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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혹은 ‘공간의 압축’이 만들어 놓은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은 대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서로 다른 지방의 노동자들 상호간에 연계를 맺어주는 교통수단의 증대에 의해 촉진된다. 그런데, 이러한 연계만 맺어지면 어디서나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는 허다한 지방적 투쟁들은 하나의 전국적 투쟁,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지방도로를 갖고 있던 중세의 시민들이 수세기를 필요로 했던 단결을, 철도를 갖고 있는 현대 프롤레타리아들은 몇 년도 안되어 달성한다.[공산주의당 선언,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1,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p409]

맑스-엥겔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매뉴팩처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성 증대는 부르주아지가 개별 소규모 공장 혹은 가정에서 행해지던 생산기능을 대규모 공장에 모아서 분업화함으로써 가능했다. 대규모 공장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또한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곳곳에 산재해있던 노동자들이 단일 장소에 모이고 소통하면서 이른바 “노동계급”이라는 의식이 고양된 것이라고 보았다.

교통수단의 발달도 마찬가지 이치다. 자본가에게 있어 교통수단의 발달은 시장의 확대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준다. 교통수단이 지방도로에서 철도로 바뀌게 되면 원료를 보다 안정적으로 빠르게 조달이 가능하며, 상품 역시 보다 더 많이 신속하게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기에 자본의 거대화와 독점화는 더욱 촉진된다. 이것은 또한 인용문에서 분석한 것처럼 노동자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전국화된 투쟁을 보다 많은 규모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엥겔수주의의 뛰어난 점은 이렇게 서로 적대하는 계급이 흥미롭게도 같은 수단을 통해 갈등이 전국화되고 극대화될 수 있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공장은 노동력 수탈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철도는 시장의 확대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을 전국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그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만큼이나 같은 속도로 계급모순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것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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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uthor – Центральны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инофотофоноархив Украины им. Г.С.Пшеничного, Public Domain, Link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일당독재 또는 일인독재로 형해화되어 있는 21세기에 맑스-엥겔스의 통찰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공간은 인터넷에 의해 그 한계가 더욱더 좁혀졌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세계의 자본가와 노동자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돈을 벌고, 소통하고, 동시에 가짜뉴스에 현혹된다. 자본순환, 계급의식, 또 반대로 혐오의식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극단화된다. 맑스-엥겔스가 바라던 바람직한 투쟁의 집중도 없잖아 있지만, 세계적 우민화도 동시진행형이다.

더불어 교통수단의 발달과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세계화로 – 즉, 공간의 압축 – 인해 지구인은 값싼 상품이라는 호재(好材)를 공유하게 되었지만, 더불어 악재(惡材), 이를테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유행도 함께 겪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공간의 압축은 계급모순의 심화뿐 아니라 정치극단화, 유행병과 같은 부작용까지도 함께 공유하게 되는 상황을 불러온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의 압축은 자본주의의 축복이자 재앙인 셈이다.

그리고 공간의 압축은 맑스-엥겔스의 생각만큼 계급의식을 평준화하진 못했다. 세계화는 제조업의 저임금 국가로의 이전을 초래했고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은 일자리를 뺏기며 우경화되었다. 이는 해당 국가의 정치극단화를 불러왔고 세계는 다시 나홀로 금리인상, 전쟁, 에너지 쟁탈전 등의 양상으로 블록화되고 있다. 더불어 기후변화 등 자본주의 모순을 깨닫는 여론도 공간의 압축으로 실시간 공유되는 측면도 있으나 그 추동력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어느 경제학자의 사상전향서를 읽다 든 생각

마르크스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착취, 수탈하는 메커니즘’이라고 하고 있지만, 글로벌경제 이전의 자본주의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었다. 오히려 자본주의에서는 과도한 착취나 수탈이 마이너스로 움직인다. 적절한 재분배를 행하는 편이 자본주의 성장에 유리했던 것이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106]

제목이 사뭇 거창하고 과격한데 원래 오리지널의 제목은 ‘자본주의는 왜 자괴(自壞)했는가 – 일본의 재생을 위한 제언’이라고 한다. 여기에 쓴 “자괴”란 표현이 마땅치 않았던 역자가 부득불 위와 같은 제목으로 대체한 것이다. 따라서 제목에서 보는 것만큼 책 내용이 그렇게 과격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은 저자의 살아온 길과 이 책을 쓴 의도에서 엿볼 수 있다.

