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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나나 공화국 이야기

1983년에 국무원은 「도시 비농업 개체 공상업(工商業)의 몇 가지 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도시의 개체 공상업은 7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할 수 없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저술에 근거한 규정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론을 설명하기 위해 8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가상의 공장을 예로 들었는데, 중국 당국은 이를 ‘노동착취’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중국 정부가 보기에 자영업이 7명 이상의 사람을 고용하면 사영기업이 되고, 사영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개혁과 개방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I, 조영남 지음, 민음사, 2016년, p228]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이념적 경직성 내지는 이념적 조악함을 설명하는데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보았다. 언뜻 보아도 이는 자본론을 마치 종교경전 마냥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직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큐란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여성의 몸을 위아래로 감싸고 순종을 강조하는 무슬림의 해석이나, 성경에 그렇게 나온다는 이유로 극악하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개신교도의 해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경전을 지킴으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데에는 기여한 바는 없으나 그 교리를 강요한 이의 권력이나 도덕적 순결성은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한 채 시장경제를 성공리에 –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 도입하여, 오늘날 미국을 위협할 다음 국가로 평가받는 등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단순히 인용문에서처럼 「규정」이 교조적으로 끝까지 관철됐더라면 달성하지 못했을 위치라 할만하다. 중국이 경제에 있어 교조주의를 극복하고 유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추동했던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정치체제는 유지하면서도 경제체제는 바꿀 수 있다는 – 1992년 10월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라 할 수 있다.1

중국 공산당이 “사회주의 = 계획경제”라는 도식을 포기한 것은 여러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계획경제/자원동원경제는 사실 戰後 경제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하는 대다수 국가들에서 체제와 관계없이 시도했던 개발전략이랄 수 있다. 혁명 후의 소비에트가 그랬고, 대공황을 겪은 미국이 그랬고, 10억 인구의 중국이 그랬고, 도시국가로서 살아남아야 할 싱가포르가 그랬고, 북괴와 체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남한이 그랬다. 국가 스스로가 하나의 거대기업으로 기능하는 것은 일종의 戰時경제체제랄 수 있고 체제경쟁에 직면한 많은 나라들은 어느 기간까지는 계획경제 요소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2


“제국주의 전쟁의 음모를 분쇄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아가자!”(출처)

하지만 경제가 전간기와 질적으로 다른 고도화 단계에 들어서면서 상명하달식의 행정기능만으로 경제 시스템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됐다. 빅데이터 혹은 인공지능이 진정 시스템 전체의 원인과 결과를 예측하여 투입-산출을 조정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시장에서의 개별 경제단위가 경쟁하며 우열을 평가받고 진화-퇴보를 거듭하는 것 이외에는 딱히 더 좋은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는 경제발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역할에서 “정의로운 심판”의 역할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과 합당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공유된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 트럼프의 행보는 역사의 퇴보를 초래할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느니, 그 재원을 멕시코로부터의 수입관세로 마련하겠다느니 하는 경제원론에도 안 맞는 소리를 해대는 것은 가장 천박한 수준의 “가부장적 아버지” 역할이다. 더욱 불행하게도 트럼프는 일당독재를 통해서가 아닌 대의적 민주제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라는 점이다. 즉, 그는 선거를 통해 일당독재 지도자보다 더 많은 정치적 자본을 얻게 됐지만,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집단적 논의를 통해 시행착오를 수정할 정치적 의지는 가지지도 가지려 하지도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면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기간산업과 핵심 산업(예를 들면 금융업)은 공공적 기능이 관철되도록 “사령탑”적인3 통제를 강화하되 전 세계적 시장경제는 정의롭게 유지되도록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술이 잘못된 시장경제는 경제격차와 이념적 편견의 격차만 벌려놓아 보호주의, 인종주의, 독자주의 노선만을 강화시켰고, 그 가장 흉악한 결과가 트럼프의 당선이다. 그는 개별기업에 입지를 지정하고, 도드-프랭크법 규정을 무력화시키고, 이민을 통제한다. 7인 이하의 사영기업 허용이 희극이라면 이번 버전은 비극인가?

