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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그 후 1990년대 말이 지나면서 교회가 정체되고 성도 수의 성장이 둔화를 넘어 하향세로 돌아서자 교회성장론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됩니다. 그것은 마케팅과 자본주의 논리의 도입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도입하고 성공한 사례가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의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입니다. 자신의 교회가 속한 곳의 지역주민들을 분석하고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여 거기에 알맞은 홍보 전략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 같은 경우는 자신들의 교회에 한 명의 성도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소위 말하는 총동원 주일 등의 행사를 통해 경품과 많은 실적(?)을 올린 성도들에게 시상을 하는 해괴한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 멀쩡히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 교회로 데리고 오는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권영진 지음, 리북, 2011년, pp171~172]

스스로가 목사이신 권영진 씨의 한국교회에 대한 쓴 소리를 담은 책의 일부다. 대형화, 자본주의화, 세속화, 정치화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황을 내부자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비판하고 있다. 여러 주제들이 마음에 와 닿지만 어디까지나 국외자인 내 입장에서는 – 특히 최근의 나 – 이 인용문에 공감이 간다. 바로 연휴 3일 동안 “총동원 주일”에 동원된 듯한 전도사들로부터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간 수명의 전도사들이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처음 얼마간은 “누구세요?”라고 응답하며 일없으니 가보라고 조용히 이야기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귀찮아 아내와 나는 인터폰의 비디오를 슬며시 본다. 택배 노동자 차림이 아닌 낯모르는 이들이 있으면 십중팔구 이들 전도사다. 연휴기간 역시 아내와 나는 조용히 비디오를 지켜봤다. 그들은 역시 예상대로 연휴 기간 동안 전도에 동원된 신도들이었다.

하필 석가탄신일에 그토록 유난스럽게 더 자주 전도를 다니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지 않겠다. 다만 중학생이 되었을까 할 정도의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된 그 행동이, 조금만이라도 응답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사적인 영역을 언제라도 침범하겠다는 스팸 메일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또는 요즘 와서 그 폐해가 드러나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는 다단계 판매와 뭐가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러한 전도활동은 자본주의化된 교회 주식회사의 활동일 따름이다. 그들이 나라는 특정 개인의 종교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한 것이라면 문 앞에서 좀 더 기다리거나 다른 날 다시 와서라도 전도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 정확히는 그들을 보낸 교회는 – 나의 구원이 아닌 신도수의 양적증가에 관심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내가 응답이 없자 미련 없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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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원 전도주일”로 구글링하여 발견한 이미지
 

트위터에서 이런 경험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자 어떤 이는 자기 남편이, 집사 친구 때문에 “총동원 전도주일” 기간 동안만 그 교회에 가고 올해엔 경품으로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를 받아왔다고 한다. 앞서 말한 다단계 판매도 생각나고 어릴 적 친구를 학원에 데려오면 참고서를 공짜로 준다던 주산학원의 마케팅 전략도 생각난다.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에 그 분의 영혼을 얼마나 더 많이 구원받았을지 궁금하다.

물론 교회도 성장이 정체되어 있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신도들이 편안하게 머물러야 할 적절한 공간도 마련하고 구휼활동도 할 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남한의 개신교계의 성장욕구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권영진 목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성장욕구는 자본주의 기업의 그것과 내용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 거기에 법인세를 납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업보다 더한 특혜를 받고 성장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남한교회야말로 사모펀드와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자산이다. 소비자들은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있고 스스로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휴일노동도 불사한다. 경영자들은 정치권과 긴밀하게 연결돼있어 정치적으로 시달릴 가능성도 적다. 세금도 내지 않는다. 현재 투자의 장애요인은 자신이 자본주의 기업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정서적 거부감 뿐이다.

