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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이고 천박한 2014년 한국의 자본주의

복수의 임원회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한기총 부회장인 조광작 목사는 지난 20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내 한기총 사무실에서 열린 긴급임원회의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한기총 부회장 “가난한 집 아이들 불국사로 수학여행 가지...]

정 후보는 박 후보가 서울시 예산으로 협동조합 사업을 지원하는 점을 들며 “(이 사업은) 국가보안법 위반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박 후보 정체성이 뭔지 알 수가 없다”며 “제가 되면 이런 사업 안 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협동조합으로 사회적 기업을 꾸리고 있거나 예정인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과도 같은 발언이었다.[협동조합 사업 날벼락 맞나.. 정몽준 폭탄발언]

시차가 별로 없는 이 두 유력자의 발언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라 생각되어 인용해보았다. 조 목사의 발언은 이 사회의 부유층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흘겨보는 눈초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입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사고 난 아이들이 강남의 아이들이었으면 이랬을까’라는 주장은 불편했었는데 조 목사의 발언을 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어쩌면 막강한 생산력을 통해 과거에는 부유층만 누리던 일종의 “사치”를 전 인민의 보편적 소비로 확산해왔던 과정이다. 여행은 대표적인 사치 상품이었다. 하지만 유람선과 같은 집합적 소비상품 등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여행을 다닐 수 있게끔 했다. 그런데 조 목사는 그런 자본주의의 그러한 평등적 측면도 외면한 채, 인종주의적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가난한 집 아이도 유람선 정도는 탈 수 있는 경제상황이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한편 아들의 “미개한 국민” 발언으로 고전하고 있는 정몽준 후보는 관훈 클럽 주최의 토론회에서 협동조합에 대해 위와 같이 발언했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경제조직의 지배구조에 대한 다양한 고민 속에 나온 대안적 구조의 조직이다. 그런 조직을 박원순 후보까지 엮어서 색깔론으로 깔아뭉개고 있다. 조 목사의 발언이 어느 정도 봉건적 발상이라면 정 후보의 발언은 대기업의 대주주인 “자본가”다운 발상이다. 협동조합원은 “빨갱이”.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불가피하게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이것이 사회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는 복지지출과 같은 경제제도와 소수의 정치세력을 보호하는 정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결국 갈등은 사회적 비용이고 총체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체제에 위협요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4년 한국의 유력자들은 갈등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그 천박함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소름이 끼친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은 세계에서 가장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했다.

또 다른 세월호 사태를 막기 위한 방법은?

잔인한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국민 우울증”이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사태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사고를 불러온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을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겠다”나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비극적인 참사다. 너무나 안타까운 갖가지 사연과 복잡하게 얽힌 원인들이 산재되어 있어서 블로그에서 섣불리 뭐라 하기도 조심스러운 사고다. 그래서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마침 논지가 비슷한 두 개의 글을 동시에 읽게 되었고, 개인적으로도 이에 공감하는 바가 있기에 여기 옮겨왔다.

똑바로 말하자.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인간이 물질과 생산,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자본주의라 말할 수도 없는, 천민 약탈 도적의 무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이다. 최소한의 도구적 합리성이 있다면 기업이 이딴 식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러나 이 “해운회사”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빈 자리를 광신과 무책임과 끼리끼리의 문화가 채웠다. “돈보다 사람”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 없다. 어떤 수준에서는 돈이 더 중요하다. 그딴 식으로 사업하면 쫄딱 망한다는 경험을 보여주면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안 망했을까? 공무원과 금융기관을 꽉 잡으면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과 “인간관계”를 잘 구축해 놓는 것이 합리적 기업경영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출처]

미국에 살면서 불편한 것 중 하나는, 때로 지나칠 만큼 안전을 강조해 사회적 비용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고치러 가 보면 느끼는데, 차에 안전에 관한 문제가 하나만 있어도 수천 달러를 메기며 전체를 다 갈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번에는 바퀴에 바람이 좀 빠져 정비소에 가져갔더니 바퀴를 갈아야 한다고 했다. 타이어가 새 것이었고 내가 보기엔 정말 문제가 없어 보여 그냥 좀 고쳐서 써도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라이어빌리티(liability) 문제가 있어 날 그냥 보낼 수 없단다. 하는 수 없이 바퀴를 새 것으로 갈았다. 이들이 도덕성이 높고 진정으로 내 안전을 걱정해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사고가 발생하면 회사가 져야 할 책임이 워낙 크니 애초에 조심을 하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소송이 쏟아지는 나라인지라, 뭐라도 잘못해서 책 잡히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을 해야 하니, 회사의 자산을 책임질 수 있는 직원들을 채용하고, 그들을 철저히 교육하게 될 수밖에 없다.[세월호 여객선 침몰, 그리고 세모 그룹 유병언]

