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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 지배”에 대한 단상

개인의 현실적 정신적 부 Reichtum는 전적으로 그의 현실적 관련들의 풍부함 Reichtum에 달려 있다는 것이 위에 의거하여 명백해진다. 이를 통하여 비로소 개별적 개인들은 여러 상이한 국민적 또는 지역적 한계로부터 해방되며, 전세계의 생산과(또한 전세계의 정신적 생산과도) 실천적 관련을 맺게 되고, 또한 세계 전체의 전면적 생산(인간의 창조물)을 향유할 능력을 획득하는 상태에 놓여진다. 이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 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중 독일이데올로기, 번역 최인호 외, 감수 김세균, 박종철출판사, p218]

맑스와 엥겔스가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낯선 힘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말할 때의 그 힘이란 무엇일까?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독일이데올로기’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당시까지 인민의 의식을 지배해왔던 지배계급의 관념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관념론일 수도 있고, 그 관념론에 의해 온존하고 있던 억압적인 생산관계일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자연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풍부해진 정신력과 물질문명을 통해 자연의 변덕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자원을 채취하고 더 많은 주거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통한 이득은 사적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당연하게도 자본의 차지다.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는 이 이득이 좀 더 많은 계급과 공유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체제조차 “의식적 지배”는 자연의 파괴를 지양해야 한다는 체제적 고민은 없었다. 그리하여 체제를 불문하고 무의식적으로 진행된 – 왜곡된 형태의 – “의식적 지배”의 결과로 자연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손해에 대한 비용은 이득의 향유자가 치르지 않기에 – 부(負)의 외부효과 – “세계사적 협업”은 말뿐인 공허한 외침이 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구(舊)사회주의권에서 이 편견은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 저자의 암시인바, 그들은 인민에 의한 자연정복 또는 자연개조를 사회주의의 승리로 보았다는 정황이 책의 곳곳에 제시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댐건설, 소련의 대규모 목화재배 농장들은 이러한 비극의 증거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들이라고 시장 효율적으로 물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도시는 먼 곳의 물을 끌어다 분수 물로 써버리는 천박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낭비했을 따름이다.[‘강의 죽음’을 읽고]

다만,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자리 잡고 있는 와중에도 인류는 “탄소중립”이라는 구호를 통해 “세계사적 협업”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유럽 경제가 – 특히 독일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와중에 유럽이 값싼 러시아의 가스에 마약처럼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들이 외쳐왔던 재생에너지를 통한 “탄소중립”도 그럴싸한 화장술이었음이 드러났다. 인류가 “낯선 힘을 의식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풍부함 Reichtum”에 기반한 “세계사적 협업”이 필수적인데 그 풍부함이 허상으로 드러나 약하게나마 유지되었던 “탄소중립”이라는 협업도 위기에 처할 것 같은 위기감이 생기고 있다.

‘강의 죽음’을 읽고

이 독후감은 이 책을 펴낸 곳인 ‘브렌즈’가 무료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강의 죽음(원제 : When the Rivers Run Dry), 프레드 피어스 저, 김정은 역, 브렌즈

아담 스미스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 국부론에서 사용가치가 반드시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물과 다이아몬드를 예로 든다. 즉 물의 사용가치는 굉장히 크지만 교환가치는 거의 없고, 그에 반해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는 작지만 교환가치는 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시장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이렇듯 모순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그의 뛰어난 직관을 통해 가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헤쳤다는 점이 아담 스미스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그의 이러한 설명은 어쩌면 그가 처한 또 다른 특수한 상황에 기인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즉, 그가 살던 당시의 영국은 최고로 문명이 발달한 국가여서 물에 대한 교환가치가 싸다는 특수성을 띠고 있었기에, 물이 부족한 국가에서는 물에 대한 교환가치가 그 사용가치에 근접할 수도 있다는 – 다이아몬드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 또 다른 특수성이 간과한 설명이기도 한 것이다. 예컨데 그가 사막지대의 물이 부족한 국가의 경제학자였다면 다른 예를 들었을 것이다.

