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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이고 천박한 2014년 한국의 자본주의

복수의 임원회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한기총 부회장인 조광작 목사는 지난 20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내 한기총 사무실에서 열린 긴급임원회의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한기총 부회장 “가난한 집 아이들 불국사로 수학여행 가지...]

정 후보는 박 후보가 서울시 예산으로 협동조합 사업을 지원하는 점을 들며 “(이 사업은) 국가보안법 위반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박 후보 정체성이 뭔지 알 수가 없다”며 “제가 되면 이런 사업 안 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협동조합으로 사회적 기업을 꾸리고 있거나 예정인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과도 같은 발언이었다.[협동조합 사업 날벼락 맞나.. 정몽준 폭탄발언]

시차가 별로 없는 이 두 유력자의 발언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라 생각되어 인용해보았다. 조 목사의 발언은 이 사회의 부유층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흘겨보는 눈초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입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사고 난 아이들이 강남의 아이들이었으면 이랬을까’라는 주장은 불편했었는데 조 목사의 발언을 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어쩌면 막강한 생산력을 통해 과거에는 부유층만 누리던 일종의 “사치”를 전 인민의 보편적 소비로 확산해왔던 과정이다. 여행은 대표적인 사치 상품이었다. 하지만 유람선과 같은 집합적 소비상품 등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여행을 다닐 수 있게끔 했다. 그런데 조 목사는 그런 자본주의의 그러한 평등적 측면도 외면한 채, 인종주의적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가난한 집 아이도 유람선 정도는 탈 수 있는 경제상황이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한편 아들의 “미개한 국민” 발언으로 고전하고 있는 정몽준 후보는 관훈 클럽 주최의 토론회에서 협동조합에 대해 위와 같이 발언했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경제조직의 지배구조에 대한 다양한 고민 속에 나온 대안적 구조의 조직이다. 그런 조직을 박원순 후보까지 엮어서 색깔론으로 깔아뭉개고 있다. 조 목사의 발언이 어느 정도 봉건적 발상이라면 정 후보의 발언은 대기업의 대주주인 “자본가”다운 발상이다. 협동조합원은 “빨갱이”.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불가피하게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이것이 사회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는 복지지출과 같은 경제제도와 소수의 정치세력을 보호하는 정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결국 갈등은 사회적 비용이고 총체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체제에 위협요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4년 한국의 유력자들은 갈등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그 천박함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소름이 끼친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은 세계에서 가장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했다.

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2

특히 신도시에 들어선 종교시설의 경우, 부동산 경기 악화로 신규 입주가 늦어지면서 신도 확보 역시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성남시 분당구의 한 대형교회가 감정평가액 526억원에 경매장에 나온 바 있다. 이 교회는 2010년 신도시 판교로 이전했지만, 이전 3년 만에 경매로 넘어갔다. 유찰을 거듭하다 현재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은현 EH경매연구소 소장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은행대출을 통해 교회를 지었지만, 신도들이 예상만큼 확보되지 않아 상환이 늦어지고 심한 경우 경매로 넘어가게 된다”고 말했다.[교회·사찰 경매나온 이유는, 해럴드경제, 2014년 5월 13일]

전에 이 블로그에서 교회가 “사모펀드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인용한 기사를 읽어보니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인용하지 않은 다른 부분에 따르면 2013년 교회나 사찰 등 종교시설이 신규로 경매장에 나온 건수는 93건으로 2011년의 59건, 2012년의 77건과 비교하여 매년 꾸준하게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물로 나온 종교시설 중 교회는 70%를 차지하여 단연 비중이 높다.

남한교회야말로 사모펀드와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자산이다. 소비자들은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있고 스스로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휴일노동도 불사한다. [중략] 세금도 내지 않는다. 현재 투자의 장애요인은 자신이 자본주의 기업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정서적 거부감뿐이다.[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위의 서술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 읽은 것일까? 한번 신도가 되면 여전히 “콘텐츠에 대한 확신”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바로 교회의 수요 과다예측에 따른 레버리지 전략 실패를 감안하지 않았다. 해럴드경제의 인용문에 따르면 교회의 이런 전략실패는 명확하다. 부동산 개발에 따른 신규수요를 과다하게 예측하고 빚을 내서 교회를 지었다가 예상만큼 “매출(?)”이 들어오지 않자 파산한 것이다. 전형적인 부동사PF의 실패사례다.

