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환경

코로나19 정국에 즈음한 쇠라의 그림에 대한 상념

인류는 엄중한 “팬데믹”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갖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각 나라 혹은 지자체의 수장(首長)들이 여태 하지 않았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황도 그러한 유례없는 현상 중 하나인데, 바로 이들이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러있으라고 달래거나, 윽박지르거나, 읍소하는 업무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 내가 우연히 접한 기사는 로리 라이트풋이라는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는 예의 그 희한한 업무를 수행하는 상황을 묘사한 기사다.

어찌 보면 – 요즘 상황에 비추어볼 때 –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 기사에서 내 눈을 잡아끈 것이 있는데 바로 시장의 얼굴을 찍은 자료 사진이다. 시장으로서 흔치 않은 흑인 여성이라서 눈여겨 본 것은 아니고 배경으로 쓰인 그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가 그린 그의 필생의 역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이 그림은 현재 시카고 미술원에 전시되어 있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시카고 시장이 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중이라는 상황 설정의 사진에 이 그림이 배경으로 찍히게 된 것이다.

A Sunday on La Grande Jatte, Georges Seurat, 1884.jpg
By 조르주 쇠라 – Art Institute of Chicago, 퍼블릭 도메인, 링크

개인적으로 이 사진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매체의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진이 현 상황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지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응축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유원지와 같은 공공공간(公共空間)과 그곳에서의 휴식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시민의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이고, 어찌 보면 쇠라의 그림은 바로 그러한 자유를 암암리에 묘사한 작품인데, 시장이 그 작품 앞에서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야외에서의 휴식, 혹은 이동의 자유를 공공(公共)의 이익을 위해 제한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여겨지기에 아이러니하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개인의 이동과 휴식의 자유는 소중하다. 그렇기에 유사 이래 이윤창출을 위해 쉼 없이 일해야 했던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그 자유를 쟁취하려 했고,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문명사회에 접어들어 휴식의 자유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공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전 세계 상당수의 시민들은 광학현미경으로는 볼 수도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그 자유가 자율적/타율적으로 제한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료보건의 팬데믹에 대한 확실한 인프라의 구비 역시 여태의 자유를 보장하는 또 하나의 전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인프라 중 핵심은 의료 인프라겠으나, 또 하나 한국에서의 코로나19 통제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인프라가 디지털화된 개인정보 데이터 축적과 이 정보의 공유 시스템이다. 한국은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은 달성했다는 유리한 여건 이외에도 사실상 전 국민을 코드화한 주민등록번호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개인정보 빅데이터가 존재하고 국가가 그것을 통제하기에 역설적으로 도시폐쇄 없이 주민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 “프라이버시”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유럽인들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국가 혹은 여하한의 기관이 개인정보 빅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활용할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조직범죄나 다름없는 “n번방” 사건 역시 개인정보를 시골 면사무소 286 컴퓨터에서조차 검색할 수 있는 한국이기에 더 범행이 용이했을 것이라는 개연성도 그러한 불편한 상황의 한 사례다. 하지만 어떤 유튜버도 말하듯 어차피 개인정보 빅데이터는 이미 구글과 페이스북이 일개국가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1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통제 없는 개인의 완벽한 자유는 이제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꿈인지도 모른다.

우연치 않게 한국이 현재 코로나19 사태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각국은 이 사태가 진정된 이후 복기를 통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반성 없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라면 ‘민주적 의사결정’, ‘투명성’, ‘적절하게 통제되는 정보의 활용’이라는 교훈을 얻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21세기 형 경찰국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미 어떤 나라는 그러한 황폐한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나라는 아직도 우월감에 빠져 다른 나라를 까기 바쁘고.

소설을 읽다가 샘터 주인인 척 했던 어떤 인간이 떠오르다

“아니, 내가 뭐, 버는 게 있어서? 빨래라야 그저 여름 한철이지, 그것두 이제 장마나 지면 다 쓸려내려가구…. 흥! 그야말루 오 전 십 전 빨래 값 받어가지구 해마다 세금 바치려면 쩔쩔매는 판인데….”
그리고 그는 잠깐 말을 끊었으나, 칠성아범이,
“허지만….”
하고, 또 이의를 제출하려는 기색에, 그는 즉시 말을 이어,
“더구나, 소문을 들으면, 뭐 청계천을 덮어버린단 말이 있지 않어? 위생에 나쁘다던가… 그러니, 정말 그렇게나 되구 본댐야, 인젠 삼순구식두 참 정말 어려울 지경이니…. 흥! 말두 말어.”[천변풍경, 박태원 저, 문학과지성사, 2014년, p168]