딴죽을 걸어봤지만 어쨌든 모든 문명은 강에서 출발하였다. 당연히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담수를 싸게 이용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국지적으로 물이 비싼 문명이 있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문명은 물을 싸게 활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즉, 크게 보아 물이 싼 것은 대부분 문명에서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물의 교환가치는 올라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개연성이 크다. 물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저술가 프레드 피어스 Fred Pearce 가 지은 <강의 죽음>은 인간이 강을 어떻게 남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태로 말미암아 앞으로 인류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릴지에 대해 담담한 톤으로 경고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단순히 환경주의/생태주의적인 당위론에 근거한 것이 아닌, 수많은 현장답사와 그 실상의 파악을 통한 과학적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듣는 나로서는 때로 끔찍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인간은 현 상태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물 자원이 급속히 고갈되는 근본원인에는 대규모 농축산업과 같은 대량생산, 물을 극히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도시라는 정주방식의 등장, 그리고 이들을 지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작되는 물길과 그 위에 세워지는 대규모 관개시설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인간에 의한 물 착취는 지극히 비효율적이며 편견에 가득 차 있다. 가장 큰 편견은 강줄기와 물 자원을 인간의 “위대한” 능력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오만이다. 또한 그 편견은 경제체제를 구분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구(舊)사회주의권에서 이 편견은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 저자의 암시인바, 그들은 인민에 의한 자연정복 또는 자연개조를 사회주의의 승리로 보았다는 정황이 책의 곳곳에 제시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댐건설, 소련의 대규모 목화재배 농장들은 이러한 비극의 증거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들이라고 시장 효율적으로 물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도시는 먼 곳의 물을 끌어다 분수 물로 써버리는 천박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낭비했을 따름이다.

결국 현존하는 어떠한 경제체제, 정치체제도 아직까지는 물 자원의 지탱 가능한 이용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관계로, 인간이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물은 점점 더 희소해지고 – 물론 재생 가능함에도 그 주기는 점점 더 길어지고 – 더 불평등하게 분배될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전망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에 대한 교환가치의 급등(아담 스미스의 편견(?)과 다르게), 그리고 물을 둘러싼 지역간/국가간 갈등의 첨예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얼마 전 외신은 중국과 인도의 물 분쟁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의 대안은 소박하다. 현대인보다 현명했던 옛날 사람들이 택했던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빗물을 받아쓰고, 작은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고, 강줄기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았던 그 옛날 방식 말이다. 그 방식이 현재와 같은 대량 생산 체제에서 통하겠냐고? 저자는 또 통하고 있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전체 문명에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지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겠지만 어쨌든 몇몇 문명권에서는 시도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 시도는 더 확산될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보자. 강이 파괴되고 있는 가장 최근 사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나 스스로도 강에 접해서 살고 있지 않고, 과연 강이 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방식의 사업은 강을 “살리는” 사업이 아님을 금새 알 수 있다. 굳이 정비를 하여야 한다면, 신중한 실험과 시범사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에도 지금은 너무나 오만하게 너무나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 <강의 죽음>이 가장 경고하고 있는 모든 악행이 동원되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든다.

그것이 “녹색성장”이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그것은 한 특정정부가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지만, 이전 정부와 심지어 그 “녹색성장”을 통해 이득을 누리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책임이 면죄되는 것은 아니다. 이전 정부도 새만금을 비롯한 자연자원을 녹색개발주의의 미명 하에 유린하였으며, 한 광역자치단체의 주민들은 이러한 개발주의를 균형성장이란 이름 하에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비판하여야 할 것은 어쩌면 우리 안의 “경제 환원주의”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되지 않는 욕망.

경제란 무엇일까? 상품이 사용되고 그 상품을 교환할 수 있는 돈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돈은 우리가 착취하는 – 좋게 말해서 활용하는 – 자연자원의 가치와 그것을 상품으로 전환시키는데 들어간 노동의 가치를 인간의 기준에 맞춰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 근저에 접근하면 자연자원 없이 돈만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은 없다. 하지만 그 시스템에는 모순되게도 돈이라는 청구권으로 자연자원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이들로 가득하다. 그 경제의 착시현상을 바꿀 수 있는 법은 두 가지 대안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바뀌던가 인간을 갈아치우던가 .

