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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슬기로운 언어생활에 반성이 없는 미디어

지난해 세입자가 집주인을 상대로 경매(집합건물)를 신청한 건수는 978건으로 2018년(375건·지지옥션)보다 2.6배 급증했다. 경매 전 단계인 임차권등기 건수도 역대 최대에 이르렀다. 요즘 법무법인엔 전세금 반환 소송을 상담하는 세입자로 넘쳐난다. 법도의 엄정숙 변호사는 “역전세를 당한 세입자 상담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며 “갭투자한 집주인이 다른 자산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냐고 묻는 유형이 가장 많다”고 했다. 최근 경매로 나온 주택은 90%가 빌라로 추정된다. 하반기부터는 전세금을 못 갚아 경매로 몰린 아파트가 쏟아질 거란 우려가 나온다.[ “세입자도 집주인도 비명”… 갭투자는 어쩌다 갭거지가 됐나]

개인적으로 “갭투자”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몇년전 읽었던 어느 부동산 경매 관련 서적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책의 저자가 추구하는 전략은 빌라를 경매로 저가에 낙찰받아서 전세를 놓는 방식으로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보유 주택수를 늘려나가는 전략을 소개한 책이었다. 당시에는 빌라도 집값이 오를 가능성이 높으므로 보유하고 있다가 집값이 오르면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전략 노하우를 소개하는 책이었다. 책 내용을 보자면 많은 경우 처지가 곤란한 기존 세입자가 있어 그가 어떻게 순탄하게 집을 비우게 하느냐가 주된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온순하고 순진한 내용이었다. 최근 몇달 동안 화제가 되었던 “빌라왕”들의 행태를 보면 이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서의 책 내용처럼 차근차근 빌라를 “갭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바지사장”을 내세우고 악질 중개업자의 꼬임에 빠진 무지한 세입자의 전세금으로 – 때로는 HUG의 도움도 받아 – 아무런 “갭”도 없이 보유주택수를 늘려가는 대량생산 콘베어 벨트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경우 “갭투자”라는 표현도 무색하고 말 그대로 부동산 사기 카르텔일 뿐이다.

다시 돌아가서 언젠가부터 미디어에서 성찰도 없이 쓰는 표현인 “갭투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미디어가 쓰는 성찰없이 즐겨 쓰는 각종 표현은 – “빚투”, “존버”, “영끌” – 간혹 복잡한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해주는 기존 단어가 부족해서 쓰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미디어 종사자의 나태함으로 인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쓴 표현을 생각없이 가져다 쓰는 경우다. 이런 표현은 기사의 조회수가 생명인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특히 애용되고 있다. 자극적이고 친숙한(?!) 표현을 쓸수록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입자의 보증금을 활용한 내집 마련이 일반화되었던 한국 사회에서 어떤 면에서는 주택구입자 상당수가 “갭투자자”였다. 그리고 집주인이 적당한 돈이 모이면 세입자 대신 실거주를 하며 안정적인 주거생활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집을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한국 중산층의 삶의 한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문제는 주택거래 방식이 점점 고도화되며 “갭투자”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이나 또는 “빌라왕”처럼 부동산 구입 방식이 순수투자 목적형 혹은 기업형으로 커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며 시장참여자들이 주택을 애초에 사용가치와 상관없는 교환가치 그 자체만으로서 가치를 추구하면서 “갭투자”는 더 이상 “갭투자”로 애교스럽게 불러줄만한 행태가 아니게 되었다. 수많은 “재테크” 서적과 부동산 관련 유튜브 채널이 집을 어서 사라고 부추겼고 급기야 사기꾼들이 이런 상승장, 전세금보증제도, 그리고 순진한 세입자를 악용하여 “갭투자”를 악질 사기행위로 변질시켰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디어는 “갭투자”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채로 보도를 해대고 있다.