빼빼로데이 斷想

오늘은 유명한 빼빼로 데이다. 그것도 2011년 11월 11일이라고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라 이름 붙여진 날이라 한다. -_-; 하지만 일부 뜻있는 사람들은 특정일이 상업적 술수에 말려드는 것을 걱정하며 이 날이 사실은 ‘농어업인의 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고, 대안으로 ‘가래떡의 날’이라 하자는 가하면, 심지어 젓가락을 똑바로 쓰도록 장려하는 ‘젓가락의 날’로 키우자고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들 있다시피 이런 노력은 그다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어느덧 11월 11일은 복날이 삼계탕 집에 그러하듯 롯데의 ‘대박 데이’로 자리잡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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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y sticks” by The logo may be obtained from Rocky sticks.. Licensed under Wikipedia.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새우깡이 그러하듯 빼빼로도 사실은 일본의 다른 과자를 베낀 과자다.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과자의 브랜드는 포키(pocky)다. 하지만 11월 11일을 선점한 것은 빼빼로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기막힌 상술을 놓친 포키 측도 최근 ‘포키 데이’로 지정하여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고 한다. 그저 그런 기념일이었던 발렌타인데이가 일본 기업의 상술로 초콜릿 매출에 기여하고, 화이트데이가 사탕 매출에 기여하고… 빼빼로 데이가 다시 일본의 역수입되고… ‘OO데이’는 어쩌면 자본주의의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그러한 것처럼.

p.s. 11월 11일을 ‘젓가락의 날’이라고 지정하고 싶으면 11월 9일을 ‘젓가락과 숟가락의 날’로 정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할인판매” 빵집

런던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빵집이 있다. 빵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정가판매” 빵집과, 그 가치보다 싸게 파는 “할인판매” 빵집이 그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빵집 총수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빵제조업자의 고충”에 관한 정부위원 트리멘히어(H. S. Tremenhere)의 [報告書], 런던, 1862년). 이 할인판매 빵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명반이나 비누나 粗製탄산가리나 석회나, 더비셔州에서 나는 石粉이나 기타 유사한 成分을 섞어 놓음으로써 不純빵을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인용한보고서 및 “不純빵의 製造에 관한 1855년의 委員會”의 報告 및 하설[Hassall]의 [적발된 불순품], 제2판, 런던1861년을 보라). 존 고든(John Gordon)은 1855년의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이와 같은 불순빵 때문에 매일 매일 2파운드의 빵으로 살아가는 빈민들은 이제 자기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략] 트리멘히어는 (앞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중략] 勞動週間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한 주일 동안 그들의 가족이 소비한 빵값을 주말에 가서야 비로소 지불할 수 있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220]

이 글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력은 매매계약에서 확정된 기간만큼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는, 일종의 ‘노동력 선대(先貸), 혹은 임금 후불(後拂)’ 제도를 설명하기 위한 보충설명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대가를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받기 때문에 위와 같은 곤란을 겪는 한편, 자본가가 파산하는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편 이 글을 읽고 본래 의도와 달리 드는 잡념은 이러한 것이다. 즉, 런던에 “정가판매” 빵집이 전체빵집 수의 1/4이고 “할인판매” 빵집이 3/4이면 정상(正常)적인 빵집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우리가 통상 평균이라 부르는 것이나 보통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특정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정상적인 빵집은 “할인판매” 빵집이 아닐까?

문제는 이들 빵집이 빵값을 할인하기 위해 취한 조치다. 이들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집어넣어 단가를 낮춤으로써 노동자의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는 정상적(!)인 영양성분이 가미된 음식을 먹어야 함에도 정상적인 빵집에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빵을 제조하여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상적인 빵집은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저렇게 장기적으로 비정상적인 영양섭취에 견디지 못하는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할 경우 다른 새로운 노동력이 이 빈틈을 채워주는 일종의 노동예비군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하기 전까지는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 자신의 근력을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였을 것이다. 우리의 노동시장 역시 개발시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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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bakeries bridgeton 1936” by robert kelly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city bakeries bridgeton 1936.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실로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의 수단이 되는 생활수단, 그 중에서도 특히 음식과 관련한 소요비용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항이다. 노동대중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너무 많은 식비가 소모된다면 곧바로 임금상승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이는 총자본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의 개발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햄버거, 라면 같은 패스트푸드다. 원래는 긴 조리시간과 많은 제조비용이 소요되었을 햄버거와 같은 음식들은 표준화, 합성식품 첨가, 대량생산 등의 처방이 가미되면서 단가를 낮출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전보다 더 싼 비용으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은 싼 임금에도 큰 불만 없이 노동현장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문제는 다시 돌아가서 그것이 장기적으로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 세상에서 돌가루(石粉)가 들어간 빵을 판매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당장 소비자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사법당국이 처벌하고 등등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그런 무지몽매한 짓을 용서하지 않는 현명한 소비자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이치로 패스트푸드, GMO식품, 광우병 의심 소고기에 대해 현명한 소비를 하는 이의 숫자는 돌가루 빵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알아도 값이 싸니 사먹을 수밖에 없다. 가만. 19세기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1862년 런던에서는 – 사실은 그곳이 정상적인 빵집인 – 1/4의 정가판매 빵집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21세기의 서울에는 몇 분의 1의 정상적인 식당이 있을까? 항생제 먹이지 않은 닭으로 요리된 삼계탕, 합성식품이 아닌 반찬, GMO가 아닌 야채로 만든 반찬, 중국산이 아닌 직접 담근 김치를 파는 식당이 몇 개나 될까? 돌가루는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고 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할인”식당으로 뒤덮여진 후 그때는 돌가루를 먹지 않을 선택권마저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권하는 글 –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퍼블릭 옵션 지못미