소위 “부동산PF”를 풀어쓰자면, “부동산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파이낸스(Project Finance : 이하 PF)”라 할 수 있다. PF란 차주의 신용도나 자산이 아닌 차주가 향후 진행할 사업의 예상 현금흐름을 담보로 대출을 일으키는 금융기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동산PF라 함은 부동산개발에 PF 기법을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이 이론적인 PF의 개념이지만 실제 부동산PF의 경우에는 신용 및 자산의 담보도 추가로 잡는다.

인용문에 언급된 분당의 교회는 판교라는 신규시장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PF를 통해 대출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예상만큼 신도가 모이지 않자 대출을 갚지 못하게 되고 대주는 담보로 잡은 교회건물을 경매에 넘기게 된 것이다. 이 교회의 판교 PF사업이 실패한 이유는 직접적으로는 신규수요의 예측실패라 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를 기업으로 보고 대출을 통해 레버리지 효과를 노리려 했던 그 마인드일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남한의 교회가 현재와 같이 신도수마저 감소하는 상황에서 양적팽창만을 고집하는 사업행태를 보인다면 그 미래가 잿빛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영혼의 구원에 주력해야할 교회가 그 어떤 자본주의 기업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사업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모순이 미래를 어둡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시장상황에서 펀드에 담을만한 매력적인 상품이냐 하면 그마저도 아니다.

또 다른 세월호 사태를 막기 위한 방법은?

잔인한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국민 우울증”이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사태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사고를 불러온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을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겠다”나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비극적인 참사다. 너무나 안타까운 갖가지 사연과 복잡하게 얽힌 원인들이 산재되어 있어서 블로그에서 섣불리 뭐라 하기도 조심스러운 사고다. 그래서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마침 논지가 비슷한 두 개의 글을 동시에 읽게 되었고, 개인적으로도 이에 공감하는 바가 있기에 여기 옮겨왔다.

똑바로 말하자.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인간이 물질과 생산,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자본주의라 말할 수도 없는, 천민 약탈 도적의 무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이다. 최소한의 도구적 합리성이 있다면 기업이 이딴 식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러나 이 “해운회사”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빈 자리를 광신과 무책임과 끼리끼리의 문화가 채웠다. “돈보다 사람”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 없다. 어떤 수준에서는 돈이 더 중요하다. 그딴 식으로 사업하면 쫄딱 망한다는 경험을 보여주면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안 망했을까? 공무원과 금융기관을 꽉 잡으면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과 “인간관계”를 잘 구축해 놓는 것이 합리적 기업경영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출처]

미국에 살면서 불편한 것 중 하나는, 때로 지나칠 만큼 안전을 강조해 사회적 비용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고치러 가 보면 느끼는데, 차에 안전에 관한 문제가 하나만 있어도 수천 달러를 메기며 전체를 다 갈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번에는 바퀴에 바람이 좀 빠져 정비소에 가져갔더니 바퀴를 갈아야 한다고 했다. 타이어가 새 것이었고 내가 보기엔 정말 문제가 없어 보여 그냥 좀 고쳐서 써도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라이어빌리티(liability) 문제가 있어 날 그냥 보낼 수 없단다. 하는 수 없이 바퀴를 새 것으로 갈았다. 이들이 도덕성이 높고 진정으로 내 안전을 걱정해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사고가 발생하면 회사가 져야 할 책임이 워낙 크니 애초에 조심을 하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소송이 쏟아지는 나라인지라, 뭐라도 잘못해서 책 잡히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을 해야 하니, 회사의 자산을 책임질 수 있는 직원들을 채용하고, 그들을 철저히 교육하게 될 수밖에 없다.[세월호 여객선 침몰, 그리고 세모 그룹 유병언]

첫 번째 글을 권복규 이화여대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고, 두 번째 글은 실리콘벨리에서 활동 중인 조성문 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글들의 요지는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약간 각색을 해서 요약해본다면, 이 사회에서의 벌어지는 참혹한 사고의 원인은 “도구적 합리성”이 결여된 “천민 약탈 도적의 무리”가 “합리적 기업경영”이 아닌 “인간관계”로 장사를 해서 생겨나는 일이며 이에 대한 현실적 대안은 “라이어빌리티”를 강조하여 회사의 책임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왜 안전사고에 대한 시스템이 이토록 미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지지만, 시장경제에서 비용만 발생하는 안전조치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로 인해 발생할 비용이 조직의 존망을 흔들 정도가 되어야 반응할 뿐이다.[출처]