“영끌” 표현의 본질은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이 아니라 미래의 수익을 과하게 담보잡힌 행위다. “빚투” 표현의 본질은 “미투”처럼 ‘나도 레버리지 투자한다’가 아니라 빚으로 리스크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갭투자” 표현의 본질은 ‘나는 매매가와 전세가의 갭 정도만 투자해서 집을 샀다’가 아니라 “영끌”과 “빚투”의 총체적 레버리지 투기와 전세가가 하락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에 베팅한 것이다. 그 믿음이 전세가의 하락으로 무너지고 있는 지금 미디어는 스스로의 언어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런데 반성은 커녕 “갭투자”의 다음 버전 “갭거지”로 조회수 팔이에 나섰다.

CBDC에 관한 단상

이자를 지급하는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중앙은행 디지털화폐)가 있으면 뱅크런은 불가능하다. 최종대부자로서 중앙은행은 예금자가 돈을 인출하길 원하는 그즉시 돈을 발행할 수 있다. 그리고 사용자 간의 즉각적인 거래라는 유동성 덕분에 경쟁자는 이들 예금자에게 3%의 이자를 지불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은행을 제외하고 누가 이러한 해결책을 반대하겠는가?

확실히 전통적인 은행은 금융시스템으로서 매우 중요한데, 이는 그들이 대출을 일으킴으로써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기지를 신청한 가계가 지급능력이 있는지, 기업대출이 수익성있는 투자에 사용될 것인지 등을 점검한다. 대출은 언제나 위험하기에, 가장 경쟁력있는 은행일지라도 대출에 스프레드를 추가한다. 오늘날 은행이 얻을 수 있는 은행간 이자율 3%도 모기지에는 5%의 이자율을, 또는 기술 스타트업의 위험한 투자에는 9%의 이자율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은행과 같은 몇몇 기관은 이러한 리스크를 평가하고 가격을 매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은행들은 예금자의 돈을 굴리고 그들을 구제해줄 정부에 의존하면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그들은 너무 많은 리스크를 부담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문에 학계와 규제당국은 오랜동안 은행이 더 많은 자본비율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었다. 그들이 가계의 예금을 위험성있는 투자에 빌려주지 못하거나 정부의 구제금융에 의존하지 못할 때 그들의 위험감수 성향은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The Simplest Fix for Banking]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를 통해 이번 실리콘밸리은행이나 기타 다른 모든 금융위기 때 발생한 뱅크런을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의 일부다.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살펴볼 문제겠지만, 어쨌든 이론상으로는 정통적인 은행이라는 소매상을 거치지 않고 중앙은행이 예금자에게 추가적인 거래비용없이 바로 예금을 지급하는 방식에 있어 큰 기술적 난제는 없어 보이는 해결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용문의 다른 곳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전통적인 은행의 먹거리를 빼앗는 이슈이기에 기득권들의 저항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은행”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근사한 석조건물을 올린 곳에서만이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오고 그것을 운용할 수 있다는 신성한 권리가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직불이라는 ‘야만적인’ 디지털 거래에 의해 침범당하는 참담한 꼴을 은행들이 참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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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rian Pingstone – Taken by Adrian Pingstone in November 2004 and released to the public domain., Public Domain, Link

예전에 본 영화 중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나이(The Man in the White Suit)’가 생각난다. 1951년 에 제작됐고 전설적인 영국 배우 알렉 기네스가 주연한 클래식이다. 하급 노동자인 주인공은 각고의 노력 끝에 영구적이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직물을 발명하였고 이 직물로 하얀 양복을 한벌 만들어 입고다니면서 이 직물을 판매하여 희소성에 시달리는 시장의 수요를 구원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시장에 있어 중대한 반역이었다.

상품은 희소성이 있어야 한다. 그 희소성을 수소가 독점해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들이 상품을 끊임없이 소비할 수 있다. 영구적인 직물이 나와서 더 이상 희소성을 가지지 않을 때 상품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니고 마치 공기와 마찬가지로 공공재가 되는 것이다. CBDC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는 구체적인 시행을 통해 증명되겠지만, 그것은 은행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알렉 기네스가 발명한 영구적인 직물과 같은 느낌이 아닐까?

