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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교도소에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다

이번 주, 버락 오바마 정부의 법무부 장관인 에릭 홀더는 미국에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 교도소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상황을 부드럽게 설명한 것이다. 이 자유의 땅에는 전 세계 인구의 5%가 살고 있는데, 수감자는 25%다. 모두 합쳐 220만 명의 미국인들이 쇠창살 뒤에서 썩고 있다. : 성인 107명 당 1명 꼴. 경범은 엄하게 다뤄지고 있고, 중범은 가혹하게 다뤄지고 있다. 비용은 증가하고 있는데 1년에 800억 달러, 수감자 당 3만5천불 꼴이다. [중략] 몇 십 년간 미국의 정치인들은 더 강화된 판결 법령을 통한 대량투옥이 유권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 이후의 극적인 범죄율 감소가 이러한 가정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중략] 감옥을 통한 효용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을 가둬놓는 것이 이치에 닿던 지점을 지났다. 홀더 씨가 말하듯이 이 시스템은 “비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하지 않다”.[One nation, behind bars]

감옥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대표적인 공공서비스 중 하나다. 감옥의 일차적인 목적은 범죄자들을 교정시키는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감옥은 교정시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차적인 목적은 범죄자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를 지은 이의 교화와 사회를 안전하게 하는 것, 이보다 더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는 서비스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문제는 지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수감자의 25%에 해당할 만큼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그야말로 “썩고” 있다는 것은, 그들을 썩히는데 드는 비용, 그리고 그들이 밖에서 사회활동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를 한꺼번에 잃는 셈인데, 이를 사회적 비용으로 환산한다면 정말 비효율적인 상황인 것이다. 물론 개인으로서도 매우 불행한 상황이고 말이다.

기사는 미국의 형법 시스템이 너무 가혹하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수감자가 마약 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그 비효율성의 원인으로 들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마약의 합법화가 – 물론 약한 종류의 마약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 상황의 개선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까지 조언하고 있다. 최근 우루과이가 약한 중독성의 마약과 강한 중독성의 마약 관리를 분리하기 위해 대마초를 합법화하였듯이 말이다.

한편, 기사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수감자가 이렇게 많아진 것의 또 다른 배경에는 감옥의 민영화도 한 몫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감옥의 건설과 운영을 민간의 손에 넘겼으며 미국교정회사와 웨클허트 교정회사가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이들이 수용하고 있는 수감자는 미국 전체 수감자의 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들 회사에게 있어 수감자는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다.

마이클 무어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에 보면 교정회사와 결탁한 사법부가 어떻게 하찮은 사건들에 대해 엄격한 금고형을 내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들 교정회사들은 다른 거대산업들이 그렇듯이 사법제도의 강화를 위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했을 것이고, 때마침 정치권의 보수화 현상과 맞물려 이러한 추세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결국 더 많은 이들이 더 가혹한 기준 하에 감옥에 머물러야 했다.

요컨대, 홀더 장관의 선언은 단순히 미국정부의 과잉(?)공급되고 있는 특정 공공서비스에 대한 반성을 넘어 문명 그 자체의 한 축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선언으로 간주되었으면 한다. 격리를 통해 사회 안정을 도모하는 체제에서 과연 어떤 행동을 범죄라 규정할 수 있으며 또 얼마만큼의 벌을 내려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볼 수 있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기준은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이다.

당신 회사의 CEO는 사이코패스일까?

사이코패스들은 보상, 그러니까 당근에 너무나 이끌리는 나머지, 채찍이란 처벌을 걱정하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중략] 교도소 수감자 집단보다 기업 최고경영자 집단에서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한 사람을 더 많이 찾는 까닭을 설명해 준다.[천재의 두얼굴 사이코패스, 케빈 더튼 지음, 차백만 옮김, 미래의 창, 2013년, pp171~172]

이 부분은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실험을 통해서 내린 결론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심리학자이자 뇌과학자인 애드리언 레인은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들의 학습능력을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에서 참가자가 답을 맞히면 아무 일도 없지만, 틀리면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방식이었다. 실험 결과 사이코패스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들에 비해 게임의 규칙을 훨씬 늦게 알아챘다. 반대로 이번에는 정답을 맞힐 경우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하자 사이코패스들이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들보다 훨씬 빨리 그 사실을 알아챘다는 것이 실험결과다.