미국의 Health Care Bill에 관한 최근 글에 미쿡에 계신 ‘힘찬’님께서 안타까운 사연을 올려주셨는데 내용이 하도 절절해서 다른 독자 분들과 공유하기 위해 별도의 글로 퍼 올립니다. 원래 글은 여기에 ……. 인민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앎과 자기가 그것을 쟁취하는 방법을 앎에 있어서 괴리가 발생할 때 어떤 불행이 빚어지는 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

퍼블릭 옵션 지못미! ㅠㅠ

이대로 개혁안이 입법화 된다 해도 허울만 ‘개혁’일 뿐, 여전히 비용 때문에 잘린 손가락들 중 어떤 손가락만 붙여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 심히 우려됨.
그리고 미국에서는 그런 비극적 상황이 빈곤층뿐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울 뿐이랍니다.

이 동네서 서로 식사 초대도 하고 영화도 보러 댕길 만큼 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최근에 오랫동안 연락이 없길래 힘들게 소식을 전해봤더니, 글쎄 마약 중독으로 수용소에 끌려가 계신 거라.
이유인 즉슨, 지난 여름 건강보험을 갱신해야 하는 타이밍에 사고로 발목을 다쳤는데,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는 건강보험 갱신이 안 되는 거라. (이게 무슨 보험이얏!!) 가볍게 발목이 부러진 것도 보험 없이는 수 만불의 치료비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들 멀쩡하게 돈 벌고, 빛나는 석사 학위 2개를 자랑하는 나름 엘리트 중산층의 이 아줌마가 병원 치료를 포기하고, 무허가 피지션에게 진통제를 받아 먹으면서 몇 달을 버티다가 그만 약물 중독에 걸려 버린 거라. 극심한 감정기복과 불면증, 신체 경련 등의 마약 중독 증세를 호소하다 결국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수용소에 끌려가 지금은 재활 치료를 받고 계신 거라.
생업도 포기한 채 가족과 생이별하고 두 달째 감금돼 있는 이 평범한 가정주부와 연말을 핑계로 어렵사리 통화를 하게 됐는데 글쎄,”이런 저렴한 마약 중독 재활 시설이 있는 나라에 사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워! 다 하나님이 아메리카를 블레스하셔서 그런 거지.” 이러는 거라. 이제는 건강보험 개혁안에 찬성하냐고 조심스럽게 던진 나의 질문에 그분이 하신 동문서답임.
가드 블레스 아메리카래. 어쩔.. ㅠㅠ

신의 말씀

이리하여 <서기>야말로 다시금,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모든 것을 수중에 장악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럴진대, 학생들에게 배움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직업에마다 각기 따르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유창하게 열거하면서,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우월한 서기생활의 이점을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훈계] – 케티의 훈계 – 가 바로 이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하등 놀랄 바가 없다. 그 발췌문을 인용해 보자.
“그는 그 아이를 높은 양반들의 자제들 틈, 도시 안에서 가장 높이 솟아 서 있는 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매, 아이를 서기학교에 넣기 위해 도회지를 향하여 남쪽으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이곳에 와서 아이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 ‘나는 매맞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아 왔다만, 그것을 보더라도 너는 문필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니라. 나는 또한 강제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도 보아 왔단다. 그러한즉 서책(書冊)보다 위에 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중략] 잘 보거라, 관리(官吏)를 빼놓고는 명령을 받으며 일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 없단다. 관리란 바로, 그 자신이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란다. 글을 쓸 줄 알게 되면, 이는 내가 지금까지 네 앞에서 길게 늘어놓은 온갖 직업보다도 너에게 더 쓸모가 있게 될 것이나라.” [勞動의 歷史, 헬무트 쉬나이더 外, 韓貞淑 譯, 한길사, 1982년, pp 93~95]

