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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對)테러 전쟁”의 새로운 이름

오바마 행정부가 전임자의 나름의 수사학적 유산인 “테러에 대한 국제적 전쟁(global war on terror)”이라는 단어를 폐기할 것 같다. 이번 주 펜타곤의 직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낸 메모에서 안보 리뷰에 관한 국방부 한 부서는 “이 행정부는 ‘기나긴 전쟁’ 혹은 ‘테러에 대한 국제적 전쟁’과 같은 표현을 쓰기 싫어합니다. 부디 ‘해외에서의 우발사건에 대응한 군사행동(Overseas Contingency Operation)’이라는 표현을 쓰시오.”라고 적었다.

The Obama administration appears to be backing away from the phrase “global war on terror,” a signature rhetorical legacy of its predecessor. In a memo e-mailed this week to Pentagon staff members, the Defense Department’s office of security review noted that “this administration prefers to avoid using the term ‘Long War’ or ‘Global War on Terror’ [GWOT.] Please use ‘Overseas Contingency Operation.’ “[‘Global War on Terror’ Is Given New Name]

Common Dreams 에 올라온 글 중 일부다. 이 글에 대한 재밌는 댓글이다.

멋진 작명이다. 제국주의적 침략과 민간인 학살의 전쟁이 아니라 외국에 휴가가 있는 동안 맹장수술 받는 것처럼 들린다. 오바마는 대단한 완곡어법의 소유자다.
Nice name. Sounds like getting an appendectomy while on vacation abroad instead of wars of imperialist aggression and slaughter of civilians. Obama is the Great Euphemizer.[DrBrian]

이것이 그들이 변화라 부르는 것들인가? 정책을 바꾸지 말고 단어들만 바꾸고 나쁜 모든 것들은 마술사처럼 사라져버린다. 휙! 토니
Is this what they are calling change?Don’t change the policy just the words and everything that is bad is gone just like a magician;poof!Tony[mustbefree]

어째서 그저 “불량국가 테러리즘” 또는 “비싸게 조달된 살인 병력”라 하지 않나? — 또는 어쩌면 “글로벌워 주식회사”가 더 정곡을 찌르는 것일지도.
why not just “rogue state terrorism”? or “heavily financed murderous force”?–or maybe “global war inc.” would be more to the point.[Matangicita]

뭐..  어떤 나라 행정부만 말장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삼으시라고…

드레스덴 폭격에 관한 인터뷰 中

네오나찌들이 전혀 실행할 필요가 없는 전쟁범죄였다고 비난하는 드레스덴 공습에 대하여, 드레스덴은 아름다운 관광도시였던 것만큼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며 따라서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결정이었다는 영국 역사학자 Frederick Taylor 의 인터뷰 중 일부다. 다른 것을 떠나서 자국의 주요도시를 파괴한 공습에 대하여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와 인터뷰를 한 슈피겔이 대단해보인다.

슈피겔 온라인 : 과장된 사상자수가 학문적 연구에 반하는 것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지요. 연합군의 공격의 희생자로서의 드레스덴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데요. 드레스덴이 정말 그렇게 결백했나요?

테일러 : 드레스덴은 의심할 바 없이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예술의 중심이자 나찌 이전의 독일 인본주의에 관한 모든 위대한 것들의 상징이죠. 또한 동시에 상당한 정도로 나찌의 주요한 산업중심이기도 했습니다. 타자기, 담배, 가구, 사탕 등을 생산하던 공장들이 1939년 이후 군사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도시의 7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전쟁 관련 업무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역 철도 이사회는 동부전선의 전쟁 수행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또한 강제수용소 시스템에 죄수들을 수송하는 데에도 관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드레스덴이 합당한 폭격 목표에 해당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1945년 2월의 시점에서 그 방법과 강도가 정당한 것이었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슈피겔 온라인 : 당신은 그것이 정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테일러 : 개인적으로 그것(폭격 : 역자 주)의 논리를 추적할 수는 있지만 매우 부정적입니다. 이는 전쟁이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어떻게 도덕적 재고가 고갈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소름끼치는 사례라 할 것입니다. 18세의 나이에 그의 고향의 폭격에서 살아남아 그 파괴에 대해 다방면에 걸쳐 글을 남긴 Goetz Bergander는 그만의 독특한 용서의 방식으로 폭격을 “도를 넘어선 것(outsiz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확실히 그 폭격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The Logic Behind the Destruction of Dresden, Spiegel, 02/13/2009]