즉, 사이코패스는 다른 이들보다 보상의 규칙은 재빨리 알아채고 이를 활용하는 반면, 처벌의 규칙에는 둔감하거나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연구기관은 이런 상황이 실제 뇌활동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연구하였는데,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한 집단은 쾌락과 행복감에 관련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사이코패스 성향이 약한 집단에 비해 4배 이상 배출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연구팀은 “사이코패스는 타인이나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가 오더라도 끝까지 보상을 추구하도록 뇌의 회로가 프로그램돼있다”고 분석했다.

아널은 모질로보다도 매몰찬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한 중역이 회상한다. “아널은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았고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아널은 열심히 일하도록 직원들을 독려했지만, 원한 성과를 모두 달성한 다음에는 완전히 무관심했다.[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 베서니 맥린/조 노세라 지음, 윤태경/이종호 옮김, 자음과 모음, 2011년, p59]

컨트리와이드와 함께 미국 최대의 서브프라임 대출기관이었던 ACC캐피털 홀딩스의 창업자인 롤랜드 아널(Roland Arnall)에 대한 묘사다. 때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여겨지는 이런 덕목에 대해 케빈 더튼은 사실은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기보다는 사이코패스 성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는 또한 노골적인 사기대출과 정치권에 대한 로비로 유명했는데, 물론 이러한 행동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들도 저지를 수 있는 부패에 관련된 행동이긴 하지만, 처벌에 둔감한 사이코패스의 행동과 완전히 무관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행동이기도 하다.

딕 풀드는 리먼 브라더스를 오래도록 통치해오는 내내, 결코 강한 대리인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런 회사 운용법은 2004년 5월, 54세의 조 그레고리가 사장이자 최고운영책임자로 임명될 때도 지속되었다. 조 그레고리가 그 자리에 임명된 주요한 요인은 그에게 최고경영자가 되겠다는 야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상식의 실패, 로렌스 G. 맥도날드/패트릭 로빈슨 지음, 이현주 옮김, 컬처앤스토리, 2009년, p152]

롤랜드 아널보다 더 유명세를 떨친 금융인 리챠드 풀드(Richard S. Fuld, Jr.) 역시 아널에 못지않은 광기와 뉘우침 없는 행동으로 유명했다. 인용문에서 묘사되는 그의 모습은, 비록 관찰자의 모습일지라도 확실히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권력을 찬탈하고 이를 수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세 유럽의 잔혹한 군주를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면 헨리8세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많은 군주들에게서 보였던 마키아벨리즘적으로 보였던 모습이 또한 한니발 렉터에게서 보았던 냉혈함과 닮아 있다. 둘의 차이는 성안에 있고 감옥 안에 있었다는 차이정도?

개인적으로 지난 신용위기의 원인을 “인간의 탐욕”으로 해석하는 것은 공감하지 않는다. 즉, 다만 탐욕이 제어되지 못했을 뿐으로 이를 제어할 시스템을 정비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대안이 현 상황에서 적절치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학문적으로 사이코패스로 정의되든 아니든 간에 현대기업의 경영자들은 후진적인 과거의 군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이런 인사시스템이 하나의 체제 실패원인일 수도 있다는 설명에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들은 점점 더 보상에 민감하고, 처벌에 둔감하며, 자기기만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FBI수사관 출신으로 CFE(Certified Fraud Examiner, 각족 금융 사기와 화이트칼라 범죄를 적발, 조사하는 공인 전문가 자격증) 협회를 창설해 회장을 맡고 있는 조지프 웰스 Joseph Wells는 사기꾼의 특징으로 ‘합리화, 즉 사기 행위를 그럴듯한 이름으로 부르는 능력’을 꼽는다. 예를 들어, 장부를 조작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회사에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둘러대는 것. 사기에 연루된 대기업 간부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고 있을 뿐이다.”[치팅컬처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 데이비드 캘러헌 지음, 강미경 옮김, 서돌, 2008년, p131]