소설가 박태원이 1936년 8월부터 10월까지 『조광』에 연재한 ‘천변풍경’의 일부다. 이 소설은 청계천 주변에 사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소묘(素描)하듯 담백하게 그린 소설이다. 인용한 부분은 그 중에서도 제17절 샘터 문답에서 샘터 주인이 칠성아범과 민주사 집 행랑아범과 나누던 대화의 일부다. 샘터 주인이란 말 그대로 청계천 중 일부를 자기 것으로 하여 빨래하는 이들로부터 사용료를 받는 이었다. 이런 권리가 어떠한 법적 권리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나와 있지 않다.

Frame house along Seikei-Sen.JPG
미상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의 “Frame house along Seikei-Sen“. 위키미디어 공용에 의해 Public domain으로 라이선스됨.

일제강점기 시절의 청계천 모습

청계천은 원래 그냥 개천으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다. 인용문을 보면 박태원이 이 소설을 연재하던 시점에는 이미 개천의 이름이 청계천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 샘터 주인이 이야기하듯 실제로 일제 총독부는 청계천을 복개(覆蓋)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예산의 문제로 실행되지 못하고 한국전쟁 이후 1950~70년대에 걸쳐 복개공사가 이루어졌고, 이 공사는 일종의 근대화의 한 사례로 홍보되었다고 한다.

천변주민들에게는 빨래터이자 쓰레기 투기장이었고, 샘터 주인에게는 영업장이었던 그 곳이 “근대화”를 위해 덮여지고, 다시 “현대화”를 위해 덮개가 뜯어져 친환경(?) 관광 상품이 된 곳이 바로 청계천인 것이다. 청계천은 샘터 주인에게는 오 전이나 십 전 빨래 값 받아서 연명하게 해주는 도구였지만, 후에 이걸 보다 큰 이익에 이용해먹은 이가 있다. 2011년 건축가에 의해 최악의 건축물 3위에 뽑힌, 복원된 청계천으로 대통령이 되어 4대강으로 그 스케일을 확대시킨 이명박.

독일의 핵폐기 전략과 관련한 국제중재 소식과 그 의미

슈피겔 : 십억 유로 소송에 직면한 단계적 핵폐기

한 보도에 따르면 스웨덴의 에너지 기업 바텐팔(Vattenfall)이 독일정부를 고소할 계획인데, 이는 독일의 핵발전소에 대한 단계적 폐지와 관련된 대규모의 손실을 보상받기 위해서이다. 바텐팔은 전에 한번 성공적으로 독일정부와 겨룬 일이 있었다.

올봄 일본 후쿠시마의 핵재앙에 즈음하여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독일에서의 핵에너지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재빨리 결정했을 때, 많은 이들은 이 정책이 법정에서 끝을 맺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경제일간지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의 수요일판의 보도에 따르면, 바텐팔은 독일정부에 대하여 십억 유로의 소송을 제기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송은 워싱턴D.C.에 있는 국제분쟁해결센터(the International Center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 ICSID)에 제기될 예정라고 신문은 전하고 있다.

내부자가 한델스블라트에 전한 바에 따르면 바텐팔의 변호사들은 이미 고소장 작업을 거의 마무리했다고 한다. 회사는 단지 그들이 “핵에너지로부터의 탈피에 따른 보상”을 기대한다고만 기사에 말했다. 바텐팔은 브룬스뷔펠(Brunsbüttel) 핵발전소에 66.7%의 지분을, 크륌멜(Krümmel) 핵발전소에는 50%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모두 함부르크(Hamburg) 근처에 있다. 이 회사는 또한 두 발전소의 운영사이기도 한데, 둘 다 현재 웹사이트는 없다.

메르켈 정부는 2010년 가을,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이끈 중도좌파 정부가 계획한 단계별 핵폐기의 데드라인을 넘어서 독일의 핵원자로의 생명을 연장키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후쿠시마의 비극 이후, 메르켈의 친핵적인 과정은 정치적으로 연장되기 어려웠고 그는 재빨리 그 과정을 뒤집는다. 몇몇 원자로 — 바텐팔이 운영하는 두 개를 포함하여 — 2022년에 완결하는 것으로 예정한 새로운 단계적 폐지 계획에 따라 즉각 폐쇄됐다.

