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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형 창업”의 탑클래스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자영업의 현실

Think Progress 라는 매체에서 “더 많은 미국인들이 생계를 위해 창업하고 있다”는 기사를 웹사이트에 올렸다. Global Entrepreneurship Monitor(이하 GEM)라는 단체에서 각 나라에서의 창업의 현황과 특성을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를 기초로 작성한 기사다. 미국경제가 갈수록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비관적인 내용인데, 정작 내 눈을 잡아끄는 것은 우리나라의 “생계형 창업”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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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엄청난 실업예비군을 자영업자 수치에 감춰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나라답게 기사의 그래프 상으로는 1위다. 창업의 41.5%가 이른바 “생계형 창업”이다. 다만, 기사가 인용한 GEM의 보고서를 살펴보니 조사대상 54개 국가 중 1위는 아니고 5위였다. 우리를 앞서는 국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란, 폴란드, 파키스탄 등이었다. 경제수준을 감안할 때는 역시 우리나라가 여타 유사수준 국가에 비해 높은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상적인 수치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와 같은 북구 사민주의 국가들의 수치다. 이들 나라의 수치는 “생계형 창업” 수치가 4~7%대에 머물고 있다. 이들 나라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잘 정비된 사회안전망, 적절한 실업자 대책, 높은 노조조직률 등 기업 내의 노동자로서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타 국가에 비해 매우 낮은 창업비율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이 보고서가 정의하고 있는 “생계형 창업”은 창업자들이 “다른 노동의 선택권이 없고 소득원이 필요한(have no other work options and need a source of income)” 경우를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창업은 사회적인 노동 시스템에서 비자발적으로 내쫓긴 이들이 그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수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그 국가의 노동에 대한 안전망이 후진적임을 의미한다.

전후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은 노동의 대규모 집적, 노동자의 정년보장 또는 실업대책 강구, 은퇴 후 연금지급 등의 사회적 약속을 통해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시스템을 통해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이 나라는 그 궤도에서 벗어나 비정규직의 증가, 정규직의 조기퇴직,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인한 구직난에 직면해 있고, GEM의 조사결과가 그러한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대선에서 뽑힐 차기 정권이 노동 이슈에 대해 어떠한 자세로 접근하느냐가 향후 우리나라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여태 하던 식으로 실업자의 상당수를 “생계형 창업”의 집단에 꼬불쳐 두고, 불안한 고용의 실상을 무시한 채 실업률이 낮다고 우긴다면 노동의 질은 계속 낮아질 것이고, 이 사회는 점점 더 살벌한 정글 자본주의로 퇴색해 갈 것이다.

박근혜 씨와 문재인 씨의 일자리 공약에 대한 비교

민주통합당이 최근 문재인 씨를 당의 대선후보로 확정했다. 새누리당은 진작 박근혜 씨를 후보로 정했기에, 이로써 오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양대 정당의 공식후보가 확정된 것이다. 이전의 선거판에서 벌어졌던 경선불복에 따른 독자출마와 같은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범야권 후보로 분류되는 안철수 씨가 대선출마를 공식발표하면 주요한 후보들의 선거판은 대충 짜일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의 키워드는 ‘경제’다. 정치적 대립이 치열했던 예전 선거에서는 “민주 對 반민주”의 대결이 주요이슈였고, 지난 선거에서는 경제 이슈가 주요이슈이긴 했지만 우파의 “좌파정치 종식”이란 정치적 프로파간다 역시 한 축이었다. 이번엔 박근혜 씨가 독재자의 딸로서 퇴행적인 역사인식이 문제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민주화”란 이슈를 선점하면서 경제로 쟁점이 수렴될 전망이다.

경제 중에서도 현재까지는 “경제민주화”란 키워드가 논의되고 있다. 사실 이 표현은 그 뜻에 대해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김종인 씨와 이한구 씨가 날을 세우고 있을 정도로 두루뭉술한 표현이다. 김상조 교수는 칼럼에서 “경제민주화가 뭔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정답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고 하였고 나 역시 동의한다. 선거판은 결국 각론의 경제 이슈로 쪼개질 것이다.