4월 17일 내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위의 두 주장과 유사한 주장이고 이 체제에서의 세월호와 같은 기업 – 또는 공공 – 이 제공하는 집합적인 소비재에 대해서는 이러한 대책이 근본적인 해결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권복규 교수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실제로 안전에 대해 투자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하며 우리는 이제야 그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조문성 씨가 경험한 그 고지식한 정비소일 것이다. 결국 안전하게 하는 게 비용절감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제도적 합리성을 구현하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한 정몽준 씨가 실질적 주인인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연달아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두가 안전조치 미흡으로 벌어진 일들일 텐데, 막내아들의 페북 망언에 대해서는 사과하던 정몽준 씨가 이 사태에 대해선 묵묵부답이다. 정몽준 씨는 그러면서 정작 서울시에 안전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겠단다. 사회가 아직도 이런 행위에 대해 너그러워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한편, 권복규 교수의 애초의 글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지나치게 매크로적인 비판이라는 취지의 글이었고, 이에 대한 방증으로 며칠 전에 있었던 서울 지하철 추돌 사고를 들었다. 취지에 일부 공감한다. 하지만 결국 과적이 침몰 원인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이윤 논리를 여전히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바 있고 지하철 사고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이윤 논리, 보다 정확하게는 비용절감 논리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기업 특유의 이윤논리인 셈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공기업의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하고 있지만 사실 공기업에 대한 이런 공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축적이 일천하고 기본적인 공공서비스가 부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공기업이 이 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몫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실패” 논거가 등장하고 재정압박에 직면하자 정부는 공기업의 개혁을 주문했고 이는 거의 예외 없이 이윤추구 논리로 귀결됐다. 그 결과 공공재의 내구연한은 계속하여 늘어났고 안전을 위한 비용은 삭감됐다.

다시 큰 틀에서 보면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보다 안전에 있어서는 마이크로하게 더 엄밀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통제와 규제는 이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매크로한 측면에서 보자면 체제적 반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자본주의가 지구촌 규모의 대량생산/대량소비/집합소비로 고도화된 것은 불과 100여년에 불과하다. 당시 지어진 인프라는 서구에서조차 이제 낡아가지만 긴축재정은 공공/민간 양측에서 새로운 정비를 유예하게 만든다. “안전이 이익”의 선순환 고리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R.I.P.

자본주의 남한이 시행할 계획경제 정책

소비시장은 매우 효율적이지만 또한 ‘욕구 충족’이라는 낭비적인 메커니즘에 의존하고 있다. 소비시장은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깃의 소비자를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생산품을 쏟아 부어 소비자가 감당 못할 만큼의 양을 생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소비사회의 ‘교육시장’은 시장의 이런 일반적인 논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국가는 최근 몇 십 년 동안 고등교육기관의 수와 학생의 수는 전례 없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학교육과 고등교육 학위의 가치는 떨어졌다.[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택광/박성훈 옮김, 자음과 모음, 2013년, p130]

폴란드에서 태어나 공부를 했고 맑스주의 이론가이자 교수로 재직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폴란드 공산당의 반시오니즘으로 인해 영국으로 망명하여야 했던 현존하는 지식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유다.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에서의 과잉생산 경향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으며, 이 논리를 그대로 교육‘상품’ 시장에 적용하고 있다. 바다 건너 유럽에 머무는 철학자의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교육현실만큼 이 사유에 걸맞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삼성의 서류전형 부활과 이 업무를 각 대학의 총장에게 위임한, ‘일개 기업에 의한 각 대학총장 신규보직 인사발령’ 사건이 아니라도 이미 우리 대학은 자본에게 포섭되어 있는 상태다. 가장 큰 이유는 바우만의 생각처럼 우리나라에 대학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원부족의 국가에서 압축 성장을 통한 경제발전을 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인력자원’의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그 주된 수단은 대학교육을 통한 고등교육 인력의 양성이었다.