80년대 중국이 일당독재 바나나 공화국이었다면 현재의 미국은 민주적 바나나 공화국이다.

균(菌) 본위제

균 본위제를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문득 균들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부패하지 않는 경제가 활개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볼 지 궁금해지곤 한다. [중략] 그런데 부패하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도 거품붕괴도 허용하지 않는다.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재정출동이나 제로 금리정책과 양적완화 같은 금융정책을 통해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살포하는 수법을 써서 한없이 경제를 살찌우려고만 한다.[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더숲, 2014년, p147]

‘본위제(本位制, standard)’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그리 정교한 것은 아니지만 그 발상이 재미있어서 인용해보았다. 젊은 시절 “블랙기업”에 가까운 식품회사에 근무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제빵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권유로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읽고 난 후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 특이한 저자의 이력이 잘 드러나는 아이디어다.

천연 효모를 써서 좋은 빵을 만들겠다는 집념을 가졌던 저자는 균(菌)에 대해 많은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 ‘균(菌) 본위제’ – 굳이 보다 정확한 표현을 찾자면 배금주의에 대항하는 배균주의 정도가 아닐까 싶다 – 라는 신선한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균의 작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기물을 부패 혹은 발효란 이름으로 분해한다.

그렇다면 정말 경제 시스템에서 금본위제 대신 균본위제를 채택하면 어떻게 될까? 균은 유한하다. 더구나 유기물을 분해시킨다. 변하지 않는 화학적 특징 덕분에 교환가치로 인정받는 금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균을 화폐로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경제는 부패, 즉 거품이 항상적으로 꺼지게 될 것이다. 거품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는 경제 시스템이 될 것이다.

항상 부패가 작동하는 경제의 결과는 비교적 명확하다. 금본위제에서 제공되는 신용이라는 촉매를 활용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은 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된 여러 소수민족의 부락경제 정도로밖에 발전하지 못한다. 또는 아예 대안경제의 목표를 가지고 가공의 신용창출을 허락하지 않는 대안화폐 공동체와 같은 실험적 공간에서 그런 경제를 찾아 볼 수 있다.

사견으로 여러 대안경제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범위에서 성공적으로 안착되지 않는 한은, 경제의 발전에서 거품의 생성은 일종의 필요악이다. 대표적인 거품이 대출이다. 오늘날 기업활동에서 자동차 구입에 이르기까지 소위 “레버리지”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 레버리지가 없었다면 세계 경제규모는 지금의 10분의 1도 안 됐을 것이다.

다만 저자도 주장하듯 경제를 부패시키지 않고 계속 살찌우려 하는 현재상황이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부패하지 않는 빵을 상상할 수 없듯이 한없이 부풀어만 가는 경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번 읽은 ‘스트레스 테스트’의 저자 티모시 가이트너는 분명 경제의 구원투수였지만 또한 부패하지 않는 방부제 그득한 빵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신용제도에 관한 칼 맑스의 서술

그러나 결코 잊어선 안 될 점은, 첫째 귀금속형태의 화폐가 여전히 토대이고 이 토대로부터 신용제도는 본질적으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신용제도는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적 개인에 의한 독점적 소유(자본과 토지소유의 형태로)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신용제도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형태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생산양식을 그 가능한 최고·최후의 형태로 발달시키는 추진력이라는 점이다. [중략] 은행제도는 자본의 분배를 사적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으로부터 빼앗아 하나의 특수한 업무, 사회적 기능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렇기 때문에 은행과 신용은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추진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되며 공황과 사기의 가장 유효한 매개물의 하나로 된다. [칼 맑스, 자본론 제III권(下), 1992년, 비봉출판사, pp 746~748]