첫 번째 글을 권복규 이화여대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고, 두 번째 글은 실리콘벨리에서 활동 중인 조성문 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글들의 요지는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약간 각색을 해서 요약해본다면, 이 사회에서의 벌어지는 참혹한 사고의 원인은 “도구적 합리성”이 결여된 “천민 약탈 도적의 무리”가 “합리적 기업경영”이 아닌 “인간관계”로 장사를 해서 생겨나는 일이며 이에 대한 현실적 대안은 “라이어빌리티”를 강조하여 회사의 책임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왜 안전사고에 대한 시스템이 이토록 미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지지만, 시장경제에서 비용만 발생하는 안전조치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로 인해 발생할 비용이 조직의 존망을 흔들 정도가 되어야 반응할 뿐이다.[출처]

4월 17일 내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위의 두 주장과 유사한 주장이고 이 체제에서의 세월호와 같은 기업 – 또는 공공 – 이 제공하는 집합적인 소비재에 대해서는 이러한 대책이 근본적인 해결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권복규 교수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실제로 안전에 대해 투자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하며 우리는 이제야 그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조문성 씨가 경험한 그 고지식한 정비소일 것이다. 결국 안전하게 하는 게 비용절감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제도적 합리성을 구현하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한 정몽준 씨가 실질적 주인인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연달아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두가 안전조치 미흡으로 벌어진 일들일 텐데, 막내아들의 페북 망언에 대해서는 사과하던 정몽준 씨가 이 사태에 대해선 묵묵부답이다. 정몽준 씨는 그러면서 정작 서울시에 안전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겠단다. 사회가 아직도 이런 행위에 대해 너그러워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한편, 권복규 교수의 애초의 글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지나치게 매크로적인 비판이라는 취지의 글이었고, 이에 대한 방증으로 며칠 전에 있었던 서울 지하철 추돌 사고를 들었다. 취지에 일부 공감한다. 하지만 결국 과적이 침몰 원인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이윤 논리를 여전히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바 있고 지하철 사고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이윤 논리, 보다 정확하게는 비용절감 논리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기업 특유의 이윤논리인 셈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공기업의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하고 있지만 사실 공기업에 대한 이런 공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축적이 일천하고 기본적인 공공서비스가 부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공기업이 이 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몫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실패” 논거가 등장하고 재정압박에 직면하자 정부는 공기업의 개혁을 주문했고 이는 거의 예외 없이 이윤추구 논리로 귀결됐다. 그 결과 공공재의 내구연한은 계속하여 늘어났고 안전을 위한 비용은 삭감됐다.

다시 큰 틀에서 보면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보다 안전에 있어서는 마이크로하게 더 엄밀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통제와 규제는 이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매크로한 측면에서 보자면 체제적 반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자본주의가 지구촌 규모의 대량생산/대량소비/집합소비로 고도화된 것은 불과 100여년에 불과하다. 당시 지어진 인프라는 서구에서조차 이제 낡아가지만 긴축재정은 공공/민간 양측에서 새로운 정비를 유예하게 만든다. “안전이 이익”의 선순환 고리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R.I.P.

어느 경제학자의 사상전향서를 읽다 든 생각

마르크스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착취, 수탈하는 메커니즘’이라고 하고 있지만, 글로벌경제 이전의 자본주의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었다. 오히려 자본주의에서는 과도한 착취나 수탈이 마이너스로 움직인다. 적절한 재분배를 행하는 편이 자본주의 성장에 유리했던 것이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106]

제목이 사뭇 거창하고 과격한데 원래 오리지널의 제목은 ‘자본주의는 왜 자괴(自壞)했는가 – 일본의 재생을 위한 제언’이라고 한다. 여기에 쓴 “자괴”란 표현이 마땅치 않았던 역자가 부득불 위와 같은 제목으로 대체한 것이다. 따라서 제목에서 보는 것만큼 책 내용이 그렇게 과격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은 저자의 살아온 길과 이 책을 쓴 의도에서 엿볼 수 있다.