결과론적으로 그 전략은 주효했다. 세계시장에서 손꼽히는 기업도 몇 개 가지게 되었고 학생들의 수학능력은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우리 경제가 저성장기에 진입했으며 인구가 계속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대학 시장은 과잉공급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에 따라 우리 교육시장에서는 취업난, 학벌 인플레이션, 대학수요의 수도권 집중화, 특목고의 명문대 입학과점 등의 각종 부작용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강남의 학부모들은 이제 자녀들의 “SKY” 진학을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닌 ‘사람 구실하며 살기 위한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다. 그 이외 대학은 공급과잉의 교육시장에서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의 상품 과잉공급 이론을 생생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분들이라고나 할까? 정부 역시 입학정원 축소가 이 시장의 필수 과제임을 인지하고 있다. 자본주의 남한이 시행할 계획경제 정책이다.

시장에 맡기라는 배부른 소리를 할 여유가 없다.

미국의 교도소에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다

이번 주, 버락 오바마 정부의 법무부 장관인 에릭 홀더는 미국에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 교도소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상황을 부드럽게 설명한 것이다. 이 자유의 땅에는 전 세계 인구의 5%가 살고 있는데, 수감자는 25%다. 모두 합쳐 220만 명의 미국인들이 쇠창살 뒤에서 썩고 있다. : 성인 107명 당 1명 꼴. 경범은 엄하게 다뤄지고 있고, 중범은 가혹하게 다뤄지고 있다. 비용은 증가하고 있는데 1년에 800억 달러, 수감자 당 3만5천불 꼴이다. [중략] 몇 십 년간 미국의 정치인들은 더 강화된 판결 법령을 통한 대량투옥이 유권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 이후의 극적인 범죄율 감소가 이러한 가정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중략] 감옥을 통한 효용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을 가둬놓는 것이 이치에 닿던 지점을 지났다. 홀더 씨가 말하듯이 이 시스템은 “비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하지 않다”.[One nation, behind bars]

감옥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대표적인 공공서비스 중 하나다. 감옥의 일차적인 목적은 범죄자들을 교정시키는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감옥은 교정시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차적인 목적은 범죄자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를 지은 이의 교화와 사회를 안전하게 하는 것, 이보다 더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는 서비스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문제는 지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수감자의 25%에 해당할 만큼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그야말로 “썩고” 있다는 것은, 그들을 썩히는데 드는 비용, 그리고 그들이 밖에서 사회활동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를 한꺼번에 잃는 셈인데, 이를 사회적 비용으로 환산한다면 정말 비효율적인 상황인 것이다. 물론 개인으로서도 매우 불행한 상황이고 말이다.

기사는 미국의 형법 시스템이 너무 가혹하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수감자가 마약 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그 비효율성의 원인으로 들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마약의 합법화가 – 물론 약한 종류의 마약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 상황의 개선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까지 조언하고 있다. 최근 우루과이가 약한 중독성의 마약과 강한 중독성의 마약 관리를 분리하기 위해 대마초를 합법화하였듯이 말이다.

한편, 기사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수감자가 이렇게 많아진 것의 또 다른 배경에는 감옥의 민영화도 한 몫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감옥의 건설과 운영을 민간의 손에 넘겼으며 미국교정회사와 웨클허트 교정회사가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이들이 수용하고 있는 수감자는 미국 전체 수감자의 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들 회사에게 있어 수감자는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다.

마이클 무어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 보면 교정회사와 결탁한 사법부가 어떻게 하찮은 사건들에 대해 엄격한 금고형을 내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들 교정회사들은 다른 거대산업들이 그렇듯이 사법제도의 강화를 위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했을 것이고, 때마침 정치권의 보수화 현상과 맞물려 이러한 추세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결국 더 많은 이들이 더 가혹한 기준 하에 감옥에 머물러야 했다.

요컨대, 홀더 장관의 선언은 단순히 미국정부의 과잉(?)공급되고 있는 특정 공공서비스에 대한 반성을 넘어 문명 그 자체의 한 축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선언으로 간주되었으면 한다. 격리를 통해 사회 안정을 도모하는 체제에서 과연 어떤 행동을 범죄라 규정할 수 있으며 또 얼마만큼의 벌을 내려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볼 수 있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기준은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이다.

당신 회사의 CEO는 사이코패스일까?