이것은 그들이 유전적인 자질을 그렇게 타고난 후에, 뛰어난 머리로 연쇄살인범이 되는 대신 CEO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린 사이코패스여서 – 케빈 더튼의 표현에 따르면 “기능적 사이코패스” – 일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조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 능력을 가다듬었을 수도 있다. 후자의 방식을 위한 교육은 사실 그리 드물지 않다. 우리가 노동자를 인적자원, 대량해고를 구조조정이라 칭하고, 이해관계자나 주주의 이익 대신 자신을 위한 보상만을 생각하게 된다면 어느새 조금씩 자기 기만적이고 후천적인 사이코패스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메리칸싸이코 영화 일부

우리 사회는 “해병대 캠프” 참사로부터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최근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해병대 캠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관”이라는 자가 학생들을 구명조끼도 없는 상태에서 바다 속으로 밀어 넣는 바람에 다섯 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학교, 프로그램 진행업체, 고용된 노동자들에게서 음주, 재하청, 시간제 고용 등 사고를 예언하는 각종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어쨌든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살펴보자면 구명조끼 없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안전 불감증”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은 앞으로 “사설 캠프”가 아닌 상표 등록이 완료된 “정식 해병대 캠프”에서 안전조치가 취해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모든 갈등은 제거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사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모두 얻고 사회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말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학생들이 자발적이라기보다는 학교의 일정에 따라 참가하였고 이러한 캠프는 각 학교에서 꽤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포털에서 검색해보니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업체가 꽤 됐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주요 프로그램을 학생들의 이런 “교육과정”용뿐만 아니라 “기업연수”용으로도 홍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사회전체가 “병영캠프”로 평생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언제부터 이 사회는 “병영캠프”를 사회의 평생교육 과정으로 간주하게 되었을까? 미디어오늘의 보도에 따르면 매스미디어는 꽤 오래전부터 “병영캠프”를 “극기 훈련”을 위한 훌륭한 과정으로 홍보해왔고, 많은 학교와 기업들은 학생과 직원의 “정신무장”을 위해 캠프참여를 독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무장”은 삐딱한 내 시각으로는 훈육의 대상인 학생과 직원을 복종의 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사실 더 구조적으로 보면 학교와 기업은 본래 구성원을 서열문화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고유목적 중 하나이므로 그런 과정이 새삼스러울 것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고유한 병영문화1와 안보 과민증상2이 결합되면서 그 양상이 좀 더 폭력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학교와 공장, 또는 사무직일지라도 대량생산체제에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군사적 규율의 연장선으로 간주한 것이 그 동안의 역사다.

규율과 복종이 노동자의 의무라면 노동권과 부당노동에 대한 저항 등은 노동자의 권리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이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치겠다는 계획에 대해 주류사회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곽노현 교육감 시절 서울시교육청은 근로기준법 등을 포함한 노동인권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가진 바 있다. 여당과 사용자 단체는 강하게 반발하였다. 의무는 있으되 권리는 없는 절름발이 교육을 받으라는 것이다.

어쨌든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으면 이를 방지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재발방지책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순서고 나아가 사태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학생들을 얼차려 줘서 복종이 살아남을 길이라 가르치는 극단적인 훈육이 과연 옳은 교육인지에 대한 고민은 찾아보기 어렵고, 지엽적인 문제만 가지고 변죽을 울리는 보도를3 보면 과연 이 사회는 시행착오의 로드맵이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p.s. 그런데 왜 “병영캠프”는 훈련병으로 박박 기는 프로그램밖에 없나? 만약 사단장의 지위를 경험할 수 있는 “병영캠프”가 있다면 내 돈 내고 참가하고 싶다.

p.s.2 억울하게 죽은 다섯 명의 젊은이의 명복을 빈다.

