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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가계소비의 큰 멍에, 교육비

총가계지출액에서 식료품비와 같은 필수재 소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엥겔계수”라 하고,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엔젤계수”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득수준에 따른 엥겔계수와 엔젤계수는 어떠할까? 최근 산업연구원이 ‘우리나라 가구의 소비지출 행태 분석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분석을 내놓았다. 분석결과는 익히 짐작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13년 소득수준별 엥겔계수와 엔젤계수 비교(명목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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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 Meta 자료 재구성한 자료를 산업연구원 보고서에서 재인용
주 : 2인 가구 이상

즉, 우리나라의 가구는 소득이 적을수록 식료품에 더 많이 소비하고 교육에 더 적게 소비하는 반면, 소득이 많을수록 식료품에 더 적게 소비하고 교육에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소비성향은 사실 예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문제는 2013년 현재시점에서 과거와 비교해서 고소득층으로 갈수록 엔젤계수가 더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저소득층으로 갈수록 엔젤계수는 낮아졌다.

2003년 소득수준별 엥겔계수와 엔젤계수 비교(명목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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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 Meta 자료 재구성한 자료를 산업연구원 보고서에서 재인용
주 : 2인 가구 이상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 가계의 최종 소비지출 대비 교육비 지출비중이 6.7%로 미국(2.4%). 영국(1.5%), 독일(1.0%)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 교육비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자녀들의 학원비다. 2012년 기준 교육비 지출액 대비 학생학원 교육비 비중은 56.2%다. 공교육이 싼 것도 아니다. 교육비 중 우리나라의 가계부담은 21.5%로 OECD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OECD 공교육비 중 민감부담 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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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OECD, “Education at a glance” 2013.

그렇다면 가계는 교육비 지출을 얼마나 부담스러워 할까? 통계청이 2013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설문응답자의 73%(매우 부담 31.6%, 약간 부담 41.4%)가 교육비 지출이 부담스럽다고 응답했다. 세대별 교육비 부담을 어떨까? 현대경제연구원의 한 보고서를 보면 엔젤계수로는 40대(17.8%), 50대(17.2%)가 가장 교육비 부담이 크다. 가장 소비활동이 왕성할 40~50대가 교육비에 눌려 살아가고 있다.

이러다보니 빚이 늘고 있다. 203년 우리나라 교육비 관련 가계부채는 28.4조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받아 교육비로 쓰는 것이다. 지출 항목 상으로 교육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부동산은 교육관련 변수가 매우 큰 지출항목이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강남의 한 학군 유명한 아파트의 월세는 1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소득별 세대별로 차이는 나지만 자녀교육 올인의 나라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소득별로 교육비 지출 비중이 다르고 이런 경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교육 불평등에 따른 부의 대물림 현상이 일어날 개연성이 높다. 또한 소득수준을 가리지 않고 공교육, 사교육에 대한 지출이 여타 나라에 비해 높다. 가계 대부분은 이러한 지출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고 가장 소비가 왕성한 40~50대에서 교육비 지출비중이 높다. 비용의 적지 않은 부분은 빚을 얻고 있다.

내수를 진작시키겠다며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꺼내든 카드가 LTV, DTI 완화 카드다. 이상에서 알아본 가계의 상황을 보면 그 정책이 어떤 식으로 작용할 것인가를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다. 사람들은 늘어난 LTV 여유분만큼 돈을 빌릴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교육비 등 생활자금을 쓸 것이다. 또는 전세대출로 좋은 학군에 전세 얻는 데 쓸 것이다. 집값이 오를지도 의문이고 올라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가장 채산성 없는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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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s Academy mosaic from Pompeii” by Unknown – http://www.departments.bucknell.edu/History/Carnegie/plato/academy.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대부분의 학생에게 대학은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학위취득으로 생애소득을 증진시킬 수 있다. 순현재가치(net-present-value) 조건으로 보면 59만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부채에 빠져드는 – 특히 학위를 마치지 못한 미국인의 47%와 영국인의 28% – 증가하는 학생들에게 그건 단순히 돈값을 못하는 것이 된다. [중략] 자동화는 블루칼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화이트칼라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향후 수십 년 내로 직업의 47%가 자동화될 위기에 처해질 것이다.[Creative destruction]

대량생산의 시대 이전까지 소수만이 전유하는 권리였던 고등교육이 중산층에게까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어찌되었든 경제적 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각 정부의 고등교육 육성책은 “인적자원”의 육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 인적자원은 고등교육을 통해 고도성장 기간 동안 높은 NPV를 향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급과잉과 수요부족의 구조적 경향 때문에 이런 높은 수익성은 옛말이 되고 있다. 교육은 가장 채산성 없는 비즈니스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를 대체할 비즈니스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 등으로 온라인 교육 등 저렴한 값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일류대학 학위가 성공의 첩경 심지어는 그 출발점정도로 여기고 있다. 사회의 저성장에 따른 이런 눈높이의 하향화는 대안이 뚜렷치 않은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경쟁을 더 부추기고 있는 상황이다. 교육이 단순히 교육 그 자체만의 해법이 아닌 경제 및 사회정책과 결합되어야 할 이유다.