사이코패스들은 보상, 그러니까 당근에 너무나 이끌리는 나머지, 채찍이란 처벌을 걱정하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중략] 교도소 수감자 집단보다 기업 최고경영자 집단에서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한 사람을 더 많이 찾는 까닭을 설명해 준다.[천재의 두얼굴 사이코패스, 케빈 더튼 지음, 차백만 옮김, 미래의 창, 2013년, pp171~172]

이 부분은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실험을 통해서 내린 결론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심리학자이자 뇌과학자인 애드리언 레인은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들의 학습능력을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에서 참가자가 답을 맞히면 아무 일도 없지만, 틀리면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방식이었다. 실험 결과 사이코패스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들에 비해 게임의 규칙을 훨씬 늦게 알아챘다. 반대로 이번에는 정답을 맞힐 경우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하자 사이코패스들이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들보다 훨씬 빨리 그 사실을 알아챘다는 것이 실험결과다.

즉, 사이코패스는 다른 이들보다 보상의 규칙은 재빨리 알아채고 이를 활용하는 반면, 처벌의 규칙에는 둔감하거나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연구기관은 이런 상황이 실제 뇌활동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연구하였는데,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한 집단은 쾌락과 행복감에 관련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사이코패스 성향이 약한 집단에 비해 4배 이상 배출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연구팀은 “사이코패스는 타인이나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가 오더라도 끝까지 보상을 추구하도록 뇌의 회로가 프로그램돼있다”고 분석했다.

아널은 모질로보다도 매몰찬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한 중역이 회상한다. “아널은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았고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아널은 열심히 일하도록 직원들을 독려했지만, 원한 성과를 모두 달성한 다음에는 완전히 무관심했다.[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 베서니 맥린/조 노세라 지음, 윤태경/이종호 옮김, 자음과 모음, 2011년, p59]

컨트리와이드와 함께 미국 최대의 서브프라임 대출기관이었던 ACC캐피털 홀딩스의 창업자인 롤랜드 아널(Roland Arnall)에 대한 묘사다. 때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여겨지는 이런 덕목에 대해 케빈 더튼은 사실은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기보다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또한 노골적인 사기대출과 정치권에 대한 로비로 유명했는데, 물론 이러한 행동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들도 저지를 수 있는 부패에 관련된 행동이긴 하지만, 처벌에 둔감한 사이코패스의 행동과 완전히 무관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행동이기도 하다.

딕 풀드는 리먼 브라더스를 오래도록 통치해오는 내내, 결코 강한 대리인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런 회사 운용법은 2004년 5월, 54세의 조 그레고리가 사장이자 최고운영책임자로 임명될 때도 지속되었다. 조 그레고리가 그 자리에 임명된 주요한 요인은 그에게 최고경영자가 되겠다는 야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상식의 실패, 로렌스 G. 맥도날드/패트릭 로빈슨 지음, 이현주 옮김, 컬처앤스토리, 2009년, p152]

롤랜드 아널보다 더 유명세를 떨친 금융인 리챠드 풀드(Richard S. Fuld, Jr.) 역시 아널에 못지않은 광기와 뉘우침 없는 행동으로 유명했다. 인용문에서 묘사되는 그의 모습은, 비록 관찰자의 모습일지라도 확실히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권력을 찬탈하고 이를 수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세 유럽의 잔혹한 군주를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면 헨리8세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많은 군주들에게서 보였던 마키아벨리즘적으로 보였던 모습이 또한 한니발 렉터에게서 보았던 냉혈함과 닮아 있다. 둘의 차이는 성안에 있고 감옥 안에 있었다는 차이정도?

