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idney Paget (1860 – 1908) – File published on Camden House (Ignisart.com), Public Domain, Link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인 벵골 포병대의 스토너 소장과 사별했죠. 줄리아와 저는 쌍둥이인데, 우리가 겨우 두 살이었을 때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어요. 어머니한테는 상당한 재산이 있었죠. 연간 수입이 1,000파운드도 넘었어요. 재혼하신 후 어머니는 돌아가실 경우 전 재산을 로일럿 박사에게 물려주기로 했어요. 우리 자매가 결혼할 경우에는 각자에게 연간 일정액을 준다는 조건이었죠.[주석 달린 셜록 홈즈,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승영조 옮김, 북폴리오, 2007년, 359-360쪽]
“사망한 아내의 유언장을 찾아봤지.” 그가 말했다. “유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투자액의 시가를 알아봐야 했어. 아내의 사망 당시 줄잡아 1,100파운드였던 총수입이 지금은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750파운드도 안 되더군. 두 딸이 결혼할 경우 각자에게 돌아가는 금액이 250파운드씩이야. 따라서 둘 다 결혼을 했다가는 영감이 푼돈만 만지게 되지. 한명만 결혼해도 타격이 만만치 않을 거야.”[같은 책, 372쪽]
코난 도일 경이 쓴 셜록 홈즈 시리즈 중 1892년 ‘스트랜드 매거진’에 발표된 「얼룩 끈의 비밀」이라는 단편 소설의 일부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인기 있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추리소설로써의 특유의 매력이 넘사벽이기 때문인 것이 일차적이다. 그다음 개인적으로 꼽고 싶은 매력은 인용한 부분처럼 19세기 당시 영국의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이 소설에서의 사건 의뢰인은 당시 시대의 중상류층 집안의 상속자였는데 소설은 이에 따라 당시의 상속 풍습을 상술하고 있어 독자의 몰입감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
한편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이자 자본주의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은 어쩌면 이러한 국가적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셜록 홈즈 시리즈 다른 소설에서도 이런 배경은 자주 범죄의 일차적인 동기로 쓰였다. 물욕에 이끌린 살인극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피의자로 의심되는 로일럿 박사가 왜 자매에게 엉뚱한 흑심을 품게 되었는지 독자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영국 중상류층 사회의 재산형성 과정을 어느 정도 알면 좋은데 인용 부분은 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일단 로일럿 박사와 피해자 자매의 어머니의 만남부터가 “제국주의적”이다. 어머니의 전남편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벵골 지역에 파견된 군인이었다. 로일럿 박사 역시 그곳에 파견된 군의관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한편으로 부재(不在)지주였다. 군인의 아내이자 지주, 당시 영국의 중상류층 여성의 모습이다. 그런데 당시 영국법에 따르면 아내의 돈은 남편이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자매에게 바로 재산을 상속하지 못한 것이다. 지주였지만 여성이기에 재산권 행사가 제한된 모순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홈즈의 조사에 따르면 어머니의 재산은 당시의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인해 연간 수입이 4분의 1 이상 줄었다. 인용한 책의 주석에 따르면 당시 영국에서는 1873년부터 1894년 사이 악천후, 가축 전염병, 인건비 상승 등으로 인해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의 임대료는 자기자본(equity) 트렌치였는지 농산물 가격에 연동되는 방식이었나 보다. 그러다보니 리스크가 고스란히 로일럿 박사에게 이전된 것이다. 그런데 자매의 연금은 고정가격이었다. 자매에겐 행운이었지만 로일럿 박사에게는 재앙이었던 셈이다.
요컨대 두 자매가 모두 없어질 경우 로일럿 박사는 그나마 연 750파운드의 수입을 유지할 수 있는데 둘이 연금을 가져갈 경우 본인의 수입은 250파운드로 줄어들고 그마져도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챗지피티에 물어보니 현재 원화 기준으로 당시 1천 파운드는 대략 3억 원이다. 크다면 큰돈이지만, 쓰임새가 헤펐을 악당 로일럿 박사에게는 감질나는 금액이다. 그런데 그 돈이 4분의 1 토막 난다면 살고 있던 저택과 하인들을 부릴 처지도 못 됐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악당의 남은 선택은 하나였다.