6월, 회사는 두 발전소의 폐쇄와 관련한 손실의 “공정한 보상”을 요구했고 법률소송을 암시했다. 독일 핵원자로의 다른 운영사들도 그 당시 비슷한 의도를 알려왔다. RWE 와 E.on은 이미 핵발전소 세금에 관해 연방정부를 고소한 상태다.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

바텐팔의 시각으로 보면, 핵발전소를 포기하는 독일정부의 결정은 그들 자산의 가치를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예전 발전소의 운영주기를 연장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신뢰하였기에, 회사는 두 시설에 7억 유로를 투자했다. 회사에 따르면, 이 투자는 이제 가치가 없다. 다른 여섯 개의 원자로 역시 일본에서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한 4월 11일의 그 주에 즉시 폐쇄되었다.

한델스블라트에 따르면, 바텐팔은 본사가 해외에 있기 때문에 보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재산권 개입에 대한 조인국의 해외투자자들을 보호해주는 에너지헌장조약(Energy Charter Treaty ; ECT)의 투자규칙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약문에 보면, 여기에는 투자자의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fair and equitable treatment)”가 포함되어 있다.

이 스웨덴 기업은 이미 2009년에도 독일정부를 상대로 ICSID에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바텐팔은 함부르크-무부르크(Hamburg-Moorburg)의 석탄화력 발전소에 대해 강화된 환경규정에 소를 제기했는데, 이자를 포함한 손실 14억 유로를 청구했다. 2010년 법정 바깥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출처 : 슈피겔

투자 중에서도 발전소 사업은 대규모의 자금조달, 장기의 투자회수 기간, 국제적인 규모의 투자에 따른 폴리티컬리스크 등 투자 사업이 가질 수 있는 주요한 리스크를 모두 망라하는 투자형태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에너지헌장조약과 같은 투자위험을 최소화해주어, 투자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각종 유인책이 마련되곤 한다.

바텐팔에게 있어 메르켈 정부의 결정은 정확하게 폴리티컬리스크에 해당한다. 이전의 단계적 핵폐기 전략을 수정한 우파 정부의 정책결정을 믿고 발전소 사업에 투자했던 바텐팔은 갑작스런 정책변경에 따라 수익창출의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이 사안의 일차적인 책임은 정책의 일관성을 잃어버린 메르켈 정부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비극이 핵발전소가 많은 특정국에 주는 충격을 감안하면, 그 결정을 마냥 비합리적이라거나 표를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라고만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이는 “공익에 따른 수용”에 해당할 것이고 이는 전 세계 법체계 모두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문제는 폐쇄될 공익시설이 市場化되어 있는 상황이다.

정부지출의 일종의 부외금융(off-balace financing)에 해당하는 민영화가 일반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익시설의 민영화는 어느 정도 정부채권의 변종형태에 해당하지만, 비극은 이렇게 정부가 그 채권의 지불을 중단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비극은 그 보상이 에너지헌장조약이나 FTA처럼 투자자에게 더 유리한 각종조항이 존재할 경우 한층 배가된다.

결국 이 사태에서 – 또는 다른 사례에서 – 어느 일방을 도덕적으로 매도하기는 쉬우나 그 사태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초국적으로 움직이는 자본의 존재, 그 자본의 자유를 보장하는 각종 조약, 행정권역이 제한된 국민국가의 존재, 사법적 판단의 초국적 상태 등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이전과는 매우 다른 낯선 풍경 말이다.

거리가구(street furniture) 단상

약수역 화장실 앞의 모습이다. 이건 ‘화장실을 찾기 쉽게’라기보다는 ‘이래도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불평할 테냐?’라고 외치는 것만 같은 신경질적인 풍경이다. 이런 경우는 극단적인 예일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도시생활의 편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소위 ‘거리가구(street furniture)’에 대해서 참 무감각하다 싶을 정도로 디자인 감각이 떨어진다.

여기서 디자인이라 함은 심미적인 면도 중요하거니와 가독성을 높여 이용자에게 편리함을 주는 디자인을 말한다. 여태 우리나라에서 도시의 거리가구들에 대해 디자인을 외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나마 이걸 강조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또 그런 디자인의 혁신을 이끌어냈느냐, 또는 최소한 그 기반을 마련했느냐 하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기껏 기억나는 디자인 이벤트는 서울시의 택시들을 획일적으로 한 색깔로 바꾸겠다는 시도였는데, 통일성을 부여한다는 면에서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결국 그가 고른 색깔은 최악의 듣도 보도 못한 색깔이었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누군가 그 색을 일컫길 “김치전 먹고 토한 색깔”이라고 하였는바, 이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논 값이 5만 원이었는데 25만 원이 됐어.”

