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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리건’이 ‘로널드 레이건’이 된 사연에 대한 고찰

한국어는 여러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적혀진 한글에 대한 발음에 있어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는 편이다. 자기 이름을 ‘유인촌’이라 써놓고 사람들이 ‘유인촌’이라고 부르니까 “내 이름을 유인촌 말고 문익촌이라 읽어 달라”라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표음문자(表音文字)의 특징이다. 문익촌도 나쁘진 않지만.

그런데 알파벳은 같은 표음문자라 하더라도 좀더 변용이 많은 편인 것 같다. 특히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의 발음에 있어서는 기존 관행 또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달리 발음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팝가수 ‘샤데이’는 스펠링이 Sade다. ‘세이드’라 발음해야 할 것 같은데 나이지리아 국적인 그녀가 그렇게 불러 달래서 샤데이다.

한편 미국 대통령 중에선 희한한 케이스가 하나 있는데 ‘로널드 레이건’이다. 그의 이름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로널드 리건’이라 불리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날 ‘로널드 레이건’으로 표기가 바뀌었다. 알파벳 스펠링은 ‘리건’일때나 ‘레이건’일때나 여전히 Ronald Reagan 인데 말이다. 대통령이 될 때쯤인 1981년의 신문을 보자.

(이하 네이버 디지탈뉴스아카이브 캡처)

이때까지만 해도 ‘리건'(1980년 7월 17일 동아)

경향신문의 1981년 11월 6일자 보도에 따르면 ‘한국신문편집인협회보도용어 통일심의회(韓國新聞編輯人協會報道用語 統一審議會)’라는 거창한 단체에서 여태 ‘리건’이라 써오던 표기를 ‘레이건’으로 바꿔 쓰기로 했다고 한다. 누구 맘대로? 아무리 단체 이름이 거창해도 감히 미국의 대통령 이름을 멋대로 바꿔 쓸 수는 없다. 본인이 허락하지 않은 한은.

너무 거창한 단체 이름!(1981년 11월 6일 경향)

그런데 동아일보는 경향이 그런 사실을 보도하기 하루 전에 이미 그를 ‘레이건’이라고 표기했다. 왜 그렇게 했냐고? “본인의 희망에 따라” 그랬다는 보도도 있다. 동아는 이미 발빠르게 ‘한국신문편집인협회보도용어 통일심의회’가 바꿔 쓰기로 결정하거나 말거나 “본인”의 희망사항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다. 역시 그때부터 대단한 신문이었던 듯?

본인의 희망이라잖아~(1981년 11월 5일 동아)

그때 아직 소년시절인지라 많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사실만큼은 기억한다. 여태 ‘리건.. 리건..’하던 미국의 대통령 각하의 이름이 어느 날 갑자기 ‘레이건’으로 바뀐 그 순간 말이다.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동아의 말마따나 그리고 ‘샤데이’의 경우처럼 본인이 “이제 멋없는 리건이라는 이름대신 레이건이라 불러라. 에헴!”한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1985년 11월에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의 미소 수뇌회담이 열렸다. 언론은 양자가 화해하여 동서대립이 해소된 것처럼 요란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수행자들이 누구였던가? 레이건의 감시자로서 세계최고의 원자력발전소 건설회사 벡텔 사의 사장 조지 슐츠와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도널드 리건이 각각 국무장관과 수석보좌관의 직함을 들고 동행하지 않았던가. [중략] 이 가운데 리건 보좌관은 재무장관에서 자리를 옮긴, 최고 실력자라 부를만한 인물이었다.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때까지 로널드 리건이란 이름의 발음을 로널드 레이건으로 바꾼 것도 이 헷갈리기 쉬운 스폰서인 도널드 리건을 장관으로 맞이하는 예의로서 대통령이 한발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제1권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2010년, pp481~482]

JP모건과 록펠러 집안이 미국과 전 세계의 권력을 좌지우지한다는 히로세 다카시의 음모론 책을 읽고 있는 와중에 만난 대목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레이건’ 씨는 비록 스펠링이 Regan으로 다르긴 하지만 발음은 구분할 수 없는 차기 재무장관을 배려(?)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표기를 바꿔달라고 요구한 셈이다. 대단 대단!