각론을 먼저 치고 나온 것은 문재인 씨다. 공식후보로 선출된 직후 그의 첫 행보는 현충원 방문이었고, 그 다음이 ‘일자리창출을 위한 각계 대표 간담회’ 참석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일자리 대통령”을 자임하며, 일자리 문제를 대선 이슈로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몇몇 국가 수준은 아니지만 실업문제가 심각한 사회이슈가 되어 오고 있는 데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이 이슈에 대한 두 후보의 공약 중 흥미로운 점은 둘 다 “노동”이란 단어를 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박근혜 씨는 “고용복지”, 문재인 씨는 “일자리”란 표현을 쓰고 있다. 두 후보 모두 노동이라는 큰 틀 내에서의 한 형태인 고용에만 시선을 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고용이 창출되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발생하는 허다한 모순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양 후보 간 차이는 분명히 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문재인 씨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실현, ‘일자리 인권’ 보장, 대기업의 불법파견과 위장도급 근절 등 이미 창출된 고용 내에서의 문제를 전향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특히 “성, 고용형태, 연령, 장애, 종교 및 사회적 신분에 따른 일체의 차별을 금지”하는 ‘전 국민 고용평등법’ 제정공약은 매우 신선하다.

우려되는 부분은 이런 공약에도 불구하고 간담회에서 문 씨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근무시간 단축 등이 기업에 부담을 줄 수 있으니 정부지원을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대목이다. 비용증가에 대한 기업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는 발언이겠지만, 이는 그가 이미 제시한 일자리 공약을 무시 내지는 희석시키는 발언이다.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강행조치가 어느새 정부지원으로 변한 것이다.

애초에 고용의 질을 향상시킴에 따른 기업부담을 지원하겠다는 공약을 낸 것도 아니고, 노동자의 능력 이외의 차이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인권적 차원에서의 선진적인 입법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면서도, 바로 그 이슈에 대해 후보로 선출되자마나 정부지원을 언급하는 것은 그리 탐탁스럽지 않다. 그렇다면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을 지원하는 셈이니 종교에 따른 차별도 정부에서 지원할 것인가?

물론 정규직 전환이나 근무시간 단축이 기업의 부담을 증가시킬 개연성은 크다. 그러한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기업은 그간 비정규직 노동의 남용과 OECD 최장의 근무시간의 열매를 향유하여온 것 또한 사실이다. 파견직 활용과 같은 불법행위도 이미 법정으로부터 그 불법성을 판결 받은 상태지만 기업은 개선할 생각을 안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정부/기업간 협의의 단계가 아닌 ‘평등법’과 같은 강행법규의 제정이 답이다.

한편, 이 이슈에 대한 박근혜 캠프의 생각은 어떠할까? 박 씨의 사이트에서 그가 주최하여 열린 ‘고용복지 정책세미나’ 자료를 보았다. 이 자료는 전반적으로 고용과 복지 문제가 혼합된 정부의 공적 부조에 관한 이슈에 집중되어 있다. 정규직 전환 이슈는 ‘청년인턴’의 정규직 전환시 기업에 보조금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유일하다. “비정규직”이란 단어는 그들이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언급에 딱 한번 등장한다.

즉, 박 씨가 내놓은 자료는 최근 노동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저러한 갈등에 대한 언급은 없이 빈곤층에 대한 통합급여 체제의 부작용, 근로장려세제 확대개편, 정부의 고용서비스 품질 개선 등 빈곤층 등에 대한 복지 이슈에 집중하고 있다. 고용 이슈는 이러한 복지 이슈에 끼워 넣은 듯한 인상이 역력하다. 그의 자료에는 장시간의 근로시간, 나쁜 일자리의 급증과 같은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 캠프와 문 캠프의 노동공약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문 캠프의 현실인식과 그 대안이 시의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 국민 고용평등법’은 법제화가 될 경우 큰 보탬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씨 스스로가 “나쁜 일자리”가 크게 증가한 데에 한 몫을 했던 이로서의 한계도 극복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부담”을 운운한 그의 기회주의적 발언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유연성