“우리 논 값이 5만 원이었는데 25만 원이 됐어. 나 이제껏 그렇게 농사지어도 이번만한 돈, 못 벌어 봤어. 나 환경이니 동네 피해니 그딴 거는 모르고 일단 내 땅값이 오르니까 찬성이여 찬성!” 이포보를 찾아오신 한 주민의 이야기다. 이분께 멸종위기종의 문제를 얘기하며 4대강사업을 하지 말자 할 수는 없다. 그동안 애써 지켜온 농민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농민들이 개발붐을 타고 땅값이 오르는 것을 보며 4대강사업을 찬성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탓이기도 하다.[여주 사람들은 4대강사업에 왜 찬성하나요?, 정나래 환경운동연합 전국사무처 간사, 함께 사는 길 2010.9]

예전 아프리카의 코끼리를 지키려는 서구의 과학자들이 겪는 고초에 관한 에피소드를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다. 이 코끼리가 자못 거칠어서 농부들의 밭을 망치기도 한다. 마을 주민들에게 그는 당연히 없애야할 동물이다. 하지만 과학자는 종의 보호를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된다고 강변한다. 이 다큐에서 대립구도는 거시적인 안목을 지닌 서구 과학자와 이기적 사고를 하는 마을주민으로 형성된다.

내 땅의 가격이 올랐으니 4대강 찬성이라는 저 분의 에피소드도 얼핏 그런 구도로 형성될 소지가 있다. 글쓴이가 재빨리 이 구도를 희석시키며 “우리 모두의 탓”으로 돌리셨기에 4대강을 찬성하는 농민이 코끼리를 싫어하는 농민 신세가 되는 것은 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글쓴이가 저 증언을 끄집어낸 것은 결국 공동체의 보호가 개별인자의 이기심 때문에 균열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4대강 뿐만 아니라 허다한 개발 사업에서 공동체의 목표와 개인적 이해 간의 괴리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것 때문에 중앙과 지방, 현지인과 외부인, 그리고 현지인들끼리도 의견이 갈리고 반목한다. 대부분은 힘센 자의 논리에 따르게 된다. 힘없는 자들은 대개 그 사업의 지분이 작게 파편화되어 있어 합의가 쉽지 않다. 또한 그들의 가치는 역시 파편화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합의되지 않은 채 혼재되어 있다.

힘센 자는 자신의 논리에 수긍하는 자들에게 반대급부를 안겨준다. 지금 세상은 땅이라는 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화폐라는 대응물과 교환하는 방식이다. 그 많고 적음이 기준이지 그 방식에 대해선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다. 이른바 지배 이데올로기다. 저항하는 자가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반대급부를 찾아줘야 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가치이기에 설득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저항하는 자는 박노자 씨의 주장처럼 “자본주의는 동시에 피착취자 들의 순치과정이기도 하는 것”이기에 피착취자 역시 착취자의 세계관에 동의할 수 있다는 – 또는 적극적으로 옹호 – 사실을 유념하여야 한다. 아니 자본주의를 넘어서 아직 전(前)자본주의 형태일 아프리카의 농민에서 보듯이 여태 세상은 늘 그래왔으니 그걸 뛰어넘을 기획을 선보여야 한다. 서구 과학자처럼 오만한 도덕주의자로 비쳐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탱크’의 어원

사실 여기에 기적은 없다. 하데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인도의 농촌과 도시 외곽에서는 지금도 곳곳에서 버려진 연못을 볼 수 있다. 19세기 초반까지 인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계곡 아래에 진흙을 바른 얕은 저수지를 만들어놓고 몬순 기간에 내린 빗물을 모아 농업용수로 이용했다. 인도에서는 이 저수지를 ‘탄카tanka’라고 불렀고, 이 단어가 영국에 가서 ‘탱크tank’라는 외래어로 정착했다.[중략]
그러나 서구식 모델을 기반으로 한 관개체계가 인도 전역에서 실패하고 농민들이 지하수를 얻기 위해 점점 더 땅속 깊이 파 들어가는 오늘날, 구시대의 유물인 탄카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2010, pp433~435]