자유무역 對 공정무역

전에 “新냉전 시대의 도래?”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한편 ‘자유무역’과 ‘세계화’는 또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바로 경제권 통합을 통한 국가간 분쟁의 종식이었다. 즉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서구는 경제권의 통합이 각 나라간의 분쟁을 줄여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나치와 파시스트의 등장에서 보듯이 또 다른 분쟁의 불씨를 증폭시키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다음 글이 바로 그러한 “두려움”에 대한 묘사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과 영국의 관리들은 국제 무역을 촉진시키는 새로운 시스템, 포괄적이고 유례없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그들은 무엇을 피해야만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고율의 관세, 특혜 조약, 무역 장벽, 무역 통제, 그리고 “인근국 무력화(beggar thy neighbor)” 정책 등으로 양 대전 사이에 무너지고 만 무역 시스템을 되살리는 것이 그들의 주안점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보호주의로는 전지구적 불황과 그에 따르는 정치적 문제들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만 일으킬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었다. 그들의 꿈은 당시 전지구적 성장을 촉진시킨 19세기 후반의 개방적 무역 시스템의 회복이었다.[시장對국가(원제 The Commanding Heights), Daniel Yergin and Joseph Stanislaw, 주명건譯, 세종연구원, 1999, pp63~64]

지금의 유럽 상황을 – 특히 서유럽 상황 – 떠올려보면 지나치게 공포감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이제 독일은 더 이상 가공할만한 세계대전을 일으킬 만큼 ‘나쁜 나라’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양차대전의 후유증과 소비에트의 침략야욕(?)에 시달리고 있는 유럽인들과 바다건너 자본주의 세계의 최강자로 군림한 미국인들에게 위와 같은 논리가 비약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공감이 가기도 한다.

시간을 다시 되돌려 현재를 보자. 그들이 실현해낸 자유무역은 지구적 차원에서 안보를 지켜냈을까? 전쟁을 막아냈는가? 궤멸적인 제1세계에서의 집단전쟁은 막아냈을지 몰라도 지역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꼭 그것이 역설적으로 자유무역이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또 자유무역이건 보호무역이건 간에 제1세계의 최강자 미국은 – 서유럽의 분쟁을 막아내고자 했던 그 나라 –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위해 거의 유일하게 전 세계 곳곳에서 대놓고 대량학살로 이어지는 전쟁을 수행한 악의 전도사를 자처했다. 그리고 자유무역이 전 세계를 통합한 이후 – 특히 금융에 대한 장벽해체 이후 – 많은 신흥국들이 전쟁에 준하는 경제폭탄을 맞아 신음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자유무역이 금융 강국 본토인 미국과 서유럽마저 혼절시키고 말았다.

그러니 어쩌면 딱 이 시점이 자유무역이 과연 지구촌을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는 유일한 대안인가 하는 고민을 해볼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도 못 막고 경제위기도 가속화시키는 것으로 강하게 추측되는 자유무역이 과연 신주단지처럼 모셔야할 절대진리인가 하는 의문 말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 오바마도 자유무역(free trade)보다는 공정무역(fair trade)이란 표현을 즐긴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그것이 좌파진영에서 쓰는 같은 표현과는 다른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지만 말이다.

전쟁은 비즈니스다

블로그 주제의 다양성(?) 재고 차원에서 2003년 작성한 글을 갱신하도록 한다. 당시에 민간군사기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정리해둔 글이다.

■ 전쟁의 비즈니스化

전쟁의 최고의 수혜자는 누구일까? 바로 승전국의 위정자들일 것이다. 국내의 혼란한 정쟁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장래 고갈될 에너지의 확보를 위해, 또는 대통령의 섹스스캔들의 무마를 위해 강대국은 전쟁을 벌이며 이를 통한 열매의 단 맛을 즐긴다. 또 다른 수혜자는 막대한 전쟁수행비용의 떡고물을 받아먹는 합법 또는 불법적인 무기생산/거래업자, 용병회사,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군사관련업자들이다.  

문제는 오늘 날 이러한 전쟁관련산업들이 과거에 비해 보다 광대한 범위에서 합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냉전 이후 소위 과거 용병의 보다 세련된 형태인 민간군사기업(PMCs : Private military companies)은 보다 대규모화, 합법화를 통해 강대국의 위정자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분쟁에 보다 깊숙이 개입되고 있으며, 향후 분쟁의 지연 또는 확대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개연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분쟁, 또는 전쟁은 그들에게 시장(市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 날 전쟁은 보다 철저히 비즈니스化되어가고 있다.

