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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대안은 모두 자본주의보다 못하다”

70년 동안 이어진 공산주의 실험이 가리킨 것처럼, 자본주의의 대안은 모두 자본주의보다 못하다. 청사진으로는 아무리 그럴 듯해도, 실제로 시행되면, 그런 대안들은 모두 정치적 압제ㆍ문화적 통제와 정체ㆍ경제적 빈곤을 낳는다. 반면 자본주의가 제대로 시행된 현대 사회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사람들이 때로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만, 그들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뛰어남을 깨닫게 된다.[금융위기와 경제적 자유, 복거일, 2008년 11월 06일]

복거일 씨의 이 글에서 흥미로운 오류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그가 대척점으로 놓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과 “자본주의”의 포지셔닝을 들 수 있다. 즉 그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표현 앞에 “70년 동안 이어진 공산주의 실험”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대안”을 과거 사회주의 블록의 “공산주의 실험”이라고 여기게끔 하고 있다. 그래서 문장 후반의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과거 자본주의 블록의 자본주의 실험을 의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가 – 의도적이든 아니든 – 누락하고 있는 것은 대공황 시절부터 80년대 대처 시대가 시작되기 바로 전까지 자본주의 블록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케인즈주의 풍의 혼합경제라는 점이다.

그 당시 정부는 시장을 규제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스스로가 시장의 가장 큰 경제주체로 활동하면서 복거일 씨가 간단하게 “자본주의”라고 칭하고 있는 것, 즉 경제적 자유주의를 뛰어넘는 성과를 보였다. 이를 통해 전후 서구는 그 이전에 한번도 누린 적이 없던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사실 정확하게는 고전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보다 우월한 “자본주의의 대안”이었다. 그 뒤 이러한 개입주의 경제의 피로감과 정치적 보수화로 말미암아 서구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고 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경제적 자유주의가 뿌리내린바 그것의 결과가 – 비록 그것이 원인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 바로 현재의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다.

요컨대 케인즈주의 풍의 혼합경제는 수십 년 동안 고전적 자유주의의 분명한 대안이었고, – 심지어 자본주의 기반이 전혀 없었던 대부분의 사회주의 블록에서조차 일정정도 기능하였었고 – 그 대안들은 그것의 반작용으로 신자유주의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엄청난 사고를 치른 이후 다시 한번 경제적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진행방향은 현재로서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따라서 그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뛰어남”을 말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가 어떠한 자본주의인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신용위기 단상

결국은 시스템적인 모순이지만 이번 사태는 또한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구제금융 법안의 부결도 상당부분 월스트리트의 그간의 비도덕적 행태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를 반영한 것이다. 막스 베버가 월스트리트에 한 2박3일 머물렀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이래서 금융자본은 유태인의 천민자본주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기뻐 소리쳤을까?

월街에서 잘나간다는 CFA라는 자격증 공부는 윤리학(ethics)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만큼 금융인들의 윤리의식이 애당초 마비되었다는 반증일까? –; 중요하다는 이야기겠지. 그럼에도 언제부터인가 – 아마 처음부터겠지만 – 자본주의, 특히 월스트리트의 자본주의에서는 윤리는 교과과목일 뿐 실제업무와는 별 관계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승자독식과 한탕주의가 숭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은 경영진만 되면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아 챙겼다. ‘황금낙하산’이라는 어이없는 제도는(주1) 경영진에게 회사를 말아먹어도 한 몫 챙길 기회를 주었다. 경영진이 되지 않더라도 남들이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첨단금융상품을 만들어 한 몫 크게 챙길 기회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계속 신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언제까지? 시장이 폭발할 때까지.

그런데 자꾸 윤리의 문제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면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다. 결국은 인간은 탐욕의 동물이라는 환원론적인 철학논쟁밖에 안된다. 인간의 탐욕이 시너지 효과로 승화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운영철학이었다면 그것이 선순환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 것은 시스템이었다. 지금 보다 비판받아야 할 것은 그 탐욕을 악순환의 고리로 내몬 시스템일 것이다.