고대 이집트의 지혜의 책 중 하나인 케티의 훈계에서의 글을 재인용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에게 문자는 비비원숭이 머리 모양의 지식의 신인 토트의 선물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의 문자를 ‘신의 말씀’이라는 의미의 ‘메두네제’라 불렀다 한다.(주1) 그런데 상기 묘사를 볼 것 같으면 문자를 아는 것은 단순히 ‘신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문자의 발전은 위에 예시된 서기(書記)와 같은 전문가 계층의 형성을 통해 소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초래하였다. 자연스레 문자를 아는 이의 차지인 정신노동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서 육체노동을 지배 내지는 관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십장(什長)이자 판관(判官)이자 세리(稅吏)이자 문필가였다. 그러한 권위는 왕정의 붕괴 후 자연스레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의 길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집트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에서 문자는 소수의 특권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그것은 ‘신의 말씀’이라는 진리에로의 접근권한이자, 보다 직설적으로는 권력과 이에 따른 부의 축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그럼으로써 더 부유해진 현대 사회의 전제조건은 문자교육 – 그리고 교육 그 자체 – 에 대한 무차별적인 접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제는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는 너무나 기초적인 토대일 뿐이다. 이제 개개인은 좀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되고 전문화된 교육을 받아야만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즘 보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육의 평등화를 통해 달성된 자유, 평등, 부가 이제 새로이 차별화될 교육의 선별을 통해 붕괴될 조짐을 보인다. 외고, 자사고, 특수고, 명문대 등 차별화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중이며 부촌의 자제들이 고급교육 수혜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교육 게토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지금도 수많은 ‘케티’는 고대의 케티만큼 솔직한 어투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효과를 역설할 것이다. 육체노동자들의 고된 하루와 비루한 삶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주문하면서 말이다. 어떤 권력자는 ‘면접만으로 학교에 진학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 것이라 믿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고, 더군다나 그렇게 해줄 것을 기대하는 이도 생각만큼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상황이 요즘의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다.

(주1) 이는 비단 이집트뿐만이 아닌 거의 모든 고대사회의 특징이었을 것이다. 글을 안다는 것은 구술사회의 유적을 전하는 엄청난 도구이고 그 유적 중 가장 소중히 남겨야 할 것은 그 사회의 신화일터이니 글을 아는 이는 자연히 권력자이거나 성직자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

Vaughan ignored the remark. “I don’t want you to close the beaches,” he said.
“So I see.”
“You know why. The Fourth of July isn’t far off. and that’s the make-or-break weekend. We’d be cutting our own throats.”
“I know the argument, and I’m sure you know my reasons for wanting to close the beaches. It’s not as if I have anything to gain.”
[중략]
Brody sighed. “Shit,” he said. “I don’t like it. it doesn’t smell good. But okay, if it’s that important.”
“It’s that important.” For the first time since he had arrived, Vaughan smiled. “Thanks, Martin,” he said, and he stood up. “Now I have the rather unpleasant task of visiting the Footes.”
“How are you going to keep them from shooting off their mouth to the Times of the News?”
“I hope to be able to appeal to their public-spiritedness,” Vaughan siad, “just as I appealed to yours”
[Jaws, Peter Benchley, 三志社, 1984년, pp 86~92]

Steven Spielberg의 걸작 영화로 잘 알려진 Jaws의 원작 소설 중 일부분이다. 뜨내기 여인이 해변에서 상어의 습격으로 추정되는 공격을 당해 온 몸이 찢긴 채 해변에서 발견된 다음 날, 이에 해변을 폐쇄하려는 경찰서장 Martin Brody와 이를 말리는 읍장 Larry Vaughan의 설전을 묘사한 장면이다.

