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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물, Eminem

Eminem의 신곡 Fall이 화제다. 안 좋은 쪽으로.

“타일러는 아무것도 못 만들지. 왜 스스로 faggot이라 했는지 알겠네.”
(Tyler create nothin’, I see why you called yourself a faggot)

동료 뮤지션인 Dan Reynolds도 트위터를 통해 “이제는 faggot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선 안 되는 시대”라고 할 만큼 그 단어는 동성애자에게 모욕적인 단어라는 점이 문제인데, Eminem이 자신의 전작을 폄하한 한 래퍼 Tyler, The Creator를 공격하는 이 곡에 해당 단어를 쓴 것이다. 물론 보도에 따르면 Eminem은 이전에도 faggot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바 있고, 공격을 당한 래퍼 Tyler, The Creator도 이 단어를 남발한 바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시절이 바뀌었고 남이 사용한다 해서 Eminem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까방권이 성립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하나 Tyler, The Creator는 작년에 게이라고 커밍아웃하면서 그가 쓴 faggot 은 일종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역설적 장치의 기능일 수 있다는 것이 보도의 설명이다. 여하튼 변방의 듣보잡 래퍼가 아닌 독보적인 랩뮤직 계의 아이콘이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자리 잡은 요즘 이런 단어를 동료 래퍼에게 – 그것도 커밍아웃한 – 썼다는 사실은 Eminem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을 것 같다.

이 사태에서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 한가지는 문제가 되고 있는 Fall이 수록된 Eminem의 신보 Kamikaze의 앨범 후면 커버가 Beastie Boys의 데뷔 앨범 Licensed To Ill 커버를 오마주했다는 점이 무척 아이러니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Beastie Boys가 Licensed To Ill의 앨범 제목을 Don’t Be a Faggot이라고 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심기가 편치 않았을 밴드의 멤버 Adam ”Ad-Rock” Horovitz는 1999년 이 사실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바 있다. faggot이라는 바로 그 단어때문에 문제가 됐고 이에 대해 당사자가 사과한 바 있는 앨범의 커버를 오마주하면서 정작 그 앨범의 수록곡에서 다시 faggot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역설에 대해 Eminem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A painting of the rear end of a jet with graffiti about Eminem on it. It is very similar to the artwork of the debut album of Beastie Boys, Licensed to Ill.
By Source, Fair use, Link

Taking Woodstock

스포일러의 범위를 크게 확장하면 스포일러라 생각될 수도 있는 내용이 있어요~

Taking woodstock.jpg
Taking woodstock” by Impawards.com.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Taking Woodstock“>Fair use via Wikipedia.

제목만 보고 이거 ‘우드스탁에 대한 다큐멘터리쯤 되겠구나’ 하고 아내와 영화 시작 한 시간 전에 즉흥적으로 영화를 보러갔다. 이안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이 그나마 의사결정의 한 요소였을 뿐. 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우드스탁이 시작된 배경, 그것도 거창한 사회적 배경이라기보다는 페스티발을 기획했는데 그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엘리엇 타이버가 기획자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클 랭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의 부모님이 모텔을 운영하던 한 조그만 마을에 와서 페스티발을 해주었으면 하고 부탁하는 등, 어떻게 우드스탁이 실현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연들을 엘리엇 타이버 자신의 정신세계의 성장과 함께 엮어서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영화 중반쯤에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공연 자체에 대한 재현은 거의 없었다. 다만 약에 취한 엘리엇이 먼발치에서 밝게 빛나는 – 약기운에 관객이 넘실넘실 파도를 타는 것 같은 환각적 장면이 연출되는 – 공연 스테이지를 바라다보는 정도로 그친다.

영화는 반문화적인 이벤트의 회고라는 다소는 충격적인(?) – 여태까지? –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작품성을 인정받아온 거장 감독의 작품답게 각각의 에피소드가 큰 무리가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이나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씩 연출된다. 문제는 엘리엇이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과정인데 주디 갤런드의 음반을 낯모르는 남자 – 무대설치가 – 와 같이 들으며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게이코드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면 이미 ‘동성애적’ 무드를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평범한 남자들 간의 대화로 보일 소지도 많았고 이후 엘리엇과 그 무대설치가 와의 애정행각이 뜬금없다고 여길 소지가 있을 정도로 약간은 설명이 불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찾아보니 이미 실재인물의 엘리엇은 이전부터 게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었다. 즉, 감독은 성장영화라는 장르에 충실하기 위해 이런 배경설명을 숨겨두는 트릭을 쓴 것이다.