변방의 신문은 전체 이름을 ‘도널드 리건’이라 하기도(1980년 3월 13일 경향)

그런데 여하튼 ‘도널드 리건’이 재무장관 자리에 확정발표된 것은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한달이 지난 후였으니 딴에는 히로세 다카시가 오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림자 내각이야 이미 확정되었을 수도 있고 그깟 이름에 대한 음모론은 전체 거대 음모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기는 마이클 무어의 신작 ‘캐피탈리즘:러브스토리’를 보면 도널드 리건이 보통 인물이 아니기는 하다. 대통령이 된 후 증권거래소를 찾은 레이건이 연설을 하는 와중에 노령인 탓인지 말이 상당히 느렸다. 이때 뒤에 있던 리건이 끼어들며 “빨리 좀 말하세요.”라고 하자 레이건이 “오호~”하며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단순히 부하직원의 충고였을까?

한국어로 잘 감이 안오면 영어로 표현해보자. “you’ll have to speed it up.” 이것이 그가 한 말이다. “have to”라는 표현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입각하기 바로 직전까지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이었던) 메릴린치의 CEO ‘리건’과 변방국가의 신문조차 이름을 헷갈려 하는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리건’의 대화 톤이 굳이 주종관계를 따질 게재가 있을까?

어쨌든 답은 알 수 없다. 진실은 한 사람이 – 혹은 두 사람이 – 알고 있을 텐데 둘 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호사가의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소위 레이거노믹스가 투자은행, 나아가 미국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는가, 그리고 그것이 소수 지배계급에 의해 획책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위키피디어를 볼 것 같으면 레이거노믹스를 주장한 것은 사실은 ‘도널드 리건’이다. 그러니 사실 레이거노믹스의 옳은 표현은 원래 발음대로 <리거노믹스>일지도?

p.s. 한편 옛날신문을 살펴보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보도를 발견했다. 1960년대에 CIA가 광범위한 불법 활동을 자행했다는 1974년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라 포드 대통령이 진상조사를 위한 위원회를 꾸리는데 그 위원회 이름이 위원회를 이끈 ‘넬슨 록펠러’의 이름을 딴 ‘록펠러 위원회’였고 ‘로널드 리건’이 이 위원회에 낀 것이다. 당연히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집안의 사람이다. 과연 ‘로널드 리건’은 록펠러 집안의 하수인이었을까? 🙂

‘록펠러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로널드 리건'(1975년 1월 15일 동아)

음모론이 꾸미고 있는 음모

인공강우 전문가들은 성공을 증명할 길이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공강우가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대중의 공포도 감당해야만 한다. 인공강우가 불법 침략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미국은 1960년대에 몬순 기간 동안 게릴라의 보급로가 물에 잠기게 하기 위해 비밀리에 라오스와 북베트남에 인공강우를 실시했다. 또 인공강우는 예기치 못한 홍수를 일으킨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뭉게구름 계획Operation Cumulus’이다. 뭉게구름 계획은 영국남부에서 실시되었던 영국군의 비밀 강우실험으로, 1952년 여름에 익스무어를 강타한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영국군에서 단 한차례 구름 씨를 뿌리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엄청난 기세로 밀려든 흙탕물이 데번 주 린머스를 덮쳐 3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과관계에 관한 진실은 결코 알 수 없지만 공문서 보관소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대홍수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뭉게구름 계획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어쩌면 이들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pp415~416]

음모론의 대부분은 세계의 정치경제의 뒷면에 있는 거대한 어둠의 그림자를 소재로 하고 있기에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지만, – 폴매카트니가 애비로드 앨범사진에서 맨발이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는 정도는 발랄한 유머이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재미는 있다. 그러니 인류의 삶의 뿌리인 물, 더 정확히는 강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진지한 책에서도 유난히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뭉게구름 계획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1949년에서 1952년까지 존재하였는데 주된 목적은 적의 움직임을 저지하거나 공항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물론 뭉게구름 계획이 실제로 린머스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소리는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인공강우를 적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살상의 목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의도만큼은 비난받아 마땅해보인다.