경제에 있어 ‘유연성(flexibility)’이란 단어는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서 매우 극단적인 평가가 갈리는 단어다. 특히 앞에 ‘노동’이라는 단어가 붙게 될 때에 더욱 그렇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나 자본가나 할 것 없이 저마다 볼멘소리를 해대기 시작한다. 노동자는 사회안전망 없는 노동유연성은 사기라고 주장하고 자본가는 노동유연성이 없어서 기업경영이 어렵다고 주장한다. 양쪽 말이 다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쉽게 합의하지 못한다. 근본문제는 바로 계급갈등이기 때문이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은 ‘노동유연성’은 산업의 유연성 중 한 요소에 불과한데 우리 사회에서는 유연성이 곧 노동유연성인 것처럼, 최소한 그것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고 노동자계급이 이를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연성이라는 표현은 포디즘이나 테일러리즘 등 ‘대량생산 대량소비’에서 다양한 소비자 기호에 부응하는 생산의 유연성이라는 경영개선의 개념에서 도입된 개념이기에, 산업전반의 다양한 유연성 제고를 다루는 개념임에도 말이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이 환경을 중시하려는 소비태도를 보여 큰 배기량의 자동차 구입을 꺼린다는 경향이 관측되었을 경우, 기업은 신속하게 환경친화적인 신차를 개발할 수 있는 조직을 정비하고 조립라인을 제 때 맞춰 개선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그런 순발력을 발휘하는 것이 유연성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GM이 이걸 못 해서 망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유명한 패션브랜드 자라(Zara)의 경우 소비자의 기호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디자인 및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여 성공한 케이스로 꼽히고 있다.

우선 다시 ‘노동유연성’으로 돌아가자. 이번 쌍용자동차 사태를 접한 사회주류가 제일 먼저 뽑아든 칼은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지난 5월 “노동유연성 문제는 올해 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 과제”라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위한 수단으로는 비정규직법 개정, 복수노조 허용, 노조 전임자 지급금지, 노조의 인사경영권 침범 금지 등을 제시하고 있다.(관련기사보기)

한편 여론은 어떠할까? 위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달 8일 발표한 설문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노동유연성’ 발언에 대해 응답자의 63.0%가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막기 위해 노동안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사회에서 노동유연성 강화와 노동안정성(또는 고용안정성) 강화가 화해할 수 없는 대척점에 서있다는 증거이다.

흥미로운 점은 양 측 모두 각각의 주장의 논거를 주로 유럽의 노동시장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노동유연성 강화론자들에 따르면 유럽은 1990년대의 높은 실업률의 원인으로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지적하였고, 사회대타협을 통해 노동유연성을 제고하여 실업률이 크게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고용안정성 강화론자들은 그 배경에는 정규직-비정규직 차별해소와 사회안전망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을 보면 후자의 주장처럼 유럽의 노동유연성 강화는 사회안전망 강화에 따로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네덜란드형 유연안정성 정책은 1999년 1월에 발효된「유연성 및 안정성에 관한 법률’(Flexibility and Security Act)」로 구체화되었음.
– 유연 근로자는 계약 만료 시 특별한 절차나 조건 없이 고용계약이 종료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급여(동일노동, 동일임금), 보너스, 휴가, 훈련 등에 있어서 측면에서 정규직근로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음.
– 국가재정을 사용하는 실업보조의 경우 최대기간이 7년에서 38개월로 줄어들었으나, 근로자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자신이 비자발적인 실업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어졌음.
– 고용법규 면에서 연공서열이 낮은 사람을 우선 해고하는 원칙이 철폐되고 나이와 업무능력 등을 고려하여 해고할 수 있는 유연성이 기업에게 제공됨.[유럽의 유연안정성정책이 우리나라 비정규직 문제에 주는 시사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9년 8월 7일, p6]

