적응하여 변해야 할 것이다. 현대차노조, 대한항공노조, 금융노련과 같은 기업별/산별조직이 아닌 뭔가 더 큰 그림에서의 조직이 필요할 것이다. 재택근무가 산업민주주의의 대안이 될지 새로운 군사적 기업문화의 변태가 될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증거인멸에 나선 조선일보를 위한 캡처 이미지

이번 ‘홍석천씨 오보’는 조선일보 역시 <홍석천 “최저임금 상승 여파로 이태원 가게 2곳 폐업”>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습니다. 홍석천 씨의 비판 이후 중앙·동아일보는 제목을 바꿨지만, 조선일보는 계속 애초 기사 제목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검색해보면 “해당 기사 링크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옵니다.[중앙일보 ‘홍석천 오보’ 개인사과로 끝낼 일인가]

최근에 가게 두 곳의 문을 닫은 홍석천 씨가 이데일리와 한 인터뷰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언급만 따옴표를 써서 오보를 냈던 조중동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는데, 인용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앙은 슬쩍 제목만 바꿨고 조선은 기사를 없애버렸다고 한다.(그 와중에 동아는 복지부동) 증거를 인멸한 뻔뻔한 조선일보의 기억력을 회복시켜주는 차원에서 캡처 화면을 제공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