‘아~ 우드스탁이 저렇게 시작했구나!’라고 가벼운 맘으로 즐기고 싶은 분들에게 권할만한 작품.

Milk

어제 아내와 영화 ‘밀크’를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보고 왔다. 한 낙농업자의 진정한 우유를 만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다룬… 그런 영화는 아니고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동성애 인권운동을 펼쳤던, 그리고 스스로 게이였던 ‘하비 밀크(Harvey Bernard Milk)’의 삶을 다룬 – 역시 게이인 – 구스 반 산트 감독의 2008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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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n Penn Cannes” by Georges Biard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밀크 역을 연기한 션펜. 아카데미 주연상 득템.

밀크는 동성애자였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40년을 살아온다. 애인과 함께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거리로 삶의 거처를 옮긴 밀크는 자연스레 같은 동성애자들과 어울리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핍박받는 동성애자들을 위한 정치대변인으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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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ey Milk in 1978 at Mayor Moscone’s Desk crop” by Harvey Milk in 1978 at Mayor Moscone’s Desk.jpg: Daniel Nicoletta
derivative work: Hekerui (talk) – Harvey Milk in 1978 at Mayor Moscone’s Desk.jpg. Licensed under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하비 밀크의 실제 모습

몇 번의 도전 끝에 시의원을 진출하는데 성공한 밀크의 적은 이 사회의 거대한 편견. 마침 전국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차별을 당연시하는 보수적 기류가 일어나면서 밀크는 존 브릭스, 아니타 브라이언트 등 극우적인 의원이 추진한 법안과 맞서 싸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법안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엉뚱한 이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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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ta Bryant Billboard 1971” by Word Records.
Original uploader was Moni3 at en.wikipedia – Transferred from en.wikipedia; transferred to Commons by User:Wikiwind using CommonsHelper.
(Original text : Billboard Magazine, January 16, 1971 p. 21.).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가수이자 정치인이었던 아니타 브라이언트. 하비 밀크의 정적.

실제 인물의 8년 동안의 질풍노도와 같은 삶을 다룬지라 어쩔 수 없이 편년체의 평면적인 서술을 깔고 갈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음에도 영화는 지루하다거나 서두른다거나 하는 느낌이 적다. 공인(公人)으로서의 삶과 사인(私人)으로서의 삶에 대한 묘사가 적절히 안배되어 있고 다큐멘터리적 편집을 통해 현장감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결국 밀크가 깨부수려했던 것은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차별의 빌미로 삼는 이기주의였다. 과거 모든 역사에서 권력자들이 그러했고 아직까지 그러한 차별은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그런 이기주의 말이다. ‘동성애자’란 타이틀을 유지하여도, 그 자리에 다른 단어를 집어넣어도 차별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여성’, ‘비정규직’, ‘철거민’, ‘장애인’, ‘이슬람’, ‘좌익’

사실 그 중에서도 우리사회에서 아직까지 가장 금기시되는 천민은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동성애자’다. 홍석천, 하리수 등 커밍아웃을 한 연예인들이 살아남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누군가 밀크와 같은 시도를 한다면 과연 이 사회가 두 눈 뜨고 그것을 빤히 보고만 있을까? 아마 전국의 유림들이 난리를 피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눈에 보이는 권력보다 무서운 것은 – 역시 게이였던 – 미쉘 푸코가 묘사한 ‘미시적 권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푸코가 정확히 그러한 의미로 묘사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는바 미시적 권력은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바뀌지 않는 이 사회의 편견과 이기주의와 물적 욕망의 그물망이다. 실질적으로 그것이 사회를 통제한다.

때로 개혁적인 지도자가 나서서 이 사회를 정화하려 시도하기도 하고, 또 그것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럴 때 그 미시적 권력은 격렬히 저항하거나 힘이 약할 때면 낮게 숨죽이며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의 대표자가 지도자로 나서는 순간 봇물처럼 사회 곳곳을 다시 그들의 입맛대로 재편한다.