노골적이고 천박한 2014년 한국의 자본주의

복수의 임원회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한기총 부회장인 조광작 목사는 지난 20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내 한기총 사무실에서 열린 긴급임원회의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한기총 부회장 “가난한 집 아이들 불국사로 수학여행 가지...]

정 후보는 박 후보가 서울시 예산으로 협동조합 사업을 지원하는 점을 들며 “(이 사업은) 국가보안법 위반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박 후보 정체성이 뭔지 알 수가 없다”며 “제가 되면 이런 사업 안 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협동조합으로 사회적 기업을 꾸리고 있거나 예정인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과도 같은 발언이었다.[협동조합 사업 날벼락 맞나.. 정몽준 폭탄발언]

시차가 별로 없는 이 두 유력자의 발언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라 생각되어 인용해보았다. 조 목사의 발언은 이 사회의 부유층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흘겨보는 눈초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입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사고 난 아이들이 강남의 아이들이었으면 이랬을까’라는 주장은 불편했었는데 조 목사의 발언을 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어쩌면 막강한 생산력을 통해 과거에는 부유층만 누리던 일종의 “사치”를 전 인민의 보편적 소비로 확산해왔던 과정이다. 여행은 대표적인 사치 상품이었다. 하지만 유람선과 같은 집합적 소비상품 등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여행을 다닐 수 있게끔 했다. 그런데 조 목사는 그런 자본주의의 그러한 평등적 측면도 외면한 채, 인종주의적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가난한 집 아이도 유람선 정도는 탈 수 있는 경제상황이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한편 아들의 “미개한 국민” 발언으로 고전하고 있는 정몽준 후보는 관훈 클럽 주최의 토론회에서 협동조합에 대해 위와 같이 발언했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경제조직의 지배구조에 대한 다양한 고민 속에 나온 대안적 구조의 조직이다. 그런 조직을 박원순 후보까지 엮어서 색깔론으로 깔아뭉개고 있다. 조 목사의 발언이 어느 정도 봉건적 발상이라면 정 후보의 발언은 대기업의 대주주인 “자본가”다운 발상이다. 협동조합원은 “빨갱이”.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불가피하게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이것이 사회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는 복지지출과 같은 경제제도와 소수의 정치세력을 보호하는 정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결국 갈등은 사회적 비용이고 총체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체제에 위협요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4년 한국의 유력자들은 갈등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그 천박함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소름이 끼친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은 세계에서 가장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했다.

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2

특히 신도시에 들어선 종교시설의 경우, 부동산 경기 악화로 신규 입주가 늦어지면서 신도 확보 역시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성남시 분당구의 한 대형교회가 감정평가액 526억원에 경매장에 나온 바 있다. 이 교회는 2010년 신도시 판교로 이전했지만, 이전 3년 만에 경매로 넘어갔다. 유찰을 거듭하다 현재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은현 EH경매연구소 소장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은행대출을 통해 교회를 지었지만, 신도들이 예상만큼 확보되지 않아 상환이 늦어지고 심한 경우 경매로 넘어가게 된다”고 말했다.[교회·사찰 경매나온 이유는, 해럴드경제, 2014년 5월 13일]

전에 이 블로그에서 교회가 “사모펀드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인용한 기사를 읽어보니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인용하지 않은 다른 부분에 따르면 2013년 교회나 사찰 등 종교시설이 신규로 경매장에 나온 건수는 93건으로 2011년의 59건, 2012년의 77건과 비교하여 매년 꾸준하게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물로 나온 종교시설 중 교회는 70%를 차지하여 단연 비중이 높다.

남한교회야말로 사모펀드와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자산이다. 소비자들은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있고 스스로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휴일노동도 불사한다. [중략] 세금도 내지 않는다. 현재 투자의 장애요인은 자신이 자본주의 기업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정서적 거부감뿐이다.[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위의 서술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 읽은 것일까? 한번 신도가 되면 여전히 “콘텐츠에 대한 확신”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바로 교회의 수요 과다예측에 따른 레버리지 전략 실패를 감안하지 않았다. 해럴드경제의 인용문에 따르면 교회의 이런 전략실패는 명확하다. 부동산 개발에 따른 신규수요를 과다하게 예측하고 빚을 내서 교회를 지었다가 예상만큼 “매출(?)”이 들어오지 않자 파산한 것이다. 전형적인 부동사PF의 실패사례다.