‘탱크’의 어원

사실 여기에 기적은 없다. 하데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인도의 농촌과 도시 외곽에서는 지금도 곳곳에서 버려진 연못을 볼 수 있다. 19세기 초반까지 인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계곡 아래에 진흙을 바른 얕은 저수지를 만들어놓고 몬순 기간에 내린 빗물을 모아 농업용수로 이용했다. 인도에서는 이 저수지를 ‘탄카tanka’라고 불렀고, 이 단어가 영국에 가서 ‘탱크tank’라는 외래어로 정착했다.[중략]
그러나 서구식 모델을 기반으로 한 관개체계가 인도 전역에서 실패하고 농민들이 지하수를 얻기 위해 점점 더 땅속 깊이 파 들어가는 오늘날, 구시대의 유물인 탄카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2010, pp433~435]

‘강의 죽음’ 읽기가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다. 소름끼치는 재앙에 대한 부분을 넘어서 이제 ‘그렇다면 과연 대안은 무엇인가’하는 부분을 배회하고 있다. 작가는 대안으로 대규모 관개시설 대신 고대의 지혜를 본받자고 주장하고 있다. 마을단위에서 빗물을 받아 재활용하는 이 방식은 현대인이 보기에는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물 확보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생태적으로 조화로운 이러한 방식이 도시와 농촌에서 적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인용한 부분은 또 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인용한 것이다. 즉, 우리가 당연히 영어로 알고 있었던, – 물론 나같이 무식한 것이나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 ‘탱크’라는 단어가 사실은 인도의 언어였고, 바로 물 부족을 해결할 대안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인용했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나라 고지대 동네에 보면 옥상에 노란 탱크를 만들어두어 갈수기에 사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니 과거 ‘탄카’의 모습이 일부 남아있는 셈이다. 물론 그 안에 채워지는 것은 빗물이 아니라 수돗물 내지는 지하수다.

온라인에서 ‘탄카’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식의 보고 위키피디어마저 ‘탄카’에 대해 “Tanka (reservoir), as found in India”라 적혀 있을뿐 아무도 본문은 채워놓지 않았다. 오히려 tank를 검색했더니 우리가 잘 아는, 무시무시한 전쟁무기 탱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나온다. 물론 같은 어원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 인도 시골에서 평화적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저수지의 이름이 바다 건너 서양에 가서 전쟁무기의 이름으로 발전(?)한 양상을 보고 있자니 쓴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끝까지 읽고서 독후감을 다시 한번 쓸까 생각중이지만 결국 ‘강의 죽음’은 우리가 자연의 정복자 행세를 하며 자연을, 특히 강을 지배하려 할 때에 어떠한 불행을 자초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뉴올리언스 지방의 카타리나 피해가 그 사례인데, 물론 직접적 원인은 부시 정부의 무능력하고 미흡한 대처였지만 근저에는 애초에 범람지역이었던 곳에 도시를 세운 인간의 아집이 그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그러므로 자연에 저항하거나 정복하려 하지 말고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온 옛사람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대규모 저수지가 아닌 주거에 근접한 소규모 저수지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그 체제의 여부를 떠나서 현대경제의 대량생산/대량소비의 메커니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강을 파괴했고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파괴했을 따름이다.

음모론이 꾸미고 있는 음모

인공강우 전문가들은 성공을 증명할 길이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공강우가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대중의 공포도 감당해야만 한다. 인공강우가 불법 침략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미국은 1960년대에 몬순 기간 동안 게릴라의 보급로가 물에 잠기게 하기 위해 비밀리에 라오스와 북베트남에 인공강우를 실시했다. 또 인공강우는 예기치 못한 홍수를 일으킨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뭉게구름 계획Operation Cumulus’이다. 뭉게구름 계획은 영국남부에서 실시되었던 영국군의 비밀 강우실험으로, 1952년 여름에 익스무어를 강타한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영국군에서 단 한차례 구름 씨를 뿌리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엄청난 기세로 밀려든 흙탕물이 데번 주 린머스를 덮쳐 3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과관계에 관한 진실은 결코 알 수 없지만 공문서 보관소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대홍수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뭉게구름 계획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어쩌면 이들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pp415~416]

