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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에게 쇠사슬이 채워졌으니 조금쯤 사슬을 늦추어주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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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10주년을 맞는 1928년, 국가사회주의당의 당원은 10만 8천이었다. 비록 그 숫자는 적었으나 점점 증가하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1924년 말 형무소를 나온 지 2주일만에 히틀러는 당시 바이에른 수상이며 바이에른 카톨릭인민당의 당수인 하인리히 헬트 박사를 만나러 갔다. 헬트는 히틀러로부터 행동을 삼가하겠다는 굳은 약속을 받은 후 (그는 아직 보석 중이었으므로) 나치스당과 그 기관지의 발행금지를 풀어주었다. ‘야수에게 쇠사슬이 채워졌으니 조금쯤 사슬을 늦추어주어도 지장은 없을 것이다’고 헬트는 법무상인 귀르트너에게 말했다. 이로써 바이에른의 수상은 그릇된 판단을 내린 독일 정치가 중의 최초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제3제국의 흥망 1,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유승근 옮김, 에디터, 1993년, 185쪽]

요즘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 혹은 유사 파시즘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는 상황이라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읽고 있는 책의 일부를 인용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많은 국면에서 나치와 히틀러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바이에른 공화국 권력자들의 순진한 오판 또는 지나친 의협심 탓에 이러한 기회를 놓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 상황이 안타깝긴 하지만, 어차피 나는 이미 그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있고, 어쩌면 그들이 순진했다기보다는 이미 파시즘 혹은 나치즘은 유럽 열강 권력층의 뇌리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뿌리 깊은 제국주의자 마인드와 선민(選民)의식의 현재화였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기에 그런 오판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유럽은 문명의 대륙이자 반(反)문명의 대륙이기도 하다.

어찌 됐든 비극은 비극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내부가 썩어 곪아 터질 지경일지라도 그걸 봉합하여 더 나쁜 상황을 방지하는 것이 양식 있는 자들의 책무다. 굳이 파시즘의 폭력성이 임계점을 넘게 만들어 인류사의 비극이 된 세계대전으로 몰고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교훈은 21세기인 지금도 남한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유효하다. 근본적인 모순을 외면하는 정치세력이라는 점에서 초록이 동색일지라도 대의민주제가 임계점을 넘어서는 폭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2025년 4월 한국이 지금 그런 실험실 안에 놓여 있다. 누군가 “조금쯤 사슬을 늦추어주어도” 되지 않겠냐고 말하는 순간 국가는 나락으로 가는 상황인 것이다. 부디 4월 4일 11시에 결정문을 읽을 이들이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지 않길 바란다.

현실이 된 네오파시즘

Portofino - 2016-06-02 - View from Chiesa San Giorgio - 3284.jpg
By Pierre-Selim HuardSelf-photographed, CC BY 4.0, Link
트럼프가 꿈꾸는 새로운 가자 지구의 해안선

20세기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심각한 경제위기의 맥락에서 성장하여 “대공황(Great Depression)”으로 정점에 도달한 반면, 네오파시즘은 특히 2007-08년 금융위기로 인한 “대불황(Great Recession)” 이후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심화되는 맥락에서 성장했다. 지난 세기의 파시즘은 식민지 국가에서 발생하고 있던 극악무도한 인종차별적 관행을 배경으로 유럽 대륙 중심부에서 만연했던 국가적, 민족적 적대 행위를 지지했지만, 네오파시즘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수반되거나 후자가 부추긴 전쟁에서 비롯된 급증하는 이민에 대한 인종차별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인 분노의 배설물 위에서 번성했으며, 이는 국제 시스템의 규칙이 붕괴되는 것과 병행되었다. [The age of neofascism and its distinctive features]

트럼프가 또 경악할만한 말을 배설했다. 그가 이스라엘의 전범(戰犯) 네타냐후와 만난 자리에서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학살의 현장인 가자 지구를 미국이 접수한(“will take over”) 다음 현지인을 쫓아내고 – 또는 학살하고? – 그곳을 새로운 “리비에라(Riviera)”로 만들겠다고 말한 것이다.1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할 만한 이런 소름끼치는 발언의 주인공은 푸틴도, 김정은도, 네타냐후도 아닌 세계 “자유민주주의” 본산지의 권력자 트럼프다. 1기의 경력이 쌓이고 의회까지 장악해서 그런지 보고 듣기가 더욱 괴롭다. 트럼프의 발언은 나치의 인종 청소를 연상시키는 반인륜적 발언이다. 게다가 이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범죄다. 트럼프가 의도하는 점령국에 의한 강제 이주 행위는 제4차 제네바 협약 제4조 49항에 따라 엄연한 전쟁범죄다.

