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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의 ‘사내유보금 과세’에 대한 격렬한 저항에 관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이끄는 새 경제팀의 핵심정책 중 하나인 사내유보금 과세 정책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매체는 한국경제신문이다. 매일경제신문의 경우 어느 정도 정책도입의 필요성을 찬성하는 편인 반면, 한경은 과세원칙이나 실효성 등과 같은 논란을 뛰어넘어 “사회주의자들의 음습한 노림수”라는 표현까지 등장시키는 이념적 잣대까지 들이대가며 그 부당성을 계속하여 주장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은 바로 복지국가라는 이름 아래 환생(還生)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사내유보금 과세 논란은 그런 사회주의자들의 음습한 노림수를 사려 깊지 못한 정치권이 수용하려는 태도에서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최소한의 생활보조 차원을 넘어 나이나 계층 등의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보편적 복지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전방위적 증세를 알리는 신호탄이다.[유보금 과세, 국가 정체성 훼손하는 강제]

김영용 전남대 경제학과 교수의 칼럼이다. 이 글에서 그는 복지국가로의 지향이 사회주의 이념의 환생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내유보금 과세는 그 이념의 환생에 기름을 부을 전방위적 증세의 신호탄이다. 보도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 14명중 8명 찬성, 2명 반대, 4명 입장유보인데, 필자의 주장에 따르면 8명 의원은 사회주의자의 노림수를 모르는 사려 깊지 못한 정치권인 셈이다.

사내유보금은 자본의 항목으로서 부채비율의 분모를 증가시키고 부채비율을 감소시켜 신용등급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중략] 이런 정책이 성공적으로 실현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자. 임금 인상은 이익 감소로 직결돼 현재도 저조한 추세인 기업의 수익성이 더 낮아진다. 배당 증가는 유보이익을 감소시켜 투자 감소로 연결된다. 현금성자산이 줄어 위기상황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투자여력도 감소한다. [사내유보금은 나쁜 것인가]

좀 더 이성적인 한인구 KAIST 경영대학 교수의 글이다. 재무제표 중 재무상태표의 자본 항목에 해당한다. 이에 자본을 분모로 하는 부채비율의 산정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후 왜 이익잉여금을 남겨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신선하지 않다. 기업수익성 악화방지를 위해 임금도 배당도 늘이지 않겠다는 주장은 주주 자본주의나 이해자 자본주의 모두의 이해관계에 반한다.

배당수입으로 가계소득이 늘어난다면 이미 서민도 아니다. 기업이익을 임금 인상에 반영하라는 것 역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만 더 벌어지게 할 것이다. [중략] 여러번 강조할 이유도 없이 기업이익의 처분은 기업가의 지극히 고유한 경영상 판단에 속하는 문제다. 오늘과 내일, 단기와 장기에 걸친 자원의 배분이야말로 기업가의 선택이요 경영행위의 본질에 속한다.[‘기업소득 환류’로 간판 바꾼 유보금 과세, 정말 이럴 건가]

앞서의 글이 외부필진의 칼럼이라면 이건 사설이다. 배당수입이 있으면 서민이 아니랄지 임금 인상하면 임금격차만 벌어진달지 하는 것은 괜한 오지랖일 뿐이다. 사설의 핵심은 기업이익의 처분이 “기업가의 고유한 경영판단”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최 부총리는 이미 법인세 깎아줬더니 투자를 안 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처분할 기업이익의 원천은 정부가 만들어줬다는 이야기다. 이건 정부의 고유한 정책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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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습한 사회주의자들

요컨대 한경의 논조는 사내유보금 과세는 정부가 기업의 고유한 경영판단에 간섭하는 짓이며 기업이익을 감소시키고 종래에는 사회주의자의 음습한 노림수에 놀아나 그 이념의 환생에 기여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과잉주장은 과세의 실효성이랄지 정책연계성 등에 대한 건설적 논의를 가로막을 뿐이다. 한편으로 사회잉여를 선순환 경제에 분배하지 않고 한 푼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스크루지의 추한 얼굴도 떠오른다.