저자 나카타니 이와오는 1960년대 말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배운 철저한 시장주의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시장주의적 개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일종의 전향서로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일반을 폐지하자는 것은 저자의 생각이 아니다. 다만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맹신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인용한 구절은 저자가 주류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쭉 걸어왔기에 사실 이 반골(反骨)의 경제학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한다는 정황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인용하였다. 즉, 저자는 세계화되지 않은 과거의 자본주의는 그 지역의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재분배를 하다 세계화가 진전되며 이런 메커니즘이 사라지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맑스가 자본론을 쓰던 당시의 영국은 이미 세계화된 자본주의 국가였다. 어쩌면 플라자 합의 이전의 일본보다도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제국주의 종주국으로서 영국은 인도 등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해 원자재와 상품소비의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고, 자국 노동자는 “자유”계약을 통한 “자유로운”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고 어린이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이후 1차 대전 이전까지 자본주의의 중핵인 유럽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세계화 정도와 유사한 정도로 금융과 무역 등이 세계화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점증하는 자본주의 경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호무역주의를 선호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본주의와 세계화는 따로 존재할 수 없는 두 축이다.

저자의 말처럼 “적절한 재분배”는 자본주의 성장에 유리하다. “복지냐 성장이냐”를 고르라지만 복지는 GDP에 반영되기에 성장의 다른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자본주의자가 아니기에 자본주의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사회는 없고 자기책임만 있다”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지탱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이 자본주의의 모순인 셈이다.

지역은 돈 많은 浪人인 기업을 어떻게 유혹할 수 있을까?

The Verge라는 온라인 매체에서 일본 제조업의 상징인 거대기업 히타치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를 보도했다. 그 기사가 내 눈길을 잡아끈 이유는 기사 제목 때문이었다. 기사의 제목은 “히타치에게 좋은 것이 일본의 히타치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What’s good for Hitachi isn’t good for Hitachi, Japan)”. 무슨 의미일까 하고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 문장은, 히타치라는 이름의 기업이 기반을 두고 있는 일본의 도시 이름 또한 히타치임을 감안하고, 이를 교묘하게 활용하여 만든 문장이다.

기업 히타치와 도시 히타치의 운명은 일본의 제조업이 싹트기 시작한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구하라 후사노스케가 설립한 구하라광업소히타치광산(久原鑛業所日立鑛山)이 모체인 히타치는 광산용 전기기계의 수리공장을 1910년에 히타치市로 이전하면서 오늘의 사명을 갖게 되었고, 이후 도시와 기업은 자웅동체로서 상생해왔다. GM의 前 CEO 찰리 윌슨이 남긴 명언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이 이 도시와 기업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상황인 셈이다.

이미 이 블로그에서 몇 번 개탄했다시피, 위와 같은 명제는 점점 더 그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기술진보, 자본의 경영전략, 각국의 기업유치전략 등에 따른 자본의 세계화가 주요원인이다. 히타치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 사정이 더 있는데 바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히타치는 금융위기의 한파가 몰아친 2008년 7873억 엔의 순손실을 기록한다. 회사는 수익성 있는 부문을 팔아치우고, 주종목을 전자제품에서 산업기계로 바꾸며 생존을 도모했다. 이중에는 물론 해고와 고용의 해외이전도 포함되어 있다.

한때 40만 명에 달하는 고용을 창출했던 히타치의 현재 고용 인력은 323,500명이며 이중 3분의 1은 해외에 기반을 둔 인력이라고 한다. 이런 세계화 전략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히타치市는 피해를 입고 있다. 시의 인구와 제조업 인력은 지난 10년 동안 각각 20% 씩 줄었다. 시의 유일한 백화점은 2008년 문을 닫았고 극장은 한 군데도 없다. 비슷한 운명의 가메야마市 – 일명 “샤프” – 에 비해서는 나아보일 수도 있겠으나, 도시의 미래는 장기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적다는 점에서 가메야마市와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인다.