‘튜더스’를 읽는 중

잉글랜드에서 교권반대주의는 주로 런던을 중심으로, 특히 도시에서 성장하고 있는 중산층 법률가들과 상인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얼이났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대표들이 런던 사람들과 함께 1529년 말 처음 열린 종교개혁회의에서 교회에 대한 불만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사람들이 크롬웰의 확실한 지휘에 따라 왕에게 탄원서에 적힌 새로운 불만 사항들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크롬웰은 (왕이 지명한) 하원의장을 끌어들임으로써, 탄원서가 다수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 의견을 표출할 기회가 없었다.[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 튜더스, G.J. 마이어 지음, 채은진 옮김, 말글빛냄, 2011년, p210]

전세계 왕조 중 가장 유명한 – 다양한 의미에서 – 왕조라 할 수 있는 16세기 영국의 튜더 왕조, 그중에서도 특히 논란의 중심인 헨리8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쓰인 책의 일부다. 헨리8세에 관한 영화와 드라마가 숱하게 만들어질 정도로 그가 집권한 시기는 소위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었을 만큼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기였다. 대중문화에서 다루는 그의 모습도 대개 그런 식이다. 하지만 실은 인용한 책은 헨리8세와 그의 후손들이 자행했던 기행은 그러한 말초적이고 육감적인 본능보다는 보다 이성적이고(?) 시대 맥락적인 상황이 자리잡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헨리8세가 본처인 캐서린을 버리고 앤블린을 정실로 취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부정할 수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군주의 욕정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적자를 낳아주지 못한 늙어가는 왕비보다 젊고 세련된 –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온 힙한 여성인 – 매력적인 앤블린에게 더 성적매력을 느꼈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대중문화가 소비할만한 헨리8세의 캐릭터라면 그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영국 자본주의의 성장은 그보다 더 복잡한 맥락이 자리잡고 있다.

Full-length portrait of King Henry VIII
By After Hans Holbein the Younger Link


로마카톨릭이 아직도 유럽사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외부적으로는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는 “이교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내부적으로는 마틴 루터 등 기존의 로마카톨릭을 위협하는 신진 종교 세력, 로마카톨릭 내부의 끊임없는 권력투쟁 등등 유럽의 지배체제는 끊임없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유기체처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약한 고리’로 치고 나왔던 것이 유럽 본토의 바다 건너에 자리잡고 있던 영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혼을 하고 싶었던 헨리8세가 시대정신의 대변자가 되는 순간이다.

책에도 언급되듯이 유럽사회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세력은 카톨릭 교회와 그 정점에 있는 교황청이었다. 각국의 교구는 유럽 인민의 신앙심을 담보로 치부를 하고 있었고 그중 상당수의 부가 – 예를 들면 주교의 취임세라는 명목 등으로 – 교황청에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무역수지는 흑자여도 이를테면 (영국교회에서 교황청으로의) 이전소득수지가 적자여서 경상수지가 적자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단지 교회에 대한 왕가와 인민의 맹종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만을 터트린 것이 독일에서는 개신교였고 영국에서는 헨리8세와 영국 브루주아였다.

헨리8세, 토마스 울지, 토마스 크롬웰 등 시대정신을 읽고 이를 자신들의 권력강화에 이용했던 위정자들은 처음에는 이혼 등 가정사를 로마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위임했으나 그의 우유부담함 혹은 교묘한 정치적 줄타기로 인해 염증을 느끼고 마침내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의외로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틈새 시장을 파고들어 로마카톨릭의 절대적 권위에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는 신흥 계급인 부르주아의 마음에도 흡족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8세의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를 넘어선 시대정신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위기의 이연을 위한 양적완화가 초래한 결과