저자 나카타니 이와오는 1960년대 말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배운 철저한 시장주의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시장주의적 개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일종의 전향서로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일반을 폐지하자는 것은 저자의 생각이 아니다. 다만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맹신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인용한 구절은 저자가 주류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쭉 걸어왔기에 사실 이 반골(反骨)의 경제학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한다는 정황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인용하였다. 즉, 저자는 세계화되지 않은 과거의 자본주의는 그 지역의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재분배를 하다 세계화가 진전되며 이런 메커니즘이 사라지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맑스가 자본론을 쓰던 당시의 영국은 이미 세계화된 자본주의 국가였다. 어쩌면 플라자 합의 이전의 일본보다도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제국주의 종주국으로서 영국은 인도 등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해 원자재와 상품소비의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고, 자국 노동자는 “자유”계약을 통한 “자유로운”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고 어린이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이후 1차 대전 이전까지 자본주의의 중핵인 유럽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세계화 정도와 유사한 정도로 금융과 무역 등이 세계화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점증하는 자본주의 경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호무역주의를 선호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본주의와 세계화는 따로 존재할 수 없는 두 축이다.

저자의 말처럼 “적절한 재분배”는 자본주의 성장에 유리하다. “복지냐 성장이냐”를 고르라지만 복지는 GDP에 반영되기에 성장의 다른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자본주의자가 아니기에 자본주의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사회는 없고 자기책임만 있다”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지탱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이 자본주의의 모순인 셈이다.

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그 후 1990년대 말이 지나면서 교회가 정체되고 성도 수의 성장이 둔화를 넘어 하향세로 돌아서자 교회성장론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됩니다. 그것은 마케팅과 자본주의 논리의 도입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도입하고 성공한 사례가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의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입니다. 자신의 교회가 속한 곳의 지역주민들을 분석하고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여 거기에 알맞은 홍보 전략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 같은 경우는 자신들의 교회에 한 명의 성도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소위 말하는 총동원 주일 등의 행사를 통해 경품과 많은 실적(?)을 올린 성도들에게 시상을 하는 해괴한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 멀쩡히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 교회로 데리고 오는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권영진 지음, 리북, 2011년, pp171~172]

스스로가 목사이신 권영진 씨의 한국교회에 대한 쓴 소리를 담은 책의 일부다. 대형화, 자본주의화, 세속화, 정치화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황을 내부자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비판하고 있다. 여러 주제들이 마음에 와 닿지만 어디까지나 국외자인 내 입장에서는 – 특히 최근의 나 – 이 인용문에 공감이 간다. 바로 연휴 3일 동안 “총동원 주일”에 동원된 듯한 전도사들로부터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간 수명의 전도사들이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처음 얼마간은 “누구세요?”라고 응답하며 일없으니 가보라고 조용히 이야기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귀찮아 아내와 나는 인터폰의 비디오를 슬며시 본다. 택배 노동자 차림이 아닌 낯모르는 이들이 있으면 십중팔구 이들 전도사다. 연휴기간 역시 아내와 나는 조용히 비디오를 지켜봤다. 그들은 역시 예상대로 연휴 기간 동안 전도에 동원된 신도들이었다.

하필 석가탄신일에 그토록 유난스럽게 더 자주 전도를 다니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지 않겠다. 다만 중학생이 되었을까 할 정도의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된 그 행동이, 조금만이라도 응답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사적인 영역을 언제라도 침범하겠다는 스팸 메일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또는 요즘 와서 그 폐해가 드러나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는 다단계 판매와 뭐가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러한 전도활동은 자본주의化된 교회 주식회사의 활동일 따름이다. 그들이 나라는 특정 개인의 종교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한 것이라면 문 앞에서 좀 더 기다리거나 다른 날 다시 와서라도 전도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 정확히는 그들을 보낸 교회는 – 나의 구원이 아닌 신도수의 양적증가에 관심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내가 응답이 없자 미련 없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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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원 전도주일”로 구글링하여 발견한 이미지
 

트위터에서 이런 경험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자 어떤 이는 자기 남편이, 집사 친구 때문에 “총동원 전도주일” 기간 동안만 그 교회에 가고 올해엔 경품으로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를 받아왔다고 한다. 앞서 말한 다단계 판매도 생각나고 어릴 적 친구를 학원에 데려오면 참고서를 공짜로 준다던 주산학원의 마케팅 전략도 생각난다.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에 그 분의 영혼을 얼마나 더 많이 구원받았을지 궁금하다.