‘강의 죽음’ 읽기가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다. 소름끼치는 재앙에 대한 부분을 넘어서 이제 ‘그렇다면 과연 대안은 무엇인가’하는 부분을 배회하고 있다. 작가는 대안으로 대규모 관개시설 대신 고대의 지혜를 본받자고 주장하고 있다. 마을단위에서 빗물을 받아 재활용하는 이 방식은 현대인이 보기에는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물 확보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생태적으로 조화로운 이러한 방식이 도시와 농촌에서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인용한 부분은 또 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인용한 것이다. 즉, 우리가 당연히 영어로 알고 있었던, – 물론 나같이 무식한 것이나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 ‘탱크’라는 단어가 사실은 인도의 언어였고, 바로 물 부족을 해결할 대안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인용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나라 고지대 동네에 보면 옥상에 노란 탱크를 만들어두어 갈수기에 사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니 과거 ‘탄카’의 모습이 일부 남아있는 셈이다. 물론 그 안에 채워지는 것은 빗물이 아니라 수돗물 내지는 지하수다.

온라인에서 ‘탄카’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식의 보고 위키피디어마저 ‘탄카’에 대해 “Tanka (reservoir), as found in India”라 적혀 있을뿐 아무도 본문은 채워놓지 않았다. 오히려 tank를 검색했더니 우리가 잘 아는, 무시무시한 전쟁무기 탱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나온다. 물론 같은 어원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인도 시골에서 평화적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저수지의 이름이 바다 건너 서양에 가서 전쟁무기의 이름으로 발전(?)한 양상을 보고 있자니 쓴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끝까지 읽고서 독후감을 다시 한번 쓸까 생각중이지만 결국 ‘강의 죽음’은 우리가 자연의 정복자 행세를 하며 자연을, 특히 강을 지배하려 할 때에 어떠한 불행을 자초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뉴올리언스 지방의 카타리나 피해가 그 사례인데, 물론 직접적 원인은 부시 정부의 무능력하고 미흡한 대처였지만 근저에는 애초에 범람지역이었던 곳에 도시를 세운 인간의 아집이 그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그러므로 자연에 저항하거나 정복하려 하지 말고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온 옛사람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대규모 저수지가 아닌 주거에 근접한 소규모 저수지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그 체제의 여부를 떠나서 현대경제의 대량생산/대량소비의 메커니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강을 파괴했고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파괴했을 따름이다.

1킬로그램의 쌀을 얻기까지는 2,000~5,000리터의 물이 쓰인다. 이는 대다수의 가정에서 1주일 동안 쓰는 양보다 월등히 많은 양이다. [중략]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해 곡물을 먹여 키우는 가축까지 포함하면, 그 수치는 어마어마하게 증가한다. 소를 키워 쇠고기 1킬로그램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물의 양은 2만 4,000리터다. 1리터의 우유를 얻기 위해서는 2,000~4,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치즈는 어떨까? 1킬로그램의 체다 치즈나 브리 치즈, 카망베르 치즈를 얻으려면 약 5,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2010, p24]

출판사를 하는 친구의 아내가 이번에 내놓은 책인데, 서평을 블로그에 써준다는 핑계로 어제 책방에 깔린 책을 공짜로 얻어왔다.(친구야 쓸 거야 써~ 걱정 마~)

여하튼.. 쌀과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차지하는 면적과 쇠고기를 얻기 위해 차지하는 면적의 차이랄지 그런 부분에 대해선 가끔 이야기 들었는데 물에 대해서도 이만큼이나 소모량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니 또 한번 육식의 비효율성이랄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 안에 포함되는 영양소가 다를 수 있을지 몰라도 어느 면으로 보나 육식은 일종의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가급적이면’ 육식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 집에서는 쇠고기와 같은 고기 종류는 전혀 먹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생선을 가끔 먹는다. 밖에서 먹게 되면 — 특히 음주가 가미된 저녁 — 고기를 먹곤 한다. 우리나라는 채식위주의 식단이지만 막상 채식을 하려하면 의외로 쉽지 않다고 어떤 이가 그랬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암튼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기 시작한 책이다. ‘돈을 물처럼 쓴다’라는 말이 틀린 말임을 대번에 알게 해주는 책이다.

p.s. 책에 나와 있는데 커피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데 드는 물은 2만 리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