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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나나 공화국 이야기

1983년에 국무원은 「도시 비농업 개체 공상업(工商業)의 몇 가지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도시의 개체 공상업은 7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할 수 없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저술에 근거한 규정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해 8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가상의 공장을 예로 들었는데, 중국 당국은 이를 ‘노동착취’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중국 정부가 보기에 자영업이 7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하면 사영기업이 되고, 사영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개혁과 개방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I, 조영남 지음, 민음사, 2016년, p228]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이념적 경직성 내지는 이념적 조악함을 설명하는데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보았다. 언뜻 보아도 이는 자본론을 마치 종교경전 마냥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직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큐란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감싸고 순종을 강조하는 무슬림의 해석이나, 성경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극악하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도의 해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경전을 지킴으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는 기여한 바는 없으나 그 교리를 강요한 이의 권력이나 도덕적 순결성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한 채 시장경제를 성공리에 –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 도입하여, 오늘날 미국을 위협할 다음 국가로 평가받는 등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단순히 인용문에서처럼 「규정」이 교조적으로 끝까지 관철됐더라면 달성하지 못했을 위치라 할만하다. 중국이 경제에 있어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유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추동했던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정치체제는 유지하면서도 경제체제는 바꿀 수 있다는 – 1992년 10월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라 할 수 있다.1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 계획경제”라는 도식을 포기한 것은 여러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계획경제/자원동원경제는 사실 戰後 경제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하는 대다수 국가들에서 체제와 관계없이 시도했던 개발전략이랄 수 있다. 혁명 후의 소비에트가 그랬고, 대공황을 겪은 미국이 그랬고, 10억 인구의 중국이 그랬고, 도시국가로서 살아남아야 할 싱가포르가 그랬고, 북괴와 체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남한이 그랬다. 국가 스스로가 하나의 거대기업으로 기능하는 것은 일종의 戰時경제체제랄 수 있고 체제경쟁에 직면한 많은 나라들은 어느 기간까지는 계획경제 요소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2


“제국주의 전쟁의 음모를 분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아가자!”(출처)

하지만 경제가 전간기와 질적으로 다른 고도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상명하달식의 행정기능만으로 경제 시스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됐다. 빅데이터 혹은 인공지능이 진정 시스템 전체의 원인과 결과를 예측하여 투입-산출을 조정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시장에서의 개별 경제단위가 경쟁하며 우열을 평가받고 진화-퇴보를 거듭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더 좋은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는 경제발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역할에서 “정의로운 심판”의 역할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과 합당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공유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 트럼프의 행보는 역사의 퇴보를 초래할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느니, 그 재원을 멕시코로부터의 수입관세로 마련하겠다느니 하는 경제원론에도 안 맞는 소리를 해대는 것은 가장 천박한 수준의 “가부장적 아버지” 역할이다. 더욱 불행하게도 트럼프는 일당독재를 통해서가 아닌 대의적 민주제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라는 점이다. 즉, 그는 선거를 통해 일당독재 지도자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본을 얻게 됐지만,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집단적 논의를 통해 시행착오를 수정할 정치적 의지는 가지지도 가지려 하지도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기간산업과 핵심 산업(예를 들면 금융업)은 공공적 기능이 관철되도록 “사령탑”적인3 통제를 강화하되 전 세계적 시장경제는 정의롭게 유지되도록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술이 잘못된 시장경제는 경제격차와 이념적 편견의 격차만 벌려놓아 보호주의, 인종주의, 독자주의 노선만을 강화시켰고, 그 가장 흉악한 결과가 트럼프의 당선이다. 그는 개별기업에 입지를 지정하고, 도드-프랭크법 규정을 무력화시키고, 이민을 통제한다. 7인 이하의 사영기업 허용이 희극이라면 이번 버전은 비극인가?