물론 교회도 성장이 정체되어 있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신도들이 편안하게 머물러야 할 적절한 공간도 마련하고 구휼활동도 할 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남한의 개신교계의 성장욕구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권영진 목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성장욕구는 자본주의 기업의 그것과 내용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 거기에 법인세를 납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업보다 더한 특혜를 받고 성장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남한교회야말로 사모펀드와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자산이다. 소비자들은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있고 스스로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휴일노동도 불사한다. 경영자들은 정치권과 긴밀하게 연결돼있어 정치적으로 시달릴 가능성도 적다. 세금도 내지 않는다. 현재 투자의 장애요인은 자신이 자본주의 기업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정서적 거부감 뿐이다.

신평사의 신용은 누가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

해외 신용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을 받는 건설사가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GS건설이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을 가진 국내 건설사는 포스코건설 단 1곳에 불과하다. 게다가 포스코건설의 신용등급도 국내보다 크게 낮은 탓에 해외 채권 발행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 무용론이 불거지고 있다.[해외 신평사 신용등급 무용론 대두]

국내 3대 신용평가사들이 국내 기업에 대한 신용등급 고평가 현상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외국 신평사보다 평균 여섯 등급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평가기업이 내는 수수료가 주요 수익원인 신평사 입장에서는 경쟁사보다 낮은 신용등급을 부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국내 3대 신평사, 신용등급 ‘뻥튀기’ 심각]

같은 신문에서 같은 날짜에 보도된 두 기사다. 한쪽은 해외 신평사의 지나치게 박한 신용등급을, 한쪽은 국내 신평사의 지나치게 후한 신용등급을 비판하고 있다. 쓴 웃음이 지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기업이 초국적화되고 기업의 신용도를 바라보는 기준이 균일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신평사와 해외 신평사의 눈높이는 사뭇 다르니 말이다.

그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두 번째 기사에서 원인으로 들고 있는 평가받는 기업이 내는 수수료가 수익원이어서 신평사의 점수가 후할 것이라는 분석은, 물론 중요한 모순이긴 하지만 절반만 사실이다. 그게 주요원인이라면 역시 평가받는 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해외 신평사의 국내 기업에 대한 신용등급이 박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외 신평사가 국내기업에 대해 박한 이유로 공통적으로 들고 있는 이유는 컨트리 리스크다. 남북분단이라는 매크로 환경이 기본적으로 점수를 깎고 들어간다. 하지만 이 변수는 점차 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해외에서 바라보는 더 중요한 매크로 환경은 이른바 한국 특유의 “재벌” 체제에서의 소유-경영의 불투명성에 따른 리스크인 것 같다.

흥미롭게도 국내 신평사는 오히려 이런 특수성이 높은 신용등급의 근거가 된다. 즉, 순환출자로 엮인 “재벌”社에 속해있는 계열사는 회사 자체의 능력보다 더 좋은 신용등급을 받는다. 신용 리스크 등이 불거질 경우 모기업에서 자금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은 믿음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부실한 공사(公社)의 프리미엄도 상당하다.

국내 신평사가 외국 신평사보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것도 문제지만, ‘뒷북’ 신용등급 조정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중략] 투자적격으로 분류됐던 LIG건설도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에야 신용등급이 강등됐다.[국내 3대 신평사, 신용등급 ‘뻥튀기’ 심각]

이런 뒷북 신용등급은 주되게 국내 신용등급이 피평가기업이 갑인 상황에서 양산되는 “주례사식” 신용평가가 원인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관계기업이 뒤를 받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그 평가의 근거가 된다. LIG건설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인데, 이 회사는 그룹이 지켜줄 것이란 시장의 믿음을 근거로 법정관리 바로 직전까지 회사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니 그룹 계열사나 개발공사 등의 신용평가 레포트를 읽어보면 한심할 때가 많다. “현금흐름도 원활하지 않고, 부실사업도 많고, 우발채무도 만만치 않은데, 결론적으로는 모기업 혹은 국가의 –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 보증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A등급을 부여한다”는 식이다. 반(反)시장적 요소가 가장 시장적인 평가의 근거가 되는 장면이다.