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그 후 1990년대 말이 지나면서 교회가 정체되고 성도 수의 성장이 둔화를 넘어 하향세로 돌아서자 교회성장론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됩니다. 그것은 마케팅과 자본주의 논리의 도입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도입하고 성공한 사례가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의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입니다. 자신의 교회가 속한 곳의 지역주민들을 분석하고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여 거기에 알맞은 홍보 전략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 같은 경우는 자신들의 교회에 한 명의 성도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소위 말하는 총동원 주일 등의 행사를 통해 경품과 많은 실적(?)을 올린 성도들에게 시상을 하는 해괴한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 멀쩡히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 교회로 데리고 오는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권영진 지음, 리북, 2011년, pp171~172]

스스로가 목사이신 권영진 씨의 한국교회에 대한 쓴 소리를 담은 책의 일부다. 대형화, 자본주의화, 세속화, 정치화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황을 내부자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비판하고 있다. 여러 주제들이 마음에 와 닿지만 어디까지나 국외자인 내 입장에서는 – 특히 최근의 나 – 이 인용문에 공감이 간다. 바로 연휴 3일 동안 “총동원 주일”에 동원된 듯한 전도사들로부터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간 수명의 전도사들이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처음 얼마간은 “누구세요?”라고 응답하며 일없으니 가보라고 조용히 이야기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귀찮아 아내와 나는 인터폰의 비디오를 슬며시 본다. 택배 노동자 차림이 아닌 낯모르는 이들이 있으면 십중팔구 이들 전도사다. 연휴기간 역시 아내와 나는 조용히 비디오를 지켜봤다. 그들은 역시 예상대로 연휴 기간 동안 전도에 동원된 신도들이었다.

하필 석가탄신일에 그토록 유난스럽게 더 자주 전도를 다니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지 않겠다. 다만 중학생이 되었을까 할 정도의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된 그 행동이, 조금만이라도 응답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사적인 영역을 언제라도 침범하겠다는 스팸 메일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또는 요즘 와서 그 폐해가 드러나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는 다단계 판매와 뭐가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러한 전도활동은 자본주의化된 교회 주식회사의 활동일 따름이다. 그들이 나라는 특정 개인의 종교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한 것이라면 문 앞에서 좀 더 기다리거나 다른 날 다시 와서라도 전도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 정확히는 그들을 보낸 교회는 – 나의 구원이 아닌 신도수의 양적증가에 관심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내가 응답이 없자 미련 없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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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원 전도주일”로 구글링하여 발견한 이미지
 

트위터에서 이런 경험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자 어떤 이는 자기 남편이, 집사 친구 때문에 “총동원 전도주일” 기간 동안만 그 교회에 가고 올해엔 경품으로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를 받아왔다고 한다. 앞서 말한 다단계 판매도 생각나고 어릴 적 친구를 학원에 데려오면 참고서를 공짜로 준다던 주산학원의 마케팅 전략도 생각난다.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에 그 분의 영혼을 얼마나 더 많이 구원받았을지 궁금하다.

물론 교회도 성장이 정체되어 있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신도들이 편안하게 머물러야 할 적절한 공간도 마련하고 구휼활동도 할 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남한의 개신교계의 성장욕구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권영진 목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성장욕구는 자본주의 기업의 그것과 내용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 거기에 법인세를 납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업보다 더한 특혜를 받고 성장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남한교회야말로 사모펀드와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자산이다. 소비자들은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있고 스스로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휴일노동도 불사한다. 경영자들은 정치권과 긴밀하게 연결돼있어 정치적으로 시달릴 가능성도 적다. 세금도 내지 않는다. 현재 투자의 장애요인은 자신이 자본주의 기업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정서적 거부감 뿐이다.