한편 트럼프의 이런 기행을 옆에서 쳐다본 꼬마 파시스트 네타냐후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성일광 서강대 교수에 가설에 의하면 네타냐후는 트럼프 덕분에 엄청난 힘을 얻게 됐다고 한다. 왜냐하면 트럼프의 발언이 현재 국내외에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는 등 실각 위기에 처해있는 그의 권력 유지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2 즉,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하마스의 휴전 협상에 불만을 품고 연정 탈퇴를 협박하고 있는 강경파 극우정당을 설득하는 논리로 트럼프의 가자 지구 점령 구상이 먹힐 것이라는 계산이 있는 것이다. 외압에 의한 이스라엘의 정상국가화가 요원한 상황에서 우익 연정이라도 내부 분열을 통해 자정할 수 있는 개연성이 더욱 옅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을 둘러싼 중동 정세는 한층 더 앞날 예측이 어려워질 것이다.

요컨대 파시즘이라는 호칭은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으나, 이제 확실히 네오파시즘이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일론 머스크가 나치식 경례로 권력 찬탈을 자축하고, 의회 폭도를 방면하고, 이민자 추방에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트럼프가 인종학살 발언까지 했으니 이제 권위주의니 의사(擬似) 독재니 하는 우회적 표현도 필요 없다. 그냥 새로운 파시즘의 시대가 시작했다. 유럽에서 가까스로 막은 극우 집권은 미국에서 완수됐다. 20세기 파시즘은 변방국가의 연합체였지만, 21세기 파시즘은 글로벌 권력 중심을 집어삼켰다. 기술산업복합체와 결합하여3 더욱 강력하다. 군사적 압제가 아닌 “민주적” 유권자의 지지를 더욱 공고히 한 덕분에 생명 연장도 수월할 것이다. 20세기 파시즘보다 더 위험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종 청소하기 참 쉽죠?

  1. 그는 이를 “미래를 위한 부동산 개발“이라고 명명했다
  2. 더욱 가관인 것은 트럼프가 2월 6일(현지시간) 전쟁범죄 및 반인륜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제재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는 점이다. ICC는 지난해 11월 가자지구 내 전쟁범죄 혐의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3. 지금 빅테크의 수장들은 트럼프를 만나느라 바쁘다

파시스트는 “사회주의의 구원자”였을까?

나치의 반자본주의적 수사에는 중요한 특징이 둘 있다. 첫째, 비생산적 자본 또는 금융자본에 대한 공격은 동시에 유태인 자본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나치는 또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 노동자의 자율성 요구와 계급투쟁의 고양에 대해 끊임없이 공격했다. 유태인-볼셰비즘 음모론이 존재하며, 이 음모는 동시에 금융자본의 지배 메커니즘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통해, 이 두 특징이 나치 이데올로기 속에 결합된다. 나치는 유태인-볼셰비키의 통치에 대항한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의 구원자임을 자처한다.[파시즘, 마크 네오클레우스 지음, 정준영 옮김, 이후, 2002년, 114p]

이런 주장은 유키아바라 최의 “그림자 정부”나 쑹홍빙의 “화폐전쟁”과 같은 음모론 서적들을 읽어본 이라면 그리 낯설지 않은 주장일 것이다. 금융업 종사자와 볼셰비키에 특히 유태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역사를 음모론의 왜곡된 프레임으로 보는데 중요한 틀을 제공했다. 그 프레임을 통해 세계가 거대한 음모집단에 – 필시 유태인이 수괴로 있는 – 의해 조종되어 종내는 세계정복의 시나리오로 나아간다는 것이 이런 종류의 음모론자의 생각인데, 책 정도로나 발간되면 다양한 지적(?)토양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겠으나, 나치처럼 행동으로 나설 경우엔 참혹한 비극이 되고 만다.