‘만리장성(Chinese Wall)’이 있다. 갑자기 웬 중국이야기냐고? 그게 아니고 투자은행에 관한 용어다. 원래 투자은행은 기초자산의 증권매도자와 그 증권의 매수자를 중개해주는 기능이 본연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고유계정(prop trading)으로 직접 매수자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해상충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중개도 하는 것이 매수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온 것이 이해상충의 여지가 있는 부서는 사내에서도 정보공유가 금지되도록 하겠다는 취지의 제도다. 좀 웃기긴 하다. 그만큼 탐욕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허술하다.

보다 거시적으로 접근하면 칼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국가기구는 처음부터 불편부당한 기구가 아닌 계급차별적인 기구였다. 다수결에 의한 대의제의 도입은 이러한 정치의 본질을 – 정치와 경제가 자웅동체라는 – 희석시켰다. 극우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변화를 두려워했고, 결과적으로는 소비에트의 일당독재를 비웃는 이들이 양당독재와 시장독재는 용인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되었다. 자본가와 정치가가 구별이 안 되는 워싱턴정가가 그 하이라이트다. 이런 상태에서 시스템의 근본적인 수술은 요원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구제금융은 죽어가는 시스템의 일시적인 연장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를 자본주의의 종말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라는 이름조차도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잘해야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즉 미국과 기축통화로서의 US달러 이니셔티브가 ‘다소’ 약화될 것이다. 결국에는 노동계급, 넓게 보아 유권자들의 ‘혁명적’ 각성이 없이는 도돌이표일 것 같다. 월스트리트의 더러운 자본가들을 욕하고는 선거 때 다시 그들에게 돈을 받아먹은 매케인과 공화당을 찍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메케인의 절반만(!) 받아먹었다는 오바마를 대안이랍시고 찍는 것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주1) 이 제도는 회사가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M&A당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피인수 기업의 경영진이 이를 반대할 수 있기에 그에게 어느 정도 회유성의 보수를 준다는 의미로 생겨났다. 웃긴다.

제헌절이 더 이상 휴일이 아닌 이유

오랜만에 한미FTA에 대해 글을 올리니 손이 근질근질하여 몇 자 더 적어야겠다. 이전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한미FTA는 FTA 초유의 발명품 ‘투자자의 정부제소권’ 조항이 있다. 이에 따라 자신의 투자의 정당한 권리가 침해받았다고 여겨지는 투자자는 정부를 제소하여 제3국에서 중재에 참가하게끔 강제할 수 있다. 이는 위헌의 소지가 많은 조항임은 이미 설명하였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이때 중재부는 어떠한 판단기준에 의하여 그 건을 판정하는가이다.

“중재부는 이 협정과 적용가능한 국제법에 따라 분쟁을 판정한다.”[한미FTA 11.22조 1항]

언뜻 보면 별 문제없는 조항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이 조항은 그 판정기준에 국내법이 배제된다는 의미라는 점이다. 송기호 변호사에 따르면 국제중재 판정에서 피소된 국가의 국내법 적용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국제조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 헌법은 공공의 복리를 위해 사유재산권에 일정정도 제한을 가하는 취지의 내용이 꽤 있다. 이러한 법취지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나마 인간적인 모습의 행정권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 한 예가 얼마 전 뉴라이트 이하 보수주의자들이 삭제하자고 주장한 헌법 제119조 2항이다.

②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제민주화라는 미명 하에 행정행위가 남용되는 것도 문제지만 자유주의 시장경제라는 미명 하에 행정권이 봉쇄당하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뉴라이트 주장은 꼴통들의 주장으로 웃어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한미FTA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비준 발효되는 순간 위와 같은 판단근거에 의해 이루어진 행정행위가 정체불명의 ‘국제법’에 의해 투자이익침해행위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의를 진행하다보면 혹자는 한미FTA는 한국과 미국 정부가 똑같이 적용되는 자유무역협정이므로 미국에게도 우리가 그렇게 하여 이득을 취하면 될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한미FTA는 어찌 보면 미국식의 재산권에 대한 절대적인 보호가치를 우리나라에 적용한다는 것이고, 둘째, 결국 이득을 얻는 것은 해당 조항을 유용할 수 있는 양 국의 거대자본인데 이들의 이윤동기 아래 양쪽의 국가, 나아가 그 국가의 보호 하에 있는 국민들의 공익향유권은 침해당해도 상관없다는 신자유주의 논리라는 점이 문제다.