음모론의 대부분은 세계의 정치경제의 뒷면에 있는 거대한 어둠의 그림자를 소재로 하고 있기에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지만, – 폴매카트니가 애비로드 앨범사진에서 맨발이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는 정도는 발랄한 유머이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재미는 있다. 그러니 인류의 삶의 뿌리인 물, 더 정확히는 강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진지한 책에서도 유난히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뭉게구름 계획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1949년에서 1952년까지 존재하였는데 주된 목적은 적의 움직임을 저지하거나 공항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물론 뭉게구름 계획이 실제로 린머스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소리는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인공강우를 적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살상의 목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의도만큼은 비난받아 마땅해보인다.

기후무기에 관한 음모론은 위와 같은 인공강우 이외에도 꽤 된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아이티 지진 등 최근의 재앙들에는 예외 없이 기후무기 음모론이 끼어든다. 즉, 전자기파를 이용해서 원격으로 날씨를 바꾸고 지진을 일으키고 화산을 폭발시키는 식의 환경 테러리즘이 등장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까지도 있다. 이 주장의 최신판은 21세기 사회주의 영도자 중 한분이신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다.[또 다른 관련 글]

한편 음모론을 꼭 핍박받는 좌익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잘 알려진 음모론 중 프리메이슨이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주장의 배경 이론(?)은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우익적이다. 또 최근 천안함의 비극적인 사고의 배후를 음모론으로 떡칠하고 있는 이들은 조중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음모론은 좌우에 관계없이 자신의 세계관과 사실관계 사이의 빈틈을 채우는 자신만의 편견일 따름이다.

요즘 조중동을 읽으면 북한은 우리가 도저히 못이길 엄청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 역시도 때로는 ‘핵무기가 발명된 지 언젠데 그게 최신무기일까. 지금은 무슨 첨단무기가 있을까?’랄지 ‘1969년에 달에 갔다 온 기술로 지금쯤 토성까지는 갔어야 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가끔 하지만, 결국 진실은 사실관계가 촘촘히 맞춰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오곤 한다. 음모론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이는 대개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찌라시들처럼.

1킬로그램의 쌀을 얻기까지는 2,000~5,000리터의 물이 쓰인다. 이는 대다수의 가정에서 1주일 동안 쓰는 양보다 월등히 많은 양이다. [중략]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해 곡물을 먹여 키우는 가축까지 포함하면, 그 수치는 어마어마하게 증가한다. 소를 키워 쇠고기 1킬로그램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물의 양은 2만 4,000리터다. 1리터의 우유를 얻기 위해서는 2,000~4,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치즈는 어떨까? 1킬로그램의 체다 치즈나 브리 치즈, 카망베르 치즈를 얻으려면 약 5,0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강의 죽음, 프레드 피어스 지음, 김정은 옮김, 브렌즈, 2010, p24]

출판사를 하는 친구의 아내가 이번에 내놓은 책인데, 서평을 블로그에 써준다는 핑계로 어제 책방에 깔린 책을 공짜로 얻어왔다.(친구야 쓸 거야 써~ 걱정 마~)

여하튼.. 쌀과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차지하는 면적과 쇠고기를 얻기 위해 차지하는 면적의 차이랄지 그런 부분에 대해선 가끔 이야기 들었는데 물에 대해서도 이만큼이나 소모량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니 또 한번 육식의 비효율성이랄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 안에 포함되는 영양소가 다를 수 있을지 몰라도 어느 면으로 보나 육식은 일종의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가급적이면’ 육식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 집에서는 쇠고기와 같은 고기 종류는 전혀 먹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생선을 가끔 먹는다. 밖에서 먹게 되면 — 특히 음주가 가미된 저녁 — 고기를 먹곤 한다. 우리나라는 채식위주의 식단이지만 막상 채식을 하려하면 의외로 쉽지 않다고 어떤 이가 그랬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암튼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기 시작한 책이다. ‘돈을 물처럼 쓴다’라는 말이 틀린 말임을 대번에 알게 해주는 책이다.

p.s. 책에 나와 있는데 커피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데 드는 물은 2만 리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