경제학자들은 통화당국이 상업은행에 단기 준비금을 제공하고 장기 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중앙은행의 채권매입 프로그램이 사실상의 재정정책의 하나였다는 것에 동의한다. 최근까지 이건 괜찮은 비즈니스처럼 보였다. 채권은 기술적으로 수익이 거의 없는 반면 조달비용이 무척 저렴했기 때문에(예를 들어 유로존에서는 -0.5%) 중앙은행은 어쨌든 이익이 났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물가가 두자릿수에 이를만큼 치솟음에 따라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급하게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단기 금리가 장기 채권수익률을 뛰어넘으면서 조달비용이 증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은 자산의 손실에 직면하여 채권매입 프로그램의 재정 리스크가 현실화되고 있다.[The Fiscal Cost of Quantitative Easing]


금융역사에서 전세계에 큰 파급효과를 초래한 양적완화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양적완화, 그 다음이 이번 팬더믹 이후의 양적완화라고 할 수 있다. 두번의 양적완화에서 공급된 유동성이 팬더믹 이후 복합적인 요인과 맞물려 전세계적인 인플레이션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어림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이를 공식적인 발언으로 인정한 중앙은행 관계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어쨌든 그 결과 상당기간 지속되었던 제로금리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사상 초유의 속도로 금리가 상승하고 있다.

지난 3월 연방준비제도의 의장 제롬 파월은 한 TV인터뷰에 출연했다. 질문자는 파월 의장에게 “Fed가 경제에 투입할 수 있는 화폐량에 제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파월 의장은 “우리는 계속 빚을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주안점은 가계와 기업에게 경제에서의 신용의 흐름을 지원하기 위해서다”라고 발언하여 사실상 그런 제한은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3월 23일 긴급성명을 통해 사실상의 무제한적 양적완화를 선언한 이후 최근까지 파월 의장은 자신의 인터뷰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Fed의 자산을 거침없이 늘려 마침내 최근 7조 달러(!)까지 자산이 늘어났다. [Fed의 무제한 양적완화 도박은 성공할 것인가?]

2년 전에 이 블로그에 올린 글의 일부다. 각국 중앙은행의 이 무제한 양적완화의 결과 2년 동안 의 세계경제를 되돌아보면 각국의 국경의 봉쇄와 락다운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경제는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주요국에서 주가도 뛰고 집값도 뛰고 ‘유행병의 영향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자산가에게는 행복한 2년이었다. 그리고 이연된 위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즈음에 본격화된 것 같다. 러시아가 유럽으로의 가스 공급을 사실상 중단하면서 저인플레의 민낯이 드러나기도 했다.

휴 필 BOE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이날 영국 상원에 출석해 “최근 물가 오름세의 주원인은 천연가스 가격 상승”이라면서도 “또 다른 원인으로 통화정책에 대한 BOE의 결정도 포함된다고 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후적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런 (완화적 통화정책을 지속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략]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경우 인플레이션 원인으로 통화정책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연준 올 3월 이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서에서 △팬데믹 △에너지 가격 상승 △러시아의 전쟁 △중국 도시 폐쇄를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BOE 수석 이코노미스트 “펜데믹 양적완화는 실수였다”···중앙銀 ‘인플레 유발’ 첫 인정]

팬더믹에서의 양적완화는 이전의 양적완화에서도 그랬지만, 그 수혜자는 주식과 주택을 소유한 자산가였다. 그리고 이연된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침체에 빠트리려할 즈음에 파월은 노선을 180도 선회하여 정책금리를 올렸다. 다시 처음 인용문으로 돌아가 이 경우 중앙은행은 그들의 포트폴리오에서 손실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중앙은행의 이익이나 손실은 해당국의 재무부처로 귀속되므로 결국 손실부담의 주체는 납세자다. 인플레와 납세로 두번 고통을 받는 셈이다.

Fed의 무제한 양적완화 도박은 성공한 것인가?