둘째 이의제기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것이 없을 것 같고, 첫째 이의제기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겠다.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을 공용으로 취득당하지 아니한다.”[미국 헌법 수정 5조]

송기호 변호사에 따르면 미국 헌법에서 재산권 조항은 오로지 한 조항뿐이라 한다. 그리고 미국의 재판정은 이 조항을 근거로 재산권에 있어서만큼은 공익의 침해 여부와 상관없이 그 권리를 절대적으로 – 적어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훨씬 많은 비율로 – 인정해주곤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미FTA는 미국의 법취지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주1)

자 이제 여러분은 왜 제헌절이 휴일에서 제외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물론 농담이다. 과연 농담인가?) 그 이유는 한미FTA가 비준 발효되면 그간 우리나라 사법권과 헌법은 별로 효용성 없는 기관과 문서조각으로 전락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법기관이나 헌법은 가끔 ‘아주 순수하게’ 해외법인이나 외국인이 전혀 섞이지 않은 상투 튼 사람들끼리의 송사에나 관여할 것이다. 이명박이 달리 영어 몰입교육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어떠한 이유를 떠나서라도 이러한 개떡같은 FTA를 자신의 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누무현을 꼴통이라고 생각한다.

“한미 FTA는 그것을 통해 물건을 더 파는 것보다는 제도를 미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주2) 각 분야의 세계의 제도와 뒤섞이지 않으면 수준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노무현 前대통령, 2007년 5월14일, 두바이 동포간담회)

“다음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할 것 같았는데, 저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손해 가는 일을 하는 대통령은 노무현 밖에 없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에 특단의 의지로 결정했다”(노무현 前대통령, 2007년 3월20일 농어업분야 업무보고)

(주1) 보다 복잡한 방식에 따라 한미FTA가 국내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국내 헌법상의 조항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고, 미국의 경우 한미FTA는 별도의 이행법으로 처리되어 여타 법이 저촉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가 있는데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이 글에서 전반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송기호 변호사의 ‘한미FTA 핸드북’(녹색평론사)을 참고하기 바란다.

(주2) 수준을 끌어올린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에 간단히 설명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상 – NekoNeko 님의 의견에 대한 답글

사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고 알려진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중심원리인 자유시장, 규제의 완화, 재산권 등의 중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원리와 일체의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19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사조를 특정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1) 닉슨 정부의 금환본위제의 포기 등과 연계된 금융자본의 국제화 경향 2) 과거 사회주의 블록의 위협에 대한 내부적 통제의 수단으로 강화되었던 사회복지 등의 공공서비스 등의 해체경향과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견지 하에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시장 자유주의가 한층 강화된 자본주의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쌔처 정부는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도입이 공공부문의 비효율을 제거시켜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이른바 Universal Testing 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면 공공이나 민간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겠다는 취지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취지는 좋았다. 다만 처음의 문제인식이 “공공=비효율, 민간=효율”이라는 선입견 하에 출발하였다는 점이 문제다. “보편적인(universal)”한 평가에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좌우파로 나뉘어져 있는 정치권에는 선입견 자체를 전제하고 있는 집단이니 사실 애초에 보편과는 거리가 먼 정치놀음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NekoNeko님의 코멘트를 살펴보자.

“신자유주의가 세계화를 통해 전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모는 측면에서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에서 시장이 재발견되고 이를 통해 좀 더 효율적인 자원 활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 역시 사실이거든요. 자원의 낭비를 줄이는 것은 인간적인 모습이지 비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장의 효율적 기능을 이야기하고 있는 NekoNeko님의 발언은 넓게 보아 바로 쌔처 정부의 Universal Testing 의 취지와 유사하다 하겠다. 결국 폐쇄된 시장이란 특혜와 비효율을 낳게 되고 이는 희소한 자원의 낭비를 유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순기능이 있기에 사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시장은 존재해왔고 자본주의 이후에도 시장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NekoNeko님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많은 이들로부터 “무한경쟁으로 모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고 비판받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NekoNeko님의 대안은 다음과 같다.