산업과 지역경제와의 함수관계에서의 비극은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었는데, 이는 두 체제 공히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한 체제였고 지역단위 경제가 특정산업 혹은 특정기업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역시 풀어야할 숙제지만, 더 큰 문제는 지역경제가 산업 및 기업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닌, 히타치처럼 상호갈등 관계로 바뀌는 경우다. 도시의 이름을 바꾼다고 한풀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전에 HBR은 기업과 지역의 모순관계에 관한 글에서, 기업이 특정 지역에 초래한 적자에 세금을, 기업이 기여한 흑자에 세금혜택을 주는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세금이 기업에 대한 통제수단으로써 효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나 자유무역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이 해법이 실현가능할지 의문이다. 미국이 제조업 경쟁력을 되찾고 있다는 글에서 보듯, 입지의 자유를 획득한 자본은 세금, 생산성, 임금, 인프라 등의 변수를 조합해 최적화를 시도하고, 노동자와 지역은 다만 자본의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다.

재정위기 극복을 위한 해법인 ‘더 많은 세금’, 그 한계

자본주의를 무릎 꿇리고 있는 것은 좌익들의 주장의 힘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너무 오랫동안 자라면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소수가 이익을 얻고 다수가 그렇지 못한 시스템에 살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하에서 매 수년마다 투표함이 다수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투표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 그리고 그 다음엔 침묵을 지키고. 이러한 서비스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는 공공 자산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적은 양이지만) 혜택을 베푼다. 그러나 부자와 기업이 해마다 더 적게 지불하면서 자신들 주머니에 챙기고,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어서 세금을 못 낸다면, 돈은 어디에서 나올까?

정답 : 부채. 공공부채는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빈자는 더 가난해지도록 하는 국가가 지불하는 비용이다. 이 시스템은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Debt and Democracy : Why Germany’s Rich Must Pay Higher Taxes]

독일의 경제학자 Jakob Augstein가 슈피겔에 기고한 Debt and Democracy의 일부다. 서문을 보고서는 사회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 서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는 독일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Jakob이 말하길, 이러한 인식은 좌익의 선전선동이 아니고 독일 사회가 “빈자에서 부자로 부를 재분배(redistribution of wealth from poor to rich)”하는 시스템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법학교수 Paul Kirchhof를 비롯한 우익진영에서 나오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Jakob은 재정위기에 몰린 국가가 공공지출을 줄이게 된다면 부자는 개의치 않을 것이나 가난한 이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종내는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갈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해지고, 부자는 세금을 내지 않고, 국가는 재정이 어려워져서, 공공지출을 줄이면 결국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 Jakob이 우려하는 악순환 경제 시스템이다. 그가 제안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세금을 더 걷는 것이다. 독일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그 어느 때보다 낮다고 하는데, 최고세율은 42%다.(우리나라는 35%)

이 주장의 한계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와 동일한 맥락인데, 과세는 개별 국가의 권한인 반면에 자본은 세계화되어 부자와 기업이 자산을 해외에 분산하는 방법으로 조세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 글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자본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면서도 더 적은 세금을 내고 있다. 정부의 지속적인 감세는 우익의 왜곡된 경제관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일종의 자본에 대한 국가 간의 세율 경쟁입찰의 결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이 국가를 경쟁시키는 일종의 逆자유경쟁시장이 된 것이다.