알다시피 신용평가는 대공황 등 경제적 격변기를 거치며 그 평가의 객관성이 시장참여자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검증되며 발달해 왔다. 이제 “신용”이라는 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어느 단어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지난 2008년의 위기를 “신용위기(credit crunch)”라 부른 사실에서도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실물의 윤활유인 돈을 은행에서 제공한다면, 그 돈의 흐름에 대한 믿음은 신평사가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신용평가의 신뢰도는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만일 은행이 제공하는 화폐가치가 신평사가 제공하는 신용처럼 들쑥날쑥하면 어떻게 될까? 아노미 상태가 될 것이다. 신평사의 신용은 누가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여러 상업은행들이 파산했으나, 협동조합은행은 단 한 곳도 파산하지 않았다. 영국 최대의 협동조합은행인 ‘더 코퍼러티브 뱅크(The Co-operative Bank)’는 영업이익이 ‘07년 79억파운드(약 14조원)에서 ‘12년에는 133억 파운드(약 23조)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오히려 증가했다. 네델란드 국민의 50%가 조합원으로 가입된 네델란드 라보방크(Rabobank)는 무배당원칙과 내부적립만으로 42조원의 자기자본을 축적하고 있으며,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에 오히려 20%나 순이익이 급증한 바 있다. [중략] 이처럼 협동조합은행들이 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성장을 유지한 것은 다른 은행들이 부동산이나 위험 부담이 큰 대형 수익 사업 진출을 통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 반면, 협동조합은 본연의 사업영역과 다른 의사결정을 할 때 조합원들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조합원을 위한 최상의 상품과 서비스에 집중하는 전략이 영업 확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공존을 위한 실험 협동조합모델, 제조업에도 가능할까’]

무절제한 “시장 자본주의”의 대안의 하나로 “협동조합 모델”의 가능성을 살펴본 LG경제연구원의 보고서 중 일부다. 상업은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CEO의 투자의지, 이윤 극대화 추구 동기, 그리고 신속한 의사결정 등 자본주의 기업이 일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미덕(?)이 결여된 점이 오히려 협동조합은행의 미덕이 된 역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의사결정에 관한 구조적 특성의 차이에 관한 언급은 지난 금융위기의 원인을 주로 “도를 넘어선 탐욕”으로 설명하려는 것보다는 보다 유익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특정 기업의 특정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의 동기가 어떠하건 간에, 소수의 의지에 의한 의사결정은 득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한 고민은 계속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언급한 사례를 우리나라에 대입해보면 저축은행의 부동산PF 에로의 집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 이코노미스트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모저축은행의 행장이 모시중은행의 후순위채 수익률이 높은데 살지 말지 고민을 하기에 사라고 했더니, 사지 않고 결국 “그동안 하던 부동산PF”나 계속 하더니 망했다고 한다. 독단적이고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

물론 의사결정 과정이 협동조합 모델을 취하게 되면 비전문가적인 – 반드시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 목소리가 득세할 우려도 있다. 의사결정을 민주화하기 위해 사외이사를 도입한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는 단점이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몰고 왔던 파생상품의 탄생과정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소위 “전문가”들끼리의 의사결정에 의한 오류도 만만치 않다.

주식회사의 형태에서,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도 참여시키려는 시도도 있긴 하지만, 결국 어찌 됐든 주식회사는 주주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의사결정을 소수의 의한 독단으로 흐르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재벌은 순환출자를 통해 극히 소수의 지분을 가진 재벌 일족이 “오너”행세를 하며 의사결정을 한다.

삼성이 오늘날의 삼성으로 자란 데에는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현명한, 그리고 “독단적인” 의사결정이 선행된 점은 있다. 하지만 그런 의사결정은 LG도 했고, 현대도 했고, 동부도 했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삼성 또한 자동차 시장 진출이란 어리석은 의사결정도 했다. 실패의 뒤치다꺼리는 정부가 해줬다. 독단적인 의사결정의 리스크는 상존한다.

곁가지 의사결정의 신탁(信託)에 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