읍장의 논리는 여름 한철 장사로 그 해를 탈 없이 지내는 조그만 휴양지촌인 Amity가 뜨내기 여자의 죽음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찰서장 Brody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2~3일 간 해안을 폐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자치조례에 따라 자신을 해임할 수도 있다는 읍장의 협박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읍장이 서장의 입을 막으려는 또 다른 논리 역시 서장의 논리와 유사하다. 즉, 그것은 바로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다. 서장의 논리가 불특정 다수인 공공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목적이라면, 읍장의 논리가 공공, 즉 Amity 읍민들의 경제적 이해를 해치지 않겠다는 – 더불어 스스로 부동산 개발업자인 자신의 경제적 이해도 – 의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서장에게 가장 큰 위협은 읍장의 해임 협박이었지만 그 역시도 읍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 즉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정서에 공감한 바도 크다. 소설에서는 그 해 여름 장사를 망칠 경우 Amity읍민의 1/3이 생활보호 수당을 받아야 할 정도의 가난한 읍으로 그리고 있다. 투표에 의한 선출직인 서장 역시 이러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동일한 문제에 봉착할 경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여야 할까? 경제적 피해는 다수에게 미치지만 상어의 습격은 극소수, 그 또한 지극히 희박한 확률 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자의 보호가 더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하면 될까? 원작에서 Amity읍은 전자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어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결국 후자의 결정으로 선회하였다. 우리 역시, 특히 ‘경제적 이익’과 결부된 의사결정에서는 ‘경제적 요소’가 일차적인 고려사항이 되는 경우가 많다.

FTA에서 그러했고, 환경문제와 경제적 이익이 상충할 때에 그러했고, 지난 선거철 뉴타운 이슈가 그러했고, 기업 및 공공기관의 구조조정 시에 경쟁력 강화라는 슬로건을 채택할 때에 그러했다. 하지만 때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적은 확률적 문제에 불과하기에 간과되었던 ‘상어의 습격’으로 인해 그간 얻었던 경제적 이익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때도 있었고, 지불할 개연성도 있는 상황이 많다.

이는 또한 소수자의 보호의 이슈일수도 있다. 즉, 다수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과 소수자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라는 논리를 들어 소수자의 이익(또는 권리)을 쉽게 포기하곤 한다. 하지만 다수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이 대의민주제에 반드시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해변의 안정이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든지 해변에 나가서 수영하는 한 상어의 습격은 무차별적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요컨대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라는 개념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공화제를 채택한 이래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크기와 내포하는 의미가 변화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왕이나 귀족이 누리던 특혜를 공공(public)이 함께 누린다는 이상향의 큰 틀은 당연시되지만 세세한 항목은 때때로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고 공공 스스로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전의 공공성 개념이 그랬듯 21세기 형 공공성은 어떠해야 할지는 결국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Is the Conservative Movement Losing Steam?

Is the Conservative Movement Losing Steam?
Richard Posner(저자소개)
May 10, 2009

이 글은 미국의 보수주의 석학 중 하나인 리차드 포스너씨가 쓴 글로 보수주의가 이미 미국정치의 승리자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있으나, 그것이 기초하고 있던 사상적 기반이 – 특히 아들 부시의 행정부를 거치면서 – 심각한 지적퇴보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는 글이다.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사실 그 지적 기반이라는 것도 – 좌우를 떠나서 –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절대원칙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격렬하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마모되고 세련되면서 지도적 위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시대정신은 그 주창자의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원하는 시대상황의 것일 수도 있다.[역자]

한때 생명력 있었던 미국에서의 보수주의 운동의 지적인 퇴보가 감지되고 있다. 내가 설명할 것인바, 이것은 그 성공의 유서가 될 수도 있다.

1960년대까지(내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나는 거의 보수주의 운동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희미하고 빠듯했으며, (1964년 린든 존슨에 의해 학살당한) 배리 골드워터, 아인 랜드, 러셀 커크, 그리고 윌리엄 버클리 와 같은 형상으로 상징화되었다. 이들은 내게는 전혀 어필하지 못했다. 보다 강한 보수주의 사상가, 예를 들어 밀튼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그리고 다른 걸출한 보수주의 경제학자, 예를 들어 조지 스티글러와 같은 이들이 무대에 있었다. 그러나 경제학계 밖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대 말의 국내의 혼란, 존슨식 “위대한 사회”의 무절제, 반독점과 규제의 경제학의 중요한 진전,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그리고 (착각인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소비에트가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믿음–이 모든 상황전개로 인해 다채롭고 활기에 넘치는 보수주의 운동이 촉발되었다. 이는 마침내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의 선거에서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이 운동은 “시카고 스쿨” (그리고 그에 따른 탈규제, 민영화, 통화주의, 낮은 세금, 그리고 케인지언의 거시경제학에 대한 거부) 과 연계된 자유시장 경제학, 강한 군대와 리버럴한 국제주의에 대한 거부의 의미에서의 “신보수주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페미니즘과 [소수자에 대한 : 역자주] 차별철폐에 대한 저항과 범죄에 대한 강경노선이 관련된 문화적 보수주의를 아우르고 있었다.