“어쨌거나 사회 시스템이 이러한 문제점까지 커버해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전 이런 사회 윤리의 문제는 시스템 보다 사회 구성원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중략) 이 모든 것들을 시스템으로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 역시 NekoNeko님의 대안에 동의한다. 적자생존 사회에서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는 현재의 교육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게 금융교육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바 그 주장에는 일정 정도 동의하는 동시에 돈벌이 교육에 상응하는 만큼 약자에 대한 배려 등 사회연대 교육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첨언할 점은 이러한 교육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의 주요한 부분이기에 NekoNeko님의 발언이 약간은 어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시장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유사 이래 극우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시장이 가장 효율적이 되려면 시장에 아무런 규제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시장이 마비되었을 때에 사실 그들이 가장 크게 의존한 것은 바로 시장에 대한 규제와 계급적으로 불공정한 국가기구의 재정지원이었다.(주1) 규제와 제도가 바르게 세워지지 못한 것이 문제이지 규제나 제도 그 자체가 문제인 적은 없었다. 전봇대 한 개를 뿌리 뽑아 어떤 도로의 소통이 좋아졌다고 전봇대 자체를 부정하는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자유주의가 되었든 자본주의가 되었든, 또는 수정자본주의가 되었든 그것이 효율만능, 승자독식, 탈규제만능의 시장 시스템으로 작동된다면 그것의 수명은 승자들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비효율적이고 수명이 짧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서브프라임모기지로 망신창이가 된 미국의 주택시장이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요동치는 원자재 선물시장이다. 미국의 금융당국이 뒤늦게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있고 의회가 선물시장에서의 투기행위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체제수호자들의 위기의식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일 것이다.

(주1)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 직면하여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부시행정부가 취한 조치와 금융자본에 지원한 천문학적인 돈을 생각해보라

윤길현, 가장 나쁜 점은

원래 스포츠 관람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라 ‘윤길현’이라는 이름이 포털 검색어 상위에 오를 때까지도 그 친구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사태를 이리저리 모아서 재구성해보니 이미 그 이름은 이 시대에 이XX과 함께 대표적인 패륜아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사건의 정황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사건을 시간 순으로 죽 나열해보겠다.

– SK와 KIA는 3연전으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있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 SK에는 8회 윤길현(26) 이라는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와 있었다
– KIA 타석에는 최경환(37)이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윤길현이 빈볼을 던졌고 최경환을 약간 화난 투로 윤길현을 쳐다보았다
– 윤길현이 침을 뱉고는 “뭐? 뭐?”를 외치며 손으로 도발을 하며 다가갔다
– 양측 선수들이 뛰어나왔고 KIA의 이종범(39)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 윤길현이 이종범에게도 눈을 치켜뜨며 “뭐? 뭐?”라고 외쳤다
– 사태가 수습된 후 경기가 재개된다
– 최경환이 윤길현에게 삼진아웃당한다
– 윤길현은 돌아선 최경환에게 “아이 X팔”이라고 쌍욕을 했다
– 덕아웃에 돌아온 윤길현이 동료선수와 상황을 재연하며 즐거워했으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 이런 상태에서 김성근 감독은 9회 다시 윤길현을 마운드로 내보냈다
– 경기 후 KIA팬을 중심으로 한 스포츠팬들이 인터넷을 달구기 시작했다
– 윤길현이 싸이 홈피에 변명에 가까운 짧은 사과문을 올린다
– 그런데 애초 윤길현의 아이디(dbsrlfgus123)와 다른 아이디(qwert09)가 올린 글이었다
– 30여분 개제되었던 사과문은 이후 삭제되었고 홈피는 폐쇄되었다
– 김성근 감독은 자신은 윤길현이 욕한 줄 몰라서 9회에 내보냈다고 변명한다
– 그리고 현재 자숙의 의미로 경기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 KBO는 퇴장당하지도 않은 선수를 징계할 마땅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입장이다

대충 이 정도가 진행상황이다. 가만 보고 있으면 각종 자충수만 골라서 두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고의적인 빈볼이야 다들 던지는 것이고 KIA역시 3연전 동안 많이 던지지 않았느냐, 후배라고 선배한테 복종만 하라는 이야기냐는 것이 SK 일부 팬들의 항변이다. 하지만 이 항변은 고의적인 도발행위, 쌍욕, 덕아웃에서의 시시덕거림, SK 선수들의 모르쇠, 진위여부가 불투명한 사과문 등 각종 분노를 자아낼만한 에피소드 속에 파묻힌다.