80년대 중국이 일당독재 바나나 공화국이었다면 현재의 미국은 민주적 바나나 공화국이다.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이코노미스트의 칼럼에 대해

그러나 당신이 만약 자본주의를 시장경제에서의 개인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한다면, 이 시스템은 후퇴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Airbnb와 Etsy와 같은 신경제 웹사이트들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휴가기간 동안 집을 빌려주거나 예술품과 공예품을 파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과거에 집주인들은 임차인을 찾는데, 취미생활자는 구매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집합적인 웹사이트들에서는 이런 일들이 훨씬 쉬워졌다.[Advancing, not retreating]

분명히 Airbnb와 Etsy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거나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효용을 증가시킨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자본주의가 전진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는 글쓴이가 “자본주의 = 시장경제에서의 개인의 상호작용” 등식 자체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트에서도 몇 번 살펴보았듯이 시장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구(舊)사회주의 블록 일부에서는 이른바 “시장 사회주의” 실험을 시도한 나라들도 있을 정도로 시장이란 제도는 다양한 경제체제에서 존재가능하다.1 심지어 어떤 이는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의 특징이며 칼 맑스가 지향한 것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시장경제라는 뉘앙스의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맑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았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대해 “자유로운 생산사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맑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따른 공동생산의 의미를 지닌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자본주의)’와는 무관하다.[맑스적 코뮌주의의 생태문화사회적 성격]

몇 번 주장하였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중추기능을 하는 기업은 거의 대부분 계획경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위 인용문의 글쓴이가 이야기하듯 ‘전제적’ 성격이 상당히 강하다.(이번 엘리엇 사태나 롯데 사태에서의 행태를 보라)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유의 집중이나 – 또는 그 소유보다도 더 왜곡된 권력 집중이 – 진정한 시장경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보는 입장이었고, 인용문의 글쓴이가 주장하는 ‘코뮌주의’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스트가 “자본주의 발전”의 사례로 든 애어비앤비는 적어도 현재까지의 모습으로 봐서는 대기업보다 덜 위계적이고 수혜자가 폭넓다는 측면에서 덜 ‘전제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초기형태일지도?

문재인, 박근혜, 헌법 등등 잡담

블로그를 여기저기 조금씩 정리했다. 배경에 이미지도 넣고, 자유게시판도 만들고, 블로그 소개 글도 좀 바꾸고(소개라기보다는 그냥 푸념), 태그 구름도 새로운 플러그인을 적용하였다. 그렇게 하니 조금 집안 분위기가 화사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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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씨가 대선 슬로건을 ‘사람이 먼저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대한민국 남자’로 정했다고 한다. 문재인 씨가 특전사 출신임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이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그의 특전사 경력은 박정희의 학생운동 세력에 대한 강제징집 덕분에(?) 쌓은 경력이다. 이렇게 쌓은 경력으로 박정희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의 딸 박근혜 씨와 대항하려는 상황이니 무슨 ‘뫼비우스의 띠’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한 트위터러의 지적에 따르면 문재인 씨의 그런 슬로건들은 2012년 프랑스 대선의 좌우파의 슬로건을 모두 흉내 낸 것이라고 한다. 하나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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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박근혜 씨는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서 5ㆍ16 군사쿠데타에 대해 “선친으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다만 반대 의견을 가진 분도 계시니 이 문제에 대해 옳으니 그르니 하기보다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도 했는데 이미 국민과 역사의 판단은 내려졌다. 군사쿠데타 범죄로.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쓰여 있는 바, 4.19정신을 파괴한 5.16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변호한 박근혜 씨는 헌법정신을 유린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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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시장경제 덕분에 더 잘 산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각국 국민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설문만 놓고 보자면 중국은 자본주의, 일본은 사회주의 국가에 가까울 것 같다. 한편 설문에 응한 국가들 중에서 경제위기로 고통을 겪고 있는 남유럽 국가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념의 공백상태를 어떤 정치세력이 파고들 것인지가 향후 남유럽 및 전체 유럽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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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증권사들이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를 조작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사에 나섰다고 한다. 사안이 서구 금융권의 라이보 조작 사건과 유사해서인지 연합뉴스 웹사이트에서도 비중 있게 소식을 다루고 있다.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CD를 고의로 떨어트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음모론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번엔 오히려 CD를 고의로 떨어트리지 않고 있다고 보고 조사를 하는 것 같다. 어쨌든 라이보는 직접 이해당사자인 은행권이 제출하는 금리지만 CD는 이해당사자가 아닌 증권사가 제출하는 것인지라 좀 사안이 다른 것 같고, 만약 짬짜미가 이루어졌다면 어떤 식으로 짬짜미가 이루어졌는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언론의 호들갑에 비해 그렇게 큰 스캔들이 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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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The Ruling Class란 영국영화를 봤다. 피터오툴이 주연한 작품인데 명문가의 후계자가 된 피터오툴이 연기한 Jack이 스스로를 예수라 생각하고 있다는 설정의 풍자극이었다. 결국 가족과 친지들의 도움으로 Jack은 망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Jack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반전은 Jack이 새로 얻은 정체성은 명문가의 Jack이 아닌 Jack The Ripper의 Jack이란 사실. 좀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재밌는 작품이니 기회 되면 보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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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이 어서 빨리 공휴일로 재지정되길….