냉전의 종식, 소비에트의 붕괴, 자본주의의 지구적 승리를 장식하는 범세계적인 번영, 특히 경제학에서의 클린턴 행정부의 본질적인 보수주의적 정책들, 그리고 마침내 부시 행정부의 선거와 초기 시절은 보수주의 운동의 절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정점에 달했을 뿐 아니라 쇠퇴하고 있다는 신호가 있었다. 주도적인 보수주의 지성들은 늙어갔고 운명을 달리했다(프리드먼, 하이에크, 진 커크패트릭, 버클리 등). 그리고 다른 이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조용해지고 덜 활동적이 되었다(이를테면 로버트 보르크, 아이빙 크리스톨, 게르투르드 힘멜파르브). 그리고 그들의 계승자들은 보수주의가 귀에 거슬려지고 대중추수적이 되어가자 이전만큼 공공에 나서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 말년에 나는 내가 이해하는바, 보수주의의 승리에 대한 축하에 만족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나 사회구조의 다른 더 많은 변화를 바랄 욕심이 없었다. 재산세가 폐지되거나, 한계 개인소득세율의 더 많이 감세되거나, 정부가 축소되거나, 헌법의 실용주의가 “원리주의(originalism)”를 위해 폐기되거나, 총기소유의 권리가 확대되거나, 우리의 군사적 입장이 강경해지거나, 동성애자의 권리 증진이 저항에 부닥치거나, 공공 영역에서 종교의 역할이 확대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2004년 부시의 재선에 따라 물이 오른 신보수주의가 수용한 원인이 되었다.

내 주제는 보수주의의 지적인 퇴보다. 신보수주의의 정책이 대부분 감정과 종교에 의해 좌우되고 있고 대부분 약한 지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정책들이 개념상으로 취약하다는 것은, 실행에 있어서도 대부분 실패해 왔던, 그리고 정책이 정치적 실패라는 것은 그러므로 놀랍지 않다. 보수주의에 대한 통렬한 타격은, 오바마의 선거와 프로그램에서 최고조에 달했는데, 네 배나 배가되었다.: 미국의 외교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력의 실패; 지구온난화에 대한 부정, 관리 임명시의 종교적 기준의 활용, 정부기관에서의 관리와 전문지식의 무시와 같은 지성을 의지로 대체하려는 시도의 공허함; 지속적인 임신중절에 대한 편견; 그리고 거대한 재정적자, 메디케어 약품 계획, 초과 대외채무, 자산가격 인플레이션의 형태로 나타난 재정적 요실금

2008년 가을에 공화당의 얼굴은 사라 페일린과 수리공 조가 되어버렸다. 보수주의 지성인에게 당은 없었다.

그리고 작년 9월 금융 위기가 닥쳤고 디프레션이 확실해졌다. 이 예기치 않은, 그리고 쇼킹한 이벤트로 인해 경기 싸이클과 통상적인 거시경제에 관련된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의 핵심적인 믿음에 심대한 분석적 약점이 드러났다. 프리드먼 주의자들의 통화주의와 금융의 효율적 시장 이론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의 혐오의 대상인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거시경제학적 사상이 다시 존경받게 되었다.

신정부의 정책과 계획의 리버럴한 면이 과한 것 같은 신호와 전조가 보인다. 그래서 학식있는 보수주의 비평가들의 타깃이 많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 따르면 보수주의 운동은 1964년 이래 가장 낮은 저점에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차이를 통해 이 운동은 현재까지는 이미 그 운동이 이미 얻은 명예에 안주하고 있는, 최소한 한동안은, 미국 정치와 사회사상의 중심을 이동시키는데 성공했다.

북한의 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것

한편 교육기관에 대한 지출액은 한국이 GDP 대비 7.2%로 OECD 평균 5.8%보다 높았다. 이 중 민간 기관에 대한 지출은 2.9%로 OECD 평균 0.3%의 10배 수준인 반면 공공기관에 대한 지출은 4.3%로 OECD 평균 5%보다 낮았다.[한국 사교육비 OECD 10배]

사교육 공급시장이 부동산 시장과 가장 밀접하게 상관관계를 가지는 나라답다.

periskop님께서 위 기사는 사실관계와 다르다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periskop님이 트랙백 걸어주신 글을 참고하십시오.