결국 전 세계적인 규모의 동일과세라는 이상주의적인 대안이외에 뾰족한 대안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할 글들

 

사악한 구글과 미련한 아일랜드

해외 세금계산서를 줄이기 위해, 구글은 복잡한 법적 구조를 사용하였고 이를 통해 2007년에 31억 달러를 절감하고 지난해 총수익을 26%증가시킬 수 있었다. 많은 다국적기업들이 비슷한 구조를 활용하는 가운데, 구글은 그들의 해외 세율을 기술 분야의 경쟁자들보다 더 낮게 낮출 수 있었다. 2007년 이래 그들의 세율은 2.4%이다.[중략]
미재무부에서 일했던 세무 경제학자 마틴 설리반은 “이 회사는 평균적인 법인세율이 20%이상인 고세율의 나라들에서 대부분 영업활동을 합니다.” 미국 다음으로 구글의 두 번째로 큰 시장인 영국은 28%다.
버뮤다에서는 법인세가 전혀 없다. 구글의 이익은 세무 변호사들로부터 “더블 아이리쉬”와 “더취 샌드위치”로 불리는 대단히 난해한 경로를 통해서 이 섬의 백사장으로 여행한다. 구글의 경우 이렇게 작동한다.: 유럽, 중동, 또는 아프리카의 어떤 회사가 구글을 통해 검색광고를 구입하면, 이 돈은 구글 아일랜드로 송금된다. 아일랜드 정부는 기업이윤에 대해 12.5%를 과세한다. 그러나 구글은 이 이윤을 더블린 사무실에 머물게 하지 않게 함으로써 대부분의 세금을 내지 않았는데, 보도된 바로는 2008년에 세전이윤이 매출의 1%도 안 된다.
아일랜드 법으로는 구글이 거액의 세금을 부과 받지 않은 채 버뮤다로 직접 돈을 보내기 어렵다. 그래서 지불된 돈은 네덜란드를 통해 짧은 우회로를 경유한다. 아일랜드에서는 다른 EU국가들의 회사로의 일정액의 지불에는 과세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돈이 네덜란드로 가면, 구글은 너그러운 네덜란드의 세법을 활용할 수 있다. 거기에 있는 그들의 계열사 구글 네덜란드 홀딩스는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직원이 아무도 없다) 모여진 돈의 99.8%가 버뮤다로 넘어간다.(버뮤다에 있는 이 계열사는 기술적으로는 아일랜드 회사다. 그래서 “더블 아이리쉬”란 별명이 붙었다.)[The Tax Haven That’s Saving Google Billions]

사악해지지 말자던 구글이 저지르고 있는 “사악한” 짓의 일부다. 어제 이 블로그에 올린 글에 댓글 달아주신 daremighty님의 제보(!?)로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구글을 통해 많은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는 와중에 – 비록 공짜이긴 하지만 그게 과연 공짜일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는 – 구글마저, 아니 다른 IT기업보다 더 잔머리를 굴리며 이렇게 탈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왠지 악덕기업에 한 푼 보탠 것 같아 당황스럽기도 하다.

한편, 이 “돈의 세계여행”에서 눈에 띄는 나라는 아일랜드다. 아일랜드는 최근 85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한 나라여서 특히 눈에 밟힌다. 아일랜드는 1980년대 말부터 강력한 대외개방경제를 표방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였다. 경제정책의 핵심은 12.5%라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율로 다른 나라의 기업을 유혹하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단기적인 성공을 거두어, 아일랜드는 유례없는 높은 성장률을 지속해 왔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성장추세는 꺾이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구글의 행태가 왜 아일랜드의 성장추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던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다. 즉,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한 국가의 세금 세일즈는 언젠가 더 낮은 세율, 그리고 더 교묘한 탈세(또는 절세) 방법이 나타나면 쇠락할 수밖에 없는 영업 전략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구글에 자국 기업이 2개나 되면서도 푼돈만 걷고 있는 꼴이라니…

그럼에도 아일랜드는 어이없게도 구제금융에 대한 반대급부로 12.5%의 법인세율을 올리라는 채권단의 주문에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면서 양보하지 않았다. 그대신 그들이 150억 유로 규모의 재정긴축안을 발표하면서 내놓은 대책에서는 최저임금 삭감, 복지예산 축소, 공공분야 일자리 축소 등 노동계급에게 일방적으로 피해가 가는 대안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심지어 부가가치세의 세율은 21%에서 23%로 올렸으면서도 말이다.