기후무기에 관한 음모론은 위와 같은 인공강우 이외에도 꽤 된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아이티 지진 등 최근의 재앙들에는 예외 없이 기후무기 음모론이 끼어든다. 즉, 전자기파를 이용해서 원격으로 날씨를 바꾸고 지진을 일으키고 화산을 폭발시키는 식의 환경 테러리즘이 등장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까지도 있다. 이 주장의 최신판은 21세기 사회주의 영도자 중 한분이신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다.[또 다른 관련 글]

한편 음모론을 꼭 핍박받는 좌익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잘 알려진 음모론 중 프리메이슨이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주장의 배경 이론(?)은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우익적이다. 또 최근 천안함의 비극적인 사고의 배후를 음모론으로 떡칠하고 있는 이들은 조중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모론은 좌우에 관계없이 자신의 세계관과 사실관계 사이의 빈틈을 채우는 자신만의 편견일 따름이다.

요즘 조중동을 읽으면 북한은 우리가 도저히 못이길 엄청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 역시도 때로는 ‘핵무기가 발명된 지 언젠데 그게 최신무기일까. 지금은 무슨 첨단무기가 있을까?’랄지 ‘1969년에 달에 갔다 온 기술로 지금쯤 토성까지는 갔어야 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가끔 하지만, 결국 진실은 사실관계가 촘촘히 맞춰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오곤 한다. 음모론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이는 대개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찌라시들처럼.

음모론, 프리드먼, 그리고 자유

케인즈의 일반이론에서의 주요주제 하나는 공황조짐이 있는 상황에서의 통화정책이었다. 그러나 밀턴 프리드먼과 안나 슈워츠는 그들의 “미국에서의 화폐의 역사” 에서 Fed는 대공황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중에 이 주장은 프리드먼 그 자신의 것들을 포함한 인기 있는 저작들에서 Fed 가 공황을 초래했다는 주장으로 변신했다.
A central theme of Keynes’s General Theory was the impotence of monetary policy in depression-type conditions. But Milton Friedman and Anna Schwartz, in their magisterial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claimed that the Fed could have prevented the Great Depression ? a claim that in later, popular writings, including those of Friedman himself, was transmuted into the claim that the Fed caused the Depression.[Was the Great Depression a monetary phenomenon?, Paul Krugman, 2008.11.28]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주장을 세상의 모든 일을 유태자본의 음모로 환원시키는 음모론자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당시 연준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이자율을 낮추어 경제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기보다는 무자비하게 통화량을 수축시켰다. 그리하여 1929년 457억 달러에 달하던 통화량이 4년 후인 1933년에는 3백억 달러에 불과해서 극심한 디플레가 조장되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1929년 대공황의 주범이 연준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겠지만 유수의 경제학자들간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경제학자인 스탠퍼드 대학의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도 1996년 1월 방송국 대담에서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다.[세계 경제를 조종하는 그림자 정부(경제편), 이리유카바 최, 2002년, 해냄출판사, p154]