This is a job for Uncle Sam

비록 자유 시장이 왼쪽 신발과 오른쪽 신발을 얼마나 많이 생산할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좋지만 집단행동의 심리학에서 기인하는 시스템 리스크를 방지할 수는 없다. 이 일은 샘 아저씨가 해야 할 일이다.
Although the free market is very good at deciding how many left and right shoes to produce, it cannot prevent systemic risk that arises from the psychology of herd behaviour. This is a job for Uncle Sam.[출처]

이글을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이렇다. 왜 일반적으로 시장참여자의 집단행동으로 인한 시스템 리스크를 방지하는 엄청난 역할을 수행하는 정부가 신발 생산량을 결정하는 정도의 사소한 역할은 시장보다 더 잘하지 못한다고 여겨질까? 예를 들어 서구의 집값 폭락은 신발 생산량 결정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시장이 집을 과잉 공급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이 과잉 공급된 집들을 팔기 위해 대부를 늘렸기 때문에 발생된 일이다. 한국 시장 역시 과잉 공급된 주택이 대규모 미분양 사태를 유발하면서 국가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즉 국가주도의 공급 시스템이 열등하였다면 시장의 그것도 지금 상태로는 그리 낙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여태의 시장의 역사는 사실 그러한 과잉 공급으로 인해 거품이 터지면서 그것을 수습하는 수축의 시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즉 통상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 현실은 수요에 대한 공급이 그 결정지점의 위와 아래로 급격하게 요동쳤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한 변동성은 주기적인 파괴적 경기후퇴를 통해 완화되곤 했다. 좋게 말해서 시장의 자율조정이고 나쁘게 말해서 시장의 무정부성이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그나마 우리가 시장에서 공급되는 것들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제공받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제 엄밀하게 말해 시장에서 공급되는 중 영향력이 큰 상품의 상당수는 그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와 판단을 타인에게 위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번 사태의 또 하나의 공모자 신용평가기관이 바로 그들이다. 모기지 채권이라는 시장영향이 엄청난 상품의 품질을 거짓으로 보증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결국 앞으로도 이러한 상태의 시장경제가 유지되는 한에는 과잉 공급으로 인한 가격폭락, 공급 축소로 인한 가격폭등, 시장참여자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한 정보오류 또는 더 다양한 변수가 결합된 시장의 변동이 계속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동으로 인한 영향은 이번 사태에서도 보듯이 금융의 세계화와 증권화 경향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전 산업적으로 폭넓고 무차별적일 개연성이 크다. 금융시장은 그러한 여러 변동성을 파생상품으로 해소하려 노력해보았지만 이번에 별무소용임이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

지금 각국 정부가 엄청난 자금을 풀어대고 금리를 인하하면서 케인즈의 부활이니 New new deal 이니 하며 포장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신종 보호무역주의’이고 ‘서브프라임 거품’을 ‘재정 거품’으로 대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현재 각국의 경제정책은 모순의 근본적인 치유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요는 전 세계의 소비자, 다른 말로 노동자들이 막대한 부채에 의해서가 아닌 실질적인 구매력을 통해 소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이윤호 장관의 심플라이프

이윤호(사진) 지식경제부 장관은 30일 “이번 (촛불시위) 사태를 치르면서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좌파 세력이 있는지 절감했다”며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가 아직 굉장히 취약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윤호 지경 “좌파 얼마나 많은지 절감”, 동아일보, 2008년 7월 31일]

이 기사로 판단해 본 그의 머릿속

촛불시위 참여자 = 좌파 세력 =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파괴세력

참 단순해서 좋다. 이런 사람은 지식경제부 장관보다는 무식경제부 장관이 어울릴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 분은 인구의 절반이 골수 좌파이고 사회주의당이 지난 십 수 년을 집권했으면서도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는 프랑스 같은 나라에라도 가면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혼절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스웨덴에라도 가면 코마 상태로?