나치들이 이렇게 금융자본과 볼셰비키를 한 울타리에 엮는 무리수는 유태인이 “무(無)민족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즉, 그런 특성 때문에 유태인 환전상은 국경을 넘나들며 금융업을 한 것이고 볼셰비키는 민족주의가 아닌 국제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이라는 우월한 개념을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인 셈이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을 민족에 복속시켜 스스로가 우월한 민족의 해방자임을 자처하려 한 나치스트/파시스트에게 있어 국제주의를 통해 민족의 틀을 깨려는 유태인은 공산주의자든 금융자본주의자든 모두 파시즘/나치즘의 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사상은 – 인용한 책의 저자의 표현으로는 “반동적 모더니즘” – 사실 당시의 상황에서 예외적이고 변태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은 거센 사상적 소요상태에 휘말리는데 공산주의 운동이 인기를 얻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적 기운을 고취시키려는 사상적 조류도 만만치 않았다. 전혀 파시즘과 관계없는 것으로 보이는 사상가 막스 베버조차도 예를 들면 근대 이전의 금융자본 위주의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라 폄하하고 청교도적 윤리를 강조하는 산업자본을 근대적 자본주의의 지향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 그 한 예다.

(상략)이와 같이 베버는 근대 이전의 자본주의를 근대자본주의와 엄격히 구분하여 비합리적 자본주의, 정치기생적 자본주의 등으로 불렀는데 천민자본주의도 이러한 표현의 하나이다. 베버가 이 기묘한 표현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중세에 ‘천민민족 Pariavolk’으로 불리며 주로 상업, 금융업에 종사했던 유태인이었지만, 보통은 근대 이전의 낡은 자본주의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천민’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중세의 상인금융업자가 일반적으로 특수한 신분을 형성했으며 그 직업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천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어로서 사용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를 시대를 초월한 현상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경제학 사전, 풀빛편집부 편, 조용범/박현채 감수)

막스 베버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하지만 파시스트는 근대에 대한 이러한 고찰에서 대중을 자극할만한 재료를 찾아와 무차별적으로 섞어서 그들의 논리를 재구성했다. 본래부터 반(反)계몽과 반(反)지성을 주장하던 무리였으므로 이런 저런 주장을 섞어 거대한 궤변을 만들어내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종내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와 볼셰비즘을 넘어선 “사회주의의 구원자”를 자처한 이들인 만큼 그들의 뇌 속에 사상적 모순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자본주의와 볼셰비즘을 넘어선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태적 모습을 취하며 체제 위기를 돌파했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보다는 금융자본과 화폐자본을 ‘적’으로 간주하는 반동사상의 전통 속에 안락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전통의 목표는 무계급사회를 구현하거나 착취를 철폐하는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근대 사회의 금전적 만능주의를 억제하는 ‘인민들’의 공동체를 추구한다. 자본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공격은 항상 자본주의 생산양식보다는 금융 또는 은행자본에 대한 공격에 집중된다. ‘사회주의’라는 라벨을 붙이고 작동하고 있지만, 파시즘의 공격은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에 대해서는 걸고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파시즘, 마크 네오클레우스 지음, 정준영 옮김, 이후, 2002년, p110]

결국 파시스트/나치스트에게 있어 주적(主敵)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볼셰비즘으로 상징되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이었다. 국제주의를 부르짖는 사회주의자들과 “기생적”으로 다른 자본을 착취하는 은행자본만 통제 하에 둔다는 생각이었고, 이러한 상황에 당시 독일의 자본가들은 안락함을 느끼며 나치에 협조한다. 일례로 코카콜라는 나치 정부의 비호 하에 무력한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하여 독일에서 사세를 키웠는데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일 운동선수에게 알맞은 건강음료로 홍보하고, 나치의 홍보기구를 적극 후원하는 등 친(親)나치 행각을 일삼았다.(앞서의 책 124p) 그리고 이윤은 더욱 커졌다.

그럼 현대적 의미에서의 파시스트는 누굴까? 유럽 각국에서는 극우정당이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류보다 더 무서운 집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집단이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에서 활동하는 티파티(Tea Party) 등이다. 표면적으로는 정부의 독단에 맞선 시민운동으로 포장한 이들의 탄생배경이 미국 금융의 몰락에 대처한 정부의 부당한 구제금융에 대한 정서적 반감에서 시작됐다는 점, 그러면서도 지향하는 바는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키려는 리버타리안적 행태를 보인다는 점, 표면적으로는 대중동원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관철한다는 점에서 유사 파시스트적 모습을 보인다고 여겨진다.

물론 당시의 구제금융은 명백히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였고, 이는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행태였다. 하지만 구제금융의 시작이 오바마가 아닌 부시였고, 종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복지예산 삭감이나 환경규제 완화라는 점에서 정당한 분노가 엉뚱한 해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최근 뉴욕시장 선거에서도 티파티를 후원하는 막강한 자본가가 후원하는 유사단체가 벌써 기승이라니 이들 파시스트의 향후 행보가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