역시 장유유서의 한국사회인지라, 특히나 이종범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압도적인지라 그에 대한 비난이 가장 우세하다. 11살이나 많은 최경환 선수에게 쌍욕을 하고 이종범에게 눈을 치켜뜬 윤길현은 인간말종이라는 것이 현재의 여론이다. 물론 나 역시도 이종범에게 만큼은 남다른 애틋함이 있어 그가 그런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 안쓰럽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윤길현과 SK의 행동 중에 가장 화가 치미는 것은 바로 삼진아웃을 당한 최경환에게 윤길현이 쌍욕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패자의 등에 칼을 찍는 행위이다. 팀간의 승부이긴 하지만 타석에 들어선 타자와 이를 상대하는 투수는 또 하나의 작은 승부를 펼쳤고 윤길현은 승자, 최경환은 패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윤길현은 돌아선 패자에게 패배 이상의 모욕감을 안겨준 것이다. 효도르가 패배한 최홍만에게 쌍욕을 했다고 상상해보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이 당연시되는 이 세상에서도 그나마 인류가 일종의 공동선처럼 지켜왔던 것이 바로 패자에 대한 아량이었다. 인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그나마 사회적 약자나 정치적 약자는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공적부조나 복지정책으로 시현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회의 승자가 패자를 저주하고 조롱한다고 생각해보라.

사실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실상 이 사회를 그러한 패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로 몰고 가고 있다. “Money Talks”, “Winner Takes It All”과 같은 프로파간다가 주창되고 서점의 경제 섹션에는 진지한 경제분석 도서보다는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 성공담 등의 이른바 재테크 서적들로 메워져 있다. 새로 등장한 보수정부는 이전의 두 정부의 기조와는 같으나 더 빠른 속도로 사회의 신자유주의화에 몰입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윤길현의 행동은 어쩌면 이 사회의 또 다른 자화상 일뿐인지도 모른다. 그 역시도 뛰어난 선수로 자라오는 과정에서 야구만 잘하면 거칠 것이 없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어떠한 것인지 익히지 못한 절름발이 엘리트로 자라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사회 곳곳에 이러한 절름발이 엘리트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4가지 없는 인간들을 혼내주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철저한 예의범절 교육을 통해 다시 장유유서가 지고지순의 가치로 여겨지는 아름다운 전통사회로 회귀할 것인가? 물론 의미는 있겠으나 그것은 근본에 다가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역시 거시적이긴 하지만 그 해답은 바른 교육이다. 단순히 학교교육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약자에 대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나의 이익이 된다는 그런 반복학습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교육이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윤길현의 행동은 장기적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야구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고 그가 언제까지 그의 치기어린 행동을 감싸주는 현재의 SK 감독진과 선수진에 둘러싸여 살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되었을 때에 다른 구단과 그 선수들은 윤길현의 행동을 기억하고 그때 그를 따돌리든지 하여 징벌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의 이타적 징벌의 한 사례다. 그때쯤이면 윤길현은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다시 한번 큰 테두리에서 이야기하자면 우리 사회 역시 유아독존의 안하무인인 승자에게 돌아올 것은 차가운 멸시와 비협조뿐이라는 사실을 알게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징벌이 아닌 공생의 길이다. 안하무인의 프로야구 선수가 살아남는 프로야구는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되고 안하무인의 승자가 살아남는 사회는 자멸의 길로 접어들 뿐이다.

이래서 내가 박노자 씨를 좋아한다

이래서 내가 박노자 씨를 좋아한다. 평소 그의 점잖은 선비풍의 글을 읽다가 이렇게 단어는 얌전하게 쓰면서도 속 내용은 신랄한 비아냥거림을 접하게 되면 평소 얌전한 사람이 노래방에서 노래빨날리는 광경을 보는 듯한 신선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평소의 글투에도 약간 장난기가 섞여 있는 진중권 씨나 우석훈 씨의 글이나 말과는 또 다른 쾌감을 제공한다.