좌우(左右)를 구분하는 백한번째 방법

좌익(또는 좌파)과 우익(또는 우파)을 구분하는 데에는 백가지 방법이 있다. 또는 훨씬 더 많다. 사람 사는 세상이 두부모 자르듯이 명쾌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번 들여다보자.

천차만별 좌우구분

우선 소위 좌파정당이라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에서의 좌우구도다. 당내에는 소위 ‘평등파’와 ‘자주파’가 있다(또는 있다고 하고 없다는 사람도 있다). ‘평등파’는 좌파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주파’를 우파라 한다. 그런데 ‘다함께’라는 단체에 소속된 정치적 세력이 있다. 이들은 좌파들이 극좌파라 부른다. 그런데 ‘다함께’에서는 ‘자주파’를 ‘민족주의적 좌파’라고 부른다. 소위 좌파도 또 지향점이 조금씩 틀리다. 이 좌파에는 ‘유럽 취향의 사민주의자’, ‘신좌파적 감성의 사회주의자’, ‘생태사회주의자’, ‘과거 스탈린식 공산주의자’ 등 굉장히 폭넓게 아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로 폭을 넓혀보자. 북한을 ‘좌파 국가’(이런 표현 실제로는 없고 보다 정확하게는 사회주의 국가)로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바로 위와 같이 남한의 정치적 지형이 많이 달라진다. 그런데 여하튼 북한을 사회주의 체제로 보기도 하고 수구적인 왕조체제로 보기도 한다. 남한 정치는 또 어떠한가. 어떤 이는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한 우파 정부로 보고 어떤 이는 가진 자를 핍박(!)한 좌파 정부(주1)로 본다.

정리가 되었는가. 뭐 된 것 하나도 없지. -_-;

이글은 제목에도 썼지만 좌우를 구별하는 101번째 방법이다. 앞서의 100가지 방법을 정리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별로 없고 필자가 앞으로 글을 쓰거나 세상을 바라볼 때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한 나만의 기준 정립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선 좌익(左翼, left)의 사전적 의미부터 알아보자.

사회주의적 ·급진주의적 ·공산주의적인 과격한 혁신사상 또는 그러한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

이 용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 대혁명 당시, 상대적으로 사회변동에 온건한 지롱드당이 의회의 오른쪽 부분에, 급진적인 자코뱅당이 의회의 왼쪽 부분에 위치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한편 우익은 좌익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좌익(左翼)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우익은 보수적·민족적·국수적·반동적인 것을 가리킨다

고 정의되어 있다.

우선 좌우익과 좌우파의 구분에 대해서

우선 좌우구분법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필자는 좌우익/좌우파의 구분법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예전에 어느 신문에선가 좌우익과 좌우파의 구분법에 대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개인적으로 그 구분법을 따르려 노력하고 있다. 즉 좌우익은 절대적인 기준이고 좌우파는 상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좌익은 사회주의 사상을 신봉하거나 그러한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이고 좌파(左派)는 특정집단 내에서 좀 더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나 분파를 일컫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우익은 현재 시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신봉하거나 그러한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이고 우파(右派)는 특정집단 내에서 좀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나 분파를 일컫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구분법에 따르면 스스로를 사회주의 정당이라 자처하는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은 좌파정당이라기보다는 좌익정당이다. 한편 그 당 내에서 사회주의로의 도달방법에 대해 변혁적인 방법을 택하느냐 의회주의적인 방법을 택하느냐로 의견이 갈라지면 그것은 ‘당내 좌파’와 ‘당내 우파’가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영어로는 좌익이나 좌파나 다 left-wing 이다. 영어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구분법이 쓸모가 있다고 본다. 특히나 한반도에서 좌우의 구분이 날림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제부터는 좌와 우의 구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좌우의 구분에 대해