신용제도에 대한 맑스의 혜안을 살펴볼 수 있는 문장이라 인용했다. 신용제도라는 것은 맑스도 자본론에서 말하다시피 금세공업자, 고리대금업자의 약탈적 금융을 자본주의 체제에 맞게, 즉 “이자 낳는 자본”을 산업자본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네덜란드의 발달한 금융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영국의 표준적인 개인은행업의 시조인 조시아 차일드(Josiah Child)는 고리대금업자의 독점을 맹렬히 비난하며 고리대로부터 상업, 산업, 국가를 해방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영란은행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 신용제도는 귀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 신용제도가 탄생한 이후 각국이 금본위제 등 귀금속 연계 신용제도를 유지함으로써 금융견실주의에 충실하고자한 것을 보면, 경제 지배층도 신용제도가 “본질적으로” 귀금속 형태의 화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귀금속에 대한 믿음은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아래 금값의 변동을 보면 경제주체들이 인플레이션에 대한 헤지수단으로 금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다. 이번 美대선에서 롬니는 금본위제 복귀를 고려하기까지 했다.

WGC-Gold-price
출처
 

맑스의 두 번째 강조점은 신용제도의 탄생의 기원에서 궁극적인 방향까지 함께 고려하고 있다.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고 있기에 그 자본 역시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렇듯 발달된 생산력 체제가 사적인 독점적 소유를 기반으로 움직이기에 자본이 필요한 누군가는 다른 이에게 돈을 빌려야 하고, 이는 신용제도의 발달을 수반하게 된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발달이 가속화되기 위해 신용제도는 꼭 필요했고, 결국 그 신용제도는 생산양식의 최후의 형태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 된다. 맑스의 “모순의 변증법”의 좋은 사례라 할 만하다.

하지만 자유방임주의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자본의 분배”를 마냥 사적 자본가의 손에 맡겨놓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 때문이다.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는 필히 중앙은행 등을 통해 신용을 통제하였다. 시장자유주의의 본산 미국조차 민간과 관이 결합된 형태의 Fed라는 나름의 독특한 제도를 통해 “자본의 분배” 기능을 통제하였다. 문제는 맑스가 예언한 것처럼 그 자본과 신용 또한 사적자본, 최근 들어 투자은행이 독점하고 그 생산을 한계이상으로 몰아붙이면서 공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짧은 문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19세기 후반에 쓰인 이 책이 이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것은 감탄할만한 재능이다.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에 살았고,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자본가였던 삶을 살았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평생의 동지로 있었기에 가능한 서술이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 사실 제III권은 맑스의 원고를 엥겔스가 정리해서 쓴 것이고 – 위와 같은 송곳 같은 문장을 보면, 우리 후대들이, 심지어 맑시스트를 자처하는 자들조차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Gold
Always believe in your soul
You’ve got the power to know
You’re indestructible
Always believe in, because you are
Gold
[Spandau Ballet 의 히트곡 Gold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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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통제에 대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모순

과거에는 자본은 자유로운 노동자에 대한 자기의 所有權을 행사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强制法에 의거하였다. 예컨대 1815년 까지는 영국의 기계제조 노동자들의 外國移住가 중형으로써 금지되고 있었다.[자본론 I 下, 칼마르크스,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00년, pp726~727]

오늘날엔 물론 이런 야만적인 노동통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또한 보다 교묘한 형태로 노동자들의 이전의 자유는 제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각국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권 제한이다. 자국 노동조건의 보호라는 미명 하에 진행되는 이 통제는 현실에서는 결국 3D업종에 대한 저임금 노동력의 일상적인 공급으로 귀결될 뿐이다.

제조업이나 저부가가치 서비스업에 대한 위와 같은 노동통제가 일반시민들의 평균적인 정서에 다소 반하는 야만적인 형태라면,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연구인력 등에 대한 노동통제는 보다 교묘하고 그럴듯한 형태를 취한다. 이 주장은 보통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있어 위와 같은 노동통제보다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국가핵심기술을 지키는 일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설계도면이나 실험 데이터 등을 이메일이나 디스켓에 담아 빼내가는 ‘보이는 기술유출’은 수사기관을 동원해 손써 볼 기회라도 있다. 하지만 연구원들의 머리에 담아가는 ‘보이지 않는 기술유출’은 더욱 심각하다. 국가핵심기술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가 어느 날 외국기업으로 이직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두뇌에 축적된 기술개발 노하우도 고스란히 함께 유출된다. 결국 기술을 지키려면 엔지니어의 외국기업 이직을 막아야 한다.[핵심 엔지니어 국가가 관리해야]