■ 민간군사기업(PMCs : Private military companies)의 급부상

ICIJ(Public Integrity’s 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오늘 날 적어도 90개의 합법적인 회사가 전 세계 110개 국가에서 군대와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전체 시장규모는 약 1,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군사훈련, 물류, 배식 등 직접적인 전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한 예로 민간군사기업들은 200개가 넘는 미국 내 대학에서 군사훈련 과정을 맡고 있다. 미래 미군의 사관생도들이 민간회사의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간군사기업을 통한 군대 민영화의 논리는 다운사이징과 아웃소싱 등 민영화를 통해 군의 효율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하나 증가하고 있는 지역내 소규모 분쟁에 대한 직접적 개입의 회피가 용이하다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미군의 유틸리티 체계에 대한 민영화의 법적 근거인 USC 2688 가 미의회에서 승인되었다. 또한 1997년 11월 10일 당시 국방부 장관인 윌리엄 코헨(William S. Cohen)은 군대의 전기, 상수도, 가스와 같은 유틸리티시스템을 민영화시킬 것을 지시했다. 다만 특수한 보안을 요하는 부분이나 민영화해봤자 경제적 이득이 없는 부분은 제외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결과적으로 1994년 이후 미국방부는 미국에 기반을 둔 12개의 민간군사기업과 3천여 건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문제는 이들 계약 모두가 단순한 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ICIJ가 펜타곤을 통해 입수된 서류를 살펴본 결과 각 계약의 사업내용과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에서 이러한 민간군사기업들이 실제분쟁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 PMCs의 분쟁개입 사례

최근 미국이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시에라리온은 현재 끔찍한 살육이 진행 중이다. 반군이 혁명통일전선(RUF : Revolutionary United Front)은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고 있으며 이에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인 ECOMOG의 외피를 쓴 나이지리아 군과 남아프리카의 용병회사인 Executive Outcomes 등이 개입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미군이 파견되지도 않은 이 살육의 현장에서 미국의 깃발이 보이고 있다. 그들은 바로 오레곤에 위치한 민간군사기업 ICI(International Charter Incorporated of Oregon)다. 미정부와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이 회사의 주업무는 결국 정규군을 파견하기에는 애매하고 고약한 지역에 파견되어 통상적인 미국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데에 있다.

시에라리온에서 이들의 역할은 수송과 의료후송 서비스를 통해 나이지리아 군을 지원하는 것이다. 전투는 나이지리아 군이 수행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전투에서 불가피하게 ICI 직원이 총상을 입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전투와 완전히 무관할 수 없는 행위에 개입하게 되었다. 응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군당국과 ICI는 이와 관련한 ICIJ의 질문에 일체 응답하지 않았다.

미국은 시에라리온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한때 자신들이 지원했던 라이베리아의 독재자 찰스 테일러가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는 반군에 의한 시에라리온의 학살과 불안으로 인해 미국에 다섯 번째로 많은 석유를 공급하고 있는 나이지리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시에라리온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일 뿐이다. 결국 ICI에게 이번 전쟁은 비즈니스이고 미국으로서는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일종의 외교수단이다.

민간군사기업의 활동영역은 이라크전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성장하였다. 민간군사기업은 배식에서부터 B-2폭탄의 관리체계 유지에 이르기까지 전투를 제외한 거의 전방위에 이르고 있다. 민간군사기업 직원의 숫자는 군인 10명 1명 꼴로 군인 100명당 1명 꼴이었던 지난 걸프전에 비해 거의 10배나 성장하였다.

그 활동영역도 질적으로 성장하였는데 현재 민간군사기업의 자문단은 새로운 이라크 군인과 경찰의 훈련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콜롬비아에서 마약소탕에 참여하였던 딘코(DynCorp)가 맡게 되었다. 2002년에만 23억달러의 매출을 올린 이 회사는 민간군사기업의 간판급 기업이다.

이쯤 되면 과연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단순한 서비스 공급자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 PMCs의 이윤창출 방법

기업형태가 세련화되고 합법화되었다고 해서 이전의 용병들이나 무기거래상 들과 이윤창출 동기 및 과정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보다 합법화된 공간에서 교묘하고 세련된 방법(이를테면 민영화 프로젝트의 입찰참가 등)으로 행동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근본에는 역시 탈법적이고 정치적인 속임수가 존재한다.

이윤창출의 첫 번째 수단은 시장(市場)의 확대이다. 이들에게 전쟁은 끔찍한 비극의 현장이 아니라 회사매출을 실현하는 시장일 뿐이다. 이는 특정 지역에서의 분쟁 시 정부군과 반군이 서로 다른 민간군사기업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수행할지도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빚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기업의 도움을 받을지도….