한편 이 책에서는 말미에 지급준비금 보유율을 1백 퍼센트까지 증가시켜야 한다거나 월별 인구 증가 예상에 준해 월별 화폐 공급량을 산출한다는 등의 COMER(통화경제개혁위원회 : committee on monetary economic reform)라는 단체의 주장을 싣고 있는데 그다지 맘에 와 닿는 주장은 없다. 잘은 몰라도 통화주의 이론을 조악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주1). 한편 이들이 이론적 지주로 여기는 프리드먼은 어떠한 세계를 꿈꾸고 있을까? 그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터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래 글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페비언 사회주의와 뉴딜 자유주의(주2)로 향한 여론의 흐름은 이제 약화되었지만, 앞으로 나타날 여론의 물결이 아담 스미드나 토마스 제퍼슨의 정신에 입각한 자유의 확대와 정부의 축소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마르크스나 모택동의 정신에 입각한 일당독재정부로 향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선택의 자유, 밀턴 프리드먼, 박우희譯, 1980년, 주식회사 중앙일보, p190]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프리드먼은 “마르크스나 모택동의 정신에 입각한 일당독재정부”는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그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담 스미드나 토마스 제퍼슨의 정신에 입각한 자유의 확대와 정부의 축소”일 것이다. 아담 스미스라면 이미 국부론을 통해 경제학의 기반을 다진 이고 그 다음으로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내 관심을 끄는 이는 토마스 제퍼슨이다. 왜 프리드먼은 토마스 제퍼슨을 끄집어냈을까? 그것은 그가 바로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인물과 대척점에 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 해밀턴은 누구인가? 그는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다. 그는 미국의 건국 이후 영국의 영란은행을 흉내 낸 중앙은행을 설립하였고, 미국의 경쟁력 약한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반대하였고, 당시 13개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주정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기에 많은 이들의 많은 반발을 샀다. 그를 반대한 부류는 월스트리트와 금융을 금권주의의 탐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남부의 부유한 농산물의 자유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 그리고 신생미국이 영국과 같은 강력한 정부보다는 보다 자유로운 자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제퍼슨이 있었다.

자본주의 캠프 선봉에는 해밀턴이 있었고, 민주주의 캠프 선봉에는 제퍼슨이 있었다.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주의자 Federalist 들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했으며, 특히 금융과 상업활동에서 정부의 개입을 강조했다. 지역적으로는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을 기반으로 했다. 반면 제퍼슨이 이끄는 공화주의자 Republican(놀랍게도, 오늘날 민주당의 원조인 이들을 당시에는 ‘공화당’이라고 불렀다)들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을 지지했고 이들의 지역기반은 남부였다. 농민들과 대지주들이 공화당의 지지 세력이었다. [머니맨, 헨리 브랜즈, 차현진 해설.옮김, 청림출판, 2008년, p92]

자 이제 편이 갈라졌다. 프리드먼이 아담 스미스와 함께 제퍼슨을 언급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절대적인 가치인 자유를 – 특히 경제활동의 자유를 – 마르크스나 모택동이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밀턴과 같은 강력한 중앙정부 주창자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제나 절대군주제에서 정당성을 획득한 주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절대군주 하에서의 경제에 대한 독재로 인한 폐해는 실제로도 심하였다고 한다.

특히 프리드먼의 주특기(?)인 통화문제에 있어 군주의 횡포가 심했는데 그것은 바로 무절제한 화폐 초과공급을 말하는 것이다. 즉 화폐주조권을 가지고 있던 절대군주는 금함량을 속이는 방법 등으로 화폐를 유통시켜 자신의 사금고를 채우곤 했다. 발권기관의 수익을 뜻하는 시뇨리지의 어원도 불어의 ‘군주 seigneur’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이러니 나라의 경제는 피폐해져 인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게 찌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절대군주제는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거기에서부터 자유주의는 싹트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프리드먼이 대표하는 시장자유주의는 마르크스, 모택동, 해밀턴이 지향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이토록 피를 흘려가며 지켜온 자유를 빼앗아가는 행위라고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와 모택동은 좌익을 대표하고 오히려 해밀턴은 금권주의를 대표하는 바, 상반된 이들 같지만 둘 다 시장의 자유를 유린한다는 점에서는 공범인 셈이다. 더 나아가 ‘그림자 정부’의 저자 이리유카바 최는 현대의 자본주의는 사실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시장의 지배자인 자본가가 경제사에 등장한 이래 권력층은 – 심지어 절대군주조차도 – 자본가의 자유는 유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들은 공생관계를 변함없이 맺어왔다. 프리드먼이 싫어하는 해밀턴은 유치산업(幼稚産業) 보호론을 통해 미국에서의 자본가의 육성을 도모했었다. 독재자 박정희는 재벌의 독점권을 옹호하였다. 오늘날 미국정치의 경우에는 부시 행정부처럼 정부 자체가 자본가로 메워지기도 했었다. 그들에게 있어 주요한 패퇴는 기껏해야 아직 대지주가 힘을 발휘하던 시절의 영국에서 ‘곡물법(corn law)’을 폐지할 힘이 없었던 시기나, 대공황으로 인한 금융억압으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던 정도였다.