상기 내용을 보면 네덜란드의 경우 제도가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된 측면도 있고, 불리하게 된 측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의 노동시장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노동자에게 유리함을 알 수 있다. 반면 우리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시행방안을 적어도 위 기사로 판단하자면 사회안전망 구축 방안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노동유연성 강화와 관계없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노조 전임자 임금을 주지 않아서 어떻게 노동유연성이 강화된다는 것인지 내 짧은 지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보고서는 노동유연성 강화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에는 결국 재정준비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사회복지 지출 비율로는 해고자의 보호는 어려운 실정이고 결국은 더 많은 재정확보를 통한 사회보장장치의 강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노동유연성 강화와 감세를 통한 경기부양, 그리고 SOC예산 증액(특히 4대강 정비)이라는 모순된 정책을 수행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총체적인 유연성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개인적으로는 급변하는 사회경제구조에서 경제 시스템의 유연성 확보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쌍용차 사태는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 및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의 산업구조조정이 (폭력적으로) 관철된 측면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생산품목, 디자인, 제공할 서비스, 노동시장 등 총체적인 경영요소들이 실시간으로 변해감에 따라 생산주체의 대응 역시 그만큼 유연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구글을 생각해보라 이제 구글을 검색 사이트라 부르는 이는 없다)

문제는 계급갈등이 온존하는 시스템에서는 가진 자들은 허다한 유연성 중에서 손쉽게 노동유연성 제고를 택하려 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그 자신이 다른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바로 그 “유연성”이 떨어지기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경제체제가 현재와 다르다면 이러한 갈등을 민주적인 통제에 따른 산업재배치로 해소할 개연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만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에 관한 메모

그러나 이 논리 자체는 노동뿐만 아니라 토지도 또한 상품의 가치에 뭔가를 기여한다는 낡은 반대론에 대처하지는 못했다.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이 올바르게 확립되자 비로소 토지의 역할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명이 가능했다. 물론 매우 일찍부터 상품의 사용가치는 그 교환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이 인식되고 있었다. 유명한 물과 다이아몬드의 예증은 스미드 이전의 여러 저작자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상품의 교환가치는 종종 그것의 효용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지적했던 경제학자들도 허치슨 이전에 있었다. 그러나 리카아도가 항상 ‘부’(사용가치의 합계로 그것의 창조에는 토지와 노동이 함께 공헌한다)와 ‘가치’(그것은 노동만에 의해 결정된다)에 대해서 강조했던 구별이 정확히 정식화되었던 것은 (비록 몇몇 초기의 경제학자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이 구별을 채용했다 하더라도) 잠시 후의 일이었다. 일단 이러한 방식으로 토지가 가치의 결정요소에서 제외되어 버리면 남는 문제는 오직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주는 것은 그것에 지불된 보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 그 자체의 지출을 통해서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뿐이었다. [노동가치론의 역사, 로날드 L. 미크 지음, 김제민 옮김, 풀빛, 1985년, p100]

소통이 없는 우리나라의 ‘일자리 나누기’

일본경제신문은 일본 기업 단체(일본 경제단체 연합회, 이하 경단련)와 노조단체(일본 노동조합 총연합회, 이하 연합)의 양자간에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고용을 유지하는 잡셰어링의 도입을 위한 논의를 재개하고 있다고 보도(1/8)[최근 일본의 Job Sharing 도입 논의와 전망,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2009. 2.21, p2]

이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나의 일자리 나누기와 일본의 그것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있다. 1) 우리나라는 임금을 깎아서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발상이고 일본은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발상이다. 2) 우리나라는 정부가 하향식으로 공공기관의 임금을 강압적으로 깎는 방식이고 일본은 노사간의 논의를 통한 방식이다. 네덜란드, 프랑스 등 여타 국가도 일본과 진행양상이나 추진방식은 매한가지다.

물론 일본에서의 일자리 나누기 추진현황이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따라할 수 없는 특수상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예나 다른 나라의 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의 보편적인 원칙은 바로 이해당사자 간의 소통이다. 일자리 나누기는 첨예한 이해관계가 대립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그러나 그 현장에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소통은 찾아볼 수 없다.

“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에 대한 독후감

고대 사람들은 부(wealth)가 어떻게 창출되는가 물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남의 것을 뺏으면 되지.”