미시적 권력이란 괴물은 우리 스스로 편견에 빠지고 욕망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 계속 자라난다.

형식이 내용을 배반하는 신문기사 하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들 중에는 특히나 다른 단어들보다 정치사회적 의미가 커서  사용하는데 주의를 요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단어들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 살아 움직였던, 또는 움직이고 있는 역사를 관통해오는 과정에서 가졌던 애초의 의미와 사회적 맥락, 그리고 여러 선입견들이 짧은 단어 하나에 녹아들어 있다.

예를 들자면 예전에 한번 언급하였던 ‘천민자본주의’라는 표현이 있을 수 있고, ‘386’, ‘빨갱이’, ‘깜둥이’, ‘병신’ 등등은 그것과 유사한 표현과 사뭇 다른 정치사회적 함의를 담은, 사용에 매우 주의를 기해야 하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사용에 주의를 요하는 단어가 있는데 오늘 발견한 어느 신문기사에 이 표현이 여과 없이 드러난 것을 발견했다.

‘동성연애자’

이 단어는 우리사회에 아직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서슴없이 피력되던 시기에 쓰이던 표현이었다. ‘호모’보다는 덜 모욕적인 표현이긴 하나 성적취향을 표현함에 있어 ‘연애’라는 표현이 주는 미묘한 느낌에 부정적인 의미가 실려 최근 몇 년간 부정적인 표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게이’, ‘동성애자’, ‘레즈비언’ 등등의 표현으로 동성애자들을 호칭하고 있다.

아래 퍼온 신문기사는 동성애자의 성적취향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의 와중에 선천성에 손을 들어주는, 어찌 보면 동성애자들이 맘에 들어할만한 기사다. 그런데 문제는 이 외신을 인용 보도한 기자의 표현이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금기시되고 있는 ‘동성연애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본문에 들어가면 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있다. 기자는 “연구결과 정상 남성들과 동성애여성들은” 이라고 써 결국 <이성애 남성=정상 남성, 동성애 남성=비(非)정상 남성>이라는 등식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스스로 내비췄다. 기사의 내용과 형식이 아주 극단적으로 배치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동성연애자 ‘ 뇌 구조 부터 다르다

【서울=메디컬투데이/뉴시스】
동성연애자가 되기 쉬운 사람은 이미 자궁속 태아기 부터 이 같은 소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스웨덴 연구팀이 ‘미국립과학원보’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동성연애남성들과 여성들은 좌우측 뇌 크기가 절반씩 거의 같은 반면 동성연애여성들과 남성들은 우측 뇌가 좌측 뇌보다 큰 것으로 나타났다.

뇌영상촬영을 통해 진행된 이번 연구결과 동성애자들은 특히 뇌 속 ‘편도(amygdala)’라는 영역이 일반인들과 크게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결과 정상 남성들과 동성애여성들은 편도내 오른쪽 부위의 신경 연결이 왼쪽에 비해 더욱 많은 반면 여성들과 동성애남성들은 좌측 편도부위의 신경연결이 더욱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 같은 차이로 인해 태아기 부터 동성애자가 될 소인을 타고 나게 된다고 밝혔다.

원나래 기자 wing@md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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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다음 포털서비스에서 퍼왔다. 이 기사를 제공한 메디컬투데이에 가보았다. 그랬더니 그 사이트에 있는 기사는 흥미롭게도 당초 기사의 ‘동성연애자’를 ‘동성애자’로, ‘정상 남성’을 ‘남성’으로 바꿔놓았다. 아마도 기자나 편집자가 다음 게시판에서의 빗발치는 비난을 본 모양이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언론은 어느 특정한 지적에 대해 그 지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원래 기사를 바꾸는 행위는 – 특히 웹사이트에 올려진 기사에 대하여 – 자초지종의 설명 없이 바꾸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

과거 종이신문에서는 이미 발행한 신문에 실린 기사를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당연히 다음날 신문에라도 ‘고칩니다’다 하고 정정 기사를 내곤 했다.(주1)그렇다면 웹사이트에서도 정정기사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공지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메디컬투데이의 해당 기사는 그런 공지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주1) 물론 그 사회적 파장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정정기사는 아주 눈에 뜨이지 않는 조그만 구석에 싣곤 하지만