해군이 면직산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은 1753-63년의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 함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영국이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영국이 패배했다면 인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내놓도록 요구 당했을 것이므로 면직산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넬슨 제독이 해상권을 장악한 덕분에 랭카셔의 수출은 1793-1815년 사이에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면직산업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식민제국과 해군력이 원료 공급지와 시장을 하나로 묶는 것을 도와줌으로써만 영국 면직산업은 유지될 수 있었다.[면직산업과 의료,시장, 통상로 보호의 문제, 강철구, 2008.8.11]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의 글이다. 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정치체제는 말할 것도 없이 군주제였다. 그들은 비록 독재자이긴 하였지만 자신들의 권한을 자국 산업의 성장을 위해 사용했다. 그러한 면에서 어쩌면 시장참여자 중에서 자본가에는 애초에 강력한 국가로부터 찾아올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월街의 사태를 보더라도 그들은 든든한 조력자가 아닌가 말이다.

한편 앞서 살펴본 화폐주조권이 독점되어 있기에, 연준이 – 현대판 군주(?) – 그것을 잘 못 사용하였기에 그들 자체가 대공황의 주범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앞서 언급한 “미국에서의 화폐의 역사”에서 연준이 최종대부자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여 은행 공황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책적 실수도 있었지만 금본위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이번 금융위기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원인이 결합되어 폭발한 당시의 대공황을 단순히 통화의 수축만을 원인으로, 그것도 음모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의 실패를 바탕으로 최종대부자의 기능을 없애버리자는 – 또는 통화량 조절이외에는 다른 짓은 하지 말라는 – 발상은 허리띠를 안 매고 다니면 살이 빠질 것이라는 착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쯤에서 프리드먼이 보호하고자 하는 자유가 도대체 어떠한 자유인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이것이 아닐까?


“나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한 것은 고맙다. 그러나 내가 보너스를 받을 자유는 빼앗지 말라.”

최상위 임원들의 임금과 보너스를 강력히 제한하겠다는 발표 하루 뒤 AIG는 이들 임원 중 몇몇은 내년에 “유지 보너스”로 수백만 달러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One day after announcing strict limits on salaries and bonuses for its top tier of executives, AIG revealed that some of those executives will receive millions in “retention bonuses” next year.[AIG to pay retention bonuses to executives, Financial Times, 2008.11.26]

(주1) 원래 통화주의 자체가 조악한 것일지도…

(주2) 여기에서의 자유주의는 우리가 오늘 날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사상적 뿌리와는 다르다. 이는 미국에서는 자유주의, 즉 liberalism을 1차 세계대전 당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진보당의 작가들이 진보주의 progressivism의 대체물로써 선점하였기 때문이다.