소위 “부동산PF”를 풀어쓰자면, “부동산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파이낸스(Project Finance : 이하 PF)”라 할 수 있다. PF란 차주의 신용도나 자산이 아닌 차주가 향후 진행할 사업의 예상 현금흐름을 담보로 대출을 일으키는 금융기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동산PF라 함은 부동산개발에 PF 기법을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이 이론적인 PF의 개념이지만 실제 부동산PF의 경우에는 신용 및 자산의 담보도 추가로 잡는다.

인용문에 언급된 분당의 교회는 판교라는 신규시장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PF를 통해 대출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예상만큼 신도가 모이지 않자 대출을 갚지 못하게 되고 대주는 담보로 잡은 교회건물을 경매에 넘기게 된 것이다. 이 교회의 판교 PF사업이 실패한 이유는 직접적으로는 신규수요의 예측실패라 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를 기업으로 보고 대출을 통해 레버리지 효과를 노리려 했던 그 마인드일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남한의 교회가 현재와 같이 신도수마저 감소하는 상황에서 양적팽창만을 고집하는 사업행태를 보인다면 그 미래가 잿빛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영혼의 구원에 주력해야할 교회가 그 어떤 자본주의 기업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사업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모순이 미래를 어둡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시장상황에서 펀드에 담을만한 매력적인 상품이냐 하면 그마저도 아니다.

또 다른 세월호 사태를 막기 위한 방법은?

잔인한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국민 우울증”이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사태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사고를 불러온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을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겠다”나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비극적인 참사다. 너무나 안타까운 갖가지 사연과 복잡하게 얽힌 원인들이 산재되어 있어서 블로그에서 섣불리 뭐라 하기도 조심스러운 사고다. 그래서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마침 논지가 비슷한 두 개의 글을 동시에 읽게 되었고, 개인적으로도 이에 공감하는 바가 있기에 여기 옮겨왔다.

똑바로 말하자.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인간이 물질과 생산,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자본주의라 말할 수도 없는, 천민 약탈 도적의 무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이다. 최소한의 도구적 합리성이 있다면 기업이 이딴 식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러나 이 “해운회사”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빈 자리를 광신과 무책임과 끼리끼리의 문화가 채웠다. “돈보다 사람”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 없다. 어떤 수준에서는 돈이 더 중요하다. 그딴 식으로 사업하면 쫄딱 망한다는 경험을 보여주면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안 망했을까? 공무원과 금융기관을 꽉 잡으면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과 “인간관계”를 잘 구축해 놓는 것이 합리적 기업경영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출처]

미국에 살면서 불편한 것 중 하나는, 때로 지나칠 만큼 안전을 강조해 사회적 비용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고치러 가 보면 느끼는데, 차에 안전에 관한 문제가 하나만 있어도 수천 달러를 메기며 전체를 다 갈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번에는 바퀴에 바람이 좀 빠져 정비소에 가져갔더니 바퀴를 갈아야 한다고 했다. 타이어가 새 것이었고 내가 보기엔 정말 문제가 없어 보여 그냥 좀 고쳐서 써도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라이어빌리티(liability) 문제가 있어 날 그냥 보낼 수 없단다. 하는 수 없이 바퀴를 새 것으로 갈았다. 이들이 도덕성이 높고 진정으로 내 안전을 걱정해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사고가 발생하면 회사가 져야 할 책임이 워낙 크니 애초에 조심을 하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소송이 쏟아지는 나라인지라, 뭐라도 잘못해서 책 잡히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을 해야 하니, 회사의 자산을 책임질 수 있는 직원들을 채용하고, 그들을 철저히 교육하게 될 수밖에 없다.[세월호 여객선 침몰, 그리고 세모 그룹 유병언]

첫 번째 글을 권복규 이화여대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고, 두 번째 글은 실리콘벨리에서 활동 중인 조성문 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글들의 요지는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약간 각색을 해서 요약해본다면, 이 사회에서의 벌어지는 참혹한 사고의 원인은 “도구적 합리성”이 결여된 “천민 약탈 도적의 무리”가 “합리적 기업경영”이 아닌 “인간관계”로 장사를 해서 생겨나는 일이며 이에 대한 현실적 대안은 “라이어빌리티”를 강조하여 회사의 책임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왜 안전사고에 대한 시스템이 이토록 미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지지만, 시장경제에서 비용만 발생하는 안전조치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로 인해 발생할 비용이 조직의 존망을 흔들 정도가 되어야 반응할 뿐이다.[출처]