전쟁을 해서 뺏고, 도둑질을 해서 뺏고, 노예로 만들어서 뺏고 등등 뺏는 방법은 지금보다 훨씬 투박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괜히 대량살상무기가 위험하다 화염병을 던지니 위험하다 핑계대지 않았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고 패자는 노예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이 좀더 세련(?)되게 살기 시작했을 때에 그들은 무역을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전쟁과 도둑질이 손쉬운 돈벌이였지만 더 머리를 굴려 돈을 버는 방법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야한 경제이론이 등장한다.

“무역을 하려면 상품거래의 표준이 되는 등가물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금(金)이다. 금을 많이 가지는 자, 또는 나라가 부자다.”

이것이 중상주의(mercantilism)의 단순논리다. 우리는 적게 쓰고(수입하고) 남이 많이 쓰게 해서(수출해서) 차액을 남기는데 그것이 금의 형태로 체현되는 것이고 그 나라에 금이 많으면 그 나라는 부자라는 것이 논리였다.

이를 반박한 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 등이 주창한 노동가치론이다. 금을 서로 뺏고 빼앗겨도 금의 총량은 더 많이 캐내지 않는 한은 불변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점점 윤택해진다. 그것은 금이 더 많아져서가 아니라 바로 노동을 통해 자연자원을 쓸모 있는 물건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당연한 이치다. 과격급진 이론이 아니고 그저 사실일 뿐이다.

이후 무슨 정보가치론이니 뭐니 하는 이상야릇한 궤변으로 오염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가치론은 경제학에 있어서 하나의 공준이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생산의 3요소로 토지, 노동, 자본을 들면서 노동을 격하시키지만 나머지 두 개의 것은 경제학적으로는 노동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없는 것들이다. 토지는 부의 원천이랄 수 있고 자본은 혈맥의 역할을 하나 결국은 노동이 투입되어야 기능한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이 투입되면서 자본가가 투입된 노동에 상응하는 가치를 노동자에게 지급하지 않았다는 논리직관을 통하여, 잉여가치라는 핵심개념을 도출해낸다. 이 잉여가치가 결국 사회전체의 부의 증분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 어떤 노동이냐 하는 것은 때로 혼선도 있지만 대체로 1차, 2차 노동이다. 3차, 즉 금융업을 포함한 서비스업부터는 1,2차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나눠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해석에서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제를 당연시하는 것이다.

즉 금융업은 그 자체로는 가치(value)를 창출하지 못한다. 그것을 전유(專有 ; appropriation)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세상 모든 노동자들이 1,2차 노동을 하지 않고 금융업에만 종사한다고 가정해보자. 창출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은 자명하다. 아이슬란드 전 인구가 금융업에 종사하며 타국의 화폐를 뺏어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 세계 모든 인구가 금융업에 종사하며 타국의 화폐를 뺏어오는 것은 금을 둘러싼 중상주의보다 더 어이없는 체제일 뿐이다.

결국 1,2차 노동으로부터 창출되는 잉여가치의 총량은 산술적임에도 그것을 전유하려는 금융업 등 서비스업의 기능이 기하급수적으로 활발해지면 사회는 두 가지 길로밖에 갈 수 없다. 화폐증발과 신용창출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키든가 아니면 그 금융기능이 마비되든가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된다. 지난 몇 십년간 급속도로 발달해온 자본주의는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을 왔다 갔다 하다가 이번에 후자의 길로 깊숙이 접어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Nick Beams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고유모순이 바로 이것이다. 사회 전체가 요구하는 청구권, 예를 들면 이자, 지대, 집값 등은 노동으로부터 창출되는 잉여가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그 잉여가치 비율은 여러 사정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점점 그 청구권은 늘어만 간다. 금융화, 증권화, 집값 상승 등이 청구권에 거품을 형성한다. 그리고 빵~ 하고 터진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자유화가 그것을 치유할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위와 같은 프로세스를 부정한다. 케인지언들조차 정부가 유동성을 공급하면 자본주의는 치유될 것이라고 말한다. 기업이 부채비율이 높아지면 건전성이 악화된다. 결국은 퇴출의 길로 접어든다. 유동성을 공급하는 국가는 어떻게 되는가? 건전성이 악화된다. 그 국가는 퇴출되지 않는 불사의 존재일까? 미래세대는 그들의 영원한 인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