세계화 혹은 ‘공간의 압축’이 만들어 놓은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은 대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서로 다른 지방의 노동자들 상호간에 연계를 맺어주는 교통수단의 증대에 의해 촉진된다. 그런데, 이러한 연계만 맺어지면 어디서나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는 허다한 지방적 투쟁들은 하나의 전국적 투쟁,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지방도로를 갖고 있던 중세의 시민들이 수세기를 필요로 했던 단결을, 철도를 갖고 있는 현대 프롤레타리아들은 몇 년도 안되어 달성한다.[공산주의당 선언,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1,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p409]

맑스-엥겔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에 있어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매뉴팩처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성 증대는 부르주아지가 개별 소규모 공장 혹은 가정에서 행해지던 생산기능을 대규모 공장에 모아서 분업화함으로써 가능했다. 대규모 공장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또한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곳곳에 산재해있던 노동자들이 단일 장소에 모이고 소통하면서 이른바 “노동계급”이라는 의식이 고양된 것이라고 보았다.

교통수단의 발달도 마찬가지 이치다. 자본가에게 있어 교통수단의 발달은 시장의 확대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준다. 교통수단이 지방도로에서 철도로 바뀌게 되면 원료를 보다 안정적으로 빠르게 조달이 가능하며, 상품 역시 보다 더 많이 신속하게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기에 자본의 거대화와 독점화는 더욱 촉진된다. 이것은 또한 인용문에서 분석한 것처럼 노동자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전국화된 투쟁을 보다 많은 규모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엥겔수주의의 뛰어난 점은 이렇게 서로 적대하는 계급이 흥미롭게도 같은 수단을 통해 갈등이 전국화되고 극대화될 수 있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공장은 노동력 수탈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철도는 시장의 확대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을 전국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그 폭발적인 생산성 증가만큼이나 같은 속도로 계급모순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것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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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author – Центральны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инофотофоноархив Украины им. Г.С.Пшеничного, Public Domain, Link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일당독재 또는 일인독재로 형해화되어 있는 21세기에 맑스-엥겔스의 통찰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공간은 인터넷에 의해 그 한계가 더욱더 좁혀졌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세계의 자본가와 노동자는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돈을 벌고, 소통하고, 동시에 가짜뉴스에 현혹된다. 자본순환, 계급의식, 또 반대로 혐오의식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극단화된다. 맑스-엥겔스가 바라던 바람직한 투쟁의 집중도 없잖아 있지만, 세계적 우민화도 동시진행형이다.

더불어 교통수단의 발달과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세계화로 – 즉, 공간의 압축 – 인해 지구인은 값싼 상품이라는 호재(好材)를 공유하게 되었지만, 더불어 악재(惡材), 이를테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유행도 함께 겪게 되었다. 어찌 보면 공간의 압축은 계급모순의 심화뿐 아니라 정치극단화, 유행병과 같은 부작용까지도 함께 공유하게 되는 상황을 불러온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의 압축은 자본주의의 축복이자 재앙인 셈이다.

그리고 공간의 압축은 맑스-엥겔스의 생각만큼 계급의식을 평준화하진 못했다. 세계화는 제조업의 저임금 국가로의 이전을 초래했고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은 일자리를 뺏기며 우경화되었다. 이는 해당 국가의 정치극단화를 불러왔고 세계는 다시 나홀로 금리인상, 전쟁, 에너지 쟁탈전 등의 양상으로 블록화되고 있다. 더불어 기후변화 등 자본주의 모순을 깨닫는 여론도 공간의 압축으로 실시간 공유되는 측면도 있으나 그 추동력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김진태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의미는?