동성애자의 천국을 노래하는 Big Eden

뉴욕에서 성공한 화가 Henry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개인화랑 개업일을 코앞에 두고도 부랴부랴 고향 Big Eden으로 향한다. Henry는 할아버지와 정든 이웃들을 만나 오랜만에 푸근한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정작 그가 절실히 보고 싶은 이는 따로 있다. 고교시절 그가 좋아했던 건장한 체격에 핸섬가이 Dean.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에다 이혼남인 그를 교회에서 만나자마자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Henry.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가는 것이 마을의 유일한 잡화점 주인인 Pike(역시 학교 동창이다)는 엉뚱하게 Henry에게 삘이 꽂혀버린 것이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 Henry의 할아버지와 Henry를 위해 수다스러운 Thayer 여사의 음식을 Henry네 집에 배달해주던 Pike는 여사의 음식이 맘에 안 들어 아예 요리책을 사서는 직접 요리를 해내버린다. 물론 할아버지보다는 Henry가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며…. 하지만 천성적인 수줍은 성격 탓에 Henry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같이 식사도 못하고 매번 돌아와 버린다.한편 할아버지가 쓰러져 다시 병원에 입원하던 날 집에 돌아온 피곤한 Henry와 Dean은 우연히 입맞춤을 하게 되지만 자신이 게이임을 아직 인정하지 못한 Dean이 차마 진한 입맞춤을 하지 못하고 입을 떼버린다. 이후 소원해진 둘 사이에 서서히 Pike가 끼어들어 어느덧 이 좁은 동네에서 게이 삼각관계가 펼쳐진다.

사실 영화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이 청량하게 아름다운 동네의 주민들은 모두가 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셋의 동성애 관계를 곧 눈치 채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관계개선을 부추기기도 한다. 한마디로 게이들의 에덴동산이다(보수적인 기독교도들에게는 신성모독 적으로 느껴질 설정이겠지만). 이런 면에서 영화는 역시 동성애를 주제로 했지만 동성애자이기에 겪는 고민과 갈등을 허심탄회하게 술회한 Cachorro 와 비교된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설정인 Cyrano 의 게이버전에 가깝다. 육체적으로 끌리는 Dean과 정신적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Pike 사이에서 고민하는 Henry. 딱 Cyrano의 설정이지 않은가.

하지만이 영화를 단순히 게이코드를 이용한 그저 그런 코미디로 치부하기에는 무척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일단 재미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궁합이 들어맞고 있다. 특히 Henry 역의 Arye Gross는 실제 게이가 아닌가 할 정도로 게이 연기가 훌륭하다. 그리고 풍경이 멋있다. 그 드넓은 자연을 담은 화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이니 뭐니 하며 아웅대는 인간사가 부질없게 느껴진다. 음악도 맘에 든다. 개인적으로 컨트리는 비호감 장르지만 이 영화에서 소개되는 컨트리 음악들은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다. 한마디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참신한 영화는 아니지만 가끔 즐거운 마음으로 꺼내서 다시 볼 정도로 정이 가는 코미디다.

* Sex And The City 에서 Carrie의 절친한 게이친구 Stanford가 시골고향에 내려가면 이런 식의 해프닝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도 들었다.

공식 웹사이트

남의 기사 베낄거면 영어공부 열심히 하자

MRSA라 불리는 새로운 박테리아 변종이 미국의 동성애자 남성들에게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美동성애자 ‘신종에이즈’ 공포”라는 제목의 문화일보 기사를 접했다.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인용보도 한 기사였다. 내용이 어딘가 부실해서 원 기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New Bacteria Strain Is Striking Gay Men” 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전체를 다 비교해보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왜 문화일보 기사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는 확인했다. 번역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문화일보의 해당 문구다.

“미국에서 게이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샌프란시스코 카스트로구역의 경우 주민 588명당 1명이 MRSA 박테리아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샌프란시스코 전체에 3800명 이상의 감염자가 있다는 뜻이라고 체임버스 박사는 주장했다.”

이 글이 인용한 뉴욕타임스의 해당 문구다.