연방준비제도에 관한 이슈 하나

최근 개인적으로 필독하는 블로그들에서 회자되고 있는 경제관련 이야기가 여럿 있는데 우선은 가장 중요한 현재의 금융위기이고, 그 다음에는 그 금융위기로 인해 논객으로 떠오른 미네르바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어느 중국 은행가가 썼다는 “화폐전쟁”이라는 책이다. 이중 사실 제일 구미가 당기는 부분은 “화폐전쟁”, 보다 정확하게는 그 책이 주장하고 있다는 음모론의 핵심부 美연방준비제도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공부가 부족하다싶어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파고들어보리라 맘먹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거니와, 음모론도 은근 쏠쏠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

각설하고 연방준비제도가 과연 어떠한 존재냐 하는 것이 음모론자들과 그 반대자들의 주장의 대척점이 되는데 사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명쾌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중 한 쟁점이 연방준비제도가 그들이 발행하는 화폐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재무부채권을 인수하여 이득을 취하는가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혹자는 모두 다 재무부가 가져간다고 하고 혹자는 조폐권을 볼모로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일단 연방준비은행이 모든 이익을 재무부로 고스란히 뺏기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나라의 중앙은행 시스템의 운용도구로써 의회가 설립한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들은 사기업인 것처럼 조직되었다. 아마도 “소유권”에 관해서 혼동을 초래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준비은행들은 회원은행들에게 주식지분을 발행한다. 그러나 준비은행 주식의 소유는 사기업의 주식소유와 매우 다르다. 준비은행들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운영되지 않으며 일정량의 주식 소유권은 법에 의해 시스템의 회원에 대한 요구조건이다. 주식은 팔거나, 거래하거나, 또는 채무에 대한 담보의 성격으로 제공되지 못한다. 배당은 법에 의해 1년에 6%다.
The twelve regional Federal Reserve Banks, which were established by Congress as the operating arms of the nation’s central banking system, are organized much like private corporations–possibly leading to some confusion about “ownership.” For example, the Reserve Banks issue shares of stock to member banks. However, owning Reserve Bank stock is quite different from owning stock in a private company. The Reserve Banks are not operated for profit, and ownership of a certain amount of stock is, by law, a condition of membership in the System. The stock may not be sold, traded, or pledged as security for a loan; dividends are, by law, 6 percent per year. [출처]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Federal Reserve Act 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배당에 관한 해당조항은 Stock Issues; Increase and Decrease of Capital 조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법 조항을 살펴보면 적어도 – 표면상으로는 –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천문학적인 이익을 취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자신들의 주식에 대한 정률의 배당권을 보장받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생돈을 넣어놓고만 있을 수는 없는 문제기도 하니까 말이다.

연방준비제도의 역할, 그리고 음모론

지난 번 “美모기지 시장의 두 거인, 법정관리 임박?” 이라는 글에서 Inigo님께서 아주 좋은 말씀을 남겨주셨다. 특히 연방준비제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CNBC의 뉴스(동영상 보기) 를 추천해주셨는데 관심 있는 분들은 꼭 보시기를 권한다. 다만 내용이 영어인지라 –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 보시는 분들 힘들어하실까 봐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 가장 재미있는 부분의 – 스크립트를 번역해둔다. 인용문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오랜 동안 몸담고 있는 Harvey Rosenblum씨가 한말이다.

경제에서 연방준비제도는 도덕적 해이를 유발한다. 중앙은행이 된다는 단순한 역할은 당신의 일이 도덕적 해이의 유발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개 중앙은행은 “최종대부자”다. 사람들이 유사시에 의지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최종대부자를 가지는 것보다 더 도덕적으로 해이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연방준비제도의 직무는 저 바깥(세상)을 강타하고 있는 모든 경제적 공포에 빠진 3억 명의 미국시민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는 것이다.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도덕적 해이, 도덕적 해이”를 외칠 때이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다.