“현금인출기를 마비시키자”

월스트리트저널이 ‘London: Know Your G-20 Protestors’라는 기사에서 오는 4월 2일 런던에서 열릴 G20회의에 있을 반정부 시위의 참여주체들을 나열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무정부주의자, 반(反)금융자본 운동단체, 환경운동단체, 반전(反戰)단체 등이 모일 것이라 한다. 어떤 반대단체는 2009년 4월 1일을 만우절(april fool’s day)에 빗대어 ‘금융 바보들의 날(financial fool’s day)라 명명하고 그 도메인으로 블로그까지 만들었다. 한편 화석연료(fossil fuels) 사용에 반대하는 환경운동단체 Fossil Fools는 다음과 같은 특이한 시위방침을 내려 눈길을 끈다.

이들은 시위자들에게 현금인출기에 “고장 났음”이라는 스티커를 붙여서 기계를 마비(주1)시킴으로써 “은행을 혼내줄 것”을 주문했다.
It also encourages protesters to “spank a bank” by shutting down cash machines with “out of order” stickers

런던에서 현금인출기에서 돈 빼려다 기계가 카드를 먹어 고생한 사건이 생각난다.

(주1) 스티커 붙인다고 기계가 마비(shut down)되는지는 실험을 안해봐서 모르겠음

‘스타형 팔로워’와 ‘공존형 시티즌’, 그 공통점과 차이

삼성경제연구소가 재미있는 보고서를 하나 내놓았다. 제목은 “시티즌십, 위기극복의 필요조건”. 현재와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써 “시티즌십(citizenship)”을 제안하고 있음을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평소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긴 한데, 보고서에는 시티즌십을 “시민으로서 갖는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과 의무, 그리고 바람직한 덕성을 의미하는데, 공익달성을 위해 사익추구를 절제하고, 평소 갈등관계에 있던 집단과도 협력하려는 태도를 보유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정말 이 정의에 비추어 이 사회 구성원이 진정한 시티즌십을 갖게 된다면 현재의 위기는 단숨에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보고서는 왜 시티즌십을 강조하고 있는가? “위기극복의 관건은 리더와 사회구성원의 협력을 통한 사회응집력의 확보”(p1)에 있기 때문이다. 즉 전통적인 주장은 위기국면에서의 리더십이 강조되었던 반면 그 구성원의 이른바, 팔로워십(followership)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온 측면이 있는바, 보고서의 목적은 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히 요즘과 같이 예전에 비해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 대의민주제 제도 국가의 보편적 현상이라 한다 – 더욱 강조되어야 함이 타당해 보인다.

“팔로워십(followership)”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도 좀더 필요할 것 같은데, 이는 기업조직의 성과 향상에 관한 이론에서 등장하는 단어로 “카네기 멜론大의 로버트 켈리 교수가 종전 연구들이 조직목표 달성에 있어 리더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팔로워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p2)하고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주목하면서 팔로워를 유형화하고, 이들이 구비해야 할 바람직한 덕목을 팔로워십(foloowership)으로 命名”(p2)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구분한 팔로워의 유형은 아래와 같다.

출처 : 삼성경제연구소

이 유형에서 가장 바람직한 유형은 당연히 적극적 사고와 독립적 사고를 동시에 지닌 ‘스타형 팔로워’다. 그들은 “리더의 결정을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지만, 리더의 결정에 동의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리더를 지원”(p3)하는 유형이다. 나머지 유형들은 조직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유형들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경영 실용 이론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회조직 모든 단위가 어떠한 동기로 움직이건 간에 면밀한 계획과 실행으로 최적화되어야 한다는 대의에 있어서는 동의하는 바이고, 켈리 교수의 의도와 관찰도 그러한 면에서는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다.