지금부터의 의견은 ‘龍川 미리내’님의 “대토목 공사와 한국의 우파”라는 글에 대한 상념이 많이 녹아 있다. ‘龍川 미리내’님은 이 탁월한 글에서 남한의 위정자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정치철학으로 말미암아 좌우파 개념이 혼돈 내지는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고 이것이 오늘날 새로 탄생할 정부의 대운하 해프닝에서 절정을 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龍川 미리내’님은 그의 글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IMF 침공으로 인하여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칠 여지가 없이 노동의 유연화(실제는 해고의 자유 확대)와 같은 가장 우파적인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이 글의 백미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남한사회의 비극은 바로 소위 민주화세력(남한 사회를 당으로 비유한다면 이들은 분명 당내 좌파다. 다만 모두다 좌익은 아니다.)이 독재세력(이들은 당내 우파이자 우익이었다)에 대한 반발이었든지 또는 IMF 침공 탓이었든지 국가의 경제노선을 좌익 또는 좌파적이 아닌 전적으로 시장경제 우선의 우익노선을 취했다는 점이다.

어떠한 점에서 우익인가

앞서 살펴본 한 사전에서는 우익을 “보수적·민족적·국수적·반동적인 것을 가리킨다”라고 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확장해보자면 현대 정치사와 경제사에서 우익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노선을 지향하고(주2)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시장경제’에 대해 맹종 내지는 최소한 친화적인 입장을 견지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우익내의 좌우파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물론 자기들 스스로도 종종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혼동하지만 말이다(특히 유시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햇볕정책을 펼치면서 민족의 화해를 시도하는 한편으로 노동자를 탄압하고 자유무역협정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지극히 정상적인 우익정부이다. 그런데 이 정부가 또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집단이 보기에는 ‘좌파’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리하면 지난 10년간의 집권세력은 ‘한나라당이 보기에 좌파적인 우익정부’이다.

박정희는 좌익인가 좌파인가 우익인가 우파인가

‘龍川 미리내’님은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분명히 “좌파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맞는 말이다. 그의 연차별 경제개발계획, 새마을 운동과 같은 시도들은 분명히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에 영향 받은 바 크다. 그렇지만 핵심은 그런 한편으로 그가 또는 그의 정권이 인민권력의 가능성이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철폐에 대해 한 번도 로드맵에 올려놓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들을 철저히 탄압했다는 점에서(주3) 그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경제전술을 베낀 변방나라의 변태적 우익’이다.(주4)

한편 이명박 당선자의 대운하 사업을 살펴보자. 이 해프닝은 언뜻 후버댐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국가적으로 추진하였던 루즈벨트의 뉴딜 사업을 연상시킨다. 또한 노동자들을 놀리느니 구덩이라도 팠다가 다시 메우는 것이 국가적으로 이익이 될 거라는 케인즈의 유머도 생각난다.(주5) 분명 그 역시도 시장이 아닌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사업을 통한 경기부양을 유도한다는 차원에서 변종우익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경제 철학은 사실 박정희 정권보다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그것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더 헷갈리는 변종우익이다. 하여튼 대운하도 정부 재정이 아닌 민간투자사업으로 한다고 하니 완전히 반시장적이라고도 하기 어렵다.

사실 그의 우익적인 행태는 지금 대운하가 문제가 아니라 금산분리 철폐나 신문-방송 교차 소유 허용과 같은 실질적이고 더 파급력이 큰 시장주의적인 정책에 방점이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때로 이명박 측에서 그러한 보다 근본적인 우익적 조치에 대한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대운하라는 지극히 ‘허경영’스러운 해프닝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결국 좌익의 핵심적인 키워드에는 ‘권력의 형태’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대한 관점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나도 정리 안 되지만

어쨌든 쭉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요약하자면 좌익과 우익은 그 정치경제적 노선에 따라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가치를 두어 구분할 수 있고 구분하는 편이 편하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사물의 본질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온다. 소금에 아무리 검은 물을 들이고 쪼개고 쪼개도 ‘짠 맛’이 나지 않으면 소금이 아닌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좌파와 우파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상대적인 가치를 두어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막말로 내 왼쪽에 있는 이는 좌파고 내 오른쪽에 있으면 우파다. 말섞기도 짜증나면 극좌파고 극우파다.

polanara 님의 댓글에서 화두를 얻어 글을 썼으니 polanara님이 댓글을 달아준 그 “너무나 차이나는 프랑스와 한국의 우익”에 대한 언급으로 글을 끝내겠다.