4월 17일 내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위의 두 주장과 유사한 주장이고 이 체제에서의 세월호와 같은 기업 – 또는 공공 – 이 제공하는 집합적인 소비재에 대해서는 이러한 대책이 근본적인 해결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권복규 교수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실제로 안전에 대해 투자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하며 우리는 이제야 그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조문성 씨가 경험한 그 고지식한 정비소일 것이다. 결국 안전하게 하는 게 비용절감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제도적 합리성을 구현하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한 정몽준 씨가 실질적 주인인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연달아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두가 안전조치 미흡으로 벌어진 일들일 텐데, 막내아들의 페북 망언에 대해서는 사과하던 정몽준 씨가 이 사태에 대해선 묵묵부답이다. 정몽준 씨는 그러면서 정작 서울시에 안전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겠단다. 사회가 아직도 이런 행위에 대해 너그러워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한편, 권복규 교수의 애초의 글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지나치게 매크로적인 비판이라는 취지의 글이었고, 이에 대한 방증으로 며칠 전에 있었던 서울 지하철 추돌 사고를 들었다. 취지에 일부 공감한다. 하지만 결국 과적이 침몰 원인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이윤 논리를 여전히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바 있고 지하철 사고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이윤 논리, 보다 정확하게는 비용절감 논리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기업 특유의 이윤논리인 셈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공기업의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하고 있지만 사실 공기업에 대한 이런 공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축적이 일천하고 기본적인 공공서비스가 부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공기업이 이 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몫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실패” 논거가 등장하고 재정압박에 직면하자 정부는 공기업의 개혁을 주문했고 이는 거의 예외 없이 이윤추구 논리로 귀결됐다. 그 결과 공공재의 내구연한은 계속하여 늘어났고 안전을 위한 비용은 삭감됐다.

다시 큰 틀에서 보면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보다 안전에 있어서는 마이크로하게 더 엄밀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통제와 규제는 이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매크로한 측면에서 보자면 체제적 반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자본주의가 지구촌 규모의 대량생산/대량소비/집합소비로 고도화된 것은 불과 100여년에 불과하다. 당시 지어진 인프라는 서구에서조차 이제 낡아가지만 긴축재정은 공공/민간 양측에서 새로운 정비를 유예하게 만든다. “안전이 이익”의 선순환 고리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R.I.P.

자본주의 남한이 시행할 계획경제 정책

소비시장은 매우 효율적이지만 또한 ‘욕구 충족’이라는 낭비적인 메커니즘에 의존하고 있다. 소비시장은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깃의 소비자를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생산품을 쏟아 부어 소비자가 감당 못할 만큼의 양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소비사회의 ‘교육시장’은 시장의 이런 일반적인 논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국가는 최근 몇 십 년 동안 고등교육기관의 수와 학생의 수는 전례 없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학교육과 고등교육 학위의 가치는 떨어졌다.[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택광/박성훈 옮김, 자음과 모음, 2013년, p130]

폴란드에서 태어나 공부를 했고 맑스주의 이론가이자 교수로 재직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폴란드 공산당의 반시오니즘으로 인해 영국으로 망명하여야 했던 현존하는 지식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유다.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에서의 과잉생산 경향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으며, 이 논리를 그대로 교육‘상품’ 시장에 적용하고 있다. 바다 건너 유럽에 머무는 철학자의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교육현실만큼 이 사유에 걸맞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삼성의 서류전형 부활과 이 업무를 각 대학의 총장에게 위임한, ‘일개 기업에 의한 각 대학총장 신규보직 인사발령’ 사건이 아니라도 이미 우리 대학은 자본에게 포섭되어 있는 상태다. 가장 큰 이유는 바우만의 생각처럼 우리나라에 대학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원부족의 국가에서 압축 성장을 통한 경제발전을 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인력자원’의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그 주된 수단은 대학교육을 통한 고등교육 인력의 양성이었다.

결과론적으로 그 전략은 주효했다. 세계시장에서 손꼽히는 기업도 몇 개 가지게 되었고 학생들의 수학능력은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우리 경제가 저성장기에 진입했으며 인구가 계속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대학 시장은 과잉공급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에 따라 우리 교육시장에서는 취업난, 학벌 인플레이션, 대학수요의 수도권 집중화, 특목고의 명문대 입학과점 등의 각종 부작용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강남의 학부모들은 이제 자녀들의 “SKY” 진학을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닌 ‘사람 구실하며 살기 위한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 그 이외 대학은 공급과잉의 교육시장에서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의 상품 과잉공급 이론을 생생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분들이라고나 할까? 정부 역시 입학정원 축소가 이 시장의 필수 과제임을 인지하고 있다. 자본주의 남한이 시행할 계획경제 정책이다.

시장에 맡기라는 배부른 소리를 할 여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