유럽의 변방이었던 아일랜드가 EU에 참가하면서 누릴 수 있었던 특혜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 거칠 것 없는 자본의 세계화라는 상황은 처음 얼마간 아일랜드에게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였으나, 이제는 경제적 재난을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법인세율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검을 강물에 떨어트리고 그 떨어진 배의 위치에 표시를 하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미련한 짓일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런 미련한 짓이 비단 아일랜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각 나라, 각 지방자치단체는 여전히 경쟁적으로 다국적 기업유치를 위해 사탕발림을 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히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그것은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심지어 미국 자동차의 자존심인 디트로이트조차 메뚜기 떼처럼 이동성이 뛰어난 자본을 잡지 못해 폐허가 되지 않았는가? 자본은 바람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대안은 뭘까? 전에 농담 삼아 말했지만 전 세계가 단일세율을 적용하는 것만이 구글과 같은 잔대가리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다. 여전히 그게 실현가능하냐 하는 의문이 드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영토적 개념의 국가이익이 국제경제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낮은 세율이 국가경쟁력이라고 강변하는 이가 있다면 뭐 아마도 세율 0%가 될 때까지 내달리는 치킨게임을 좋아하는 이일 것 같다.

워런 버핏의 “더 많은 세금”은 올바른 해법인가?

“부자들이 항상 이야기하길, 알다시피,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주면 우린 나가서 돈을 더 많이 쓸 것이고, 그러면 그것들은 나머지 당신들에게 모두 흘러들어갈 거예요.” 버크셔해서웨이의 CEO 버핏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미국 대중이 알아차렸으면 합니다.”[Warren Buffett Tells ABC Rich People Should Pay Higher Taxes]

요즘 빌게이츠와 함께 ‘자비로운 자본주의’의 선동가가 되어버린 워런 버핏의 최근의 사자후다. 각각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대표하는 이들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오른 두 인물의 이러한 일련의 언행은 어쩌면 현재의 자본주의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토로하는 고백성사일지도 모른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들 “착한” 부자의 용기 있는 언행에 호응하고 있다. 사실 버핏이 말한 톤의 내용은 이미 소위 “좌파”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정직한 우파 경제학자들마저도 인정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 발언을 절대 할 것 같지 않은 이들로부터 들었다는 신선함 때문에 더 많은 호응을 얻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버핏은 거짓선동에 불과한 ‘트리클다운 효과’에 대한 대안을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는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을 주장하고 있다. 부시를 비롯한 보수정부의 정책기조에 정면으로 반하는 주장이거니와 진보진영의 주장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증세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다른 상황도 있다는 점이다.

세전 국내 비금융 기업이윤은 – 한데 뭉뚱그렸지만, 또한 미국 비즈니스의 근본적인 건전성에 대한 공정한 평가기준으로 보이는 – 국민소득(national income)의 비중에서 최고기록의 근처에도 못 가는 수준이다. 이들 이윤은 1940년대에는 국민소득의 15%를 초과했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연속 12%를 넘었다. 금년 3분기 이들 이윤은 국내소득의 7,03%다.
[중략]
누가 더 잘하고 있나? 음. BEA의 데이터에 따르면, 금융업의 이윤과 “나머지 세계”의 이윤이 – 즉, 미국 국적 기업이 외국에서 벌어들인 돈 – 1950년대와 1960년대 그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국민소득에 대한 지분으로 기업이 내는 세금은 그 때보다 훨씬 적다.
그래서 기업이윤이 전 기간에 걸쳐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금융회사들(대부분 거대 금융회사)과 다국적 기업들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적은 세금을 내기 때문이다. 흠…[The Real Story Behind Those “Record” Corporate Profits]