정부만이 할 수 있는 기획

미국은 현재 의료비가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중반 정도이지만, 이대로 의료비가 늘어나면 2020년에는 20%중반까지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움직임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예방에 대한 관심이다. 이미 암이라는 질병에서 잘 드러났지만, 전체 치료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악화된 다음보다는 초기에 검진해서 찾아내는 것이 싸게 들고, 그보다 이전에 흡연이나 음주와 같이 암을 유발하는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발생률을 낮추는 것이 싸게 든다.[컨트라리언 전략, 이지효 지음, 처음북스, 2014년, p155]

GDP에 관한 역설을 잘 설명해주는 대목 같아서 인용했다. 사람들이 술과 담배를 즐긴다. 그리고 평소에 검진을 게을리 한다. 그러다 암에 걸려 치료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GDP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검진을 게을리 하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향락 산업과 의료 산업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사후치료보다는 예방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개별산업이나 개별가계 차원이 아닌 사회 전체적 관점에서 기획을 할 수 있는 주체는 주로 정부다. 사실상 유일하게 정부만이 개별산업의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이른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이런 계획을 입안하고 비용을 지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지출에 대해서 아마도 아인 랜드라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내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돈을 지출하느냐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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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el Dieu in Paris about 1500” by Unknown – http://www.mja.com.au/public/issues/177_11_021202/dec10354_fm.html#i1067496.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한편 그렇다면 정부는 이와 같은 기획을 추진할 재원을 무엇을 통해서 조달할 수 있을까? 대표적인 사례가 비만 등의 원인인 탄산음료에 매기는 “죄악세”가 있을 것이다. 오바마는 자신의 건강보험 계획의 재원으로 이 세금을 매기려 했었다.1 암 예방을 위한 의료센터의 설립 역시 담배나 술을 파는 회사로부터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는 일종의 도관체인 셈이다.

요컨대 정부는, 예를 들어 건강이라는 이슈에 대해서 개별산업의 경제적 이익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또는 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이는 또한 사회 전체적으로는 GDP에 악영향을 미칠지라도 정부 개별의 대차대조표 상으로는 유익한 행동이기 때문에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이 또 다른 경제적 관점에서는 어떠할까? 적어도 이 사례는 장기적인 생산력 관점에서도 이익일 것이다.

그들의 동정심도 쓸모가 있다

인플레이션 대 ‘동정’이라는 싸구려 희극을 보라. 복지국가 정책이 이 나라(와 전全문명세계)를 거의 경제적 파탄(그 전조는 바로 인플레이션이다)에까지 몰아넣었지만, 압력을 행사하는 집단들은 비생산적인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이 기부하라고 요구하면서 반대자들에게는 ‘동정심’이 없다고 소리 지른다. 동정 그 자체는 밀은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자라게 할 수 없다. 이미 망한(즉 자신의 자원은 다 소모해버린 채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고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사람(혹은 나라)의 ‘동정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철학 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 中 말의 입으로부터(1975년), 아인 랜드 저, 이종욱/유주현 역, 자유기업선테, 1998년, pp 144~145]

복지국가 정책이 어떻게 인플레이션을 촉발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글 나머지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그의 다른 에세이 ‘평등주의와 인플레이션’을 보면 그는 불가항력 등으로 인해 어그러지는 생산 체계로 말미암아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비추어보면 그는 아마도 생산 없이 소비만 하는 “아무것도 내줄 것이 없는” 사람이 생산 체계를 왜곡시켜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이미 망한” 사람이나 나라에서 새로운 활력이 솟아나 그들의 동정심이 다시 생산자에게 도움을 줬던 역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지 궁금하다. 실업급여, 건강보험, 대외원조와 같은 복지는 어쨌든 장기실업, 건강악화, 정정혼란과 같은 더 큰 비용을 발생시킬 사태악화를 막는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난 노동자나 貧國은 생산자의 일원으로 복귀해 경기선순환에 참여하며 ‘동정심’ 클럽의 일원이 되었다.

‘전 국민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으니 더 좋은 세상이 된 것일까?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하게 될수록 잘 사는 이들은 더 못사는 이들과 보다 적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나누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중요한 상품들을 – 건강보험, 교육, 보안 서비스, 교통, 레크리에이션 서비스 – 민간부문에서 개별적으로 구입하거나 사적인 커뮤니티 혹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시킬 목적의 조닝 제도에 의해 관할되는 지방자치제 안에서의 공동으로 구입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상품들이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공공적으로 공급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출처]

이코노미스트의 “Why aren’t the poor storming the barricades?”이라는 기사가 인용한 미시간 대학교 철학교수인 엘리자베스 앤더슨의 글이다. 이글은 오늘날 아무리 가난한 이들일지라도 이전 세대에서는 더 잘사는 사람들이 살수조차 없었던 많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 예를 들면 냉장고나 휴대폰 등 – 세상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자와 빈자간의 차이에 대해 유념하여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글이다. 즉, 가난한 이들이 각종 재화와 서비스 중에서도 특히 집합재와 공동재 등과 같은 소위 “공공재”에로의 접근권이 제한받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공재는 위에서 언급한 건강보험, 교육, 치안, 교통 등 사회발전을 위한 하부구조로써 공공유틸리티, 공공서비스, 사회간접자본, 복지 등 다양한 이름1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집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것은 각국이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늘어나는 소요(needs)에 부응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던 것이 빈부차가 심해지면서 인용문에서 설명하듯이 여러 서비스들이 민영화되거나 보다 값비싼 사적재(私的財)로 대체되면서 공공적 사용이 배제되거나 질이 하락하고 있다.