더군다나 장래 시장이 침체될 경우 민간군사기업은 새로운 시장 창출을 위한 비정상적 노력을 기울일 개연성마저 있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은 비정부 분야에서 이러한 민간군사기업과 계약을 체결하여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예로 World Wildlife Fund 라는 회사와 CARE같은 민간단체에서 민간보안회사를 고용하여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두 번째 수단은 비용절감이다. 그들은 비용의 과다청구, 업무시간(?) 부풀리기, 질 낮은 군사훈련 등을 통해 이윤극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딘코의 해고당한 어떤 이에 의해 폭로되었는데 그는 회사가 육군 헬기의 기술담당에 비적격자들을 배치하여 비용을 부당하게 절감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는 소위 효율화와 전문화를 통한 비용절감이라는 민영화의 기본논리의 어두운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기업은 효율화를 통해서 비용을 절감하고자 하는 동기만큼 질 낮은 서비스 제공을 통한 비용절감의 동기도 강하다.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실세와의 긴밀한 인간관계이다. 코소보 전쟁에서 미군 2만명의 식사, 식수, 세탁, 우편 등을 독점했던 KBR은 7700만 달러 규모의 이라크 유전 진화와 복구 등 재건사업권을 따냈다. 이 회사의 모회사는 헬리버튼이고 딕 체니 부통령은 이 회사의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 그밖에 무엇이 문제인가?

확실히 여러 면에서 군 관련 서비스의 민영화는 비용절감적인 측면도 있다. 그 반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이 산업분야에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관련산업의 놀라운 성장에 비해 관련 제도와 공적영역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통상 민영화의 성공요소에는 공공의 적절한 법적 근거와 입찰제도, 그리고 사후감시를 객관적으로 할 수 있는 규제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이 산업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국제법(활동범위가 국제적이므로)이나 국내규정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더욱이 민간군사기업을 움직이는 데에는 의회의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 장래 더욱 비대해질, 그래서 그 자체가 권력이 될지도 모르는 민간군사기업을 통제할 국가기제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감시와 통제의 미비의 결과로 장래 우발적인 지역분쟁 개입의 가능성이 보다 많아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개입 시 발생할 수 있는 고의적인 또는 고의하지 않은 사고는 분쟁을 더욱 격화시킬 수도 있다. 한 예로 1998년 한 미국회사가 구성한 첩보기관에서 일하던 콜롬비아 공군이 실수로 한 마을에 폭탄을 떨어뜨려 17명이 사망하였다. 페루에서는 CIA와 계약한 한 민간업자가 제공한 잘못된 정보에 의해 선교사들이 타고 가던 비행기를 격추시켰다. 이쯤 되면 과연 전투 영역과 비전투 영역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 결론을 대신하여

전쟁은 인간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온 필요악이었다. 전쟁을 통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희망을 잃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전쟁을 통해 권력을 얻고 막대한 부를 얻었다.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오늘 날 전쟁은 시류에 맞게 새로운 질적 변환을 겪고 있다. 군대는 합법적인 민영화 회사가 제공하는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다. 군산복합체는 전쟁터를 구식 무기의 소비장소 또는 신무기의 실험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뉴스채널은 매출극대화를 위해 전쟁터를 전자오락 화면으로 조작하고 있다.

인류의 진보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에게 보다 깔끔해진 전쟁의 이면이 보다 추악해졌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설이다. 더불어 효율과 공공영역의 축소만이 올바른 사회개혁이라고 생각하는 신자유주의론자에게도 역설이긴 마찬가지이다.

만에 하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건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일까? 남한? 미국? 무기업체? 아니면 민간군사기업?

관련사이트

전쟁의 비즈니스화에 대한 자료 : http://www.theexperiment.org/articles.php?news_id=1884
전쟁의 비즈니스화에 관한 기사 : http://www.icij.org/dtaweb/icij_bow.asp?Section=Chapter&ChapNum=1
미군의 유틸리티 민영화 과정 : http://www.gdsassociates.com/milpriv/
미군의 유틸리티서비스 민영화 진행현황 : http://www.acq.osd.mil/ie/utilities/status/status1qtrfy02.htm
군대 민영화에 관한 논문 : http://www.cfr.org/public/armstrade/privmil.html
민간군사기업에 관한 기사 : http://www.moscowtimes.ru/stories/2003/07/23/202.html
시에라리온 사태에 관한 기사 : http://www.icij.org/dtaweb/icij_bow.asp?Section=Chapter&ChapNum=2
라이베리아 찰스테일러 대통령에 관한 기사 : http://nwkold.joongang.co.kr/200008/445/nw445014.html
ICI 의 홈페이지 : http://www.icioregon.com/
DynCorp 의 홈페이지 : http://www.dyncorp.com/