김진태가 그렇지 않아도 살얼음판이었던 금융시장에 곡괭이질을 해댔다. 극우정치인으로서 그간의 언행을 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그의 행동이 채무변제에 대한 책임이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위치와 연계되는 순간, 그간의 언행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금융당국은 수수방관하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주말에 부랴부랴 모여서 입바른 소리일 확률이 높은 ‘50조원+α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시장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나 김진태의 망발은 사실 ‘울고 싶은데 뺨때리는 격’이어서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사태는 강원도가 레고랜드 개발을 위해 만든 출자기업 강원중도개발공사가 자금난을 겪자 김진태가 기업 회생 신청을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촉발되었다. 즉, 공사는 레고랜드 사업 관련 자금 조달을 위해 특수목적회사 아이원제일차를 설립하고 2천50억 원의 ABCP(Asset Backed Commercial Paper)를 자본시장에서 발행했다. 하지만 지난달 ABCP 차환 발행이 이뤄지지 않은 데다 지급 의무를 맡았던 강원도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최종 부도 처리됐다. 복잡한 단계이긴 하나 사실상 지자체가 보증을 선 채무가 상환되지 않자 시장에는 불신감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ABCP, 말 그대로 자산이 담보로 받쳐주고 있는 기업어음이다. 그렇다면 아이원제일차는 투자자에게 무엇을 담보로 제공하였을까? 정확한 구조는 모르지만, 아마도 레고랜드의 미래수익이 일차적인 담보였을 것이다. 통상 기업이 장기구매계약을 통해 미래매출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시점에서 유동성 확보를 위해 ABCP를 발행하는 경우가 많다. 어려운 말로 “유동화 금융”이지만, 조금 더 직관적인 표현으로 급전(急錢)이다. 공사 역시 레고랜드 사업지연으로 자금난을 겪게 되자 유동화 회사를 설립하여 급전을 쓴 것이고 신용평가사는 도의 지급 보증을 믿고 해당 어음에 A1 등급을 매겼다.


개략적인 ABCP 발행구조

그렇다면 차주는 왜 장기의 안정적인 금융을 일으키지 않고 단기로 차환 발행의 위험이 높은 ABCP를 발행하는 것일까? 발행이 쉽기 때문이다. 미래수익을 담보로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지자체가 보증을 서거나 또는 위치 좋은 부지를 담보로 제공하면 좋은 신용등급을 받아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기자금이기에 금리도 더 저렴하다. 증권사도 이익이다. 그들 역시 내부적으로 단기금융이 가능하며 일단 CP를 총액인수한 후 투자자에게 수수료를 떼고 넘겨 위험을 최소화한다. 시장이 정상일 때는 모두가 행복한 비즈니스다. 이게 지난 몇 년 간 여의도 증권가에서 성행하던 패턴이다.

둔촌 주공아파트의 PF 사태도 마찬가지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총 1만2032가구 규모의 ‘올림픽파크포레온’을 짓는 이 사업은 조합과 시공사와의 갈등 등으로 인하여 사업이 지연되던 중 8월 기존 대주단이 7천억 원의 사업비 대출 만기 연장을 거부하며 자금 위기에 봉착한다. 이에 조합은 증권사를 통해 자산담보부단기채(ABSTB)를 발행했다. 이 역시 PF의 미래수익을 담보로 발행한 것이나 실상은 시공사의 지급보증이 가장 큰 담보였다. 그러나 그 채권 역시 차환발행에 실패하며 시공사가 자금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상황이 악화되었고, 일부 건설사는 자금난으로 유상증자를 하는 등의 사태가 빚어졌다.