“공공재”로 불리는 많은 것들이 경제학적으로는 비배제성/비경합성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인 동시에 시장에 의해 공급되어 특정 세력을 배제시키게 되면 사회의 유지 및 발전에 저해될 것이라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기에 공공재로 공급된 것이다. 보편적 교육이 없으면 “결과의 평등” 이전에 “기회의 평등”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기에 공립학교가 공급된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제 이러한 배제 없는 서비스 이용을 부자들 혹은 부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반대하기에 빈부차가 여전히 유의미하다.

불평등은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을 질투하게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로부터 박탈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Why aren’t the poor storming the barricades?]

아무리 가난한 이라도 웬만하면 집에 TV는 있고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집만 나서면 실업자가 거리를 배회하는 근린에 거주하고, 몸이 아파도 여력이 안 돼 병원에 가지 못한다면 사회의 지탱가능성은 더욱 희미해질 것이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을 체감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경제정책을 복지에 중점을 맞추어 시행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2 그 와중에 현 정부는 예산부족을 핑계로 등록금 인하 공약을 파기했다. 이젠 놀랍지도 않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신영석 부원장은 ‘한국형 복지모델의 전망과 모색’ 보고서에서 지난해 9월 표본추출한 만 19세 이상의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한 결과 [중략] ‘경제성장을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한다’와 ‘복지정책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응답은 각각 54.7%와 42.0%로 나타났다. 연령대별로 경제성장이 더 중요하다는 응답은 60▪70대 65.0대, 50대 67.3%, 40대 60.1%로 40대 이상은 60% 이상이었으나 30대와 20대는 37.1%와 39.8%로 나타나 대조적인 양상을 보였다. 반면 복지정책의 중요도에 대해서는 30대와 20대가 61.3%, 56.8%의 높은 응답률을 보인 것과 달리 40대는 38.6%, 50대는 31.2%, 60▪70대는 26%에 그쳤다. [세계일보, 60,70대 65% “복지보다 성장 우선”, 2014.1.20]

기본소득 단상

‘연금재원을 소비세로 하자’고 제안했을 때 반드시 나오는 반론이 있다. 그것은 ‘소비세에는 역진성(逆進性)이 있다’는 주장이다. [중략] 그래서 내가 제창하고 싶은 것이 ‘환급금부 소비세’다. 예를 들어 소비세가 20퍼센트가 되었을 때, 연수 200만 엔인 사람들의 소비세 부담은 (모든 수입을 소비로 돌렸다고 하면) 40만 엔이 되는데, 이 세율 인상과 동시에 ‘전 국민에게 균등하게 매년 40만 엔씩 환급한다’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중략] 이 같은 ‘환급금부 소비세’의 아이디어의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은 ‘베이직인컴(기초적 소득)’이라는 세상이다. [중략]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덴마크는 기초연금은 세금방식이고, 모든 거주자에 대해서 무조건으로 지불한다. [중략] 연금은 퇴직 후에 평등하게 주는 급부인데, 이것도 퇴직 후라고 하지 않고, ‘지금 당장’, 모든 연대의 사람에게 확대하는 것이 베이직인컴 제도라고 생각하면 된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p343~347]

사실 노동당 일부에서 주장하는 기본소득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소비세와 결합시켜 역진성을 없애고 기초생활도 보장하자는 아이디어는 참신하다. 물론 소비세와 결합하면 실질적으로는 기본소득이 이미 낸 세금에 대한 환급금에 불과하므로 상쇄효과 밖에 없다는 점이 눈에 띄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차원이므로 소비세 수입을 통한 추가적인 복지혜택 등과 결합하면 재분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쨌든 기본소득은 일반인의 ‘소득’에 대한 통념, 즉 ‘소득은 노동에 대한 반대급부다’라는 선입견에 비추어 볼 때 좀 의아한 개념이다. 존 로크가 재산형성의 기본적인 경로를 ‘노동’으로 정의한 이후 대부분의 사상가는 노동을 소득과 재산의 기본전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 맑스가 노동자의 노동을 부불(不拂)노동으로 정의한 이후 투여노동이 꼭 소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종의 균열이 생긴다.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체제라면 개인의 소득은 시장에서 결정된 노동에 대한 가격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이 시장에서 검증받은 능력에 대한 대가라고 정당화할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에서 이런 시각의 맹점으로 특정인이 금융구조화 능력이 뛰어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배경에는 금융시장이 발달한 시공간적 조건이 성숙되어야 한다는, 즉 사회 없이 개인의 특출함만으로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란 점을 지적한다.