The Federal Reserve is in business to create moral hazard. The mere act of being a central banker means that your job description involves creating moral hazard. A central bank is a “lender of last resort,” what more moral hazard can you have than having a lender of last resort that people know, when push can to shove, can be relied upon? The Federal Reserve’s job is to cushion the blow to 300 million American citizens of all the economic shocks that hit out there. What drives me crazy is when I hear people shouting “Moral hazard, moral hazard”… that’s what my job is to do…

도덕적해이의 유발이 연방준비제도의 일이라는 주장이 사뭇 도발적이다. 이는 사실 최종대부자로서의 연방준비제도의 역할을 다소 자극적으로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다. 자립심을 갖고 살아가야 할 한 젊은 대학생이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기 벅차서 결국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Harvey가 말하는 “도덕적 해이”다. 즉 그의 진정한 의도는 시장에 그런 신뢰감(많은 시장참여자들이 도덕적 해이라고 비난하는)을 부여하는 것이 연방준비제도의 역할이니 너무 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경제사를 살펴보면 이 나라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최종대부자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번 심각한 금융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오늘 날과 같은 연방준비제도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오늘 날 미국의 비롯한 대다수의 국가들이 그 형태가 어찌되었든 간에 ‘최종대부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는 사례는 없고, 그것이 지금 미국에서 연방준비제도가 하고 있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하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엄밀히 말해 국가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프레디맥, 패미메도 그 야릇한 지위 때문에 사람들의 혼동을 야기하고 있지만 연방준비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제도가 구성하고 있는 각종 기관들은 국가의 소유가 아닌 민간은행들의 소유다.(물론 당사자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한편 음모론자들의 주장은?) 대통령의 승인을 얻기는 하지만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이사들은 거의 민간은행에 의해 낙점되다시피 한다. 그러면서도 미국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결정적으로 미국의 화폐, 즉 US달러의 통화발행권은 미국 정부가 아닌 이들이 쥐고 있다. 미국 정부는 채권을 발행하여 이들에게 US달러를 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복잡한 상호관계로 말미암아 연방준비제도는 음모론자들을 비롯한 여러 반정부/반금융 세력들의 끊임없는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위의 스크립트를 퍼온 Lawson for Congress 라는 블로그 역시 이러한 음모론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즉 블로그는 “민간 독점기업이 공짜로 돈을 찍어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We cannot allow a private monopoly to create money out of nothing to loan to us at interest)”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 음모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최종대부자’로서의 중앙은행의 존재의의 자체를 거부하는 주장까지 접어들면 대략 난감해진다. 즉 중앙은행은 시장의 교란을 완화(cushion)하는 주체가 아니라 시장의 교란,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보통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적 입장을 끌어오곤 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자유로운 발권력을 가진 ‘자주적인’ 정부를 꿈꾼다.

이런 음모론을 읽으면 무척이나 재밌다. 프리메이슨, 우드로 윌슨, 그린백, 히틀러와 레닌을 지원한 금융투기세력, 케네디의 암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 등 세상이 온통 하나의 꽉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착착 움직여가고 있음에 전율을 느낀다. 책 한권을 끝날 때쯤이면 거대한 악의 세력의 존재감에 몸서리가 처진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다. 너무 빠지다간 염세론자가 되고 만다. 🙂

음모론의 황당함은 기회가 되면 또 이야기하기로 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로 돌아가자. 결국 특히나 오늘 날과 같이 한층 경제활동이 복잡해지고 규모화되어 있는 시장에서는 ‘최종대부자’로서의 중앙은행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더불어 더욱 그 활동범위가 강화되고 세분화되어야 한다. 규제는 잘못 수립되었기에 나쁜 것이지 많아서 나쁜 것이 아니다. 규제가 없으면 지원도 없다. 시장근본주의자는 때로 고의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내가 보기에도 이상한 제도지만 그 제도가 없었다면 이번 서브프라임 사태시에 분명히 미국의 경제는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붕괴되었을 것이다.

Manchurian Candidate : 지적사고를 요하는 스릴러

인간의 의식은 조정당할 수 있을까?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영화라는 매체는 이러한 소재를 지속적으로 이용해왔다. 의식의 조종, 이중성격, 기억의 불충분함과 같은 인간의 의식과 성격에 관한 것들이야말로 영화의 극적긴장감을 구성해주는데 있어 최고의 요리재료이기 때문이다.