“The Castro district in San Francisco has the highest number of gay residents in the country, according to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One in 588 residents is infected with the new multidrug-resistant MRSA strain, the study found. That compares with 1 in 3,800 people in San Francisco, according to statistical analyses based on ZIP codes.”

요약하면 카스트로 구역에는 주민 588명당 1명이 MRSA 감염자인데 비해 샌프란시스코 전 도시로 보면 3,800명당 1명이 MRSA 감염자여서 결국 해당 박테리아가 게이들 사이에서 더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문화일보 기사는 엉뚱하게도 “카스트로구역의 경우 주민 588명당 1명이 감염자여서 샌프란시스코 전체에 3800명 이상의 감염자가 있다는 뜻”이라고 오역하였다. 문화일보식 셈법으로 계산하면 샌프란시스코 전체 인구는 588 X 3800 으로 22,344,000명으로 계산된다. 실제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80만 명 정도이다.


오늘의 교훈 : 남의 기사 베낄거면 영어 공부 열심히 하자.

몰락을 자초하는 봉건적인 운동단체 범민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범민련)가 그들의 기관지 ‘민족의 길’에서 성적소수자와 이주노동자에 대해 사회병리현상으로 간주하는 글을 싣고 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인권단체 및 관련단체들의 요구를 묵살하여 운동단체들로부터 고립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이른바 통일운동세력 들의 수구 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사고방식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현재 진행상황을 보니 또 한 번 순혈주의적인 민족주의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느낄 수 있었다.

발단은 이러하다.

“한편 발단이 된 ‘민족의 진로’ 3월호에 실린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글에는 “외국인노동자문제, 국제결혼, 영어만능적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렌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 만연, 종교의 포화상태, 외래자본의 예속성 심화, 서구문화의 침투 등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9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개방화, 세계의 일체화 구호가 밀고 들어오던 시점부터 이러한 문제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 실렸다.”(관련기사 보기)

이들의 고루한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이주노동자(외국인노동자란 표현도 가급적 쓰지 말자고 했는데 본문에는 버젓이 쓰고 있다)의 유입이랄지 동성애의 문제가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때문에 동성애가 창궐(!)했다는 이러한 인식은 동성애에 대한 온갖 편견을 가지고 있는 보수적 기독교계의 무지와 편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또 하나 우스운 게 국제결혼은 왜 언급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소위 “혼혈아”를 낳게 되니 그렇다라는 극단적인 순혈주의 아닐까?

여하튼 이후 관련단체 들이 지속적으로 사과요구를 하여왔으나 범민련 측은 불성실한 답변으로 일관하다가 지난 6월에야 이주노조에게만 해명 글을 발송해 사과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한다. 여전히 동성애 관련부분에 대해서는 일말의 해명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진보네트워크센터는 6일 공식 성명을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행위를 하는 단위와는 연대가 불가능하다”며 “더 이상 연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에 연대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범민련과의 ‘연대 중단’ 입장을 피력했다고 한다. 더불어 이들은 “이 사안에 대해 제 인권사회단체들의 지지와 연대가 이어질 것이며 이어져야한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보기)

이러한 해프닝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사회의 다양성과 부문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시종일관 ‘조국통일의 위업’이라는 거대담론에만 천착해온 후진적 운동단체의 삐뚤어진 가치관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같은 뜻을 지향하고 행동하는 단체라 여긴다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예의마저 갖추지 않은 채 서구문화 침투니 극단적 이기주의를 논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정말로 동성애를 사회병리학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이 도덕적 근본주의자들이 주목하여야 할 소식이 있다. 그들이 최근 부러운 눈길로 바라마지 않는 베네주엘라의 제헌의회 소식이다.

“차베스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안에 일부 의회가 제안한 안이 포함된 첫 번째 부분에서는 대통령 임기연장 및 임기제한 폐지, 선거에서 외국계 재정지원 금지, 노동시간 축소 등이 포함된다. 두 번째 부분에는 의회가 제안한 비상시 기본권 제한, 건강 및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금지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관련기사 보기)

여하튼 반성과 사과가 없는 이들이 영입하여야 할 인물이 한 명 있다. 차별금지법에서 ‘성적지향성’을 뺀 바로 그 서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