이라크 참전군인들, 반전(反戰) 운동에 나선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참전 군인들이 오는 3월 13일에서부터 16일까지 그들이 저질렀거나 목격한 전쟁범죄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집결할 것이라 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라크 참전군인들(Iraq Veterans Against the War)’이라는 단체는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성고문이나 해디타 에서의 가족몰살 사건과 같은 범죄는 많은 정치가들이나 군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수의 벌레 먹은 사과(a few bad apples)”에 의해 저질러지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범죄들은 “점점 더 많은 피를 부르는 점령(an increasingly bloody occupation)”의 전형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즉 2004년에서부터 2005년까지 이라크에 주둔했던 미육군 하사 Logan Laituri 의 말에 따르면 정책결정자들이 군인들은 국제조약과 같은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는 무법의 선례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군인들은 예를 들면 길을 걷던 중 비무장의 민간인을 쏘아도 처벌받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라크 참전군인들’은 이번 모임을 ‘겨울 군인(Winter Soldier)’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표현은 미국의 혁명가 Thomas Paine이 1776년 쓴 아래와 같은 문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These are the times that try men’s souls. The summer soldier and sunshine patriot will, in this crisis, shrink from the service of his country; but he that stands it now, deserves the love and thanks of man and woman.”

이 모임의 주최 측은 이번 집회에서 사진이나 비디오를 통한 증거도 공개될 것이라고 한다. 증언들은 위성 TV와 ivaw.org 의 스트리밍비디오로도 방영될 것이라고 한다.

보다 자세한 소식은 Common Dreams 의 해당 기사를 보실 것

Paths Of Glory

개인적으로는 영화 감상할 때 롱테이크니 트래킹샷이니 하는 현란한 영상문법보다는 내러티브에 빠져드는 편이다. 영화에서의 영상기법이나 소설에서의 문체는 그 자체로도 감상포인트이긴 하나 역시 매력적인 이야기를 꾸며주는 양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탠리큐브릭의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각적 요소의 탁월함과 현란함은 그 자체로도 매료될만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

개미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장면이나 참호 속을 시찰하는 장면은 유사한 장면의 연출에 있어 고전으로 남을만한 – 또는 지금 재탕을 해먹어도 여전히 매력적일만한 – 표본으로 남을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물론 지나친 비주얼함이 극의 집중에 방해가 될 만도 하나 적어도 개인적으로 그로 인해 내러티브를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반전(反戰)영화로 자리매김하였고 프랑스 군인에 대한 – 또는 군대 체제에 대한 – 신랄한 시각으로 말미암아 1975년까지 프랑스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는 이 작품은 큐브릭의 영화이력의 이정표로 인정되고 있는 역작이다. 그의 개인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작품일 수도 있는데 영화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배우 Susanne Christian 은 그의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였던 서부전선에서 사령관 역할을 하고 있던 Broulard 장군은 개인영달을 위해 가능성 없는 개미고지의 점령을 명령하고 Dax 대령은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부하들의 피해를 뻔히 알고도 진격명령을 내린다. 일부 부하들이 진격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진격은 막대한 피해만 남긴 채 실패한다. 분노한 Broulard 장군은 희생양을 위해 무고한 사병 셋을 군사법정에 회부한다.

전직 변호사였던 Dax 대령은 그들을 변호하지만 법정에는 기소장도 없었고 증거제출도 거부한 채 사병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그 와중에 Broulard 장군의 용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령이 양심적인 장교의 고백에 의해 밝혀지지만 군부는 사형언도를 취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내용을 Broulard 장군의 축출에 활용한다. 이러한 더러운 암투에 Dax 대령은 진저리를 치지만 부하사병들이 포로로 잡힌 한 독일소녀의 노래에 나지막한 허밍으로 동참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된다.

명백히 잘못된 명령임에도 이에 복종하였으나 이내 부하들을 감싸기 위해 희생양을 자처한 Dax 대령의 캐릭터는 선과 악의 명확한 이분법보다는 고뇌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는 나약한 인간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그럼에도 말미부분에 암시되는 새로운 희망은 약간 작위적인 면이 없잖다. 차라리 부하사병들이 독일소녀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기보다는 그녀를 더 그악스럽게 약 올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와 아래에서 모두 배신당하는 Dax 대령의 모습이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