‘양들의 침묵’의 감독 조나단 드미가 감독하고 덴젤 워싱턴(베넷 마르코 소령 역)이 주연한 2004년작 ‘맨추리언 캔디데이트(The Manchurian Candidate)’는 가공할 음모집단에 의해 의식을 조정당한 한 전도유망한 정치가를 둘러싼 음모와 배신의 드라마이다. 복잡한 플롯으로 관객들을 헷갈리게 하는 요즘의 스릴러 경향을 보면 그다지 정교하게 구성되었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지만 실은 이 초현실적인 영화의 오리지널이 1962년산이라면 한번쯤 흥미를 느낄 것이다.

시대를 앞선 걸작 스릴러로 평가받는 오리지널은 존 프랭큰하이머가 감독하고 프랭크 시나트라(베넷 마르코 소령 역), 로렌스 하비(레이몬드 쇼 역) 등이 출연하였다. 한국전 당시 소대가 통째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이후 소대원들은 한결같이 레이몬드 쇼 하사가 영웅적으로 그들을 구했다고 증언하고 그 결과 레이몬든 쇼는 전쟁영웅이 되어 금의환향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 모든 영웅담은 국제적인 규모의 음모집단에 의해 조작된 것이고 레이몬드 쇼를 비롯한 소대원 전부는 철저한 마인드컨트롤에 의해 조정을 받고 있었다. 결국 최면상태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과 그 아버지까지 죽인 레이몬드 쇼는 로봇이 되어버린 스스로의 몸을 자신의 의지로 포기하고 만다.

오리지널 작품은 이러한 으스스한 설정 아래 매카시즘, 전쟁의 광기, 그리고 가공할 음모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영화의 원작자 리차드 콘돈은 이러한 음모론을 현실로 받아들인 이 중의 하나이다. 그는 실제로 현실에서도 이러한 의식의 조정이 음모집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이였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반공주의적 메시지로 전락하지 않고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며 마침내는 상상 못할 반전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 오리지널 영화의 미덕이다.

스릴러를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관객이 반전의 묘미를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나단 드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험을 감수했고 일단은 원작보다 조금 더 꼬아서 반전을 시도했기에 어느 정도 그 모험은 성공했다라고 평가내릴 수 있다. 더불어 오리지널이 담고 있던 매카시즘 광풍의 시대상황은 요즘의 정치상황에 맞게 일극체제의 신안보주의 상황으로 적절히 대치되었다.

그리고 음모집단의 정체도 오리지널의 중국-소련 연합 공산주의자에서(이 부분이 영화의 묘미인데 언뜻 이러한 설정때문에 반공주의적인 영화로 보이나 실은 매카시즘의 비판이 감독의 진정한 의도로 추측된다) 사모투자펀드 ‘맨츄리언 글로발’로 설정되어 보다 현대적인 ‘공공의 적’(!)을 창조해냈고, 오리지널에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맨츄리언’이라는 단어의 타당성도 나름대로 부여하고 있다.

극중 캐릭터의 분석도 나름대로 진일보하였는데 다만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레이몬드 쇼의 어머니 역할은 그녀의 뛰어난 연기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에서 같은 역을 연기한 엔젤라 랜스베리의 소름끼치는 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느낌을 준다.

히스테릭한 반공주의 시대를 비판하였던 오리지널이 21세기인 2004년에 또다시 리메이크되었다는 사실은 관객으로서는 즐거움일지 몰라도 리메이크가 만들어질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광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한 시대상황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비판의 대상은 미국 일극체제의 안보에 대한 공포로 변하였는데 그것이 반공주의만큼이나 조작된 정치적 허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이 영화를 국제적인 무기 암거래를 소재로 한 2005년 작 ‘전쟁의 지배자(Lord Of War)’와 비교하여 감상하면 보다 흥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