이 주장은 결국 상대적인 고급 “노동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여 그들의 직업선택의 자유와 심지어 19세기 영국에서 시행했던 야만적인 거주이전의 자유까지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멋모르는 칼럼니스트의 공허한 주장 일뿐이라고? 2010년 법원은 기술의 유출을 우려하여 연구원들의 이직을 일정기간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은 LG화학이 “2차전지 핵심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며 외국계 경쟁사로 이직한 연구원 6명을 상대로 낸 전직 금지 가처분신청에서 “퇴사일로부터 1년에서 1년6개월 동안 외국계 경쟁사로 이직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법원 ‘기술유출우려’ LG화학 연구원 이직 금지]

결국 공권력은 개별자본의 이익을 보호해줬는데, 이러한 결정의 근저에는 총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감은 자본 대 자본의 이합집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LG화학이 “외국계 경쟁사”와 기술협력을 하거나 M&A를 시도한다면 이는 경영활동으로 보호받을 것이다.

물론 일부의 경우 소위 “국부유출”이나 “국가적 자존심” 등 정치적 문제로 인해 기업의 이러한 활동이 제약을 받을 때도 있다.(이를테면 중국기업의 미국 내 인프라 자산의 인수 등) 하지만 이를 무력화시키는 양자간 투자협정 등이 FTA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면, 여하간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도 기업 활동의 저해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

쌍용자동차나 외환은행의 경우처럼 외국 기업의 한 기업에 대한 전면적 기술이전과 자본이전에 대해서는 “외자유치”라는 명목으로 보호되지만 연구 인력의 직업선택에 대한 (상대적으로) 부분적인 기술이전에 대해선 공권력의 힘으로 막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FTA등 자본의 자유를 강화하는 협약에 의해 더 빈번해질 것이다.

 

보론 :

트위터에서 aleph_k님이 아래와 같이 의견을 주셨다.

기술직 인력의 해외 유출을 막는 독소조항은 당장 FTA하면 외국에서 제소할 제0순위 중 하나 아닌가요?[출처]

이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어 한미FTA 제19.2조(기본 노동권)에 보면 “각 당사국은 작업장에서의 기본원칙 및 권리에 관한 국제노동기구 선언 과 그 후속조치(1998년)(국제노동기구선언)”에 기술된 대로 “고용 및 직업상의 차별의 철폐”를 준수하여야 한다.

표현이 추상적이긴 하지만 ‘특정고용이 자국 자본에 유리하다면’ 위에 예로 든 연구 인력의 이직금지 판결 등에 대하여 충분히 딴죽을 걸 수 있지 않을까 판단된다. 다만 이와 같은 행태는 당사국의 선의에 의한 노동의 자유 부여라 기보다는 이 또한 국가의 외피를 둘러쓴 자본의 경쟁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FTA와 자본이 부여하는, 또는 부여할 수 있는 “노동의 자유”는 당사국 자본에 유리한 범위 내에서만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저급인력은 여전히 이러한 자유에서 배제될 것인데, 이는 NAFTA를 체결했음에도 미국이 어떻게 멕시코로부터의 인력유입을 통제하고 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바로 그 땅에 멕시코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고 있다. 전에도 불법 이주의 익숙한 통로가 되었던 그곳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뒤 급증한 멕시코의 빈민들이 매년 몇십만 명씩 새로운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사막과 늪지대에서 국경수비대에게 발각돼 비참한 최후를 맞는 멕시코인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은, 그 맞은편에서 선조들이 빼앗은 국경을 철저히 수호하는 미국인들의 ‘애국전쟁’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모순의 멕시코 국경]

근본적으로 FTA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는 관심도 없으며 당연하게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조항은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국의 자본에 이익이 되는 한에서 전문적인 연구 인력의 이직제한에 대해 딴죽을 걸 소지는 있으나 노동자 일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오히려 한미FTA에서는 변호사 등 전문직 서비스에 대해서만큼은 제12.4조(시장접근) 등에서의 제한 없는 시장접근에 대한 유보조항을 두었다. 이들 전문직의 기득권이 자본의 그것에 근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엔지니어링 서비스 역시 자국에 사무소를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 노동의 자유를 제한한 측면이 있다.