두 사업의 공통점을 살펴보자. ▲ PF로 개발사업을 시작했고 ▲ 여건 악화로 자금난에 시달렸고 ▲ 지자체/시공사가 신용을 제공한 단기자금을 동원했고 ▲ 매크로 시장이 얼어붙으며 차환발행에 실패했다. ABCP, ABSTB 등 어려운 용어가 등장하지만, 원리는 간단하다. 금리가 저렴하고 조달이 쉬운 단기자금을 동원하여 차주는 위기를 모면하고 대주는 장단기금리차를 향유하는 금융업의 기본적인 이익추구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알다시피 1997년 외환위기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단기외채를 끌어와 마진을 더해 장기로 운용하여 수익을 올리다 유동성 위기에 봉착하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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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여의도 금융가에서 다시 이 방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주식거래 등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하던 일부 증권사들은 부동산개발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M증권 등이 이러한 식으로 재미를 보기 시작하자 증권사들이 너나없이 PF사업에 “브릿지”, “메자닌”, “ABCP” 등의 용어로 포장된 단기자금을 제공하거나 “총액인수”라는 또 다른 단기금융기법으로 큰돈을 벌게 되었다. 사업자와 은행 등 장기금융을 제공하는 금융기관 사이에 놓여있는 ‘그림자 금융’이다. 이제 문제는 이들이 제공한 신용이 얼마만한 규모이고 위기 상황에서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가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상황은 긍정적 요소가 없다. 토지가격, 공사비, 금리 등 사업비 주요항목은 모두 이미 올랐거나 오를 일만 남은 반면, 분양가는 시장 악화로 인해 낮출 수밖에 없다. 사업성이 악화되는 것은 불가피하고 분양이 되지 않을 경우 자금위기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한 예로 최근 GS건설·SK에코플랜트는 경기 의왕시 ‘인덕원자이SK뷰’ 아파트의 일반분양 899가구 중 508가구의 미계약이 발생해 무순위청약으로 전환했다. 지난달 청약 당시 5.6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던 단지의 실제 계약률이 43.5%에 그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업시행자, 금융기업, 건설사 모두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금융당국은 부동산PF 대출 현황을 파악하는 작업을 실시한다고 한다. 현재 부동산PF 대출 잔액을 올해 112조원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번 ‘50조원+α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이 이러한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테스트가 선행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금융당국이 대형 증권사에 1조원 규모의 중소형 증권사 ABCP매입 전용 펀드를 조성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대통령은 그 와중에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이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발언했다. 지금 이 판의 가장 큰 수혜주는 “도덕적 해이”로 먹고사는 대기업들이다. 경알못 대통령이여.

“사회적 소유”에 대한 단상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인간이 조직화된 사회의 의지에 따라 그에 반응하도록 경제적 자극을 정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이 경우에 인간 행동의 경제법칙은 인간이 의도한 대로 작용한다. 그 외에도,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인간 행위의 상호작용 양식을 목적에 맞도록 계획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인간 행위의 상호작용 법칙 또한 인간의 의도대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생산관계의 적대적 성격을 제거하고, 경제법칙 작용의 가능성을 사회 전체의 의도대로 이용하는데 반대하는 특권계급으로 인한 장애를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은 사회 발전과 경제법칙의 작용을 조정할 수 있게 된다.[정치경제학, 오스카르 랑게 지음, 문태운 옮김, 이제이북스, 2013년, p90]

이 문단을 읽고 드는 의문은 여기서의 “인간”은 개별의 합으로서의 인간인가 사회 총체로서의 인류인가 하는 점이다. 소위 ‘집단의식’ 혹은 ‘집단행동’이라는 개념에서 생각해보자면 인간은 개별적인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과는 다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은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다. 그 집단 역시 일국의 차원인가 전 세계적인 차원인가에 따라 그 행태가 또 천차만별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 집단의 민족주의적인 감성일 것이다. 예로 어느 국가에서 “사회적으로 소유”한 생산수단을 극단적인 민족주의적인 의도로 활용했을 경우 미치는 영향이 “적대적 성격이 제거”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소유된 생산수단을 ‘기후변화 저지’라는 인류보편적인 – 이마저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이상적인 상황이 랑게가 그리고 있는 적대적 성격이 제거된 사회적 소유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일국 사회주의 체제 혹은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사회적 소유”를 가장한 권위주의적인 국유화와 그 정점에 있는 정치 및 경제 지도자의 – 일종의 사회적 생산수단 펀드의 펀드매니저 – 관리자로서의 이익 전용(轉用) 혹은 횡령으로 인한 폐해도 만만치 않은 지라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구체적 운용에 대한 갖가지 의구심은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