하바드비즈니스리뷰의 편집책임자 저스틴 폭스(Justin Fox)의 주장에 다르면 세금이 걷혀지지 않는 상황이 단순히 보수정부의 세금감면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기업이윤의 비중이 점점 더 금융업과 다국적 기업에서 창출되고 있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고, 이것이 더 적은 세금징수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금융업은 제조업과 달리 다양한 금융상품과 구조화 금융 덕분에 여러 가지 세금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수입의 주요부분을 담당하는 부문을 조세피난처로 옮겨 세금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들 역시 다양한 세금혜택을 좆아 미국 이외 지역에 적은 세금만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 있고 이를 잘 활용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국민소득(national income)은 늘어도 국내소득(domestic income)은 줄어들게 된다. 자연히 기업이 낼 세금은 줄어든다. 또한 고용창출효과가 큰 제조업 부문이 줄어들게 되면서 근로소득도 줄어 자연히 세금은 더욱 줄어들게 될 것이다. 자본의 세계화가 제1세계 국가에게도 별로 이롭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의 세계화’는 제3세계에게는 혜택일까? 중국, 인도, 그리고 망하기 전의 아일랜드와 같은 몇몇 나라들은 대외 개방경제, 특히 해외직접투자로부터 혜택을 받은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나라들은 – 위에 언급한 나라들조차 – 미국 노동자들보다 훨씬 적은 임금으로 동일한 노동을 해야 하는 혜택을 받았을 뿐이다.

한편 ‘경제저격수의 고백’의 저자로 유명한 존 퍼킨스가 CNN기사를 인용하여 주장한 바에 따르면 미국기업의 2/3와 해외기업의 68%가 2조5천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으면서도 연방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 결과 전체 연방세에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43년 40%에서 2003년 7%로 급감하였다 한다.

요컨대 미국의 자본이 금융자본화/세계화되면서, 그리고 국내정치가 금권주의화되면서 기업의 이윤은 계속 상승하여도, 그 이윤은 미국내 제조업을 통한 부의 창출보다는 다른 국가로부터의 노동착취, 더 적은 세금납부를 통해 달성하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구조적인 상황은 문제가 부자들의 자애로운 납세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움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미국자본의 복잡한 사정을 촉진한 것은 “더 많은 세금을”을 외치고 있는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가 가속화시킨 상황이기도 하다. 그들 스스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대변하며 금융의 세계화와 자본주의 제조업의 국제적 수직계열화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세금을 더 내자고 할게 아니라 자신들의 기업경영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설국열차’라는 만화가 있다. 얼어붙은 지구를 끝없이 달리는 열차에 앞 칸은 부자들이 뒤 칸은 빈자들이 타고 있다. 부자 들은 열차속도를 높이기 위해 뒤 칸을 떼어내려 한다. 그 만화를 보며 부자는 빈자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현실에선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세계화로 파편화된 미국에선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미국 부자들은 다른 설국열차의 뒤 칸을 착취하면 되니까.

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 (6)

다음은 사회주의평등당(the Socialist Equality Party) 호주지부의 국가서기인  Nick Beams가 2008년 11월과 12월에 걸쳐 호주 여러 도시에서 가졌던 강의를 요약 발췌한 내용이다. 번역이 일치하지 않은 점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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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노동계급이 그들만의 독립적인 이해관계로 나아갈 프로그램 및 전망 – 국제사회주의 – 의 개발이 필요하다. 이는 다양한 “좌파적” 개혁가와 급진적 경향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정책과의 분명한 차별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 모두는 자본주의 질서의 영원성을 확신하면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들 중 몇몇을 살펴보자.

작가 나오미 클레인 Naomi Klein 과 같은 케인지언에게 위기의 원인은 정치적이다. 위기는 전후 기간 동안 작동하였던 규제를 철폐한 의사결정의 탓이다. 전후 규제 시스템의 붕괴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닌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의 심연의 모순이라는 인식과 같은 분석은 클레인에 의해 “근본주의”로 평가절하 당한다. 결국 그들의 역할은 이번 위기로 인해 급진화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다.

소위 “좌파적” 개혁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과거로부터의 교훈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정치적 전망의 논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국의 반(反)부채 활동가 앤 페티포 Ann Pettifor는 10월 21일 가디언에 쓰길 실패한 “세계화” 실험의 파괴적인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그의 주장은 금융시장은 “길들여지고” 국가는 “덩치를 키워서” 정부가 보다 효율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고 단일 글로벌마켓은 “덩치를 축소해야”하고 “적당한 규모”라는 컨셉 하에 국제무역 시스템을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티포의 처방은 1930년대 초기 노동당 “좌파”의 경력을 쌓았던 오스왈드 모슬리 Oswald Mosley 가 주도한 운동을 포함한 우익과 파시스트 운동의 “좌파적” 정책을 상기시킨다. 이 운동은 국가적 이익 차원에서 세계시장을 비난하였고 “세계화”와 그 당시 지칭되었던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적대시하였다.