네이버 지식인 중에서 발견한 질문

차마 링크는 못 하겠고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를 추구했었는데 왜 자본론이라는 책을 쓴거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거의 반대되는 사상 아닌가요? 다른 지식인벌써 다 검색해봤습니다. 알기쉽게 설명해주세요. 짧고 간략하게. 다른데서 그냥 퍼오시면 선택안합니다.

초일류 직장인의 자살소식을 접하고

이 부사장은 삼성전자의 엘리트코스인 서울대 전자공학과, 미국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박사를 따고 일본 NTT에 근무하다가 1992년 삼성전자에 합류한 인재다.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 부사장은 주로 반도체 D램과 플래시메모리 분야에서 일 해왔으며, 2006년에는 그룹 내 최고의 엔지니어게 주어지는 ‘삼성펠로우’에 선정되기도 했다.[S급 인재 삼성전자 부사장, 업무과중에 투신자살]

직장인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춘 “S급 인재”가 운명을 달리 하셨다. 경찰은 “업무가 과중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이 씨가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번 ‘우울한 슈퍼리치’라는 글에서도 적은 바 있지만 사회적 경제적 성공과 ‘행복’이 반드시 함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언젠가 엄청난 돈을 버는 헤지펀드 투자 매니저에 관한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단위가 거의 천만 달러 단위였다. 그런 그는 인터뷰 와중에도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업무처리를 하느라 제대로 인터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래서 멍청한 생각을 했다. ‘노동시간을 1/10로 줄이고 돈을 1/10만 벌어도 남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 아닌가?’ 하는…

물론 바보 같은 소리다. 월스트리트 금융업과 같이 전 세계의 금융시장이 실시간으로 전쟁터인 상황에서 그 친구는 24시간 내내 – 잠자는 시간만 빼고 – 긴장을 늦출 수 없을 것이다. 잠깐의 방심은 소득의 일부가 아니라 전액을 날릴 수도 있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금융업 같지는 않겠지만 삼성전자의 저 부사장님도 순간의 과로나 좌절감이 삶을 빼앗아간 경우일 것 같다.

공장감독관들은 현재의 10시간 勞動法이 또한 자본의 단순한 화신으로서의 자본가에 내재하는 난폭성으로부터 자본가까지도 어느 정도 해방시켜 그에게 약간의 “敎養”을 위한 시간을 주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에는 공장주는 돈벌이 이외의 다른 일을 위한 어떠한 시간도 가져본 적이 없고, 노동자는 노동 이외의 다른 일을 위한 어떠한 시간을 가져 본적이 없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384]

노동해방은 동시에 자본해방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레버리지(leverage) 단상

레버리지(leverage)를 노동가치론에 연결시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칼 마르크스는 생산에 투여되는 자본을 불변(不變)자본과 가변(可變)자본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변한다는 표현의 대상은 그 자본이 표현하고 있는 가치(value)다. 가치는 상품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한 기본전제로 그 표현법의 근본은 노동시간에서 시작하여 화폐로 표현할 수 있다.