개인적으로 지난 신용위기의 원인을 “인간의 탐욕”으로 해석하는 것은 공감하지 않는다. 즉, 다만 탐욕이 제어되지 못했을 뿐으로 이를 제어할 시스템을 정비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대안이 현 상황에서 적절치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학문적으로 사이코패스로 정의되든 아니든 간에 현대기업의 경영자들은 후진적인 과거의 군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이런 인사시스템이 하나의 체제 실패원인일 수도 있다는 설명에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들은 점점 더 보상에 민감하고, 처벌에 둔감하며, 자기기만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FBI수사관 출신으로 CFE(Certified Fraud Examiner, 각족 금융 사기와 화이트칼라 범죄를 적발, 조사하는 공인 전문가 자격증) 협회를 창설해 회장을 맡고 있는 조지프 웰스 Joseph Wells는 사기꾼의 특징으로 ‘합리화, 즉 사기 행위를 그럴듯한 이름으로 부르는 능력’을 꼽는다. 예를 들어, 장부를 조작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회사에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둘러대는 것. 사기에 연루된 대기업 간부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고 있을 뿐이다.”[치팅컬처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 데이비드 캘러헌 지음, 강미경 옮김, 서돌, 2008년, p131]

이것은 그들이 유전적인 자질을 그렇게 타고난 후에, 뛰어난 머리로 연쇄살인범이 되는 대신 CEO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린 사이코패스여서 – 케빈 더튼의 표현에 따르면 “기능적 사이코패스” – 일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조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 능력을 가다듬었을 수도 있다. 후자의 방식을 위한 교육은 사실 그리 드물지 않다. 우리가 노동자를 인적자원, 대량해고를 구조조정이라 칭하고, 이해관계자나 주주의 이익 대신 자신을 위한 보상만을 생각하게 된다면 어느새 조금씩 자기 기만적이고 후천적인 사이코패스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메리칸싸이코 영화 일부

우리 사회는 “해병대 캠프” 참사로부터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최근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해병대 캠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관”이라는 자가 학생들을 구명조끼도 없는 상태에서 바다 속으로 밀어 넣는 바람에 다섯 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학교, 프로그램 진행업체, 고용된 노동자들에게서 음주, 재하청, 시간제 고용 등 사고를 예언하는 각종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어쨌든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살펴보자면 구명조끼 없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안전 불감증”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은 앞으로 “사설 캠프”가 아닌 상표 등록이 완료된 “정식 해병대 캠프”에서 안전조치가 취해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모든 갈등은 제거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사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모두 얻고 사회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말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학생들이 자발적이라기보다는 학교의 일정에 따라 참가하였고 이러한 캠프는 각 학교에서 꽤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포털에서 검색해보니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업체가 꽤 됐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주요 프로그램을 학생들의 이런 “교육과정”용뿐만 아니라 “기업연수”용으로도 홍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사회전체가 “병영캠프”로 평생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언제부터 이 사회는 “병영캠프”를 사회의 평생교육 과정으로 간주하게 되었을까? 미디어오늘의 보도에 따르면 매스미디어는 꽤 오래전부터 “병영캠프”를 “극기 훈련”을 위한 훌륭한 과정으로 홍보해왔고, 많은 학교와 기업들은 학생과 직원의 “정신무장”을 위해 캠프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무장”은 삐딱한 내 시각으로는 훈육의 대상인 학생과 직원을 복종의 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사실 더 구조적으로 보면 학교와 기업은 본래 구성원을 서열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고유목적 중 하나이므로 그런 과정이 새삼스러울 것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고유한 병영문화1와 안보 과민증상2이 결합되면서 그 양상이 좀 더 폭력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학교와 공장, 또는 사무직일지라도 대량생산체제에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군사적 규율의 연장선으로 간주한 것이 그 동안의 역사다.

규율과 복종이 노동자의 의무라면 노동권과 부당노동에 대한 저항 등은 노동자의 권리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이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겠다는 계획에 대해 주류사회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곽노현 교육감 시절 서울시교육청은 근로기준법 등을 포함한 노동인권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가진 바 있다. 여당과 사용자 단체는 강하게 반발하였다. 의무는 있으되 권리는 없는 절름발이 교육을 받으라는 것이다.

어쨌든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으면 이를 방지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재발방지책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순서고 나아가 사태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학생들을 얼차려 줘서 복종이 살아남을 길이라 가르치는 극단적인 훈육이 과연 옳은 교육인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고, 지엽적인 문제만 가지고 변죽을 울리는 보도를3 보면 과연 이 사회는 시행착오의 로드맵이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p.s. 그런데 왜 “병영캠프”는 훈련병으로 박박 기는 프로그램밖에 없나? 만약 사단장의 지위를 경험할 수 있는 “병영캠프”가 있다면 내 돈 내고 참가하고 싶다.

p.s.2 억울하게 죽은 다섯 명의 젊은이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