마가렛 대처는 ‘사회란 없다’고 일갈했지만 소득은 개인의 능력과 함께 사회가 그 능력에 지불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가능한 것이다. 시장 역시 사회 안에 존재하며 맑스에 따르면 시장에서의 대가 중 지불되지 않는 노동도 있다. 적정한 재분배가 일어나지 않는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역할 또한 사회가 맡아야 한다는 당위에 비추어 보자면 ‘기본소득’은 진지하게 고려해야할 또 하나의 공적부조의 수단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복지체제로의 이행이 가능할까?

나는 북구 여러 나라의 경제가 지금 활황을 보여주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안심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인구적으로 봐도 소국인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나라가 서구선진국에 못지않은 국가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이들 나라의 ‘국민부담율’(세 부담과 사회보험료 부담의 합계)이 70퍼센트를 가볍게 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7할을 정부에게 흡수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식 발상에서는 전체주의 국가이고 수탈국가가 되는 것이다. [중략] 덴마크에서는 ‘자기가 투자를 하든가 해서 리스크를 안는 것보다는 정부에게 자금을 맡겨 장래의 생활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 같은 제도가 운영되겠지만, 지금의 일본에서는 그 정도로 정부를 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징수된 세금의 사용방식이 지금보다 훨씬 투명하고 납득성이 높은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북구와 같은 수준의 사회복지 시스템을 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p337~339]

미국 자본주의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말에서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며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딴 저자는 뼛속깊이 미국식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흡수하고 일본사회에 이 구조를 주입시키려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08년 미국의 신용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신념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쓴 책이 이 거창한 제목의 책이다. 아무튼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를 통째로 부정하기보다는 인용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와는 또 다른 자본주의인, 북구식의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평등이 강화된 그러한 자본주의를 원하는 것 같다.

저자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자기책임, 무한경쟁, 시장숭배, 승자독식의 논리가 지배적이며 이런 논리는 전통적으로 신뢰, 계열화, 연공서열, 평등주의 등을 강조하던 일본식 자본주의와는 맞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물론 일본식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던 그런 특징이 무사안일주의나 거대관료화와 같은 부작용으로 이어졌음은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부작용을 미국식 자본주의로 고치려 했던 것은 잘못이었음을 반성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일본사회와 일정 정도 유사한 국내사회와 비교하여도 일정한 시사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안 역시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저자가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나라의 국민부담률이 70퍼센트를 가볍게 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여부는 조금 의심스럽다. 내가 찾아본 바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스웨덴의 국민부담률이 45.7%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나라의 국민부담률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경이적으로 높다. 한국과 일본의 국민부담률은 2012년 현재 각각 25.0%와 26.9%다. 이 수준은 미국의 24.8%와 유사하고 OECD 평균인 33.8%에 크게 미달한다. 한국일보의 8월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향후 4년 내에 국민부담률을 30% 수준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국민부담률을 올리는 주요수단은 세수증대와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의 보험료율을 올리는 방법이 있다. 세수증대는 박 정부가 주장했던 지하경제 양성화나 세무조사 강화 등의 방법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율 인상 등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박 정부는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세제개편안을 내놓았지만 야당과 여론의 비판을 받아 일정 부분 계획을 수정하였다. 분명히 개편안이 만만한 월급생활자의 책임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런 사안조차 강한 반발에 부닥친 것은 이 사회가 개혁을 위한 사회적 자본이 얼마나 일천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즉, 오랜 군사독재와 지지 기반이 약한 정권교체 등 안정적 정치일정 경험이 부족한 남한 정치의 특성으로 인한 첨예한 갈등은 지속적으로 합리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저해하고 있다. 소위 뚝심있는 정책 추진을 위한 정치적 자본이 부족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분명 정치적으로는 수구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미약하나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내수 위주의 복지체제로 가려는 경향이 있음에도 야당과 그 지지자들은 현 정부의 정당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우를 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보편적 복지”를 지향한다는 민주당이 세제개편안을 “세금폭탄”이라 비난한 것이 그 사례다.