빼빼로데이 斷想

오늘은 유명한 빼빼로 데이다. 그것도 2011년 11월 11일이라고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라 이름 붙여진 날이라 한다. -_-; 하지만 일부 뜻있는 사람들은 특정일이 상업적 술수에 말려드는 것을 걱정하며 이 날이 사실은 ‘농어업인의 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고, 대안으로 ‘가래떡의 날’이라 하자는 가하면, 심지어 젓가락을 똑바로 쓰도록 장려하는 ‘젓가락의 날’로 키우자고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들 있다시피 이런 노력은 그다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어느덧 11월 11일은 복날이 삼계탕 집에 그러하듯 롯데의 ‘대박 데이’로 자리잡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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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y sticks” by The logo may be obtained from Rocky sticks.. Licensed under Wikipedia.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새우깡이 그러하듯 빼빼로도 사실은 일본의 다른 과자를 베낀 과자다.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과자의 브랜드는 포키(pocky)다. 하지만 11월 11일을 선점한 것은 빼빼로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기막힌 상술을 놓친 포키 측도 최근 ‘포키 데이’로 지정하여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고 한다. 그저 그런 기념일이었던 발렌타인데이가 일본 기업의 상술로 초콜릿 매출에 기여하고, 화이트데이가 사탕 매출에 기여하고… 빼빼로 데이가 다시 일본의 역수입되고… ‘OO데이’는 어쩌면 자본주의의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그러한 것처럼.

p.s. 11월 11일을 ‘젓가락의 날’이라고 지정하고 싶으면 11월 9일을 ‘젓가락과 숟가락의 날’로 정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할인판매” 빵집

런던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빵집이 있다. 빵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정가판매” 빵집과, 그 가치보다 싸게 파는 “할인판매” 빵집이 그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빵집 총수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빵제조업자의 고충”에 관한 정부위원 트리멘히어(H. S. Tremenhere)의 [報告書], 런던, 1862년). 이 할인판매 빵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명반이나 비누나 粗製탄산가리나 석회나, 더비셔州에서 나는 石粉이나 기타 유사한 成分을 섞어 놓음으로써 不純빵을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인용한보고서 및 “不純빵의 製造에 관한 1855년의 委員會”의 報告 및 하설[Hassall]의 [적발된 불순품], 제2판, 런던1861년을 보라). 존 고든(John Gordon)은 1855년의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이와 같은 불순빵 때문에 매일 매일 2파운드의 빵으로 살아가는 빈민들은 이제 자기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략] 트리멘히어는 (앞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중략] 勞動週間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한 주일 동안 그들의 가족이 소비한 빵값을 주말에 가서야 비로소 지불할 수 있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220]

이 글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력은 매매계약에서 확정된 기간만큼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는, 일종의 ‘노동력 선대(先貸), 혹은 임금 후불(後拂)’ 제도를 설명하기 위한 보충설명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대가를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받기 때문에 위와 같은 곤란을 겪는 한편, 자본가가 파산하는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편 이 글을 읽고 본래 의도와 달리 드는 잡념은 이러한 것이다. 즉, 런던에 “정가판매” 빵집이 전체빵집 수의 1/4이고 “할인판매” 빵집이 3/4이면 정상(正常)적인 빵집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우리가 통상 평균이라 부르는 것이나 보통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특정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정상적인 빵집은 “할인판매” 빵집이 아닐까?