사르코지와 이명박은 분명히 우익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우익이고 스스로도 우익을 자처한다. 하지만 한쪽은 노동자에 대한 더 많은 분배를 주장했고 또 한쪽은 노동자의 자원봉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둘 다 반(反)시장적인 발언을 했다. 그런데 사르코지는 ‘좌파’적인 발언을 한 것이고 이명박은 ‘극우파’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 같으면 둘을 싸잡아 욕했을 것이다. 반(反)시장주의자라고.

여하튼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우익일 뿐이다. 우익은 우익의 길로 간다. 권력이 인민의 손으로 넘어가지 않는 한에는 가끔씩 재밌는 ‘좌파쇼’나 ‘극우파쇼’를 보여줄 뿐이다.

(주1) 나는 개인적으로 우익언론이 현 정부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일종의 정치적 선동이고 실제로는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이는 그런 생각은 한국의 우익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주2) 국수적, 반동적이란 표현까지는 포함시키지 않겠다. 그럴 것 같으면 사실 소비에트 붕괴시의 공산당은 우익으로 보아야 한다.

(주3) 박정희 시대에 빈민촌에서 탁아소를 운영한 이를 빨갱이라고 몰아서 잡아간 일도 있다고 한다

(주4) 그리고 실제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 많은 제3세계 국가의 당시 독재자들은 경제노선으로 미국식의 시장자본주의 노선보다는 소련식의 계획경제 노선을 채택했고 효과를 보기도 했다

(주5) 그런 면에서 피라미드를 지은 이집트 왕조는 케인즈 주의 왕조였던가?

노동자의 노동은 자원봉사가 아니다

흔히 성장과 분배 중 어느 가치에 비중을 두느냐가 정치적, 경제적 포지션에서 이른바 ‘우파’냐 ‘좌파’냐를 나누는 기준이라고들 말한다. 실제로 전후 현대 정치의 역사는 이러한 성장 위주의 정책과 분배 위주의 정책이 그 집권주체에 따라 번갈아가면서 시행된 것인 양 – 실제로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는지는 좀 더 생각해볼 일이지만 – 보이는 측면이 많다.

일단 ‘선(先)성장론’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논리의 주창자들은 우선 파이를 키워야만 나눠먹을 떡이 생기고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선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갖는 것은 나중 일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문제는 나중에 골고루 나눠주는 것에 대한 확신 일게다.

솔직히 이러한 논리가 적어도 이 땅에서는 상당히 먹혀들어간 것이 사실이다. 해방 이후 자원빈국에 자본빈국이었던 나라가 짧은 시간에 고도성장을 하게 된 계기는 노동자들의 임금수탈에 가까운 저임금 고착화를 통한 수출경쟁력 확보였다. 그 성장이 비록 노동집약적이고 종속적인 발전이었으나, 결과론적으로 오늘날 세계 11위의 무역규모를 가진 나라가 되었고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전체적으로 향상되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은 남한경제의 국제경쟁력 확보의 결정적 요소는 바로 저임금이었기에 – 즉 파이가 커져도 금새 나눌 수 없는 구조였기에 – 상당히 오랜 기간 임금상승은 억압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82년 각국의 임금차이를 보면 한국에 비해 각각 미국 7.3배, 일본 5.3배였고, 심지어 비슷한 경제수준의 국가인 대만 1.2배, 싱가포르 2.4배였다. 아직도 파이는 가진 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가진 자들이 파이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을까? 대표적인 시기는 바로 1987년 정치적 자유화가 전개되고 이에 따라 노동조합 운동이 활성화되었던 시기였다. 1989년을 예로 들면 노동생산성은 7.2% 상승하였고 명목임금은 25%이상 상승하였다. 파이 나누기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일종의 계급투쟁의 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월은 흘러 이제 세기가 바뀐 2008년. 선거의 화두는 ‘경제’였다고들 이야기하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제대통령이라고 자처하던 분이 당선자가 되었다. 승리의 원인도 많은 이들이 – 물론 주로 우익 언론들이 – 경제를 살려달라는 유권자의 주문이라고들 한다. 작년 경제성장률 예측치가 4.8%임에도 경제가 죽었다고 외치는 것이 어폐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경제성장률과 괴리감이 큰 유권자들의 체감지수 탓일 것이다.