정치적 이념 지향과 경제적 이념 지향의 이러한 모순된 혼란은 소위 “민주화 세력”의 경제적 지향이 자의든 타의든 시장개방과 규제철폐, 그리고 한미FTA 추진 등 오히려 미국식 자본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고 지지자들도 뚜렷한 경제체제에 대한 고민이 없는 와중에 더욱 강화됐다. 사회는 어느새 승자독식과 약자배제의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져 인근 주거지역에 임대 아파트를 짓는 것을 반대하는 등의 이기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기도 한다. 수구적인 정치체제는 이러한 토양 속에서 강화된다. 그리고 현 정부는 자신들의 복지강화 정책이 반대에 부닥친다면 바로 그 명분으로 발을 뺄 것이다.

공공서비스, 불평등 심화, 그리고 “연대적 의무”

미국인의 삶에서 불평등 심화를 걱정하는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중략] 상류층 지역에서는 경찰에 의존하기보다는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한다. 자동차도 한집에 두세대가 되다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처럼 부유층이 공공장소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것들은 달리 대신할 수단이 없는 서민들만의 몫이 되어버린다.[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년, p368]

마이클 센델의 베스트셀러 – 한국에서 인문학 서적의 돌풍을 일으킨 –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의 불평등 심화가 가지는 핵심적인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유사 이래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더 좋은 사회을 위한 시민의 도덕적 책임의 세 범주들, 즉 “자연적 의무”와 “자발적 의무”에 덧붙여 센댈과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한 “연대적 의무”가 부의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희미해지는 상황을 묘사한 구절이다.

공공서비스는 실제로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재화이자 서비스다. 고속도로, 철도, 항만, 학교, 경찰, 군인 등의 인프라스트럭처 및 각종 서비스들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집합소비재에 대한 소요/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가 제공한 재화 및 서비스다. 이러한 재화/서비스는 지난 시절 시장에서 공급되기 어려운 제약조건 때문에 주로 국가가 공급해왔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전 세대가 지불한 도로를 이용해 자동차 여행을 즐기고, 치안의 보호를 받고,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 도달하는 방법론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고 센델이 말하고 있는데, 이런 공공서비스에서도 일종의 서사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세대는 전 세대의 땀으로 만들어진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한 공공서비스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연대적 의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연대적 의무”는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공공재정의 위기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공공서비스는 민영화/사유화되었는데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염자부담원칙(polluter pay principle)이다. 개인적으로는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편으로 지지하는 바이지만, 역시 다음 세대에게 빚을 떠넘긴다는 점에서 고유의 “연대적 의무”에서는 멀어지고 있다.

공공서비스에 대한 “연대적 의무”는 美민주당의 진보적 투사로 떠오르고 있는 엘리자베스 워렌이 한 가정집에서 했던 연설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그는 그 연설에서 자본가들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 도로로 운송”해서 돈을 벌었으니 “다음 세대를 위해 내놓는 것이 사회의 암묵적 계약이 아니었냐”고 묻고 있다. 탈세와 이로 인한 공공재정의 위기를 질타한 이 연설에서 그는 서사적인 “연대적 의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무감의 퇴색은 센델이 지적하는 것처럼 동시대의 소비영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경찰기능이 완전 민영화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사설경찰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대중교통 확충보다는 기름 값 추이에 더 신경을 쓰는 형편이다. 실제로 런던에서는 한때 부자동네 의회가 시의 지하철 확충에 자신들의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우긴 적도 있었다. 부의 편중에 따른 의무감 퇴색의 전형적 예다.

이러한 관점을 아까 올린 목동의 사례로 보면 흥미로워진다. 학교라는 공공서비스가 – 사립학교라 할지라도 여전히 공공적 기능이 있다 – 목동에 위치하면서 주민들은 교육 혜택을 누려왔다. 여러 요인에 의해 “귀족 학군”으로 분류되며 집값 상승이라는 부수적 효과도 거둔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교육을 “목동 학군”의 일종의 사적재(私的才)로 향유하려는 욕망이 생겼다. 저소득층과 그 사적재를 나누기가 싫다고 한다.

요컨대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른 재화/서비스 공급방식을 보면 대개의 자기서비스(self-help)가 주를 이루었고, 사회가 발달하면서 정부에 의한 공공서비스의 공급이 활성화되다가 이제 여러 서비스들이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사적재와 공공재가 분화되는 길을 걷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서사적인 연대의식은 희미해져가고 있다. 또는 심지어 특정 공공재를 사적재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