여하튼 보고서는 이후 켈리 교수의 이러한 주장을 “기업조직에서 팔로워십이 필요하다면 사회에서는 시티즌십이 중요”(p3)하다는 논리를 통해 전 사회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이를 통해 도출되는 결론은 무척 단순하고 명쾌하다. 즉 보고서는 “리더를 ‘돕고’, ‘후원하며’, ‘공헌하는’ 시민이 사회통합에 기여”(p3)하는 것을 시티즌십의 진정한 덕목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보고서는 “위계조직인”(p4) 기업의 팔로워와 “그 자신이 사회의 주인”(p4)인 시티즌이 차이는 있긴 하지만 “리더와의 유기적 관계형성과 역할 분담 등을 통해 조직이나 사회의 생존과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에서는 유사”(p4)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에 정의된 시티즌십을 우리는 보고서가 생각하는 ‘스타형 시티즌십’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제 보고서가 켈리 교수의 팔로워 4가지 유형을 어떻게 사회의 시티즌 유형에 대비시켰는지 살펴보자. 우선 보고서는 X축에 있던 ‘적극적 vs 소극적’ 지표를 Y축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Y축의 ‘독립적 사고 vs 의존적 사고’ 지표는 X축으로 바꿔 ‘타협적 vs 비타협적’으로 치환했다. 아까 살펴봤듯이 켈리 교수가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스타형 팔로워’를 이상적으로 봤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약간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보고서가 ‘스타형 팔로워’와 견주고 있는 ‘공존형 시티즌’을 보자. 그는 ‘스타형 팔로워’와 적극적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타협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출처 :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는 “위기에 처했을 때 공익달성을 위해 사익추구를 절제하고, 평소 갈등관계에 있던 집단과도 협력하려는 태도에 따라 ‘타협적 對 비타협적’으로 구분”(p4)했다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엄밀히 말해 반칙이다. 우리는 ‘스타형 팔로워’가 위계조직에서조차도 “리더의 결정을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는”(p3) 독립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어느 조건에서 리더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는지, 그리고 수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안을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보고서는 “위기에 처했을 때 공익달성을 위해 사익추구를 절제하고, 평소 갈등관계에 있던 집단과도 협력하려는 태도”(p4)라는 기나긴 전제를 깔고 그의 타협적 태도를 선험적으로 재단해버린다. 그 팔로워가 위기, 공익, 사익, 갈등, 협력 등에 대한 개념정의, 원인, 정도, 해법 등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독립성’이 거세된 것이다. 그러니 ‘독립’적일 수록 ‘타협’적인 것이라는 모순이 성립되어버린다.

지양하여야 할 유형은 한층 문제가 있다. 켈리 교수의 분류에 의하면 ‘순응형’, ‘냉소형’, ‘수동형’이 문제가 된다.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위계조직에서 여전히 그들은 조직의 결정을 따르는 – 적어도 전복시키지는 않는 – 유형으로 짐작된다. 보고서의 바람직하지 못한 유형을 보자. ‘순응형’, ‘대립형’, ‘불만형’이다. 켈리의 분류보다 그 행동에 있어 더 적극적인 유형으로 보인다. 실제로 보고서는 ‘대립형’, ‘불만형’을 각각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정책방안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여 역량결집과 정책실현을 지연”(p5)하는 형과 “위기극복을 위한 정책방향에 대안 없이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며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p5)하는 형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위계조직 구성원이 아닌 그 스스로가 사회의 주인인 시티즌은 언제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정책방안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일” 권리가 있고, 그것은 독립적인 ‘스타형 팔로워’의 그것보다 더 큰 정도로 시티즌이 확보한 권리인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보고서의 작성자들은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대립형과 공존형의 차이가 보고서가 생각하는 것처럼 명확하지 않으며, 대의민주제에서는 권력을 리더에게 위임하지만 그것이 기업과 같은 위계조직에서의 그것과는 근본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의적인 도식화를 통해 희석내지는 왜곡하고 있다. 이후 보고서는 여러 사례를 들어 ‘대립형’과 ‘불만형’의 오욕의 역사 – 물론 그들의 관점으로 등치시킨 – 를 나열하고 있다. 영국의 노조파업, 아르헨티나의 反신자유주의 운동 등이 그것들인데 보고서의 관점은 이들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비타협적’인 것이며, 따라서 ‘공존형’이 아닌 ‘대립형’ 내지는 ‘불만형’이 되어버린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가 통째로 – 또는 일부라도 –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조차 비타협적 태도는 반역자의 그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나 역시도 ‘공존형 시티즌’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덕성이 ‘스타형 팔로워’와 일맥상통하여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런데 그 기본전제는 켈리 교수의 주장처럼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즉 주체적인 사고와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협과 비타협의 경계는 사회 리더의, 또는 공동구성원의 정책의 동의 여부에 따라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오직 타협적인 것이 옳은 것이라는 주장을 강요한다면, ‘공존형 시티즌’은 언제든 ‘대립형 시티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또는 그것은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보고서는 시티즌의 덕성을 요구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공존형’ 리더를 가진 적이 있는지부터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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