국민국가 정부의 힘을 키우자는 페티포의 호소는 구제금융이 개시되면서 잘 이행되고 있다. 금융위기는 이미 유럽의 정부들은 “자신들의” 기관들을 보호하면서 스스로 분열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미행정부가 자동차 회사들을 구제금융한다면 다른 정부들도 “국가의 챔피온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슷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다른 말로 그들 모두가 1930년대 그러한 재앙을 몰고 왔던 관세장벽을 반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에 부합하게 파괴적인 형태의 보호주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페티포가 주장하는 국제무역의 “적당한 규모”는 1930년대의 세계시장의 붕괴와 더불어 형성된 무역블록의 잔재이다.

케인지언 “좌파”들은 경기부양 패키지의 실행을 지지한다. 그리고 1월 20일 오바마 행정부의 권력이 어서 오기를 갈망한다. 11월 22일 오바마는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2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이미 지난 12개월 동안 해고자 수가 280만 명 증가했고 실업률은 1.7% 포인트 증가했다.

모든 국제 금융거래에 거래세(turnover tax)를 도입하자고 주창한 것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에 위치한 ATTAC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써 주창하길 “금융이 사회적 정의, 경제적 안정성, 그리고 지탱 가능한(sustainable) 개발에 기여하여야 하는 반면” 현재의 “모델”은 총체적인 불신을 얻고 있기에 “정치와 경제의 의사결정자들은 이 지탱 불가능하고 불공평한 금융 시스템을 인민의 요구, 평등, 그리고 지탱가능성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최근 ATTAC 와 같은 소위 반(反)세계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조직들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른 면에서 그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끝낼 수도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ATTAC 은 최근 그들의 슬로건을 다시 수정했다. “다른 금융 시스템은 가능하다 : 이윤에 앞선 안정성과 연대(Another finance system is possible: Stability and solidarity before profits.)”

이들의 요청은 “새로이 출발한 금융시스템을 엄밀히 규제하기 위해” UN의 후원 하에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것인데 이는 2003년 이라크의 범죄적인 침략을 자행하려 했던 미국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UN의 시도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도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지성인 중 한 명인 프라밧 파트나익 Prabhat Patnaik 은 케인지언의 정부지출 증대 프로그램에 “좌파적”인 맛을 가미했다. 10월 13일 공개된 “위기의 전망”이라는 글에서 그는 현 시점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세계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증가하는 소비를 통해 수요를 불어넣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그러한 지출의 일반적인 목적은 최근 수년간의 세계경제의 특징이었던 전 세계 보통사람들의 생활수준을 쥐어짜는 것과는 반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성장 부양”은 새로운 투기적 거품이 아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에서의 인민들의 삶의 수준을 직접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확대된 정부 지출”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다소간은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고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를 경감시킬 수 있다는 개념을 개진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반항하는 대중이 그들이 직면한 현실에 눈감게 만드는 것이다. 위기의 근본에는 전 세계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된 잉여가치와 관련한 가상자본의 초과 축적이 놓여있다. 이는 여하한의 생활수준의 향상은 이윤의 위기를 악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Nick Beams 는 이후 몇몇 좌익들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고발하고 있으며 심지어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일부 인사 발언까지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생략한다. 여기까지는 케인지언 “좌파”를 비롯한 급진적이나 Nick Beams 가 기회주의적이라고 간주하는 이들의 비판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어 소개한다. 또한 이 뒷부분은 향후 사회주의 운동의 진로를 트로츠키주의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들 분파의 행동강령을 알아두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이 글을 번역했던 애초 나의 관심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일단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추후 의미가 있다고 판단될 때 별도로 소개할지도 모르겠다. :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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