문제는 이들 빵집이 빵값을 할인하기 위해 취한 조치다. 이들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집어넣어 단가를 낮춤으로써 노동자의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는 정상적(!)인 영양성분이 가미된 음식을 먹어야 함에도 정상적인 빵집에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빵을 제조하여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상적인 빵집은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저렇게 장기적으로 비정상적인 영양섭취에 견디지 못하는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할 경우 다른 새로운 노동력이 이 빈틈을 채워주는 일종의 노동예비군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하기 전까지는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 자신의 근력을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였을 것이다. 우리의 노동시장 역시 개발시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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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bakeries bridgeton 1936” by robert kelly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city bakeries bridgeton 1936.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실로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의 수단이 되는 생활수단, 그 중에서도 특히 음식과 관련한 소요비용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항이다. 노동대중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너무 많은 식비가 소모된다면 곧바로 임금상승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이는 총자본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의 개발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햄버거, 라면 같은 패스트푸드다. 원래는 긴 조리시간과 많은 제조비용이 소요되었을 햄버거와 같은 음식들은 표준화, 합성식품 첨가, 대량생산 등의 처방이 가미되면서 단가를 낮출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전보다 더 싼 비용으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은 싼 임금에도 큰 불만 없이 노동현장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문제는 다시 돌아가서 그것이 장기적으로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 세상에서 돌가루(石粉)가 들어간 빵을 판매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당장 소비자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사법당국이 처벌하고 등등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그런 무지몽매한 짓을 용서하지 않는 현명한 소비자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이치로 패스트푸드, GMO식품, 광우병 의심 소고기에 대해 현명한 소비를 하는 이의 숫자는 돌가루 빵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알아도 값이 싸니 사먹을 수밖에 없다. 가만. 19세기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1862년 런던에서는 – 사실은 그곳이 정상적인 빵집인 – 1/4의 정가판매 빵집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21세기의 서울에는 몇 분의 1의 정상적인 식당이 있을까? 항생제 먹이지 않은 닭으로 요리된 삼계탕, 합성식품이 아닌 반찬, GMO가 아닌 야채로 만든 반찬, 중국산이 아닌 직접 담근 김치를 파는 식당이 몇 개나 될까? 돌가루는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고 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할인”식당으로 뒤덮여진 후 그때는 돌가루를 먹지 않을 선택권마저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권하는 글 –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퍼블릭 옵션 지못미

미국의 Health Care Bill에 관한 최근 글에 미쿡에 계신 ‘힘찬’님께서 안타까운 사연을 올려주셨는데 내용이 하도 절절해서 다른 독자 분들과 공유하기 위해 별도의 글로 퍼 올립니다. 원래 글은 여기에 ……. 인민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앎과 자기가 그것을 쟁취하는 방법을 앎에 있어서 괴리가 발생할 때 어떤 불행이 빚어지는 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

퍼블릭 옵션 지못미! ㅠㅠ

이대로 개혁안이 입법화 된다 해도 허울만 ‘개혁’일 뿐, 여전히 비용 때문에 잘린 손가락들 중 어떤 손가락만 붙여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 심히 우려됨.
그리고 미국에서는 그런 비극적 상황이 빈곤층뿐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울 뿐이랍니다.

이 동네서 서로 식사 초대도 하고 영화도 보러 댕길 만큼 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최근에 오랫동안 연락이 없길래 힘들게 소식을 전해봤더니, 글쎄 마약 중독으로 수용소에 끌려가 계신 거라.
이유인 즉슨, 지난 여름 건강보험을 갱신해야 하는 타이밍에 사고로 발목을 다쳤는데,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는 건강보험 갱신이 안 되는 거라. (이게 무슨 보험이얏!!) 가볍게 발목이 부러진 것도 보험 없이는 수 만불의 치료비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들 멀쩡하게 돈 벌고, 빛나는 석사 학위 2개를 자랑하는 나름 엘리트 중산층의 이 아줌마가 병원 치료를 포기하고, 무허가 피지션에게 진통제를 받아 먹으면서 몇 달을 버티다가 그만 약물 중독에 걸려 버린 거라. 극심한 감정기복과 불면증, 신체 경련 등의 마약 중독 증세를 호소하다 결국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수용소에 끌려가 지금은 재활 치료를 받고 계신 거라.
생업도 포기한 채 가족과 생이별하고 두 달째 감금돼 있는 이 평범한 가정주부와 연말을 핑계로 어렵사리 통화를 하게 됐는데 글쎄,”이런 저렴한 마약 중독 재활 시설이 있는 나라에 사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워! 다 하나님이 아메리카를 블레스하셔서 그런 거지.” 이러는 거라. 이제는 건강보험 개혁안에 찬성하냐고 조심스럽게 던진 나의 질문에 그분이 하신 동문서답임.
가드 블레스 아메리카래. 어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