박노자 씨 말마따나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노선의 관철은 역설적으로 정치적 레토릭의 급진화와 경제적 노선의 보수화의 교묘한 줄타기를 했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가속화될 수 있었다. 막 독재의 틀을 벗어난 인민에게 몇몇 탈권위적 정치행태를 보여주면 경제적으로는 충실한 우파 노선을 걷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은 그들을 ‘좌파’라고 부르기 서슴지 않았다. 물론 그 정부들의 하부 추종자들 중에서는 ‘나름 좌파’도 섞여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노자 씨도 그렇게 봤는지 모르지만 나도 솔직히 그들이 이전의 두 정부를 ‘좌파’정부로 몰아세운 것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뜻이 그렇다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이 그런 정도의 머리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그 친구들 하는 행동을 보면 진정으로 그 시절을 ‘상종 못할 빨갱이 놈들의 세상’이었고 지금은 ‘사람 사는 정의로운 세상’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이들이 자신들 스스로가 노무현 정부 시절 득달같이 비판하던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제기를 이제 시민들이나 네티즌들이 주장하자 이들을 마치 ‘돌아온 반도(叛徒)’ 대하듯이 대하고 있는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좌파/우파 구분법이 진정성이 없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나폴레옹 귀양 갈 때와 파리 입성할 때의 헛소리가 이렇게 차이가 나겠는가 말이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양쪽의 주장 간에 수위조절을 했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 꼴을 보고 있자면 이 세상이 진짜 메트릭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제 정신도 아니고 정치이념의 ABC도 모르는 것들이 기자질을 하고 있고 하버드 수석 졸업했다고 뻥치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국회에 입성하겠는가 말이다. 하긴 학살자 부시가 세상의 지배자인 세상이니 그 정도는 약과인지도 모르겠다.(주1)

박노자 씨의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읽기

 

(주1) 부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늘자 동아일보는 부시 측근의 부시 재임시절의 비리와 오판에 대한 폭로에 대해 “뒤늦은 정의감? 두둑한 인세?”라는 제목으로 그것들을 폄하하면서 관련사진에는 생뚱맞게 부시의 인간적인(?) 면모가 담긴 사진을 첨부하였다. 전형적인 용비어천가적인 기사였다.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까지 이렇게 사탕발림을 하는 신문이니 정말 할말 다했다

올해 노벨상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

언제부터인가 경제학에 복잡한 수학공식과 물리학공식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라는 용어는 철지난 좌파 경제학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용어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된 연구는 그 이후 정치와 경제의 상호관계를 파헤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 시장가설에 맞는 시장을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기들만이 아는 암호를 동원하여 이론으로 구현해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온 듯하다.

이런 와중에 금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레오니트 후르비치 미네소타대 교수, 에릭 매스킨 프린스턴대 교수, 로저 마이어슨 시카고대 교수 등 3명이 고안하고 발전시켜온 ‘메커니즘 디자인’은 정치와 경제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제시하는 분야로 추측되어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다.

‘메커니즘 디자인’은 어떻게 하면 정책이 성공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가를 연구한 이론으로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정책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고 한다. 설득의 수단은 각종 지원, 규제, 또는 폭력적 억압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이 이론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상황에서의 전략에 대한 연구이론인 게임이론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자세한 이론의 얼개는 알 수 없으나 밀턴프리드만 유의 극단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시장은 그 자체로 자기완성형이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은 어떤 식으로든 시장을 왜곡시키고 오도하게 한다는 논리와는 배치되는 이론으로 생각된다. 이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아이디어는 수상자중 한명인 에릭 매스킨 교수의 수상소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환경을 보호하거나 모든 시민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시장의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전제하면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몇몇 서방 지도자들이 옹호하고 있는 엄격한 자유시장 논리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장은 경제학자들이 사유재산이라고 부르는 분야에서 활발하게 작동하지만 공공의 이익에 관해서라면 제 기능을 하지 못 한다”면서 “공익 분야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장만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적절한 수준’을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나 메커니즘, 기관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은 언제나 옳다’라는 시장신봉자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 발언들이 거침없이 쏟아낸 멋진 수상소감이다. ‘메커니즘 디자인’의 경제학상 수상은 한편으로 보면 노벨 평화상의 주제가 ‘환경’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즉 올해 노벨상의 주제는 ‘시장만능론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수상위원회 측이나 이들로 대표되는 유럽의 정치적 엘리트들은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 이후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의 지구차원의 확산과, 구 사회주의권의 급속한 자본주의화 및 산업생산기지화로 말미암은 폐해가 이제 서서히 우리의 목을 죄어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시장만능론으로 말미암아 환경은 피폐해지고 공공서비스의 영역은 급속한 민영화로 몸살을 겪고 있다. 계급간 사회양극화는 심해지고 제1세계는 잉여자원의 과잉소비를 통해, 제3세계는 필수자원의 획득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올해 노벨상이 주는 함의는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