요컨대 실제로는 여전히 파이가 커지고 있는데 실감을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다양한데서 찾을 수 있겠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대형소매업체의 시장지배에 따른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붕괴,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90년대 이후 증가한 노동유연화에 따른 고용불안과 실질임금하락 등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자주 들어왔던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인 것이다.

일본은행(BOJ) 부총재가 최근 “기업 수익 증가가 임금 인상과 소비를 촉진하는 선순환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일본경제에 비관적인 발언을 했다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월 7일 보도에서 그 원인을 시간제 근로자나 임시직 등 비정규직의 증가로 인한 내수부진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일본의 비정규직 비중은 3분의 1 이상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실질적으로 비정규직 비중이 전체 노동력의 절반을 진작 넘어섰다.

다시 정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명박 당선자는 그 어느 역대 대통령보다도 성장론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성장률을 7%라는 가공할 수치로 상정하였다. 현대판 바벨탑이 될지도 모르는 대운하를 파헤쳐서라도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다. 유권자들은 어쩌면 – 아마도 – 이러한 도전정신(?)에서 박정희의 환영이 보였는지 그에게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파이가 커지면 자신에게도 돌아올 파이 조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여태 팔 아프게 여기 썼지만 문제는 그 기대감의 달성가능성은 무척 낮다는 것이다. 먼저 성장하고 나중에 나눠줄 때 나눠주는 주체는 먼저 성장의 열매를 향유한 이들이고 그 열매를 공유하고자 하는 이들은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함을 이미 앞서 예로 든 민주노조 운동 등 계급투쟁의 역사가 증명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유권자들은 그런 일들이야 다 알지만 그래도 당선가능성이 높은 이명박 당선자에게 선처를 호소한 것인가?

어제 보도에 따르면 이 당선자는 전국상공회의소 회장단 신년인사회에서 태안반도의 자원봉사자들처럼 노동자들이 자원봉사 하는 기분으로 자세를 바꾼다면 기업이 성장하는 데 뭐가 어렵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한다. 도저히 파이를 나눠먹자고 선처를 호소할 분위기가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뭐로 보고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기업의 성장을 위한 자원봉사용이 되었단 말인가. 이는 일종의 듣도 보도 못한 역(逆)분배론이다.(주1)

이어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원가가 절감되고 기업이 얻는 이익도 확대되고, 세금도 많이 내려가고, 이런 선순환의 기틀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자신만의 선순환론을 주창하였는데 재밌는 것이 위의 일본은행 부총재의 선순환론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원칙적인 임금인상과 그에 따른 소비촉진은 빠져 있고 기업이익 확대와 세금감소가 언급되어 있다.(주2) 즉 이 당선자는 이 발언을 통해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는 자원봉사자로 경제의 선순환 고리에서 아예 삭제시켜버린 셈이다.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시장친화적인 정치지도자 정도의 정상적인 스탠스를 취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대운하 등에서 보이는 ‘묻지마 개발’ 방식이 그렇거니와 어제의 ‘자원봉사형 노동자’상은 그의 통치방식이 시장경제와 별로 상관없는 그저 친재벌적인 방식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모습들이다.

 

(주1) 이와는 너무나도 대비되게 최근 프랑스의 우익 대통령 사르코지는 자본가들을 경악케 할 만한 제안을 했다 한다. 바로 기업이 번 이윤을 ‘주주 : 노동자 : 재투자 = 1:1:1’ 식으로 나누자는 것이라 한다. 같은 우익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주2) 근데 생산성이 향상되거나 기업이익이 확대되면 왜 세금이 내려가는지 잘 모르겠다. 기업이익이 확대되면 세금감면 조치가 자동적으로 취해진다는 이야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