資本 C는 두 부분 즉 生産手段에 지출되는 화폐액 c와 勞動力에 지출되는 v로 구성되어 있다. c는 不變資本으로 전환된 가치부분을 표시하며, v는 可變資本으로 전환된 가치부분을 표시한다. 따라서 최초에는 C=c+v이다. 예를 들면, 투하자본 500원=410원[c]+90원[v]이다. 생산과정의 끝에 가서는 상품이 나오는데, 그 가치는 c+v+s이며, 여기서 s는 잉여가치다. 예를 들면 410원[c]+90원[v]+90[s]이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268]

c가 불변자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생산수단이 생산과정에서 오로지 과거의 가치를 이전하기만 할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v를 가변자본이라 하는 이유는 그가 보기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90원을 지불한 노동력이 필요노동시간을 초과하여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즉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식을 통해 이윤율의 허상을 폭로한다. 즉 자본가들은 위 도식에서의 이윤율이 s/(c+v)=90/(410+90)=18% 라고 설명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계산방식이다. 마르크스는 불변자본이 얼마가 이전되던 노동시간의 착취도와는 관계없으므로 잉여노동/필요노동=s/v=100% 의 비율이 사태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것을 그는 잉여가치율이라 정의한다.

다시 한번 거꾸로 정리를 해보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90원을 지불하고 그 보수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을 지출하게 한 후, 추가로 90원에 해당하는 초과노동을 지출하게 하여 100%의 잉여가치율을 실현하였다. 하지만 생산수단의 소모분을 감안하면 그 이윤율은 18%다. 회계 용어로 하자면 ‘법인세전 당기순이익’과 비슷할 것이다.

왜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아닌 잉여가치율에 주목하였는가? 그것은 그 당시 관변학자들이 위의 산식에서 18%의 이윤율을 끌어낸 후 노동시간을 축소할 경우 – 예를 들어 현재 노동시간의 18% – 그 순간 자본가는 손해를 보는 분기점에 도달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8%를 줄여도 여전히 잉여가치율은 (90X(1-18%))/90=73.8/90=82% 라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난 번에 말한 숫자의 정치학이다.

얼핏 이윤율이 대폭 감소할 것 같지만 실상 이윤율 역시 73.8/500=14.8%로 줄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심지어 당시 관변학자들은 “노동자들은 마지막에서 둘째번 1시간에 자기의 임금을 생산하고 최후의 1시간에 순이윤을 생산”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다.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투하된 자본을 보충할 뿐”이라는 논리다.

각설하고 이제 레버리지에 대해 알아보자. 자본가는 해당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비용을 모두 자기 돈으로 댈 필요 없다. 자기자본(equity)에 대한 기대수익이 타인자본(loan)에 대한 기대수익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필요자금 500원 중 20%만 자기자본으로 출자하고 나머지를 해당기간 동안 10%의 이자로 은행에서 빌리기로 했다.

실질적으로 그가 낸 돈은 100원이 되었다. 그리고 400원을 끌어 모아 500원을 투입하였다. 이를 통해 총매출은 590원이 되었다. 이윤은 90원이다. 이중 40원은 차입금에 대한 이자 10%로 지출되므로 남은 돈은 50원이다. 이제 자기자본에 대한 수익률, 즉 Return on Equity는 50/100=50%다. 애초 18%에서 수익률이 2.8배 증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버리지다.

한편 이 사업에서 노동시간을 18% 감축할 경우 레버리지를 이용한 자기자본수익률은  (73.8-40)/100=33.8/100=33.8%로 줄어든다. 이윤율의 감소율은 (18%-14.8%)/18%=17.8%인데 반해 자기자본수익률의 감소율은 (50%-33.8%)/50%=32.4%에 해당한다. 레버리지를 활용한 투자가 이윤감소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레버리지 추세보다 디레버리지(deleverage) 추세가 훨씬 급격한 이유다.

요컨대 경제의 생산과정에서 –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 유일한 가치창출의 원천은 노동이다.(자연자원은 c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치를 이전할 뿐이다) 이윤창출은 과거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되는 가치들의 결합이며, 잉여가치율은 생산과정에서의 가치증분을 설명한다. 이윤율은 과거가치를 분모에 더해 잉여가치율, 즉 착취율은 희석한다. 자본가가 레버리지를 활용할 경우 이윤율을 증가시킬 수 있고, 이때 이자는 창출한 잉여가치를 전유(appropriate)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